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다보면 책읽기와 글쓰기의 묘한 관계가 느껴지는 두 권의 책.
책만 읽는 ‘빌어먹을’ 그녀
책사냥꾼인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백수생활백서’는 민음사가 주관하는 ‘2006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만화책 같은 제목이지만 ‘책이 나를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고 살고 싶게 만든다’는 주인공의 독백이 긴장을 자아낸다. 주인공이 작가인가, 지레 짐작하지 말라. ‘나’는 책을 읽고 또 읽을 뿐 쓰지 않는다. 쉽게 말해 백수다.
‘나’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지금 스물여덟 살이고 어머니는 아주 어릴 때 세상을 떠나 기억에 없다. 식당을 하는 아버지와 줄곧 단둘이 살았다. 일도 취미도 없는 ‘나’에게 아버지는 가끔 “빌어먹을…”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성심성의껏 하는 일이라곤 책 읽기가 유일하다. 지난 10년간 매년 평균 500권을 읽었다. 아니 하루에 한 권 이상의 책을 비타민처럼 복용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래봤자 평생 5만권도 읽기 어렵다는 사실에 마음이 바쁘다.
‘나’에게 어떤 책은 읽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1992년 출간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1990년에 나온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 같은 책이 그렇다. 이미 절판된 책에 대한 소유욕은 참기 어렵다. 인터넷 게시판에 그 책을 팔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자 행여 놓칠세라 연락을 한다. 이렇게 ‘그’와 만났다.
재건축하기 위해 곧 비워야 할 남자의 아파트에는 책이 너무 많다. ‘나’는 그 방의 책을 쓰다듬는다. 이미 읽은 책들에서는 추억이, 읽지 않은 미지의 책에서는 호기심이 불길처럼 일어난다. 책을 갖고 싶다는 욕망은 낯선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앞선다.
‘백수생활백서’는 줄거리가 빈약한 소설이다. 책을 사랑하는 여자와 책을 주려는 남자의 로맨스는 긴장이 떨어지고 그 남자의 ‘했소’체 말투는 무성영화 자막을 보는 것처럼 어색하다. ‘나’를 둘러싼 인물들-아버지, 여자친구 채린과 유희, 남자친구 경-은 어쩐지 현실성과 생동감이 부족하다.
유일하게 흥미를 끄는 것은 ‘나’와 유희의 관계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글을 써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평소 책과 거리가 먼 유희가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더니 소설가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소설도 안 읽는 애가 어떻게 소설을 쓰려고” 하며 핀잔을 주는 ‘나’에게 유희는 “그럼, 소설 많이 읽는 너는 왜 소설 안 쓰냐?”고 대꾸한다.
“하긴 그러네.”
그 뒤로도 줄곧 ‘나’는 읽기만 하고, 유희는 뭔가를 계속 쓴다.
책벌레를 위한 환상곡
이런 약점에 눈감으면 이 소설은 ‘책벌레’에게 꽤나 흥미로운 설정이 많다. 주인공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2층 전체를 아우르는 서재다. 시대를 앞서 간 에세이스트였던 외할머니의 아버지, 대학교수였던 외할머니의 두 번째 남편(‘나’의 외할아버지), 딱 한 권의 베스트셀러를 내고 절필한 소설가인 ‘젊고 아름다운’ 외할머니, 이렇게 세 사람의 컬렉션으로 꽉 찬 서재는 상상만 해도 매력적이다. 문학의 고전부터 시집, 철학서, 자연과학서적, SF소설과 탐정물, 화집, 사진집…. 그곳에서 ‘나’는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의 흔적을 찾는다.
책만 읽으며 노닥노닥 잘 사는 ‘나’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책 읽어서 뭐 할 거냐?” ‘나’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고백한다. 어떤 사람은 책 읽는 것이 그리 좋으면 그걸 직업으로 삼으면 되지 않느냐고 충고하기도 한다. 아무나 다 하는 책 읽기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