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든 감독은 1960~70년대 UCLA를 미국 대학 최강팀으로 이끈, 그야말로 전설적인 스포츠 지도자다. 그가 오기 전 평범한 대학 팀에 불과했던 UCLA는 전미대학농구선수권대회(NCAA)에서 역사상 최다 우승인 10회 우승하며 대학 농구의 최강자로 거듭났다. 특히 1967년부터 1973년까지는 무려 7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단일 경기 최고 기록인 88경기 연속 승리 기록도 갖고 있다. 우든 감독의 남다른 지도력과 리더십이 지금까지 미국인들에게 존경과 찬사를 받는 이유다.
우든의 NACC 10회 우승 이후 약 4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를 제외한 NACC 최다 우승이 4회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10회 우승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알 수 있다. 많은 농구 전문가가 우든의 기록을 깨는 감독이 나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예측하는 이유다. 29년의 지도자 생활 중 통산 664승162패로 승률 80.4%의 대기록을 남긴 우든 감독은 1961년에는 선수로, 2006년에는 감독으로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獻額)됐다. 선수와 감독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 사람 또한 그가 처음이다. 그는 현대 농구의 기초가 되는 수많은 전술을 창시했고 빌 월튼, 카림 압둘 자바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를 직접 지도했다.
그가 거둔 경이로운 성적 덕에 많은 사람은 우든을 UCLA가 위치한 지명을 따 ‘웨스트우드의 마법사(the Wizard of Westwood)’로 불렀다. 평소 소박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던 우든은 그러나 이 별명을 아주 싫어했다. 자신은 마법사가 결코 아니며 그냥 선수들의 스승일 뿐이라고 늘 강조했다.
사람들이 그를 최고의 지도자로 꼽는 이유는 그가 거둔 성적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경기의 승리보다 과정을 중요시한 최초의 스포츠 지도자라는 점을 사람들은 높게 평가했다. 한때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도 활동했던 우든은 학점이나 경기의 승리로 인정받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싫어했다. 그는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바로 성공이다. 성공은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얻을 수 있는 자기만족과 마음의 평화”라고 말했다.
단순히 말로만 그친 게 아니라 우든은 이를 그대로 실천했다. 경기에서 이기더라도 과정이 나빴다면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특정 선수가 경기 중 상대편 선수에게 욕을 하거나 반칙을 쓰면 실력에 관계없이 다음 경기에 그 선수를 기용하지 않았다. 선수들에게 고된 훈련을 시킬 때면 중년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0대, 20대 선수들과 똑같이 훈련을 소화했다. 유명 감독이 된 후 나이키 등 수많은 스포츠용품 회사가 거액의 스폰서를 제시했지만 이를 단호히 뿌리쳤다.
선수들에게도 패스, 풋워크 등 농구의 기술적 측면을 강조하고 가르치기보다 지각하지 않기, 동료를 비난하지 않기, 양말 제대로 신기 등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데 중점을 뒀다. 이에 바로 그가 경기장 안에서만 성공한 스포츠 지도자가 아니라 경기장 바깥에서도 더 존경받는 사람이 된 이유, 그가 남긴 말과 교육관이 전 세계 수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리더십의 교본처럼 여겨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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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버지의 신실한 태도는 훗날 그가 훌륭한 리더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우든은 훗날 “대공황 시절의 끔찍한 경제적 어려움, 어린 두 여동생의 죽음 등 우리 가족의 불행이 적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불평하거나 남을 비난한 적이 없다. 부자와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거기에 만족했다. 나는 개인적인 삶은 물론 감독으로서도 아버지를 본받기 위해 노력해왔다. 리더로서 내가 이룬 업적의 대부분은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어릴 때부터 농구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그는 마틴스빌 고등학교 재학시절 3년 연속 자신의 팀을 인디애나 주 우승팀으로 이끌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29년 퍼듀대에 입학한 우든은‘내가 아는 가장 훌륭하고 소신 있는 코치’라고 평가한 또 다른 멘토 워드 피기 램버트 코치를 만난다.
램버트 코치는 우든에게 팀은 가족의 연장이라는 점을 일깨워준 인물이었다. 램버트 코치는 극성스러운 퍼듀대 동문회 및 팬들로부터 팀의 운영에 관한 여러 가지 간섭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항상 선수들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결정을 내린 인물이었다. 심지어 대도시의 환락적인 환경이 선수들에게 좋지 않다는 이유로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리는 경기 참여를 거절할 정도였다. 자신의 자녀에게 권하지 않을 행동들을 선수들에게도 권하지 않는 램버트 코치를 보며 우든은 지도자는 단순히 팀을 이끄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원의 부모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램버트 코치 밑에서 우든의 기량은 무럭무럭 성장했다. 그는 4년 동안 세 번이나 전미 국가대표 선수로 뽑혔고, 퍼듀대 농구팀도 전국 대회에서 우승했다. 선수로 활약하면서 영문학 학사 학위도 딴 그는 대학 졸업 후 영어 교사와 농구팀 코치 중 어떤 직업을 가질지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