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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괴짜들 ⑮

홍콩 영화 촬영지 순례자 주성철

“주윤발과 함께 하늘 보고, 유덕화와 같이 달리고, 장국영과 더불어 차 마시는 방법”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홍콩 영화 촬영지 순례자 주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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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영화가 있었네

“그동안 수없이 ‘천장지구’를 봤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 비로소 영화를 이해한 느낌이었어요. 홍콩 영화가 제게 주는 기쁨을 제대로 느끼려면 영화 속 장소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국영과 장만옥, 유덕화가 출연한 ‘아비정전’의 공간을 찾았을 때 이 생각은 확신이 됐다. 장만옥의 옛 남자친구(장국영) 집이 있는 곳은 셩완 캐슬로드. 한없이 비가 쏟아지던 날, 이 길에서 이별을 맞은 장만옥이 멍하게 서 있자 순찰 돌던 경찰 유덕화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영화 속에서 유덕화와 장만옥은 이야기를 나누며 밤거리를 느릿느릿 걸어요. 그때 경적을 울리며 천천히 트램이 다가오지요. 언덕 위 캐슬로드에서 트램이 다니는 아래 동네까지, 그들이 걸은 길을 따라 똑같이 걸어봤습니다. 30분 넘게 걸리더군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생각하며 걷는 동안 직접 그 길에 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영화의 행간을 읽은 느낌이었어요.”

그때부터 홍콩은 그에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판타지의 공간이 됐다. 한국에서 시름시름 기운 빠져 지내다가도 홍콩 첵랍콕 공항에 발만 디디면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처럼 힘 있게 걷게 되는 자신이 느껴졌다.



‘열혈남아’에서 장만옥과 유덕화가 뜨거운 키스를 나눈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을 때는 가슴이 뛰었다. 도무지 어딘지 알 수 없던 이 장소의 단서는 영화 속 장만옥의 대사에서 얻었다. 란타우 섬에서 온 친척! 그는 바로 란타우 섬과 홍콩 섬 사이의 교통편을 알아봤고, 홍콩 센트럴 지역 페리 선착장에서 1시간쯤 배를 타면 란타우 섬 무이워 선착장에 도착한다는 걸 알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달려간 그곳에 영화 속 공중전화 부스가 그 모습 그대로 놓여 있는 걸 봤을 때 느낀 기쁨이란…. 이런 성공의 경험이 그에게 계속 다른 장소, 또 다른 장소를 찾게 만들었다.

‘영웅본색’의 마지막 부분, 홍콩을 떠날 결심을 한 주윤발이 “다른 건 다 버려도 홍콩의 야경만은 정말 아까워”라고 말하며 도시를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그의 두 눈 가득 들어오는 야경의 촬영지도 특별했다.

“흔히들 홍콩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은 피크 트램을 타고 빅토리아 피크에 올라가서 바라보는 광경이라고 해요. 저도 오랫동안 주윤발이 서 있는 곳이 빅토리아 피크일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영화 속에서 그가 얘기할 때 하늘 위로 비행기가 오가는 게 보이는 겁니다.”

아. 첵랍콕 공항이 생기기 전 홍콩의 관문이었던 카이탁 공항 근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근처를 뒤진 끝에 구룡성채가 내려다보이는 외딴 산에서 비로소 영화 속 야경을 만났다. 이 산은 ‘성항기병’과 ‘아비정전’에도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 홍콩의 영화 촬영지를 찾아다니다 보면 이렇게 수많은 영화가 한 군데서 만나고 어우러졌다.

홍콩 마니아

‘금지옥엽’에서 기분 좋게 취한 장국영이 동료들과 헤어져 퇴근하던 곳, ‘희극지왕’에서 학생으로 가장한 술집 종업원 장백지가 발랄하게 등교(출근)하던 곳은 모두 ‘천장지구’에서 유덕화가 비극적인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던 그 계단이다. ‘AD2000’에서 테러리스트 노혜광이 곽부성의 추격을 피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의 지붕을 타고 달아나는 장면 뒤로는 ‘중경삼림’ 속 양조위의 집이 스쳐 지나간다. ‘희극지왕’에서 주성치와 장백지가 키스를 나누는 섹오비치 마을회관은 ‘홍콩탈출’에서 유덕화와 이미봉이 키스를 나눴던 장소이기도 하다. 1989년 작 ‘홍콩탈출’ 당시만 해도 꼿꼿하게 서 있던 젊은 나무가 2000년작 ‘희극지왕’에 이르면 비스듬히 쓰러져간다. 최근 찾아갔더니 이제는 옆에 선 대나무에 의지한 채 간신히 생명을 이어갈 정도로 더 많이 늙었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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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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