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호

클래식 문화와 도시를 번성케 한 세계 곳곳의 콘서트홀

[음악으로 보는 세상] 오스트리아 빈 부르크 극장, 일본 도쿄 산토리홀…

  • 김원 KBS PD·전 KBS 클래식 FM ‘명연주 명음반’ 담당

    입력2025-12-1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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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과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음악을 듣는 일이 더는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스마트폰과 블루투스 이어폰만 있으면 어디서든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연주자들은 여전히 공연장에 묶여 있다. 특별히 클래식 연주자들이 연주 공간에 더 많이 의존한다. 클래식 악기들은 전기에 힘입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의 힘으로 소리 증폭이 가능한 음악은 음향 시설이 좋은 실내 공간이 아니어도 소리를 멀리 깨끗하게 보낼 수 있다. 리드기타와 베이스기타, 건반과 드럼 그리고 노래하는 가수만 있으면 록 밴드들은 운동장에 모인 수만 명 앞에서도 공연할 수 있다. 하지만 클래식 악기들은 잔향이 좋은 전문 콘서트홀에서 제 빛을 발한다. 그래서 한 도시의 클래식 음악이 발전하기 위해선 좋은 콘서트홀이 필요하다. 

    일본 도쿄의 산토리홀. 위키피디아

    일본 도쿄의 산토리홀. 위키피디아

    클래식 음악의 역사는 공간을 울리는 악기의 역사이기도 하다. 야외에서 큰 소리를 내는 악기가 많지만 춤을 추고 와인을 마시는 실내 공간에서 다른 악기들과 어울려 음색과 음량이 균형을 이루는 악기는 많지 않다. 현대 오케스트라에서 쓰이는 악기는 모두 음악을 전문적으로 연주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에서, 균형을 이루도록 개발되고 개량된 악기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현대 트럼본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색벗(sackbut)과 목관악기의 몸통에 금관악기의 마우스피스를 가진 코르네토(cornett)라는 악기의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아직 정교한 실내악이 없을 때였으므로 이 악기들은 거대한 교회에서 연주되는 합창 음악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큰 소리를 내야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서 바로크 시대로 접어들 무렵에는 바이올린을 비롯한 현악기들이 만들어져 색벗과 코르네토를 대체한다. 비슷한 시기에 피아노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하프시코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비로소 실내악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클래식 음악 역사는 악기의 역사

    색벗(위)과 코르네토. University of Edinburgh

    색벗(위)과 코르네토. University of Edinburgh

    소리는 공명한다. 근처에 진동수가 비슷한 물건이 있으면 같이 울린다. 많은 악기가 음이 공명하는 원리를 이용해 만들어졌다. 공명현을 따로 가지고 있는 악기도 많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을 그린 그림에도 등장하는 하프가 공명현을 가진 악기 중에 가장 오래된 악기다. 여러 개의 현을 가진 현악기들은 대부분 공명현상을 이용해서 풍부한 소리를 낸다. 고음악을 듣다 보면 몇 안 되는 악기로 오케스트라 같은 소리를 내는 걸 듣고 깜짝 놀라게 된다. 소리가 잘 울리는 공간에서 공명이 좋은 악기들을 사용하면 음악은 놀랄 만큼 풍성해진다. 그런데 작은 악기로 소리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내려면 조급해서는 안 된다. 그런 소리는 악기가 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공간과 숨어 있는 공간이 함께 울려 만들어지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소리가 공명을 거듭해서 숨어 있는 공간까지 찾아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마이크와 스피커를 사용하지 않는 모든 공연은 다 마찬가지다. 

    공명현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더 큰 공간이나 건물 밖의 야외 공간을 울리기 위해선 현악기에 울림통(공명통)을 만들어준다. 거문고나 가야금처럼 현 밑에 울림통을 받친다. 치터(zither)나 살테리(psaltery) 같은 고악기들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울림통이 더 커져서 몸이나 바닥에 고정할 수 있게 되면 두 손이 자유로워진다. 이때부터 악기를 연주하는 데 두 손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후로 맬릿(mallet·마림바나 실로폰 등을 연주할 때 사용하는 채)을 두 손에 쥐고 현을 때리는 악기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두 손으로 부족해서 열 손가락을 모두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하프시코드를 만들었다.



    현으로 소리를 내는 방법 중 가장 오래된 방법은 손가락으로 현을 뜯는 것이다. 망치나 맬릿으로 현을 두드릴 수도 있고, 활을 사용해서 현을 켤 수도 있다. 하프시코드는 이 중 가장 오래된 방법을 사용한다. 하프시코드는 열 손가락을 사용해 건반을 누르면 건반과 연결된 피크(pick)가 현을 뜯어서 동시에 여러 소리를 낸다. 바흐가 이 악기를 사용했고, 하이든과 모차르트 시대가 돼서야 해머로 현을 때리는 방식을 사용하는 포르테 피아노가 만들어졌다. 바흐부터 모차르트에 이르는 동안에 오보에와 플루트, 클라리넷도 만들어져 오케스트라의 중요한 악기가 됐다. 피리처럼 한 통으로 만들어지던 목관악기들을 3~5개 부분으로 분리해서 케이스에 넣을 수 있게 되면서 온도와 습도가 변해도 목관악기를 쉽게 보관할 수 있게 됐다. 

    베토벤이 연주하던 피아노는 낭만주의 시대를 맞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는 악기였다. 바로크 시대의 하프시코드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에서 빠질 수 없는 악기였지만, 고전주의 시대 이후 피아노는 오케스트라에서 제외됐다. 피아노가 오케스트라 전체가 내는 소리와 맞서면서 수천 명의 청중과 공명하는 악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아노의 소리는 혼자 음악을 듣는 개인에게 친절하지 않다. 라디오나 스피커로 듣는 피아노 소리는 정교한 녹음 기술과 섬세한 선곡이 만들어낸 결과다. 실제로 공연장에서 듣는 피아노는 난폭하다. 그래서인지 피아니스트 중에는 격투기 선수 같은 체구를 가진 사람이 많다. 작고 가녀린 여자 연주자도 만만히 보면 안 된다. 

    하프시코드. Gettyimage

    하프시코드. Gettyimage

    음악은 공간을 울리지만 본질적으로 시간을 다루는 예술인데, 피아노와 하프시코드는 시간을 다루는 방법이 다르다. 피아노는 현을 강하게 때려서 음의 여운을 길게 남길 수 있고, 페달을 사용해 시간의 지속을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프시코드로 시간의 지속을 표현하기 위해선 오히려 음을 반복해야 한다. 쉴 새 없이 재잘거려야 한다. 하프시코드의 꾸밈음은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음으로 표현하는 매력적인 방법이다. 바로크 시대 복식(服飾) 가운데 러프(ruff)나 프릴 칼라(frilled collar)을 떠올려보자. 얇고 힘없는 천을 여러 겹으로 주름 잡으면 목 주위를 장식하는 견고한 칼라가 된다. 오래된 시간은 반복되고 떨리면서 지속된다. 

    낭만주의 시대의 피아노 작품으로 콩쿠르에서 우승한 젊은 연주자들이 때가 되면 바흐를 연주한다. 하프시코드를 위해 만들어진 바흐의 작품을 피아노로 잘 연주하기 위해선 어깨와 손목에 힘을 빼고 건반을 어루만져 음이 꽃처럼 피어나게 해야 한다. 내 힘으로 소리를 만들어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가 피워낸 꽃망울이 공간과 공명하면서 꽃처럼 피어나게 해야 하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하지만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는 바흐가 남긴 곡을 연주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제 악기가 공간을 어떻게 채우는지 이해하게 된다. 피아노를 치는 연주자라도 하프시코드가 작은 공간을 울리는 방법을 이해해야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다. 

    음악만을 위한 공간, 예술가와 청중 함께 태어나게 해

    피아노 연주회에 리사이틀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붙인 사람은 리스트다. 1840년 영국에서 순회공연을 하던 중에 리스트는 무대를 청중이 앉는 객석과 분리하고 자신의 공연에 ‘낭송한다(recite)’는 단어에서 유래한 리사이틀(recital)이란 이름을 붙였다. 교회에서 사제가 성경을 낭송하듯 음악을 연주하고, 귀족의 후원 없이 청중을 위한 연주를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때 현대적 의미의 청중도 같이 탄생했다. 이전에는 연주를 위한 공간이 따로 없었고, 연주자들은 귀족의 저택과 살롱에서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자신의 작품을 연주했다. 와인을 마시고 춤을 추는 공간에서 자신과 작품에 집중한 채 음악을 연주하는 건 불가능했다. 오로지 음악만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예술가와 청중이 함께 태어났다. 

    대중을 위한 공연장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최초의 대중 공연장은 몬테베르디가 아직 살아 있던 163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졌다. 몬테베르디의 제자이던 프란체스코 카발리가 활약한 산 카시아노 극장이 티켓을 사서 입장하는 최초의 상업 오페라극장이었다. 가수와 연주자가 직접 극장을 대관하지는 않았고, 흥행사들이 오페라를 기획하고 극장을 빌려 수익을 올렸다. 18세기에 들어서 오스트리아 빈과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같은 대도시에도 민간 상업 공연장이 만들어졌다. 이런 도시에선 작곡자와 연주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직접 공연장을 대관해 자선 콘서트를 열었다. 자선 콘서트라는 명분으로 연주회가 열렸지만, 실상은 대관료와 공연에 들어간 비용을 제외한 수익이 모두 공연을 준비한 작곡가와 연주자에게 돌아가는 연주회였다. 

    와인을 생산하지 않고, 뛰어난 클래식 작곡가도 배출하지 못했던 영국은 외국에서 와인과 작곡가를 수입했다. 헨델과 하이든 같은 작곡가들이 런던에서 공연을 개최해 성공을 거뒀는데 이들은 모두 민간 극장을 임차하고 스스로 공연을 기획했다. 19세기가 되자 베토벤도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자선 콘서트를 열었다. 1800년 4월 오스트리아 빈의 부르크 극장을 대관해서 연 베토벤의 첫 자선 콘서트에선 그의 교향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대중에게 공개됐다. 이 작품들은 이미 귀족의 저택에서 초연됐고, 여러 차례 연주됐지만 이 공연은 그의 초기 작품들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데뷔 무대였다. 1808년 안 데어 빈 극장에서 열린 베토벤의 자선 음악회는 음악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대규모 음악회였다. 그의 중기 작품이 4시간 넘게 연주됐는데 교향곡 5번과 6번, 베토벤이 직접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 4번과 코랄 판타지가 한자리에서 연주됐다. 이 두 극장은 현재 각각 오스트리아 정부와 빈 시에서 전문 운영 법인에 맡겨 운영하고 있다. 단순 대관만을 하는 공연장은 아니고 예술감독을 두고 시즌별 기획 공연과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영국 런던의 대규모 공연장 크리스털 팰리스. Gettyimage

    영국 런던의 대규모 공연장 크리스털 팰리스. Gettyimage

    산업혁명 이후 런던, 음악 중심지로 부상

    미국 뉴욕 카네기홀(위)과 카네기홀에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 Gettyimage

    미국 뉴욕 카네기홀(위)과 카네기홀에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 Gettyimage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입헌군주제가 발전하면서 런던은 세계 음악의 중심 무대로 등장했다. 19세기에 산업혁명이 배출한 중산층이 음악회를 찾는 청중으로 성장하면서, 세인트 제임스 홀(St. James’s Hall)이나 크리스털 팰리스(Crystal Palace) 같은 대규모 공연장이 지어졌고, 이들 런던의 공연장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의 음악으로 채워졌다. 영국과 같은 섬나라인 일본은 이 전통을 배웠고, 와인 대신 뛰어난 스카치위스키 만드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위스키를 만드는 회사인 산토리가 도쿄에서 가장 뛰어난 콘서트홀인 산토리홀을 세우고 운영한다. 산토리는 이 홀을 후원하고 클래식 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획 공연을 장려하면서, 신예 음악가를 발굴하고 연주자를 교육하는 일에 투자한다. 그 결과 산토리홀은 단순히 무대를 빌려주는 장소가 아니라, 도쿄 음악 문화를 상징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산토리홀은 뉴욕의 카네기홀을 벤치마킹했다. 

    뉴욕의 카네기홀은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기부로 세워진 공연장이다. 음악가라면 누구나 서고 싶은 세계 최고의 무대일 뿐 아니라, 와일 음악연구소(Weill Music Institute)를 중심으로 젊은 연주자를 발굴하고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공연장 이상의 브랜드로 진화했다. 카네기홀의 무대를 통해서 세계 최고의 예술가로 성장한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보자.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하면서 카네기홀에서 미국 무대에 데뷔했다.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야샤 하이페츠와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가 카네기홀에서 미국 데뷔 리사이틀을 열었고, 레너드 번스타인도 뉴욕 필하모닉의 카네기홀 공연에서 대체 지휘자로 투입된 후에 세계적 지휘자 반열에 올랐다. 카네기홀에서 본격적인 연주 커리어를 시작한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은 1960년 폐쇄 직전의 카네기홀을 기사회생시키는 운동을 이끌면서 연주자의 전설이 됐다.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예술의전당

    런던과 뉴욕, 도쿄는 모두 오랜 클래식 음악의 역사에서 중심지가 아니었던 도시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민주주의와 도시가 성장하던 시기에 문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도시의 역량을 멋진 콘서트홀과 오페라하우스를 짓고 운영하는 데 집중한 결과 파리와 빈, 베네치아를 넘어서는 음악도시가 됐다. 우리나라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서울에 예술의전당을 지었다. 최근에는 부산에 세계적 규모의 콘서트홀이 건립됐으며 곧 오페라하우스도 개관할 예정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예술의전당은 여전히 대관만 하는 공연장에 머물러 있다. 19세기 초 베토벤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해외 유명 연주자와 오케스트라에 예술의전당 무대가 주어지지만 정작 국내 연주자들과 연주 단체가 이 무대를 통해 발굴돼 성장한 사례는 드물다. 오히려 유명 해외 연주 단체와 연주자의 공연 관람 장면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위해 수십만 원을 지출하는 청중이 양산되고 있다. 한 해에 쓸 문화비용의 대부분을 고가의 해외 연주자 공연에 써버린 청중은 국내 연주자의 작은 음악회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을 기획 전시해서 성공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되지만, 과연 우리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연장과 미술관이 해외 예술가의 공연과 전시로 수익을 올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의문이다. 

    김원
    ● 1970년생
    ●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 2023년 제1회 대한민국언론인대상 수상
    ● ‘당신의 밤과 음악’ ‘노래의 날개위에’ ‘명연주 명음반’ 등 KBS클래식 FM에서 다수의 프로그램 제작
    ● 저서: ‘미디어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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