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명예, 권력, 재물에도 유통기한이 있게 마련이다. 지극한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데 권력, 재물, 명예의 유통기한이 왜 없겠는가.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한 노정객 카다피는 이제 철권통치의 상징으로 몰매를 맞게 되었다. 숱한 일화를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최고 권력은 오직 국민을 섬기는 데에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또다시 확인시켰다. 그가 비록 쿠데타로 집권했더라도 대수로 공사를 성공시켜 아프리카를 기아에서 해방시킨 세기적 지도자로 기록될 수 있었는데, 독재의 맛에 취해 국민의 가슴을 멍들게 한 죄인이 되어버렸다.
사막 땅속엔 엄청난 양의 물이 저장되어 있다. 그 물을 퍼 올려 관을 통해 메마른 땅 곳곳에 보내 사막을 옥토로 만드는 대역사에 매진했던들 그는 인류사에 참 근사한 인물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타는 갈증으로 물 한 모금에 목숨 걸고 신음하는 아프리카인에게 기꺼이 생명수를 나누어주는 노년의 카다피는 성자(聖者)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독재자의 말로는 뻔한 것이지만, 27세의 육군대위 카다피가 열혈동지들을 규합하며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만 해도 그는 리비아의 희망이었다. 한반도의 8배나 되는 사하라 사막은 모래바다라는 별칭을 가질 만큼 드넓고 혹독한 열사의 땅이었다. 사하라 사막을 온통 농경지와 목초지로 바꾸어 굶주리는 아프리카인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카다피는 국기를 무늬 없는 초록색으로 바꾸었다.
나는 문득 리비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내가 머무는 동안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총괄하는 건설본부는 몹시 무거운 분위기였다. 나와 동행한, 배짱 좋고 정 많기로 소문난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은 소화가 잘 안된다며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소설 쓸 소재를 찾으려고 사막이며 국경 근처의 클레오파트라 별장이며 바닷가의 요새들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본부 임직원들의 표정이나 최 회장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져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저수조 축조공사 착공식 준비가 더뎌져서 그런 거라고 했다. 최 회장은 소화제와 지사제를 복용하며 분주했다.
그리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이 리비아를 공격하려고 항공모함과 전투기를 출동시켰다는 것이다. ‘사르리’ 공장 준공식에 카다피가 직접 축사를 하기로 했는데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면 그 거대한 공사가 물거품이 될 것이기에 영국에서 실시간 텔렉스로 보내는 긴박한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초긴장 상태였다는 것이다. 내가 불안해할까봐 끝까지 비밀로 한 거라고 했다. 그때 나는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내가 있는 동안에 전쟁이 일어났어야 했다”고 말했다. 전투 현장에서 생생하게 취재해 실감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하자 최 회장은 “아이고 저 작가정신을 누가 말리랴!”하며 어찌하든 인명과 재산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 애를 태우느라 몸이 아팠다고 했다.
우리가 돌아오고 한 달 만인 1986년 4월15일 미국은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를 맹공격했다. 그때의 폭격으로 카다피의 딸이 사망했다.
대단한 리비아의 황제
내가 카다피를 만난 것은 리비아를 두 번째 방문한 1986년 8월26일이었다. 풍운을 거느린 듯 대군단을 이끌고 등장하는 그를 대수로 공사현장에서 만났다. 그 시절만 해도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내 가슴에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광주항쟁의 처절한 아픔 때문에 한국 현대사의 쿠데타 주역들은 그리도 치가 떨리게 증오하면서 어째서 카다피에게는 관대했을까. 리비아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막을 옥토로 만들기 위한 대수로 공사를 한국의 유수기업인 동아그룹에 맡겼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한국인을 세리카(친구)라며 검문도 하지 않는 호의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카다피의 초청을 받은 것은 순전히 최원석 회장 덕이었다. 내 취재 욕심을 눈치 챈 그는 “소설가는 다양한 체험을 해야 한다”며 두 번이나 리비아의 사하라 사막을 여행할 수 있게 주선해준 것이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수로관이었다. 그 수로관을 생산하는 공장 기공식에 카다피가 참석해 축사를 한다고 했다. 최원석 회장과 한국 정부 대표로 건설부 장관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계 대표들이 오전 10시에 맞추어 현장에 도착했다. 리비아 주재 각국 대사들과 고위인사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러나 국가 원수인 카다피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의전차량과 방탄차가 들어올 때마다 참석자 모두 기립했다. 내리는 사람이 카다피가 아니어서 모두들 자리에 앉았다가 또 다른 리무진버스와 호위차량과 방탄차가 도착하면 또다시 모두 기립했다. 경호부대가 중무장한 차량과 베두인족의 터번을 두른 기마경호대를 앞세우고 들이닥치면 누구라도 뒤따르는 방탄차량 때문에 기립하곤 했다. 미국이 벼르고 있는 탓에 카다피를 보호하기 위한 위장전술이라는 걸 알아챈 건 한참 뒤였다. 그렇게 경황없이 두 시간쯤 흘렀다.
납작하고 기다란 군용 지프 두 대가 들어왔다. 두 시간 동안 수시로 드나들던 지프였기에 으레 그러려니 하고 눈여겨보지 않았다. 지프는 단상 근처에 멈췄고 훌쩍 큰 키에 상하가 붙은 공군조종사복을 입은 카다피가 내렸다. 선글라스 때문에 그의 눈빛을 가늠할 수 없었다. 박수소리와 함성이 요란했다. 그 순간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형형색색의 전통복장과 군복차림의 기마경호대가 로마의 기마병처럼 밀어닥쳤다. 중무장한 경호 차량들이 밀려들자 행사장은 각종 차로 가득했다. 마치 황제가 친정한 대전투에서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장엄한 행렬이 연상되었다.
그는 당당한 걸음으로 최원석 회장에게 다가섰다. 두 사람은 포옹했다. 그리고 카다피는 주먹을 쥐고 ‘리비아 만세!’를 세 번 외쳤다. 그럴듯한 축사, 민족주의를 절묘하게 표현하고 아프리카인 모두에게 식량을 줄 수 있게 사하라 사막을 곡창지대로 만들겠다며 쩌렁쩌렁하게 외칠 줄 알았는데 그는 연호하는 군중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을 뿐이었다.
카다피의 옆자리를 꿰차다
단상에서 내려온 카다피는 최원석 회장의 손을 잡고 현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하라 사막을 푸른 초원으로 만들겠다는 카다피와 현대의 불가사의라는 대수로 공사를 도맡은 최 회장의 그 당당함이 참 멋졌다. 두 사람을 뒤따르는 경호요원들의 복장은 참으로 가지각색이었다. 기관총을 든 백인여성들의 미모가 출중했고 베두인 전통복장을 한 흑인여성들도 각기 옷 모양과 총기가 달랐다. 갖가지 총기와 복장을 한, 눈매가 부리부리한 남성 경호요원들도 두 사람을 따랐다.
연호, 함성, 박수소리가 뒤엉키고 경호대와 뒤따르는 사람들이 뒤섞여 질서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다. 국가원수를 경호하는 게 아니라 마치 함께 축제를 즐기는 것 같아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우리 일행을 제외한 리비아 국민과 경호원들은 국가원수 카다피의 희망과, 리비아의 발전과 국민을 아끼는 카다피의 애국심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듯 하나가 되어 열렬히 환호했다.
그때 최원석 회장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나를 가리키더니 어서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글을 쓰려면 가까이에서 사진도 찍고 그의 모습도 눈여겨봐야 한다며 기공식 행사장에서는 카다피 바로 옆자리에 앉혀주었던 그는 연신 뒤돌아보며 내 움직임을 살폈다. 제2의 ‘인간시장’을 집필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찬 나는 경호원과 군중의 틈을 비집고 거의 돌진하듯 카다피와 최 회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카다피의 근접 경호대이자 여성 경호대인 아마조네스의 벽을 뚫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성무사족인 아마존(Amazon)의 복수형인 아마조네스를 본뜬 여성 경호대는 그 누구의 접근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조네스는 여자만의 부족인데, 아이를 얻기 위해 때가 되면 이웃나라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남자아이면 거세해 이웃나라로 보내거나 죽였다고 한다. 여성을 전사로 만들기 위해 어릴 때 오른쪽 유방을 절제해 활을 쏘기 편하게 했다고 한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전쟁 때 트로이 편에서 싸우다 그의 손에 죽은 아마조네스 여왕이 너무나 아름다워 제 손으로 죽인 그 여왕을 사랑했다고 한다. 1500년경에 스페인 탐험대가 아마존 강을 탐험하다가 여전사를 만나는 바람에 ‘아마존’ 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아마조네스의 일격
카다피의 여성 경호부대 아마조네스는 카다피가 직접 선발한 수백 명의 최정예 대원으로 모두 미혼이며 빼어난 미모를 자랑한다. 최근접 경호요원 중에 프랑스의 미녀들이 유독 눈에 띄었고 흑인 중에도 눈에 띌 만큼의 미모를 자랑하는 경호요원도 꽤 많았다. 카다피를 근접 취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뚫고 들어가려고 여기저기 살폈지만 팔과 팔을 엮어 둘러선 아마조네스 요원들의 장벽을 공중부양하기 전에는 통과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비교적 허술한 틈을 찾아내어 있는 힘을 다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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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나는 왼쪽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유독 큰 눈이 아름다운 검은 피부의 아마조네스 요원이 경호원의 무리를 파고드는 내 가슴을 팔꿈치로 정확히 가격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내 원초적 욕망이 그릇에 가득 차고 기울어져 엎어져버린 순간이었다. 생생하게 현장감 넘치는 글을 써보려고 그리도 안달했던 나는 리비아 최고미인이라는 아마조네스의 일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도 철벽같은 경호대를 뚫지 못한 아쉬움이 아프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