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호

우리가 외면했던 이승만의 수많은 업적

[누가 위대한 지도자인가] 위대한 사상가, 천재적 경세가

  • 최광 대구대 석좌교수·전 보건복지부 장관

    입력2025-12-12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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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싱턴·처칠·아데나워를 합친 지도자

    • 29세 때 집필 ‘독립정신’, 조선왕조 최고의 경세서

    • ‘일본 내막기’는 일본 패망 적중한 ‘예언서’

    • 자유민주주의와 정부의 역할 강조

    • 재조명되는 이승만의 수많은 업적

    1950년 7월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흔다섯의 이승만 대통령. Gettyimage

    1950년 7월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흔다섯의 이승만 대통령. Gettyimage

    필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조지 워싱턴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그리고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총리가 수행한 역할을 모두 성취한 ‘지도자 중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식민지 상태였던 조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창설했다는 점에서 워싱턴과 유사한 위상을 가진다. 두 지도자 모두 국가의 헌법 질서를 새로이 확립하고, 신생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워싱턴이 상대적으로 내부 이념 갈등이 덜한 환경에서 건국을 이끌었다면, 이승만은 냉전 대결의 최전선에서 건국과 동시에 내전을 겪어야 했으며, 공산주의라는 강력한 전체주의 이념에 맞서 국가의 기초를 세웠다는 점에서 달리 평가돼야 한다. 

    워싱턴·처칠·아데나워를 합친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은 6·25전쟁이라는 국가 존망 위기에 지도력을 발휘해 국가를 방위했다는 점에서 처칠과 비견된다. 처칠이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의 위협 속에서 영국의 자유와 생존을 지켜낸 수호자였다면,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낸 호국의 지도자였다. 다만 처칠이 당시 세계 초강대국 중 하나인 영국을 이끌었다면, 이승만은 자본과 기술이 크게 부족하고 군사력이 미약한 신생 약소국의 지도자로서 국익을 관철하기 위해 외세(미국 정부 포함)와 끊임없이 투쟁을 벌여야 했다는 점에서 더 고단하고 복합적인 외교 과업을 수행하고 성취했다. 

    이승만과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초대 총리인 아데나워는 냉전시대 분단국가 지도자로서 가장 많은 공통점과 전략적 유사성을 공유한다. 두 지도자는 모두 73세의 고령으로 집권해 이승만은 12년, 아데나워는 14년 동안 장기 집권하며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두 사람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분단이라는 부득이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통일을 염두에 두되, 우선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념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서방 동맹에 편입하는 전략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공산 괴뢰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데나워 역시 전 국민의 선거로 구성되지 않은 동독을 정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이 농지개혁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며 반공의 기반을 다졌듯, 아데나워 역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되 사회보장과 연대를 위한 최소한의 국가 개입을 허용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채택해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이러한 평행성은 이승만의 결단(단독정부 수립, 서방 동맹 편입)이 단순히 개인의 독단이 아니라, 냉전시대의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분단국가가 자유를 보전하고 생존하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채택했던 가장 현실적이고 성공적인 구조적 선택이었음을 입증한다.

    ‘독립정신’ 조선왕조 최고의 경세서

    가끔 좋은 책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받는다. 그러면 필자는 언제나 이승만 대통령이 저술한 ‘독립정신’, 당태종과 참모들 간의 정치 토론서 ‘정관정요(貞觀政要)’, 그리고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인간을 하나로 잇는 새로운 역사 ‘빅 히스토리(Big History: Between Nothing and Everything)’ 3권을 추천한다. 



    40대 후반, 교수 생활 15년차쯤인 30여 년 전에 우연히 ‘독립정신’을 접해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 이 대통령의 애국심과 박학다식함에 탄복했고, 책 읽기를 마치는 순간 필자는 형언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졌다. ‘3년의 시간 말미를 주고 ‘독립정신’에 필적하는 경세서(經世書)를 집필하라고 하면 가능할까?’라고 스스로 물었을 때,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24세에 한성감옥에 투옥됐던 죄수가 5년 만인 29세의 젊은 나이에 ‘독립정신’을 집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승만의 천재성에 족탈불급(足脫不及)·조족지혈(鳥足之血)의 자괴감에 한동안 고통스러웠다. 당시 미개와 야만이 판치는 조선왕조에서 어떻게 세상천지 우주만물을 꿰뚫고서 정치·경제·사회·문화는 물론 지리학·자연과학 역사학을 통달해 조선이 당면했던 문제들을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을 내릴 수 있었을까.

    6·25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민간인 및 군 관계자들과 만나는 장면(위). 이승만 대통령이 집필한 서적들. 뉴시스

    6·25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민간인 및 군 관계자들과 만나는 장면(위). 이승만 대통령이 집필한 서적들. 뉴시스

    ‘독립정신’은 장(章)과 절(節) 구분 없이 총 52개 주제에 대해 서술한 책으로 선진 문명을 배워서 부국강병을 이룩하자고 백성들에게 호소한다. 전반부(1~10번)에서 이승만의 정치·경제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조선을 ‘폭풍을 만나 침몰하는 배’에 비유하며,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해 국민이 해야 할 일을 논한다. 중반부(11~21번)는 몽매한 상태에 있던 백성을 계몽하기 위해 쓴 것으로,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 세계의 지리와 인종, 그리고 문명을 소개한다. 후반부(22~51번)는 19세기 이후 서양 세력의 통상 요구와 그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을 기술한다. 여기서는 개항 이후 조선을 둘러싸고 전개된 청나라·일본·러시아의 각축 과정을 정리하고 있다. 

    이승만은 ‘독립정신’ 책의 후록으로 ‘나라의 독립을 떠받치기 위해 필요한 실천 강령을 6개 항목으로 구분해’ 정리한 후 도합 25개 방책을 제시했다. 구체적 실천 강령은 ①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②새로운 문물과 법이 집안과 나라의 근본이다 ③외교를 잘해야 한다 ④국권(주권)을 중하게 여겨야 한다 ⑤도덕적 의무(의리)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⑥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등이다. 이 6대 강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젊었을 때인 개화기는 물론 그가 나라를 건국할 당시에도 중요한 실천 강령이었고, 오늘날 지도자들이 명심해야 할 교본이자 훌륭한 국정 운영 지침이다. 오늘날 지도자들이 6대 강령 가운데 과연 몇 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정책에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440여 쪽에 달하는 ‘독립정신’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집필된 책 중 최고의 경세서이자 국민 계몽서다. 도서관도 없고, 자료도 구하기 쉽지 않은 당시에 감옥에서 자유와 개방의 의미와 중요성을 인식해 집필한 ‘독립정신’은 청년 이승만의 불타는 애국심과 박식함, 큰 역경에도 굽히지 않는 투쟁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옥중이라는 집필 환경의 특수성이 방대한 지식을 내면화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을 법하다. 

    ‘독립정신’은 조선이 처한 위기의 원인을 국민과 지도층의 정신적 노예근성, 미개한 문화, 그리고 국제 정세에 대한 무지에서 찾고, 이를 극복해 독립국가를 건설할 구체적 방안을 제시한 명저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독서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기독교 세계관과 융합해 ‘자유’와 ‘자주’라는 핵심 가치를 재해석하고 체계화했다.

    ‘일본 내막기’는 미래 적중한 ‘예언서’

    이승만은 1941년 7월에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를 출간했는데, 책 출간 5개월 뒤인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책 속의 예언이 현실에서 실현됨에 따라 ‘일본 내막기’는 ‘예언서’로 극찬을 받았고, 그는 ‘한국인 최초의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일본 내막기’는 이승만의 독립 외교 활동의 정수이자 한국 독립의 필연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39년 초 이승만은 대한동지회로부터 출판 비용을 마련해 줄 터이니 독립운동사를 집필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65세의 나이로 집필을 준비하던 중 그는 과거를 회고하는 독립운동사보다는 일본의 침략 야욕을 비판하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일본 내막기’였다. 이 책에서 이승만 박사는 한국과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관계를 분석해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폭로하고,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필요하며, 한국의 독립이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자신의 지론을 담아냈다.

    이승만은 국제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뀌던 제1차·2차 세계대전 사이에 국제 정세의 큰 흐름을 잘 읽고, 앞으로 전개될 위기들을 놀랄 만큼 정확하게 예언했다. ‘일본 내막기’는 일본 천황 전체주의(미카도이즘)의 본질과 그 기원, 저들의 침략 야욕 실상, 그리고 저들의 침략 야욕을 저지할 수 있는 유효한 방안을 제시한다. 나아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최대의 적은 바로 이러한 ‘천황 전체주의’와 더불어 ‘공산 전체주의’임을 세계 최초로 밝힌 그의 탁월한 국제정치 분석서다. 

    1930년대 후반 미국은 고립주의와 평화주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이 펼치는 팽창 정책의 위험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한국, 중국을 넘어 결국 미국을 침략할 것임을 직관적으로 확신했다. 그는 미국 국민과 정부에 “일본은 겉과 속이 다른 나라(Inside Out)”이며, “미국은 일본과 전쟁을 피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알리고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일본 내막기’를 집필했다. 참으로 대단한 혜안이고 예언이었다. 

    이승만은 미국 내의 반전주의자와 평화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당신들이 평화를 사랑한다면, 전쟁이 만들어지고 있는 히틀러의 베를린, 미카도의 도쿄에 가서 평화를 설교하라”고 일갈했다. 일본의 침략 야욕을 폭로하는 동시에, 일본의 식민 통치로 인해 조선이 당한 비극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조선 독립이야말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필수 조건임을 설득하고자 했다. 

    이승만 박사는 태평양전쟁을 정확히 예측했다. 즉 일본이 중국 침략을 넘어 결국 태평양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미국을 공격할 것이며, 미국은 일본과 전쟁을 회피하거나 연기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단언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5개월 전에 출간된 ‘일본 내막기’에서 이승만 박사가 태평양전쟁을 정확히 예측한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믿기 힘들다. 그는 여기서 일본의 침략 근성과 군국주의의 정신적 배경을 쉽고 통찰력 있게 설명해 주었다. “폭발적인 판매량을 기록했다”는 표현과 더불어 판매 부수가 12만 부에 달했다는 자료가 있다. 책의 저작료 수입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됐다.

    책 출간 초기에는 미국 내 고립주의 여론에 묻혀 “헛소리”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지만, 진주만 공습 이후에는 평가가 급변했다. 이승만은 미국 정계와 학계에서 일약 주목받는 인물이 됐고, 한국 독립운동을 위한 외교적 명분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게 됐다. 당시 중국과 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미국 작가 펄 벅(Pearl Buck) 여사는 ‘일본 내막기’를 읽고 “이것은 무서운 책이다. 나는 이것이 진실임을 두려워한다”라는 서평을 남겼다. 

    자유민주주의와 정부의 역할 강조

    언필칭(言必稱·말할 때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정체성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라고 한다. 과연 두 체제의 본질이 무엇일까. 두 용어에 공통적으로 포함돼 있는 ‘자유’란 도대체 무엇이고 왜 중요한가. 단언하건대 두 체제의 본질 그리고 자유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정확히 아는 국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승만은 개화기 조선에서 누구보다 먼저 ‘자유’와 ‘자유민주주의’란 개념을 알게 됐고, 유학생으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 35년을 자유민주주의의 표상인 미국에 살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직접 체험했다.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의 개념을 접하고 체계화한 시기와 경로는 크게 두 과정이다. 첫 번째 과정의 시기는 한성감옥 시절(1898~1904)이었고, 그 경로는 주로 선교사들 특히 릴리아스 언더우드(Lillias H Underwood)를 통해 감옥에 몰래 반입된 서적을 통해서였다. 청년 이승만은 감옥에서 성경을 포함한 서양 역사·문화·정치 서적을 탐독했는데,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서구의 정치사상과 민주주의의 기초 개념을 접했다. 서구의 개인주의, 자유, 만민 평등, 공화주의 등의 기초 개념을 처음 접하면서 조선의 봉건적 체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됐고, 독립 후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한 시기였다. 청년 이승만이 기본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을 넘어 현실 적용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그의 저서 ‘독립정신’이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과정의 시기는 미국 유학 시절(1904~1910)이었다. 그는 조지워싱턴대의 정치학 학사, 하버드대의 사학 석사, 프린스턴대의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학문적으로 체계적으로 배우고 정립했다. 특히 당시 프린스턴대 총장이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은 윌슨의 국제법 및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작성됐다. 이승만은 윌슨의 학풍과 미국의 정치제도를 직접 경험하며, 법치주의·의회민주주의·권력분립 등 자유민주주의의 구체적 원리를 자신의 정치철학으로 완전히 확립하게 됐다. 이 두 과정을 거치면서 이승만은 독립 후 한국이 택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국가체제로 미국식 공화정을 명확히 설정하게 됐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는 넓게는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56명과 1787년 미국 헌법을 작성하고 서명한 대의원 39명이 언급된다. 그들 중 가장 널리 인정받는 ‘핵심적인 건국의 아버지’는 워싱턴(George Washington), 제퍼슨(Thomas Jefferson), 매디슨(James Madison), 해밀턴(Alexander Hamilton), 애덤스(John Adams),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제이(John Jay) 등 7명이었다. 신생 공화국 미국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정부의 적절한 역할을 두고 건국의 아버지들은 엄청난 논쟁을 했다. 이들 중 근본적으로 상반된 비전을 가진 두 인물이 논쟁을 이끌었는데,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국무장관으로 임명한 토머스 제퍼슨과 재무장관으로 임명한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Gettyimage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Gettyimage

    제퍼슨은 인간의 본성은 착하고 이성적이므로, 억압과 무지로부터 해방된다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은 생각하는 육체(thinking body)’이며, 민주주의는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중앙정부의 간섭과 통제로부터 주 정부의 자치권을 지켜내는 ‘주(州)권 국가(State Rights Nation)’의 원칙을 고수했다. 제퍼슨은 정부의 힘이 강해질수록 개인의 자유가 위축된다고 봤기에 “최선의 정부는 가장 작은 정부”라고 단언했다. 

    이에 비해 해밀턴은 일반 대중의 정치적 판단 능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중앙정부가 강력한 주도권을 갖고 강한 군대와 강한 경제로 ‘강성국가(National Greatness)’ 건설을 강조했다. 즉 강력한 중앙정부, 강력한 대통령 리더십을 바탕으로 빠른 시일 내에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안정되고 강한 나라를 세우는 것을 연방의 최우선 목적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재산이 있고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가 정부를 이끌어야 하며, 강력한 행정부와 사법부가 대중의 일시적 열정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다.

    민주주의와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이승만의 사상을 제퍼슨 대 해밀턴의 관점에서 정리해 보면, 이승만은 정치적 이념과 수사(修辭)에서는 제퍼슨주의자였으나, 실제 정책 운영과 권력구조에서는 해밀턴주의자 요소가 배어 있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향하는 지도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은 스스로를 ‘제퍼슨 민주주의자(Jeffersonian Democrat)’라고 칭하며 제퍼슨의 사상을 신생 대한민국에 적용하려 했다. 이승만은 기독교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을 가장 중요시했다. 이는 제퍼슨이 미국 독립선언서에 담은 자연권(자유와 행복 추구) 사상과 궤를 같이한 것이었다. 제퍼슨이 농민을 기반으로 한 공화주의를 지향하며 민중의 자유를 중시했듯이, 이승만은 강력한 반공주의를 통해 사회주의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지키는 것을 국시로 삼았다.

    그러나 건국 직후의 한국 현실과 이승만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해밀턴식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와 큰 정부의 역할을 요구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이승만 대통령은 분단과 6·25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국가 안보와 통일을 최우선으로 두었다. 이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행정부의 압도적 권한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해밀턴이 연방의 안정을 위해 주장했던 강력한 중앙정부론에 가깝다. 해밀턴이 은행가와 기업가를 지원하며 국가 주도 경제성장 정책을 주창하고 추진했듯이, 이승만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 원조에 의존하면서도 농지개혁과 주요 산업체의 국유(적산) 처리 및 이후의 불하 등을 통해 정부가 경제의 큰 틀을 설계하고 통제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이승만 대통령(왼쪽)과 그의 부인인 헝가리 태생의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운데)가 미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오른쪽)과 함께 남한의 철도 차량 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Gettyimage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이승만 대통령(왼쪽)과 그의 부인인 헝가리 태생의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운데)가 미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오른쪽)과 함께 남한의 철도 차량 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Gettyimage

    이승만의 독립투쟁

    이승만은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유형의 독립운동을 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된 후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은 설명이 필요 없지만 흥미롭게도 청년 이승만은 합병 전에도 독립운동을 했다. 일본에 합병되기 전 이승만의 활동에서 ‘독립’이란 말이 명시적으로 사용된 사례는 이승만이 1897년 배제학당 졸업식에서 ‘대한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란 제목으로 유창하게 행한 영어 연설의 원고에 등장했다. 또 다른 사례는 “이승만은 1904년 12월 고종의 밀사가 아닌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밀사로 대한제국이 독립할 수 있도록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에서 나타난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은 청의 종주권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후에 러시아,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이권 침탈 및 내정 간섭이 심화됐다. 따라서 1899년 24세 청년이 배재학당의 졸업 연설에서 외친 ‘독립’은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건설하자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독립정신’을 탈고한 후 1904년 이승만이 미국에 가서 지원을 호소한 ‘독립’은 사전적으로 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막아내고, 대한제국이 주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목적의 운동이었다. 이승만은 청나라의 종주권에서 벗어난 후 열강들의 간섭으로부터 주권을 지키고 완전한 자주 국가를 이루기를 바랐고, 1904년 무렵에는 점차 세력을 키우는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이승만이 일본에 대해 본격적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한 것은 1910년 8월22일 한일합방에서 시작됐는데 이는 본인이 박사학위를 취득한 지 34일 후였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행태는 여타의 다른 수많은 독립투사의 독립운동 행태와는 두 가지 점에서 달랐다. 첫째 비(非)무장투쟁이었다. 김구 등의 임시정부 세력이나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이 추구했던 무장투쟁 노선과 달리, 이승만은 현실적인 군사력 열세를 인정하고 국제법적·정치적 논리를 활용하는 외교 노선을 고수했다. 둘째 장기적이고 엘리트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의 활동 무대는 주로 워싱턴 DC의 정치 중심지였으며, 미국의 고위층 인사 및 지식인들과 교류를 통해 한국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승만의 외교 독립론은 크게 여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국제사회의 여론 조성이다. 그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식민 통치의 부당성을 서방 세계, 특히 미국에 알리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둘째, 국제조약에 근거한 호소다. 이승만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한국의 독립이 유린되기 이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을 근거로 미국의 책임을 끊임없이 촉구했다. 셋째,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노력이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서 연합국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승인받아 한국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 전선에 참여시키고, 전후 국제회의에서 발언권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넷째, 미국과의 동맹 강조다.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과 동맹이 필수적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당시 그의 한미동맹론은 “미국을 친구로 해 독립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다섯째,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대비다. 그는 독립운동 말기에 들어서는 이미 중국과 소련의 영향 아래에 있는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미국과 연대 강화를 도모했다. 여섯째, 선전 및 교육활동이다. 그는 하와이를 중심으로 한 미주 교민 사회에서 한인 조직을 규합하고, 교육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영문 잡지 및 저술 활동을 통해 한국 문제를 미국 지식인과 정책 입안자들에게 알리는 데 주력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하늘의 도움을 받아서든 자신의 노력과 친화력에 의해서든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다. 이승만은 주로 미국인 선교사, 교육자, 그리고 교민 사회로부터 정신적·물질적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공식적 지원은 광복 이전까지는 사실상 전무했다.

    초기에는 한성감옥 시절 릴리아스 언더우드 등 서양 사상 및 기독교를 접하게 해준 선교사들 그리고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th Gale)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등 미국 유학을 주선하고 재정 후원을 하도록 도운 북미 선교사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에는 학문적·이론적 기반이 매우 중요했다. 이와 관련해서 우드로 윌슨 프린스턴대 총장(훗날 28대 미국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 논문의 지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특히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큰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

    교민 사회의 지원도 크게 도움이 됐다. 1910년대 이후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인 동지회, 대한인국민회 등 교민 단체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및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이승만은 이 자금을 주로 외교 활동과 선전 사업에 사용했다. 미국 조야 인사들의 지원도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정치학 박사학위와 유창한 영어를 바탕으로, 그리고 친기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승만은 미국의 외교관, 국회의원, 지식인들과 인맥을 구축해 한국에 대한 지지와 관심을 열렬히 호소했다.

    재조명되는 이승만의 수많은 업적

    최근 ‘건국전쟁’과 ‘기적의 시작’이라는 이승만 대통령 관련 두 다큐멘터리 영화 덕분에,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다소 반듯하게 이루어지는 듯하다. 그동안 우리 국민에게 잊혔던 이승만의 수많은 업적이 ‘집단기억’의 형태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작금의 문제는 북한의 김일성 공산 세력과 남한의 주사파 세력이 이승만의 수많은 업적을 훼손하고 왜곡한 것을 바로잡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다. 

    이승만의 뛰어난 지도력을 오늘날 한국 사회에 제대로 투영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작업이 반드시 추진돼야 한다. 첫째는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방기한 우파 세력은 처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특히 우파 지도자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70대 이상 세대가 크게 각성해야 한다. 자신들의 무지와 잘못을 통감하고 처절히 반성하며 ‘역사 바로 세우기’에 목숨 걸고 앞장서야 한다. 둘째는 건국 대통령이 추진하고 성공한 제반 정책에 더해, 지도자로서 이승만의 세계사적·한국사적 위상 제고와 함께 그가 무엇을, 왜 고민했는지를 체계적으로 살펴 이해하고, 이를 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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