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집 근처에 작은 감리교회가 있다담장도 없는 교회당 벽에는 자벌레만한 화단이 딸려 있다그래도 거기에무화과며 앵두 목련 꽃무릇 능소화 들이 살아서내 발길이 자주 흘러가곤 한다사나흘 전에 초면인 목사와 잠시 꽃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그런데 …
2012012011년 12월 20일코끼리의 기원
어젯밤 회식이 길어졌고, 좀 취한 것까지는 인정하겠다그래도 그렇지, 평상시처럼 출근시간 맞춰 잘 일어나, 늘 하던 대로빵 굽고 딸기잼 꺼내고 오렌지 주스 따르고, 늘 하던 대로, 아들을 깨웠다빨랑 일어나라, 아침 먹자 잉,아빠, 누…
2011122011년 11월 22일연잎 위에 달항아리
이른 봄 매화꽃 함성에 깨어나꽃그늘 손잡아 흔연스러운 봄나들이그늘진 바람받이 한적한 비탈에후두둑 감꽃 주워 만든 목걸이무료한 목소리에 젖어 있는 한여름소나기 성글거리는 소리로연잎 위에 머물다 구르는달항아리 내 사랑노을빛으로 애태우는…
2011112011년 10월 19일반허공
죽을 때가 되어간다면앞이 잘 보일 것이니살아서 모든 것을 떨쳐내고 왕궁의 오솔길을 따라서비밀스러운 왕의 쪽문을 따라서그렇게 삶의 미련을 잊어버리고죽은 왕녀의 비녀를 그리워한다그리도 애처롭게 바라보는 그녀돌아가는 길에 추억 하나 이름…
2011102011년 09월 20일빈집에 우물 하나
늘 어디론가 떠나는 세상 모든 것들이 부러웠습니다하지만, 지금 여기 더 독하게 앓으며맑아질 수 있다면지나온 세월만큼 견딜 수 있겠습니다뒤꼍 떫은 감나무이따금 지나는 허기진 바람 한 점에도사색에 잠겨 있습니다세월 지나 폐허가 되어버린…
2011092011년 08월 19일살구나무에 대한 경배
내 친구 최승희 교수는 한국 고문서 연구의 권위인데그보다 더 잘하는 건살구 술 담그는 일.자기 집 마당에 있는살구나무를 잘 가꾸어매년 수확한 살구로 술을 담근다.가끔 점심을 같이 할 때페트병에 담아 가지고 나오는데그 맛은 주성(酒星…
2011082011년 07월 20일꽃
아프게 피지 않는 꽃은 없다모진 겨울 없으면 백매화도 없다혹독한 눈보라 있어서 산수유꽃도 있는 것이다사무치고 사무쳐 꽃 한 송이 피는 것이다봄 사월에도 눈발 쏟아질 때 있고황사와 흐린 빗줄기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순간 순간 치열하…
2011072011년 06월 21일사라지는 의자
2011052011년 04월 21일풍문
2011042011년 03월 22일진또배기
젊은 날, 해변을 떠돌다 진또배기를 만나면 반가웠다 푸른 하늘에는 새가 날아다녔지만 사람이 깎아 만든 새가그토록 정다웠던 이유를 몰랐다, 새를 쳐다보며아득히 외로웠던 이유를 몰랐다 …
2011032011년 02월 22일卒
어머니 묘소에 큰절하고 비석 뒷면을 살펴보니생몰연월일 앞에 한자로 生과 卒이 새겨져 있다生은 그렇다 치고 왜 死가 아닌 卒일까 궁금해 하다인생이 배움의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다,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이승이라는 학교에 …
2011022011년 01월 20일배달의 달인
100달러 50달러짜리 지폐를 다 내놔라영웅이 될 생각은 말아라한 남자가 은행 출납창구 직원에게 다가가 커다란 꽃다발과 함께 건넨 카드에 쓰여 있던 배달의 말이다 모두 440달러(52만원쯤이라지)를 건네받은 후 꽃다발을 출납창구에 …
2011012010년 12월 22일활엽수 곁에서
오늘은 등 뒤에서 오는 발소리만으로도 안다네오는 너 때문에 내 쪽이 환해지네 그것은 멀리 맴돌며 간절했었다는 뜻실로 우리는 얼마나 잦게 기다리고 외롭고 왜소한가활엽수 곁에서오늘은 가을의 가녀린 소리에 맞춰우리네 모양 잎사귀 지는 것…
2010122010년 12월 03일해 질 무렵
해 질 무렵엔우리 모두조금 더 고요한 눈길로하늘을 본다 지는 해를 안고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발걸음은 따뜻하다 가족을 다시 만나 건네는 정겨운 웃음 속에 깃드는노을의 평화 아픈 것이 낫기를 바라지만결코 나을 수가 없는사랑하는 이를 언…
2010112010년 11월 02일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물었다
한 발짝 가까워진다는 것은 한 발짝 멀어진다는 것 名作과 名畵에서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는 것 나의 따뜻한 밥상 나의 따뜻한 이부자리 나의 빛나는 순간을 제 새끼에게도 공짜로 줄 수 없는 것 저쪽은 아프게 사는데 나는 아프…
2010102010년 10월 05일떠도는 가을
차 안에 음악이 흐르는데 음악을 찾아 자꾸 채널을 더듬는다이런 것을 뭐라고 하나차 마시면서도 차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고 인도풍의 시인도 아닌데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리운 것을강물에 뜬 아파트들이 불안한 유령처럼 나를 따라오…
2010092010년 09월 02일불꽃
숨어 있는 열정이터질 때 발목 날리고남은 인생 파멸시키는지뢰 같은 것 아니라면,지루함 엉겨 붙은 밤하늘 어느 한구석적막 제치며 맹렬히 한순간 타오르다사라져버리는폭죽 같은 것이라면,소멸의 징후 온몸으로 감지하며남은 열정 잔잔히 고르는…
2010082010년 08월 04일가로수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 재앙일 수 있다는 것을생생한 실물로 보여주는 저 붙박이 생들올해도 지루하게 동어를 반복하고 있다후천성 일급 장애로 봄이면 버릇처럼, 악착같이, 수평 향해 가지를 뻗어보지만번번이, 욕망은 잔인하게 진…
2010072010년 07월 06일목련
어찌 다 푸르러지려고 저리 희단 말인가 허리 잘록 잘록 허리 신발 벗어 들고 사뿐히 온 봄 손님들 저리 많단 말인가 환한 걱정에 수북 머리에 인 구둣주걱들
2010062010년 06월 04일변명
오늘 나의 두 번째 미소는 거짓이다. 그것은 마치 오래 신은 양말이 조금씩 흘러내리는 것처럼 불편하게 이루어진다. 나는 일부러 모른 체한다. 한밤중에 당도한 손님처럼 부끄럽게 얼어붙은 두 다리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염치없는 …
2010052010년 05월 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