2013년 5월호

할리우드는 주전파(主戰派)일까?

  • 노광우 │영화 칼럼니스트 nkw88@hotmail.com

    입력2013-04-18 17: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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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은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으는 행사다. 지난 2월 열린 201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아르고’(Argo·벤 애플렉 감독)가 작품상을 받았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는 영화는 일반적으로 그전에 몇 개 부문에서 수상하고 마지막에 작품상을 받는다. 대체로 훌륭한 시나리오에 바탕을 두고 제작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리지널 각본 또는 각색상을 받은 작품이 작품상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아르고’도 각색상과 편집상을 받은 뒤 작품상을 받았다.

    참전과 작품상의 상관관계

    그러나 역대 작품상 수상작이 대개 5, 6관왕인 반면 아르고는 3관왕에 그쳤다. 이는 ‘아르고’가 기술적으로, 예술적으로 그리 뛰어난 작품은 아니라는 의미다. 이런 작품이 작품상을 수상하는 경우는 충분히 정치적 해석이 가능하다. 해당 작품이 미국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경향성에 편승한 덕에 수상의 영예를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경향성 중 대표적인 것이 미국이 벌이는 전쟁 내지 무력사용에 대한 지지 여론이다. ‘아르고’는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 구출작전을 다뤘다. 9·11테러 이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란이 미국의 다음 전쟁 타깃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가운데 이러한 영화가 제작됐고 작품상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역대 아카데미상 수상작 목록을 보면 미국이 개입한 전쟁과 작품상이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러자 1942년 독일의 공격을 견디는 영국인들을 우호적으로 그린 ‘미니버 부인’(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1943년 유럽에서의 로맨스로 시작해서 결국 항독(抗獨)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주인공의 입장을 정리하는 ‘카사블랑카’(마이클 커티즈 감독)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독일이 점령한 유럽 지역과 일본이 점령한 아시아 지역에선 미국 영화의 수입이 불허됐다. 할리우드 처지에선 해외시장의 대부분을 잃은 셈이다. 할리우드가 2차대전 기간 중 미국 정부의 주전론(主戰論)에 입각한 영화를 많이 제작한 데에는 판로 회복이라는 상업적 이유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2차대전이 끝난 후 평화의 시기가 찾아오자 아카데미상은 태도를 바꾼다. 1953년과 1957년 각각 반전론을 펴거나 군에 회의적인 시선을 담은 ‘지상에서 영원으로’(프레드 진네만 감독)와 ‘콰이강의 다리’(데이비드 린 감독)에게 작품상을 줬다.

    이후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돌입하자 아카데미상은 다시 주전론을 주창하는 영화 ‘패튼’(프랭클린 샤프너 감독)에 작품상(1970)을 안겼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엔 다시 반전론으로 돌아서 1978년과 1986년 각각 ‘디어 헌터’(마이클 치미노 감독)와 ‘플래툰’(올리버 스톤 감독)이 작품상을 받았다.

    할리우드의 이러한 경향은 미국이 1991년 제1차 이라크전쟁, 2001년 9·11테러, 2001년 아프가니스탄전쟁, 2003년 제2차 이라크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더 견고해졌다. 다만 최근 들어선 반전론에 입각한 작품들이 과거에 비해 좀 더 자주 발표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미국 내에서 전쟁 찬반 여론이 일상적으로 갈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쟁 시기에 비해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훨씬 세계화했고, 해외시장을 잃을 우려가 사라졌으며, 굳이 미국 정부에 의존할 까닭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도 할리우드와 아카데미상의 기본적 기조는 ‘미국 정부가 수행하는 전쟁에 대한 우호적 태도의 견지’라고 할 수 있다.

    反美엔 무관심

    이라크전쟁이 정리되는 시점인 2009년 이라크전쟁을 다룬 ‘허트 로커’(캐스린 비글로 감독)가 작품상을 받았다. ‘허트 로커’는 이라크 내 테러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지역에서 폭발물 제거라는 위험천만한 작업을 하는 미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투의 격렬함은 마약과 같아서 종종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중독된다”라는 내용을 남겼다. 이 작품은 이듬해 전 세계적으로 ‘3D 열풍’을 일으킨 영화 ‘아바타’와 작품상을 놓고 경합했다. 미국이 참전한 이라크전쟁을 다뤘다는 점이 당대의 영화인 아바타를 누른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할리우드는 주전파(主戰派)일까?

    영화 ‘허트 로커’의 한 장면.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아르고’와 ‘제로 다크 서티’(캐스린 비글로 감독)가 작품상 후보에 올랐는데 두 영화 모두 미국의 전쟁 영웅담을 그렸다.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아카데미상의 전략적 선택으로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인 판단인지 모른다.

    ‘제로 다크 서티’는 9·11테러의 주범이자 ‘미국의 원수’인 오사마 빈 라덴의 행적을 추적하는 CIA 여성 정보원의 무용담으로 풀어간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은 이 영화 이전에도 강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자주 내세웠다.

    자기에게 집착하는 범죄자를 천신만고 끝에 체포하는 여자 경찰을 다룬 ‘블루 스틸’(1989), 세기말의 혼란기에 신종 마약 사건을 해결하는 여성을 다룬 ‘스트레인지 데이스’(1995), 여성 사립탐정을 다룬 TV 드라마 시리즈 ‘카렌 시스코’(2004)가 그것이다.

    ‘제로 다크 서티’에서 2003년 CIA 조사관이 된 여주인공 마야(제시카 채스타인)는 상관인 댄(제이슨 클라크)의 가혹한 심문 방식 때문에 일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유능한 상관과 선배가 좌천되거나 사망한 뒤 마야는 모아놓은 자료를 집요하게 분석한 끝에 파키스탄 내 알 카에다 지도자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장소를 알아낸다. CIA와 백악관 내에서는 이 정보의 신빙성을 놓고 의견이 갈린다. 그러나 마야의 헌신을 높이 산 CIA 국장(제임스 갠돌피니)은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파키스탄 내 은신처에 특수부대를 보낸다. 결국 특수부대는 이곳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다. 이 영화는 큰 공을 세운 마야가 전세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귀환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이 영화는 마야의 추적-성공에 집중함으로써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 반면 이슬람 사회의 반미(反美) 논리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비록 CIA 요원들이 저지르는 잔혹한 고문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마저 CIA 요원 댄이 말하는 “선량한 사람 3000명이 빈 라덴 때문에 죽었다”라는 대사에 묻히고 만다.

    ‘우린 정부 시책에 협조했다’

    ‘아르고’의 내용은 1997년 기밀 해제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화는 1979년 이란혁명 당시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이 이란의 시위대에게 점령되자 대사관 직원 6명이 대사관을 빠져나와 인근 캐나다 대사관저로 피신하는 데서 시작된다. CIA는 이들을 구출하고자 인질구조 전문가 토니 멘데즈(벤 애플렉)를 기용한다. 멘데즈는 할리우드의 특수분장 전문가 존 챔버스(존 굿맨)와 영화제작자 레스터 시겔(알란 아킨)의 협조를 얻어 ‘아르고’라는 공상과학영화를 제작하기로 한다. 이어 테헤란의 캐나다 대사관저에 숨은 대사관 직원 6명을 ‘아르고’ 촬영지 섭외를 온 캐나다 국적의 영화인들로 신분을 위장시켜 테헤란에서 탈출하도록 한다.

    할리우드는 주전파(主戰派)일까?
    노광우

    1969년 서울 출생

    미국 서던일리노이대 박사(영화학)

    고려대 정보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 : ‘Dark side of modernization’ 외


    ‘제로 다크 서티’와 ‘아르고’는 작품의 질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할리우드의 주전론을 대변한다. 다만 ‘아르고’가 아카데미 회원들이 더 좋아할 만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르고’는 ‘할리우드는 미국 정부의 시책에 협조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이를 알린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아카데미상의 구미에 딱 맞는 메시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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