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귀나무 잎이 피어나면 집 앞은 나뭇잎으로 울타리를 두른다. 공 든 아이는 필자의 아들 김규현
처음에는 무슨 나무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 그런데 어느 이른 봄 노란 꽃이 살며시 피어났다. 생강나무가 있었구나. 뒤이어 옛이야기에 나오는 깨금(개암)나무도 보인다. 아, 저게 개암나무구나. 진달래가 피어나고 그 뒤를 이어 조팝꽃이 하얗게 깔린다. 한쪽에는 키 작은 골담초가 다소곳이 핀다. 사이사이 민들레가 피고지고. 다음에는 산벚꽃이 활짝 피고 그 잎이 무성하게 자라나 집 앞을 가려주기 시작한다. 은사시나무에 잎이 돋아나 바람에 파르르 흔들린다. 바람에 나부끼는 잎은 햇볕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반짝. 참나무와 분디나무에 잎이 돋아날 때, 큰꽃으아리가 숲 그늘 속에 피어 있다. 모내기철이 돌아오면, 때죽나무꽃과 찔레꽃이 피어 온 마당을 향기로 가득 채운다. 때죽꽃이 져서 서운해할 때, 쥐똥나무 작은 꽃이 얼굴을 내민다. 가장 늦게 자귀나무에 꽃이 피면, 우리 집은 나뭇잎으로 울타리를 두른다.
밤하늘 보며 ‘볼일’
이렇게 쓰고 보니 나무가 많기는 참 많다. 꽤 넓은 숲 같지만 사실 키 큰 나무 한 줄이다. 큰 나무 아래 작은 나무가, 그 아래 덩굴나무와 풀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자연 그대로라 이리 풍성하리라. 한데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달라, 어떤 이는 거기까지 확 밀었으면 마당이 넓어지고 좋았겠다고 하기도 하고, 나무가 앞을 가로막아 전망을 망쳤다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자연 그대로라 언뜻 보면 풀과 잡목이 무성하다. 하지만 우리는 울타리 나무들이 좋다. 일년 내내 새들이 날아들어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한다. 그러다 몇몇은 처마 밑에 둥지를 틀고 살기도 한다. 자귀나무에 꽃이 피면 긴꼬리제비나비가 날아들고, 나무 그늘 사이에 취도 잔대도 개머루도 자란다.
도시 살아 자연을 몰랐으니, 마당에 나무를 심는다고 했으면, 어떤 모습일까? 이렇게 우리 나무, 우리 꽃을 심고 가꿀 수 있었을까? 이름조차 몰랐던 나무들도 있는데…. 나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이름을 알게 되고, 해마다 새롭게 나무를 알아가기에 더욱 정이 가지. 집 앞 나무들은 자연에게 다가가는 징검다리다.
여름이 다가오면 나무 울타리가 앞에 둘러쳐지고, 우리 집은 마당 평상까지 넓어진다. 일하다 쉬기도 하고, 손님 오면 걸터앉아 이야기 나누고. 일도 하고. 울타리 나무는 그런 우리 생활을 적당히 가려주고, 해지기 전부터 그늘을 드리워준다. 바깥 눈길을 마음 쓰지 않고 집 안에서 입던 차림으로 마당에서 지내기도 편하다. 밤에 자다 오줌 누러 그냥 마당에 나간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잠깐 넋을 잃는다. 멀리 인도까지 가지 않아도 하늘 아래서 한가하게 볼일을 볼 수 있다. 사람도 자연이 된 기분. 우주 속에 홀로 서 있는 순간.
자연은 무엇일까? 인디언들은 땅을 ‘어머니’라 한다. 나에게 자연은 늘 새롭고, 다 헤아릴 수 없는 세계다.
남덕유산이 보이는 이 곳은 자연이 많이 살아 있다. 논둑에 할미꽃이 지천이고 밭둑에는 하늘타리, 머루 덤불이 산다. 먹구름 사이로 하늘이 동그랗게 열리며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영화에서 보던 서광이 비추는 장면도 보았다. 여름밤이면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고 두꺼비도 산다. 가을이면 다람쥐가 돌아다닌다. 바로 우리 집 마당에. 한편 자연은 두렵기도 하다. 눈이 오면 길이 끊길까. 숲길을 다닐 때는 뱀에 물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