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단 직원에서 시작해 CEO에까지 오른 구학서 (주)신세계 부회장은 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영으로 전문경영인의 본보기가 돼왔다. 국내 최초의 ‘윤리경영’ 도입, 신세계페이 운동, 온정주의 배격, 할인마트 해외 진출 등의 성과를 내면서 신세계는 워런 버핏으로부터 ‘한국에서 가장 유망한 기업’으로 꼽히기도 했다. 자유와 책임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한국 유통업의 새 장을 열고 있는 그와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b>具學書</b><br>▼ 1946년 서울 출생<br>▼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br>▼ 삼성 비서실 이사, 삼성전자 관리담당 이사, 신세계백화점 사장<br>▼ 동아일보 ‘올해의 CEO 베스트 10’, 2007 한국의 경영자상(한국능률협회)<br>▼ 現 (주)신세계 부회장
‘신동아’ 1월호 이 코너에 실린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의 말이다. 자유만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는 우리 기업가들의 속성을 지적한 듯하다. 그래도 누군가는 있을 것 같아서 김 이사장에게 ‘자유인과의 대화’에 초대할 기업인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시장원리를 철저히 받아들이면 사업에 성공하기 힘들겠지요.”
기업가는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한 기업가의 성향에는 그 사회의 특성이 반영돼 있다. 한국 기업인들은 소비자에게만 잘 보여서는 안 됐다. 어떤 식으로든 공무원과 정치인에게 ‘보험’을 들어야 기업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 기업인들이 철저한 자유주의자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기업인들 중에 누군가 ‘자유인’으로 꼽을 만한 인물이 있을 것 같았다. 사회 탓하지 않고, 정부 탓하지 않고, 스스로 옳게 돈버는 일에 성공한 사람이 있을 법했다. 그러던 차에 워런 버핏의 오른팔 격인 찰스 멍거 부회장의 말이 눈에 들어왔다.
“신세계는 정말 놀라운 기업이다…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멍거가 부회장으로 있는 버크셔 해서웨이는 가치투자, 즉 정도(正道)를 걸으면서도 돈을 버는 기업에 투자하는 데 정통한 회사다.
신세계에 대한 정보를 뒤져봤다. 오너가 자진해서 천문학적 상속세를 납부했고 ‘윤리경영’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정부로부터 특혜 받을 생각은 없어 보이는 회사다. 가격혁명으로 소비자에게 엄청난 혜택을 안겨줬다. 그러면서도 많은 이윤을 내서 지난 10년간 주가가 20배 가까이 뛰었다. 이런 회사의 경영자라면 자유와 책임의 원리를 실천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닐 수도 있다는 약간의 의구심을 품은 채 신세계 전문경영인 구학서 부회장을 찾았다. 사무실이라기보다는 미술관처럼 보이는 남대문의 집무실에서 약간은 수줍게, 하지만 아주 반갑게 그는 우리 일행을 맞았다.
인화(人和)의 부작용
김정호 구 부회장을 ‘자유인과의 대화’에 모신 것은 생활신조나 경영방식이 ‘자유와 책임의 원칙’에 충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본 건가요.
구학서 자유와 책임의 원칙을 지키는 것, 남에게 의지하기보단 스스로 노력하며 사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런데도 제게 자유주의자라는 호칭을 주시니 오히려 민망합니다. 인류 최고의 가치인 자유를 어떤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김정호 구 부회장께서 온정주의를 배격하고 신세계페이 운동을 펼친 것을 보고 자유주의 철학을 가진 경영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온정주의에 주목 했고, 또 그것이 경영 성과에 어떤 영향을 줬습니까.
구학서 온정주의 배격과 신세계페이 운동은 외환위기 이후 윤리경영을 도입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한국적 온정주의 문화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바꿔야겠다는 필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온정주의는 ‘인화(人和)’라는 말과도 상통하는데, 좋은 말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도 큽니다. 협력회사와의 술자리, 동향·동문 출신끼리의 결속 같은 것이 그렇지요. 저는 인화에 의한 온정적 의사결정이 결국 기업의 비용을 증가시킨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자기 몫은 스스로 계산하는 신세계페이 운동을 시작했죠.
처음엔 협력업체 관계자와 식사하면 무조건 그 비용을 신세계가 지급하게 했습니다. 밥이라도 한 끼 접대 받으면 그게 다 마음의 빚이 되어 제대로 의사결정을 못할 것 같았어요. 초기에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갑’의 위치에 있는 신세계 직원이 밥값을 내니까 그때까지 으레 밥값을 부담해온 협력업체 직원들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만나기를 꺼리게 된 거예요. 함께하는 자리가 줄어드니 아무래도 정보 얻기도 힘들고 업무에도 지장이 생겼죠.
고민 끝에 각자 내는 더치페이로 방침을 바꿨습니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지금은 제법 더치페이 문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신세계페이 문화는 외부와의 관계뿐 아니라 회사 내부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엄청난 비용절감을 가져왔습니다. 대외협력비가 많이 줄었거든요. 애초의 의도가 온정주의 문화를 없애자는 것이지, 비용절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돈을 모두 직원들에게 돌려줬습니다.
김정호 그렇게 온정주의를 배격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배격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구학서 물론입니다. 공사(公私)를 구분하는 것과 남을 배려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희는 직원들이 자기 이름으로 기부하는 것을 적극 장려합니다. 기부는 연말에 회사 이름으로 하는 것이 보통인데, 사실 그 돈은 주주와 직원들의 것이잖아요. 그래서 신세계는 개인이 기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어요. 매달 직원들의 개인 기부를 통해 모아지는 기금이 1억원 정도이고, 여기에 회사가 매칭그랜트 형태로 지원하는 1억원을 합쳐 매월 2억원을 결연아동 생활보조금 지원, 환아 수술 및 치료비 지원, 장학금 지급 등 다양한 지원활동에 사용합니다.
“PL은 윈-윈 게임”
김정호 ‘신세계’ 하면 무엇보다 이마트의 성공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이마트가 시장경제원리에 매우 충실한 기업이라고 봅니다. 품질향상과 가격인하를 통해 소비자에게 기여하고, 그 대가로 이윤을 벌어들이니까요. ‘가격혁명’이라고 불릴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구학서 할인점은 시스템 싸움입니다. 발주 시스템, 물류 시스템이 아주 중요한데 이마트는 그런 시스템들이 잘돼 있습니다. 또한 초기에 좋은 부지들을 저렴하게 확보한 덕에 투자비용이 낮은 편입니다. 더욱이 점포가 많다 보니 대량구매에 의한 바잉파워(buying power)가 강하다는 덤도 있고요.
“시장점유율 높으면 소비자에 이익”
김정호 싸게 팔려면 싸게 사올 수 있어야 하겠죠. 가령 농산물의 경우 산지에서 받아오는 가격이 경쟁업체들보다 더 싼가요.
구학서 그렇습니다. 전체물량을 미리 한꺼번에 사거든요. 그래서 소비자에게 싸게 공급할 수 있습니다. 미리 많이 사면 생산자는 행여 가격이 폭락하더라도 안정적인 가격으로 거래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와 생산자, 유통업체인 이마트까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거죠.
이렇게 마트가 소비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은 우리가 중소상인에게 피해를 준다고 비난과 규제로 대응하니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구 부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보다 일자리를 만들어 경제를 활성화하고 세금 잘 내는 게 근본”이라고 말했다.
구학서 과장된 기사입니다. 이마트의 PL점유율은 10% 미만입니다. 90% 이상인 선진국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지요. 그리고 PL은 유통업체 간의 차별화를 위한 전략이지 제조업과 싸우기 위한 도구가 절대 아닙니다. 어느 제조업체든지 유휴설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것을 이마트가 PL을 통해 고정적으로 가동시켜주면 해당 제조업체는 고정비용 절감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한 원가 절감은 소비자에게도 이익이 되죠. 결국 PL은 유통업체, 제조업체, 소비자 모두가 윈-윈 하는 전략입니다.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기 힘든 중소기업 제품의 경우 이마트가 신뢰성을 부여하고 인큐베이팅하는 기능도 하죠.
김정호 유통업에 대한 규제가 많은 편입니까.
구학서 꽤 그런 편이지요. 유통업은 시장 내에서 소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에 굳이 정부가 간섭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할인마트들은 인터넷 쇼핑, 모바일 쇼핑과도 경쟁하는 시대가 됐어요. 이마트만 해도 홈플러스나 롯데마트 같은 오프라인 업체들하고만 경쟁하는 게 아니에요. 하이마트, 지마켓 등이 모두 경쟁자이지요.
그런데도 정부는 한 업체의 시장점유율이 좀 높아지면 바로 독점이라는 딱지를 붙여 규제하려 합니다. 지금 같은 무한경쟁시대에 시장점유율이 좀 높다고 소비자가격을 올리는 등의 횡포를 부릴 수 있을까요? 유통업에선 규모의 경제가 중요하기에 시장점유율이 높아져 거래의 규모가 커지면 오히려 가격을 더 낮출 수 있습니다. 제조업조차 이제 시장이 글로벌화해서 독점의 이익을 누리지 못하는 시점에 와 있는데, 그보다 규모의 경제가 더 큰 유통업은 말할 것도 없지요.
김정호 마치 경제학 강의를 듣는 것처럼 논리적이고 재미있습니다. 이마트가 국내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바탕으로 중국에도 진출했는데, 한국과 중국에서 기업할 때 규제 측면에서 차이가 있습니까.
구학서 중국에서는 아직 규제라고 할 만한 것을 못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외자기업이 지분을 50% 이상 못 갖게 하는 규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다 풀렸습니다. 규제 때문에 힘든 부분은 없어요.
김정호 올해 신년사에서 중국에 이마트를 1000개 만들겠다고 하셨더군요. 중국에 진출한 이마트들의 실적은 어떻습니까.
구학서 중국에 이제 겨우 10개 진출했습니다. 중국은 워낙 큰 시장이라 1000개가 충분히 진출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계속 집중투자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진출한 점포 중 절반이 이익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중국의 도시 개발 속도와 이마트 점포 개점 속도에 차이가 있어 고생도 했지만 이젠 별문제 없이 아주 잘되고 있습니다.
‘백화점 같은 할인점’
김정호 글로벌 유통기업들과 비교할 때 이마트는 어떤 강점을 내세워 중국 소비자에게 다가가고 있습니까.
구학서 외국의 할인마트들은 대개 창고형입니다. 또 가격이 싸다는 인상을 주려 노력하지요. 그러나 이마트는 가격 이외의 것들에도 신경을 써서 백화점 같은 할인점을 만드는 데 주력합니다. 포장에서부터 진열까지 모두 소비자(주부)에게 맞춥니다. 천장도 복개 공사를 해서 아늑한 느낌을 주려 하죠. 초기엔 공사비가 더 들지만 냉난방 비용까지 따지면 결국 비슷합니다. 작은 것에도 소비자를 배려했더니 반응이 좋았습니다.
가령 처음 이마트를 개장할 때 달걀 상품을 벌크(bulk)로 팔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쉽게 깨지곤 했죠. 이로 인해 비용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비위생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비용은 좀 들지만 한국식 단위 포장으로 바꿨습니다. 중국 소비자들이 이걸 아주 좋아했어요. 이처럼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니 한국 기업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더군요.
김정호 한국의 유통기업들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구학서 이마트가 중국에 진출할 때는 현지 한족(漢族)을 점장으로 채용했습니다. 그리고 현지인 점장에게 인사, 구매, 관리 등 모든 업무를 맡겼습니다. 철저하게 그쪽 문화에 동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외국에서 성공하려면 브랜드 고유의 장점을 살리는 것만큼이나 현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 직원 1명에게 나갈 비용이면 현지에서 20명을 고용할 수 있습니다. 현지화는 비용절감과 현지 고객의 마음을 잡는 데 모두 유용하기에 꼭 필요하죠. 우리가 규모면에서는 아직 월마트의 30분의 1 수준입니다. 하지만 내부 효율과 상품관리 측면에선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다고 자부합니다. 제 입으로 이마트 자랑을 하는 것이 민망합니다만.
김정호 하하, 그렇군요. 그럼 백화점은 어느 수준입니까.
구학서 백화점은 할인마트와는 좀 다르죠. 일본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특정 매입’이라고 해서 장사는 입점업체가 하고 백화점은 브랜드 관리와 부동산임대업 기능만 합니다. 재고부담이 적어 경영상의 리스크는 적지만, 전체적인 마케팅과 세일이나 관리하지 백화점을 확실히 차별화할 전략을 세우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요즘 신세계는 자주(自主) 편집매장(백화점에서 임의로 상품을 선정해 테마별 매장으로 만드는 것)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반응도 좋고요. 이제 우리 백화점들도 수익이나 관리 측면에서 예전보다 많이 나아져서 일본백화점협회에서 공식적으로 시찰을 나올 수준에 올라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노력할 부분이 많지만요.
윤리경영의 힘
김정호 신세계가 국내 최초로 윤리경영을 도입했다고 들었는데, 그 핵심은 무엇인가요.
구학서 신세계는 대한민국 모든 제조업체와 거래하는 유통업체입니다. 또 전국의 소비자와 만나고요. 우리의 팬이 많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적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약점이 있으면 무차별 공격을 당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유통업은 더 투명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반(反)기업정서가 팽배하다고들 하는데, 여기엔 재벌들이 기업을 물려줄 때 상속세를 제대로 안 내는 등 떳떳하지 못하게 행동한 것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금 깨끗하게 다 내고 이를 대외적으로 과시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3500억원의 세금을 냈지만, 앞으로도 세금 더 낼 일 있으면 다 낼 겁니다. 떳떳하고 깨끗하게 말입니다. 그게 신세계의 윤리경영에도, 반기업정서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김정호 그렇게 말씀하시니 독자의 속도 후련해질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좋지 않은 일로 공격 받는 경우는 있지요?
구학서 예, 억울한 일도 있습니다. 예컨대 시민단체가 1998년 광주 신세계의 유상증자 건과 관련해 우리 경영진을 배임혐의로 고발한 바 있습니다. 각 방송사가 9시 뉴스 헤드라인에 편법상속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로 밝혀져 기소조차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편법상속을 했다는 보도는 이미 다 쏟아져 나온 뒤였죠. 시민단체가 고발한 사실은 크게 다뤄놓고 막상 무혐의로 결정나자 어디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않더군요. 그래서 더욱 윤리경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지만, 정말 털어도 먼지 안 나오는 기업이 되어 보려고 합니다.
김정호 그런 윤리경영 시스템이 회사의 수익성에는 어떤 영향을 줍니까.
구학서 개인의 부정으로 얻은 이익은 회사 전체가 보는 피해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이 없는 조직이 곧 경쟁력이 강한 조직입니다. 또한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윤리경영을 따르게 하려면 최고경영자부터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이마트가 월마트코리아를 인수하지 않았습니까. 월마트를 공개 M&A시장에 내놓았으면 우리가 인수한 것보다 1000억, 2000억원 정도 더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월마트가 이마트에 기업을 넘긴 것은 윤리경영을 하는 믿을 만한 기업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이마트라면 직원들 고용승계는 물론 마무리 작업까지 깨끗하게 매듭지어줄 것으로 믿었던 거죠. 이런 것도 윤리경영으로 얻은 신세계의 경쟁력이라고 봅니다.
君君臣臣 父父子子
김정호 얼마전 한국을 방문한 워런 버핏이 한국에서 가장 유망한 기업으로 신세계를 꼽은 걸 보고 놀랐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군요. 이번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기업이 수익을 내는 것과 사회공헌으로 자선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습니까.
구학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경제적 책임, 윤리적 책임, 박애적 책임 등 여러 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기업은 일자리를 만들어 경제 활성화하고 세금 잘 내는 게 근본이라고 봅니다.
김정호 구 부회장께서는 말단 샐러리맨으로 시작해서 거대기업의 CEO에 오르는 신화를 창조했습니다. 개인적 성공의 비결은 뭐라고 보십니까.
구학서 저는 머리도, 공부도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다 그럭저럭 했지요. 물론 공부가 사업과 많이 다르긴 해도 저는 정말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입니다. 제가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논어’ 안연 편)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이는 제가 실천해온 원칙이기도 합니다. 사원일 때는 우수사원이 되려고 노력했고, 과장 때는 다른 과장보다 더 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저 내 자리에서 성실하게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잘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지, 큰 욕심이나 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거다 하고 내놓을 만한 성공 비결은 없습니다.
김정호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신가요.
구학서 돈 버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돈을 버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듯해요. 벤저민 프랭클린의 삶을 그린 ‘덕의 기술’에 ‘최상의 행복은 자기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참으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서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을 사회를 위해 잘 쓰는 사람이 진짜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김정호 마지막으로 한국의 기업 환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구학서 기업가는 어떤 환경에서든 이익이 날 것이라고 예상되면 투자를 합니다. 정부가 좌파적인지 친기업적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아무리 친기업 정부라고 해도 수익이 안 날 것 같으면 투자 안 하는 것이 기업가의 본성입니다. 요즘 제조업 투자가 부진한데, 그 근본원인은 공급과잉, 중국과 인도의 성장 등으로 투자할 곳을 못 찾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서 해법 찾기
정부의 규제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정부가 기업자금 조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금리를 낮추는 등 보조를 맞춰주면 좋겠지요. 그러나 정부가 굳이 나서서 투자를 유도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은 결국 기업이 수익을 낼 수 있는 좋은 투자처를 찾는 일인데, 이것은 기업 스스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특별히 기업하기 나쁜 나라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어떤 정부도 기업에 대해 돈 벌지 말라, 투자하지 말라고 한 적 없거든요. 기업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고 수익을 낼 투자처를 찾으려 고민해야 합니다.
얼마 전 정몽준 의원이 ‘우리나라는 기업친화적이라기보다는 시장친화적이라야 한다’고 했는데, 기업가는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기업은 스스로 당당하고 깨끗하게 경영해야 합니다. 정부는 그런 사회 분위기 조성에 힘써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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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은 쾌도난마였다. 유통업계와 기업환경에 관한 지식에서부터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경영철학에 이르기까지 어디 하나 거침이 없었다. 막힘없이 이어진 두 시간의 대화 내내 그가 보여준 것은 자유주의의 구체적 모습, 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영학이었다. 특히 마음에 든 것은 투자 부진을 반기업 정서나 정부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 문제의 해법을 내 안에서 찾으라’는 공병호 소장(‘신동아’ 2007년 11월호 인터뷰)의 자유주의 철학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깨끗하게 경영할수록 수익률이 높아진다는 그의 믿음에도 공감이 갔다. 하지만 그것은 경영자 자신에게 대단한 도덕률을 요구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깨끗하기를 요구하면서 나만은 적당히 살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스스로 도덕적으로 살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높은 수익도 올릴 수 있고 타인의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은 경쟁을 통해 소비자에게 기여하는 일이라는 생각, 또한 자선은 기업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하는 것이라는 원칙도 철저한 자유주의와 재산권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영방침이다. 기업 경영자가 다들 그런 도덕성을 지니고 그 정도의 수익을 낸다면 대한민국이 곧 세계 최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신세계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