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대체로 공정하지 않다. 평등하지도 않다. 공정한 사회, 평등한(여기서 평등은 물론 결과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을 뜻한다) 세상은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흔히 까발리기 어려운 진실을 ‘불편한 진실’이라고 하는데 불공정한 사회, 불평등한 세상은 누구나 아는 진실이다. 하여 불쾌할지언정 불편한 진실은 아니다. 그럼에도 공정한 사회, 평등한 세상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돌이켜 보면 지난 반세기에 걸친 산업화, 민주화도 공정과 평등의 가치 실현을 향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산업화가 민주화의 물질적 토대가 되었고, 민주화가 선진화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면 공정한 사회,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는 선진화의 흐름은 명백하고 당연하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애초 선진화를 경제 살리기의 하위개념쯤으로 해석하지 않았느냐는 데 있다. 거칠게 요약한다면 경제를 살리는 데 도덕성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 일만 잘하면 됐지. 경제가 좋아지면 국민통합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고, 그러면 그게 바로 선진화 아닌가 하는 정도일 것이다.
중도실용 또한 그러한 인식의 도구로 여겨진 듯하다. 즉, 비판 및 반대 세력과 소통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 다 밟다가 어느 세월에 경제 살리겠는가. 일을 열심히 해서 성과를 보여주면 된다. 그것이야말로 중도실용 아닌가. 그러나 우파의 상대적 가치로서의 좌파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이념적 편협성, 신뢰의 근본이 되는 도덕성이 결여된 리더십으로는 중도실용이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나라의 격(格)을 높인다는 선진화도 이뤄지기 어렵다. 지난 2년 반의 국정지표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마침내! 드디어! 우리의 MB께서 인식의 대전환을 하신 모양이다. 그는 말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공정한 사회라는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 공정한 사회는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회다. (나는) 사회 모든 영역에서 공정한 사회라는 원칙이 확고히 준수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우리 사회가 빈부 격차 함정을 피하지 못하면 분열, 갈등을 해결할 수 없고 이는 우리가 지켜온 가치와 체제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선진화 과정에서 사회 곳곳에 공정하지 못한 일이 많이 있다. 우리가 선진국가로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회 곳곳의 불공정을 공정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공정한 사회를 위해서는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 청와대가 그 출발점이자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국정을 수행함에 있어서 업무 하나하나에 공정사회 기준을 지키도록 노력하겠다. 이것은 사회지도자급, 특히 기득권자가 지켜야 할 기준이지만 아마도 기득권자에게는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국민 모두에게 공정한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하기에 앞서 공직사회, 권력 가진 자, 힘 가진 자, 잘사는 사람이 공정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국민에 먼저 공정사회를 요구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참으로 놀라운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는 어록(語錄)이 아닌가. 이른바 MB의 CEO(최고경영자)형 리더십은 도덕성이나 공정성보다는 효율과 성과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고소영, 강부자 내각’으로 비판받았던 첫 인사에서부터 ‘잡범(雜犯) 내각, 죄송 내각’으로 비난받은 최근 인사에 이르기까지 MB에게는 ‘일 잘하는 사람’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웬만한 불법이나 탈법 등 도덕적 하자는 능력만 있으면 눈감아줘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회지도자급, 기득권자가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공정사회의 기준을 지키도록 하겠다고 하고, 청와대가 그 출발점이자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부자 감세(減稅), 대기업 중심의 성장 우선이었다. 성장을 통한 분배의 선순환이란 보수우파의 정책기조였다. 하기야 그것은 경제 살리기를 요구하는 국민 다수의 욕망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MB는 이제 빈부 격차의 함정에 눈을 돌리고, 대기업 중소기업 간 상생의 가치를 강조한다. 분배 우선주의는 아니라지만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구조를 없애고 서민과 약자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한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그동안 공정성은 진보적 개념이었다. 평등과 분배 또한 진보좌파의 슬로건이다. 그렇다면 MB가 느닷없이 좌 클릭한 것인가? 옷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쇼’를 하는 것인가? 나는 일부 좌파 논자들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맞장구를 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진짜 중도실용을 향한 변화로 긍정한다. 방향이 옳다면 지지해 힘을 실어주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MB의 인식 변화가 개운하다는 것은 아니다. MB는 8·8개각 일주일 뒤인 8·15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를 천명했다. 이를 뒤집어보면 공정한 사회를 말하기 일주일 전에 총리후보자를 비롯해 공정사회 기준에 맞지 않는 인사들을 줄줄이 천거했다는 얘기가 된다. 일주일 만에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번 인사까지는 그대로 하고 다음부터 제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나? 인사파동이 일자 새로 엄격한 검증기준을 마련하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후자가 맞을 듯싶다. 그렇다면 공정사회를 향한 MB의 진정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뒤늦게 “이번 총리 이하 국무위원 임명과정에서 공정사회에 맞지 않는 결과를 만들었기 때문에 책임이 전적으로 대통령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지만, 불과 일주일 사이에 공정사회의 기준이 흔들렸다면 공정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너무 얕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