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지 않는 인흥사 터에 평소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문경호가 적당한 시기가 되자 가솔들을 이끌고 와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절터를 집터로 바꾼 동네가 인흥인 것이다.
문경호는 풍수에 조예가 깊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이곳에 터를 잡은 배경에는 풍수적인 원리가 당연히 참작되었을 것이다. 자손 대대로 수백년 동안 거주할 세거지를 잡을 때 풍수를 보지 않고 무턱대고 잡을 리는 없다.
문경호는 인흥사 터의 어떤 부분에 끌렸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절터는 거의 명당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말은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러나 100퍼센트 맞는 말은 아니다. 지세가 너무 허한 곳이나, 너무 강한 곳을 보강하거나 누르기 위해서 사찰을 세우는 수가 있다. 당연히 그런 비보사찰은 보편적인 명당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절터는 종교적인 수행을 하는데 유리한 곳이어야 하기 때문에 바위가 많은 지형을 선호한다. 바위가 많은 곳은 지기(地氣)가 강해서 이른바 ‘기돗발’이 잘 통한다. 예를 들면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이나 도갑사가 있는 월출산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이런 곳에는 일반인들이 주택을 짓고 살기 어렵다.
반대로 절터를 명당이라고 간주하고 묘나 주택이 들어선 경우도 상당수 있다. 이런 절터는 주변 사격(청룡, 백호, 현무, 주작)을 살펴보면 살기가 별로 없는 온화한 곳이다. 주변에 바위산이 별로 없는 절터는 일반 주택이 들어서도 무방하다.
문경호가 평소에 주목하였던 인흥사 터는 필자가 보기에 절터 치고는 바위산이나 살기가 보이지 않는 온화한 장소다. 이렇게 온화한 폐사지는 조선중기 이후부터 거의 묘자리나 집터로 전환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왜군에 의해 많은 사찰들이 폐사된 상황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산세가 강한 경상도 지역보다도 산세가 부드러운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의 폐사지에서 그러한 전환이 훨씬 많이 이루어졌다.
경상도의 산세는 흔히 태산준령(泰山峻嶺)으로 일컬어진다. 대체적으로 산이 높고 기세가 강해 사람들의 성품도 그 산세를 닮아 선이 굵고 뚝심이 있다고 한다. 경상도 전체의 산세를 놓고 볼 때 태산준령에 부합되는 곳은 북쪽의 안동이나 상주보다는 대구쪽이 아닐까 싶다. 안동이나 상주는 산세가 높지 않고 비교적 부드러운 편인 반면 대구 근방은 산이 높아서 위압감을 주는 산세라고 보아야 한다.
대구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양대 산은 팔공산(八公山)과 비슬산(琵瑟山)이다. 팔공산과 비슬산 모두 1000m가 넘는 고산준령이고, 곳곳에 바위 절벽이 돌출되어 있는 호방한 국세를 지니고 있어서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어지간한 역경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돌파하는 장군과 같은 기상을 머금고 있다.
특히 비슬산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산이다. 비슬은 고대인도 힌두의 신인 비슈누(Visnu)를 한자로 음역한 표현이다. 비슬산은 신라시대까지는 줄곧 포산(苞山)이라 불려왔다. ‘삼국유사’에는 ‘포산이성조(苞山二聖條)’라고 해서 도성선사와 관기선사가 도통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무대가 바로 비슬산이다. 일연스님이 반평생을 보내면서 수도한 보당암, 무주암, 묘문암이 모두 비슬산에 있는 암자들이다. 일연 스님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산이 비슬산인 것이다.
인흥마을은 그 비슬산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이 뭉친 곳이다. 비슬산이 대구쪽으로 흘러가다가 그 주맥의 중간쯤에 장단산(將壇山)이 솟았다. 장단산 옆에는 소조산(小祖山)인 까치봉이 서 있고, 그 까치봉에서 북서쪽으로 소맥이 하나 내려와서 금체(金體) 형태의 천수봉(千壽峰)으로 뭉쳐 있다. 천수봉 바로 밑에 인흥사가 있었고, 현재는 문씨들의 세거지가 자리잡고 있다.
좌향은 서남향의 간좌(艮坐,동북방향을 등진 자리)다. 간좌는 부자터가 많다. 까치봉에서 천수봉까지의 거리는 약 2km인데 비교적 부드러운 산세로 내려온다는 점이 눈에 띈다. 안산을 비롯한 주변 사격도 살기가 보이지 않는다. 태조산(太祖山)인 비슬산이 강기(剛氣)를 품은 장군과 같은 기세인 반면, 인흥쪽으로 내려온 지맥들은 부드럽게 내려와서 그러한 강강한 기운이 거의 보이지 않는 지점에 터가 형성되었다. 외강내유(外剛內柔)라고나 할까. 외곽은 강한데 안은 부드럽다. 그 부드러움이 좋게 보인다. 그래서 선인들이 이곳 절터와 지명에 어질 인(仁) 자를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14대조 묘까지 남아 있는 선산
이곳을 답사한 지관들의 말에 따르면 소조산인 까치봉에서 주산(主山)인 천수봉에 이르기까지 모든 봉우리들이 오행의 상생(相生) 방향으로 이어져 있다고 한다. 까치봉의 끝이 삼각형처럼 뾰쪽한 목체(木體) 형태의 봉우리이고, 목생화(木生火)의 원리에 의해 불꽃같은 화체(火體)의 봉우리가 연결된다. 여기에 다시 화생토(火生土)의 원리에 의해 평평한 토체(土體)가 이어지고, 토생금(土生金)의 원리로 바가지같이 둥그런 금체(金體)가 이어지는 형국을 말한다. 까치봉에서 천수봉까지 이러한 모양의 작은 봉우리들이 연달아 이어졌다는 뜻이다.
이렇게 오행의 상생으로 이어진 형국을 아주 귀하게 본다. 이와 비슷한 형국이 전주에서도 발견된다. 전주의 주산인 기린봉에서 태조 이성계의 선산이 있는 조경단까지 이어지는 봉우리의 형태가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에는 안대를 보자. 안산은 260m 높이의 함박산으로 그 모양이 말안장의 형태다. 흔히 마체(馬體)라고 부른다. 안산이 마체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 그 터에서는 벼슬하는 귀인이 나온다고 한다. 옛날에는 벼슬을 해야 말안장에 올라탄다고 여겼던 탓이다.
욕심을 내자면 안산 쪽에 문필봉이 하나 추가되어 있었으면 더 좋았을 성싶다. 문사(文士)가 살기에는 아무래도 문필봉이 더 끌리게 마련이다. 만약 이곳에 문필봉까지 있었더라면 이 터는 1840년대까지 빈터로 남아 있었을 리 없다. 그 전에 이미 다른 성씨들이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양택에 문필봉이 없으면 음택에서 문필봉을 보강하면 된다. 한국의 풍수가에서는 전통적으로 양택보다 음택의 비중을 높게 본다. 양택은 그 터에 거주하는 사람만이 영향을 받는다고 보지만, 음택은 핏줄을 이어받은 자손이면 누구나 다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음택이 미치는 영향력의 범위가 더 넓다.
그러므로 음택에서 문필봉을 찾으면 된다. 필자는 이 집안의 선산을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남평문씨 14대조 묘부터 시작해서 바로 윗대의 묘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산실되지 않고 모두 보존되어 있었다. 500년 전의 14대조부터 지금까지 이 집안의 묘가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왕족이 아닌 민간에서 500년에 걸친 조상의 묘를 보존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필자로서도 처음 듣는다. 이는 집안의 가통(家統)이 그만큼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아울러 조상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물을 보자. 동네 앞을 흐르는 천내천(川內川)은 둥글게 돌아서 서북쪽으로 흘러 나간다. 천내천이 흘러서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었다. 수구(水口)는 서북방향(乾亥方)으로 물이 흘러나간다. 수구 너머 멀리 서북쪽으로는 낙동강이 보인다. 동네 어른들의 구전에 의하면 “멀리 보이는 낙동강 물이 보이지 않아야 동네에 좋다”고 한다. 그래서 서북방향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놓았다고 한다. 지금은 몇 그루 남아 있지 않지만 풍수적인 안목에서 볼 때 이 소나무들은 수구막이 용도로 심어 놓은 것이므로 반드시 보강할 필요가 있다.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겨울에 서북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춥기 때문에 이를 차단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낙동강 쪽에서 불어오는 서북방 바람은 강바람이라서 더욱 차갑다. 소나무숲은 차가운 강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정자(井字) 구도의 가옥 배치
인흥에 새롭게 터를 잡은 문경호는 이미 1000석 가까운 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재력을 바탕으로 인흥이 문씨들이 대대로 살 수 있는 세거지가 될 수 있도록 장기 마스터플랜을 세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그러한 마스터플랜을 세운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인흥은 처음부터 계획된 마을이란 점에서 다른 마을과 구별되는 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먼저 우물 정자(井字) 형태로 가옥을 배치한 것이지 않나 싶다. 현재 인흥마을에서 사람이 거주하는 주택은 모두 아홉 채인데, 마치 우물 정자처럼 가로 세로로 줄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는 형태다. 이처럼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춰 가옥이 배치된 사례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 힘들다.
인흥의 문씨 세거지는 9채의 개인주택 외에 문씨들의 공공건물이라 할 수 있는 3채의 건물, 즉 광거당·수봉정사·인수문고가 있다. 그러니까 인흥에는 개인주택 9채, 공공건물 3채를 합해 모두 12채의 건물만이 존재한다. 앞으로 더 이상의 건물은 들어설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우선 동네터가 전체 2만평 규모라는 점 때문이다. 1만평은 12채의 건물이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1만평은 동네 마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만약 건물을 더 지으려면 동네 마당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동네가 건물로 빽빽해져 여유공간이 없어지고 품격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서 문중에서는 더이상 신축 건물을 허용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현재 9채의 주택에는 장남 부부들만이 살고 있다. 차남과 딸들은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한다. 장남 상속의 원칙이 현재에도 굳건하게 지켜지고 있는 곳이 이곳이다. 이는 문씨 세거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부득이한 방법이라고 한다.
재산 중에서 인흥의 9채 주택만큼은 현행 법률과 상관없이 반드시 장남에게 상속하지만, 주택이 아닌 다른 부동산이나 재산은 차남이나 딸들에게도 공평하게 상속된다. 물론 장남은 집을 물려받았으므로 다른 재산 분배에서는 그만큼 제외된다.
장남이 대구 밖의 외지에 직장이 있을 경우는 밖에 나가서 살 수 있지만, 정년이 되거나 퇴직을 하면 반드시 인흥에 돌아와 사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또 문중 내규에 의하여 외부인에게 집을 파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함부로 뜨내기가 들어와서 살 수 있는 곳이 아닌,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마을이다.
동네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휴지나 빈 병, 쓰레기를 어디 하나 찾아볼 수 없다. 흙담으로 둘러싼 9채의 전통가옥에 전부 문씨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수시로 청소하고 관리하는 까닭이다. 종가집인 문정기씨 가옥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반듯한 흙담장, 잘 깎여진 마당의 잔디, 윤이 나는 현관 마루, 정감 있는 사랑채 온돌, 청결한 수세식 화장실, 안채 옆의 채마밭이 모두 사람의 손길로 다듬어져 있다.
사극 영화 단골 촬영지
전통가옥에서 흔히 연상되는 생활의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고, 한옥이 지니는 고풍스러움과 낯익은 편안함, 그리고 양반집의 품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이러한 한옥만 있으면 누가 아파트에 살겠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법도를 지키고 있는 명문가 후손들이 사는 동네라는 생각이 든다.
1935년 동아일보에서는 전국에서 책이 많은 집을 소개하는 답사기를 연재한 바 있는데, 그 연재를 담당한 김태준(金台俊, ‘조선소설사’의 저자로 당시 문명을 날리던 인물)은 인흥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에 장서가 이야기가 나면 수년 전 연희전문학교에 1만여 권 도서를 기증한 전남 곡성 정씨를 첫째로 꼽고는 아마 그 손가락으로 대구 문장지(文章之, 壽峯 文永樸)씨 장서를 세어야 할 것이다. 하도 많은 소문을 들은 터라 일부러 대구역에 내려서 화원행 버스를 잡아 탔다. … 화원에서 동으로 한 마장쯤 골짜기로 들어가면 소송독류(疎松禿柳)와 인산지수(仁山智水)가 말하지 않아도 처사(處士)의 집같이 엄숙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 상투를 짠 선비님들이 얼른 5,6명 모여 왔다. 장서가 문장지씨는 벌써 고인이 되고 그 자손 시채, 진채 제씨가 인계해서 유지한다고 한다. 따로이 재실을 깨끗이 짓고 석병토전(石土塼)과 무림수죽(茂林脩竹)이 모두 고아한 흥취가 있었다.”
명사의 평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인흥의 문씨 집안은 조선의 문풍(文風)을 지키면서 장서가 많은 집으로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문씨 집안의 문풍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10년에 광거당(廣居堂)이 설립되면서부터다. 광거당은 원래 재실(齋室)로 지어졌지만, 광거당 내에 만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萬卷堂)이 설치됨으로써 전국의 문인, 학자들이 방문하여 학문과 예술 그리고 조선의 앞일을 걱정하고 토론하는 문화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살롱이면서 도서관이었고, 거기다가 아카데미 기능을 가진 복합 문화공간으로 이용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전국의 저명한 문인, 달사들이 소문을 듣고 방문하여 광거당 내에 비치된 만권의 책을 열람하기 위해 몇 달씩 머무르다 갔다. 그러한 자취가 광거당의 누마루 바깥에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이라고 걸려 있는 추사 글씨 현판에 남아 있다. ‘수석과 묵은 이끼와 연못으로 이루어진 집’이라는 뜻의 이 현판은 당시 광거당을 다녀간 문사들의 고풍스런 정취와 격조가 묻어 있는 현판이다.
지금은 아쉽게도 묵은 이끼와 연못은 메워지고 없지만 뜰안의 대숲과 담장 밖의 수백년 된 소나무들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광거당의 문향(文香)을 전하고 있다.
광거당은 그 고풍스런 분위기로 인해서 1980년대 장미희가 주연한 영화 ‘황진이’의 촬영 무대로도 이용되었다. 이외에도 문씨 세거지 전체의 전통적인 분위기 때문에 강수연이 주연한 ‘씨받이’에서는 수봉정사와 문씨 종가인 문정기씨 집이 촬영 무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광거당을 세우고 또 그 내부에 만권당을 설치해서 수많은 책을 중국에서까지 수집하고, 당대의 문인, 달사들을 초청해서 대접할 수 있으려면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 재력은 어디서 나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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