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비바람, 눈보라에 바랜 향로봉 나무기둥 14글자 ‘국토종주삼천리오차년도 종착점’

  •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입력2005-01-26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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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중산리에서 출발한 지 1년3개월 만에 남녘 백두대간 종착점에 도달했다. 이제 더는 북으로 갈 수 없다. 하루만 가면 저 멀리 보이는 금강산에, 좀더 오르면 두류산, 마대산, 북포태산, 백두산까지 내달릴 수 있을 텐데 예서 접을 수밖에 없다.
    • 북녘 백두대간 종주기를 이어갈 그날을 기다리며….
    비바람, 눈보라에 바랜 향로봉 나무기둥 14글자 ‘국토종주삼천리오차년도 종착점’

    향로봉 정상. 멀리 보이는 산줄기가 금강산 주능선이고, 그 사이에 남북을 가르는 철책이 있다.

    2003년10월. 필자는 백두대간을 출발하면서 우리나라 산맥체계의 문제점을 거론한 바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현행 교과서에 수록된 산맥 개념은 일제시대에 일본인 지리학자의 연구를 수용한 것이다. 또한 산맥 개념은 한반도의 산줄기와 지형을 설명하는 데 상당한 무리가 있으므로, 우리의 전통적인 지리인식체계인 백두대간 개념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백두대간 개념은 논리적 탁월성에 비해 과학적 실증자료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2005년 새해 벽두, 대부분의 신문에 대서특필된 백두대간 관련 기사에 필자는 흥분을 넘어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국토연구원이 위성영상과 지리정보시스템(GPS) 등 첨단기법을 동원해 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산줄기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지도를 완성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 지도가 일본인이 만든 구 산맥지도를 대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스스로 우리 땅의 연속성을 직접 확인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값진 쾌거임에 분명하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우리가 과학의 힘을 빌려 100년 만에 되찾은 지도는 놀랍게도 인사동 헌책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발견된 ‘산경표’를 쏙 빼닮았다는 점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눈물겹게 만들어낸 ‘대동여지도’의 숨결도 그대로 옮겨진 듯하다. 그들은 어떻게 우리보다 앞서 이 땅의 모습을 그토록 세밀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 ‘산경표’를 처음 발견해 소개한 고지도연구가 고(故) 이우형 선생은 생전에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정호 선생이 애국을 뭐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첫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고산자는 당시 6m가 넘는 ‘대동여지도’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12월19일 새벽. 속초터미널에서 동해에 거주하는 산행 동반자 박 선생을 만나 택시를 타고 미시령으로 붙었다. 미시령 고개를 오르는 길은 언제 봐도 아슬아슬하다. 동쪽에서 막 솟구치기 시작한 태양은 가장 먼저 외설악의 명물 울산바위를 비추더니 곧이어 가을을 벗어 던지고 겨울로 들어선 설악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시령 정상에서 곧바로 상봉(1239m)을 향해 붙는데 양편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예사롭지 않았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인지 두 번이나 현기증을 느끼고 발까지 헛디뎠다. 차가운 날씨에 갑자기 기운을 쓰려고 하니 일시적으로 몸의 밸런스가 깨진 모양이다. 심호흡을 하고 초콜릿을 몇 개 입에 넣으니 겨우 진정됐다.

    가을과 겨울의 공존

    미시령에서 상봉까지는 긴 오르막이지만 일단 상봉에 이르면 남쪽으로 설악산을 시원하게 굽어볼 수 있는 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박 선생에게 설악산의 매력에 대해 한 수 배우고 신선봉(1204m)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봉부터는 암릉구간이어서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암릉을 통과하면 밧줄에 몸을 맡겨야 하는 가파른 내리막인데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쌓여 있어서 애를 먹었다. 상봉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늦가을이고 북쪽은 초겨울이다. 박 선생은 “백두대간에서 첫눈을 보았다”며 즐거워했다.

    눈길을 따라 20분쯤 내려가면 화암재다. 여기서 왼편으로 하산하면 내설악 어귀인 용대리로 이어지는 마장터가 나온다. 화암재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오른편의 신선봉을 두고 길이 애매하게 나 있기 때문이다. 혹 신선봉 부근에서 길을 잃기라도 한다면 일단 왼편의 산기슭을 향해 내려서는 것이 좋다.

    대간 줄기는 왼쪽으로 쭉 뻗다가 큰새이령(대간령)에서 한 차례 숨을 고르고 다시 솟아오른다. 큰새이령에서 박 선생을 기다리는데 중년 부부가 먼저 도착했다. 이들 부부에게 박 선생에 대해 물으니 도중에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아마도 신선봉 주변에서 길을 잃은 모양이다. 30여분쯤 기다리니 박 선생이 도착했다. 꽤나 힘들었을 텐데도 “덕분에 좋은 구경 많이 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역시 산을 즐길 줄 아는 분이다.

    마산에서 길을 잃다

    큰새이령에서 고성군 토성면과 간성읍의 경계지점인 마산(1051.9m)까지는 2시간 남짓 걸린다. 도중에 암봉과 병풍바위를 지나치는데 남북으로 탁 트인 곳이 여러 군데 있다. 필자는 박 선생보다 먼저 출발하면서 적당한 곳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원래는 병풍바위쯤에서 쉬어가려 했는데 걸음이 빨라지다 보니 어느덧 마산까지 지나쳐버렸다. 왼편으로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알프스 스키장과 목장을 바라보면서 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속도가 붙은 모양이다.

    비바람, 눈보라에 바랜 향로봉 나무기둥 14글자 ‘국토종주삼천리오차년도 종착점’
    산에서는 너무 페이스가 좋아도 탈이 날 수 있다. 이날 필자가 그랬다. 마산에서 왼편으로 꺾어지는 길이 분명치 않다는 지인의 충고를 잊고 그냥 내치다 보니 대간이 지나지 않는 고성군 죽왕면까지 가버린 것이다. 그제야 나침반을 펴들고 간 길을 되돌아오려니 여간 고단한 게 아니었다. 할 수 없이 7부 능선을 타고 마산 아래쪽 대간 길로 파고들었다. 눈과 얼음이 발목을 붙들고 칡덩굴과 잡목이 몸을 밀어냈다. 비지땀을 쏟으며 겨우 능선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대간 길은 선명하지 않았다. 지도를 손에 쥐고 30여분쯤 걸었을까. 산기슭 아래쪽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제대로 찾아왔다”며 진부령 가는 길을 일러줬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흘리, 알프스스키장 너머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행정구역상 주소지다. 여기서부터 진부령까지는 낮은 산들을 휘돌아 가는데 주변에 목장과 고랭지 배추밭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유난히도 작황이 좋았다는 김장배추가 밭에서 그대로 얼어 죽어가고 있었다. 수만 포기의 배추가 세찬 바람에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다. 들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아주머니에게 아깝지 않느냐고 물으니 “3년에 한 번 정도만 뽑으면 된다”고 말했다. 3년에 한 번씩만 돈벼락을 맞아도 이문이 남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여러 사람들이 망하는 것을 전제로 한 계산일 듯하다.

    진부령이 가까워오자 왼편에 알프스 스키장 전경이 드러났다. 예년보다 따뜻한 초겨울 날씨 탓에 한 개의 슬로프에만 인공눈을 뿌려놓았다. 흥겨운 랩뮤직에 맞춰 수많은 사람이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기고 있었다. 길가의 스키용품 대여점과 식당들은 곧 닥쳐올 대목을 앞두고 분주한 모습이다. 갈증을 달래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 올 겨울 경기가 어떻겠느냐고 물으니, 주인은 “날씨가 너무 따뜻하면 스키장 수지가 안 맞고, 너무 추우면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침내 진부령이다. 이곳은 남녘 백두대간의 공식적인 종착점으로 강원도 고성과 인제를 연결하는 46번 도로가 지난다. 백두대간을 북진하면 이곳에서 쫑파티를 열고, 남진하면 여기서 발대식을 갖는다. 옛 문헌에 따르면 진부령은 보부상들의 이동통로였다가 1631년 간성현감 이식이 우마차 길을 내면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필자보다 먼저 진부령에 도착한 박 선생은 식당에서 막걸리를 시켜놓고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치찌개가 막 끓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박 선생은 필자의 도착시간까지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성탄절 오후에 길을 나서다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지 1년3개월이 됐다. 지리산 중산리를 출발해 어느덧 더 갈 수 없는 곳까지 왔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3000리나 남아 있고, 넘어야 할 봉우리가 수백 개에 이르지만 말이다. 남녘 백두대간의 최북단 향로봉(1293m)에서 반나절만 가면 남북을 가르는 철조망을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다시 하루를 내치면 민족의 명산 금강산에 도달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두류산 마대산 북포태산 소백산 백두산…. 그러나 그곳은 머리와 가슴으로만 가볼 수 있는 땅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끊어진 허리를 보듬어야 하고 녹슨 철조망을 걷어내야 한다.

    이향지 시인은 2001년 ‘북한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도서출판 창해)’라는 긴 제목의 책을 펴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향지 시인은 북녘의 백두대간을 지도와 문헌으로 분석하고, 시인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며 휴전선을 지나 백두산까지 도달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남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아마도 이향지 시인의 역작은 산꾼들의 필독서가 될 것이다.

    12월25일 성탄절 오후. 필자는 육군본부의 향로봉 출입허가 결정을 최종 확인하고 진부령으로 떠났다. 진부령부터는 육군 제12사단이 관할하는 군사지역이어서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 26일 아침 진부령식당에서 아침을 먹는 도중 제12사단 정훈장교 이건일 소위가 도착했다. 동안인 데다가 목소리까지 부드러워서 동생처럼 느껴지는 신참 군인이었다. 필자는 위병소에서 인적사항을 확인한 뒤 향로봉을 향해 출발했다. 이 소위는 지프를 타고 앞쪽에서 길을 안내했고 필자와 박 선생을 포함한 5명의 등반대는 시계차를 따르는 마라토너처럼 10m쯤 떨어져서 따라갔다.

    엄밀히 말하자면 필자 일행이 올라간 길은 백두대간 주능선이 아니다. 지도상 백두대간은 진부령에서 칠절봉(1172.2m)과 1166.2m봉을 지나 향로봉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꺾어져 고성재를 거쳐 남한땅의 마지막 지점인 삼재령에 이른다. 하지만 이 구간은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다. 그래서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군사보급로를 따라 향로봉에 오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진부령-향로봉 구간은 산이라기보다 그 옛날 소달구지가 다니던 신작로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비바람, 눈보라에 바랜 향로봉 나무기둥 14글자 ‘국토종주삼천리오차년도 종착점’

    육군 제12사단 지프의 안내를 받으며 향로봉을 오르고 있는 필자 일행.

    산골부대 병사들에게 겨울은 고된 계절이다. 무엇보다 폭설이 가장 괴롭다. 눈이 쌓이면 보급로가 차단되기 때문에 잠시도 쉬지 않고 눈을 쓸어내야 한다. 진부령에서 향로봉까지는 바쁘게 걸어도 3시간 이상 걸리는 긴 오르막. 이 길의 눈을 계속해서 쓸어낸다는 것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르다 보니 맞은편 마산 기슭에 하얗게 드러난 알프스스키장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향로봉에서 금강산을 보다

    마침내 향로봉이다. 향로봉이라는 이름은 높은 산봉우리에 늘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구름이 걸쳐져 있다는 데서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 이곳은 남한 땅에서 가장 춥고 눈도 많이 내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 일행이 추위를 호소했더니 이건일 소위는 “지금 체감온도가 영하 20℃쯤 되는 것 같은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군부대 막사에서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자 이목구비가 뚜렷한 용모의 유동훈 중위가 필자 일행을 안내했다. 유 중위는 향로봉 정상의 초소에서 남북의 지형을 설명했다. 마음속로만 헤아리던 산들이 그의 짧은 강의로 분명하게 새겨졌다. 필자는 그제야 설악산과 금강산의 경계가 불분명한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흔히 금강산을 ‘1만2000봉’이라고 하는데 그 중 5개 봉우리는 휴전선 남쪽에 있다. 5개 가운데 향로봉이 가장 북쪽에 있고 그 밑으로 삼봉, 둥글봉, 칠절봉, 신선봉이 있다. 만일 금강산보다 설악산에서 더 가까운 신선봉까지 금강산에 포함시킨다면, 금강산과 설악산의 경계지점은 미시령까지 후퇴할 수 있다. 하지만 남쪽에서는 흔히 향로봉까지를 설악산의 범위로 본다.

    한편 ‘북한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의 저자 이향지 시인은 누군가 신선봉까지를 금강산군으로 묶는 과정에서 향로봉이 산에서 봉으로 강등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 실제로 조선시대 문헌에 향로봉이라는 지명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그 자리에 마기라산(磨耆羅山)이 나온다.

    아무튼 향로봉은 통일이 된다면 남북의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쉬어갈 만한 곳으로 손색이 없을 듯하다. 남으로 굽어보면 설악산 대청봉이 시원하고 북으로는 금강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향로봉 정상엔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남겨놓은 표지석과 이곳을 지키던 군부대 지휘관들의 문구가 여럿 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건 비바람과 눈보라에 조금씩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나무기둥. 이젠 글자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나무기둥에는 ‘국토종주삼천리오차년도종착점’이라는 열네 글자가 적혀 있다. 유 중위를 따라 향로봉 정상의 초소로 들어가자 두 명의 초병이 북녘땅을 바라보며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망원경으로 바라보니 금강산이 훨씬 가깝게 드러났다. 비로봉 일출봉 월출봉을 모두 식별할 수 있을 정도다.

    유 중위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하산준비를 서둘렀다. 당초엔 그냥 걸어서 갈 계획이었으나 날이 빠르게 저물고 있었기에 이 소위의 양해를 얻어 지프에 동승하기로 했다. 올라오는 동안 말 한 마디 없던 박 선생이 그제야 고단했던 속내를 털어놨다.

    “목표가 보이지 않으면 힘든 줄 모르고 갈 수 있지만, 빤히 보이는 정상을 두고 계속 모퉁이를 돌아가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더군.”

    그 한마디에 참으로 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프는 덜컹거리며 굽이굽이 향로봉 고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제대를 3개월 남겨두었다는 말년 병장 운전병은 아슬아슬한 고갯길에서도 능숙한 운전솜씨를 발휘하며 필자 일행을 진부령까지 실어다 주었다. 이 지면을 빌려 향로봉 등반을 지원해준 육군 제12사단 관계자 여러분께 고마움을 표한다.

    박 선생의 주선으로 속초의 대포항에서 백두대간 종주기념 파티를 열었다. 우리는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고 이따금씩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분위기 좋은 횟집에서 소주잔을 나누었다. 취기가 돌 무렵 박 선생이 “백두대간을 완주한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필자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됐습니다”라고 답했다. 더 보탤 것도 더 뺄 것도 없는 솔직한 심정이었다.

    산에 취하고 역사에 감동하고 인물에 매료됐던 1년3개월의 여정에서 필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화두는 이 땅에서 살다 간 사람들이 간직했던 고결한 마음씨다. 필자가 백두대간 앞에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바람, 눈보라에 바랜 향로봉 나무기둥 14글자 ‘국토종주삼천리오차년도 종착점’

    화진포 호수의 새벽 풍경. 호수 오른편에 이승만 별장이 있다.

    12월27일 아침. 7번 국도를 따라 북으로 달렸다. 간성과 거진을 지나 통일전망대 입구에서 수속을 밟고 교육용 홍보영화를 관람했다. 예전엔 북한의 무력도발이나 한국전쟁의 상처 등을 보여주었지만, 이젠 금강산의 사계와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홍보물의 마지막 화면이 ‘우리의 소원’을 배경음악으로 처리되는 걸 보면 세상이 달라지긴 분명 달라진 모양이다. 하긴 유람선을 띄워 바닷길을 열고 육로관광까지 현실화된 상황이니, 남북관계는 어느 정도 냉전의 시대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에 위치한 통일전망대는 1983년 통일의 의지를 다지고 망향과 분단의 설움을 달래기 위해 세워졌다. 이곳에서 북쪽 해변을 바라보면 금강산 해금강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보인다. 해금강은 본래 현종암, 복선암, 부처바위, 사공바위, 외추도 등 바다 위에 떠 있는 다섯 개의 섬을 일컫는 말이다. 해금강 왼편으론 낙타 모양의 봉우리가 두 개 있는데 이것이 금강산 1만2000봉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구선봉(九仙峰)이다. 9명의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데서 이런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구선봉 앞쪽 왼편엔 감호라 불리는 작은 호수가 있는데, 여기가 바로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깃들인 곳이다.

    2004년 통일전망대에는 새로운 명물이 들어섰다. 다름아닌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건설된 동해선 남북 철도와 7호선 국도다. 이 도로와 철로는 남북의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최초의 통로로, 요즘은 하루에 1000여명 이상이 왕래하고 있다. 통일전망대 난간에 기대어 시원하게 뚫린 도로와 철로를 바라보자니 새삼 역사는 발전한다는 경구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2005년은 을사보호조약 100년, 광복 60주년 되는 중요한 고빗길이다. 이제 질곡과 모순의 역사를 걷어내고 상생과 관용을 추구할 때가 무르익었다.

    통일전망대에서 차를 돌려 거진 쪽으로 나오다 오른편 건봉산으로 향하면 신라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고찰 건봉사가 있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년) 아도화상이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뒤 고려 공민왕 7년(1358년) 송용화상이 건봉사로 중수한 한국 불교의 성지로, 선교 양종 대본산으로 지정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건봉사가 얼마나 큰 사찰이었는지는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 등 설악산 주변의 모든 사찰이 건봉사의 말사였다는 점과 조선 고종 때 건봉사가 전국 4대 사찰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종 당시 건봉사의 규모는 무려 3100여 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건봉사는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며 급속도로 쇠락했다. 한국전쟁 동안 966칸의 가람이 불탔고, 휴전 이후에는 민통선 북방에 있다는 이유로 4월 초파일에만 개방되다가 1989년에 이르러서야 자유로운 출입이 허용됐다. 일제시대에는 만해 한용운이 머물면서 ‘건봉사지’를 저술했고 일제하 민족교육의 산실 봉명학교가 있던 유서 깊은 도량이었지만, 지금은 유구한 역사를 모두 잊은 듯 중생이 쉽게 찾아가기도 어려운 곳으로 변모했다.

    건봉사를 떠나 화진포로 나왔다. 화진포 해수욕장은 남한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며 근방의 호수와 소나무 숲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장소다. 해수욕장 앞쪽으로 바라보이는 금구도는 거북 모양을 닮은 바위섬인데 이곳엔 천연기념물 201호인 고니를 비롯해 많은 철새가 날아온다. 금구도는 본래 신라시대에 수군들이 기지로 사용하던 곳으로 지금도 당시의 성터가 남아 있다.

    화진포의 풍취가 예로부터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광복 이후 남과 북에서 각기 권력을 장악한 이승만과 김일성이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취향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이승만 별장이 화진포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데 비해 김일성 별장은 바다와 맞닿은 산기슭에 붙어 있다. 두 별장의 중간쯤에는 이승만의 심복이자 자유당 정권의 풍운아 이기붕의 별장이 있다.

    다시 지리산으로

    12월31일. 아들과 함께 지리산으로 갔다. 백두대간을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근 모 방송사가 대하드라마 ‘토지’를 방영하면서 소설 속 무대인 평사리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경남 통영이 고향인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은 단 한 번도 평사리에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평사리를 배경으로 대하소설을 집필했다. 문헌을 뒤져보면 평사리에 조대호라는 참판집이 있기는 했으나, 그의 생애는 ‘토지’의 최 참판댁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한다.

    예상대로 최 참판댁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전에는 없던 입장료가 생겼고, 평범한 시골집 앞에 주막 또는 상회라는 간판이 나붙었다. 마을 어귀를 돌아 최 참판댁 대문으로 들어서자 한눈에 잘 지은 한옥이라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안채를 중심으로 왼편의 별당, 오른편의 사랑채, 앞쪽의 행랑채, 뒤편의 뒤채는 소설 속의 현장을 비교적 완벽하게 복원했다. 사랑채에 앉아서 마을 주변을 둘러보다가 뒤편의 대숲을 거닐자니 마치 아들과 함께 소설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평사리를 빠져나와 연곡사로 향했다.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장시간 대화를 나눈 지리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의 주성근 계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평사리에서 연곡사로 가는 길은 왼편으로 섬진강을 끼고 달리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도중에 화개장터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연곡사에 도착하자 주 계장이 반갑게 맞았다. 그는 먼저 백두대간 무사종주를 축하하며 “다 걸어보니 기분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필자는 “이 땅의 산은 작은 봉우리 하나도 가볍게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주 계장은 “그렇죠. 뒷동산도 수십 번 올라보면 스스로 감동하게 된답니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섬진강에 흰눈이 내리고

    우리는 함께 연곡사를 올랐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연곡사는 지리산 일대의 수많은 사찰 가운데 시련을 가장 많이 겪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대사가 중창했으나, 조선 영조 이후 연곡사가 밤나무를 국가에 바치는 사찰로 지정되면서 고통이 가중되자 승려들이 하나둘씩 도량을 떠나갔다. 그 뒤 수차례 중건된 연곡사는 광복 전후의 격변기엔 빨치산들이 흘린 피로 물들었다. 연곡사 바로 위쪽의 피아골은 지리산 빨치산들이 가장 치열하게 저항했던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연곡사 대웅전 뒤편에 남아 있는 동부도와 북부도 등 국보급 문화재들을 둘러보고 일주문을 나서는데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주 계장과 작별하고 섬진강변으로 나서자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했다. 섬진강 푸른 물결 위로 흰 눈이 퍼붓는 풍경은 가슴이 설렐 만큼 아름다웠다. 아들과 함께 눈발이 강물 위에서 부서지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 발길을 돌렸다. 함박눈은 계속 퍼붓고 있었다. 2004년 갑신년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연재를 마치며15개월 동안 필자의 백두대간 종주기에 관심을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통제구역을 돌아볼 수 있게 협조해준 국립공원관리공단, 육군본부, 불교계, 산악회 관계자 여러분, 한 달에 두서너 번씩 산행에 나서는 필자를 묵묵히 지원해준 사랑하는 가족들, 졸고를 깔끔하게 다듬어 귀한 지면에 소개해준 ‘신동아’ 편집부 식구들, 산속에서 필자에게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산꾼들, 고비 때마다 힘을 보태주신 산촌 마을의 지킴이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합니다. 끝으로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함께 지리산에 오르기로 약속했으나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국가인권위원회 나상민 조사관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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