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손바닥
“내 소설의 주인공들이 지금은 어떻게들 지내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어요. 마치 그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죠. 상상이 아니라, 진짜 그런 생각을 하는 시간이 있어요. 오늘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눈이 많이 와서인지. 지금 그 ‘사람’들 잘 지내고 있을까요? 어디서 미끄러지지는 않았을까? 춥게 지내지는 않을까? 밥은 먹었을까?”
필자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닥터 지바고’를 읽는 동안에는 방문을 열면, 눈 오는 밤에 그가 어딘가로 걸어가는 것 같았다. ‘장길산’을 읽으면서도 그러했다. 완구점 앞을 지나갈 때는 쇼윈도 안에 오정희 선생의 소설 속에 나오는 ‘완구점 여인’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도 거리에는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주인공이 얼마나 많은가. 일본의 한 만화 주인공이 작품 속에서 죽자 독자들이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줬다. 삶과 죽음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사랑한다면 죽지 않는다. 잊히는 것이 죽는 것이다.
신경숙의 눈빛 속에는 고향이 들어 있다. 나만 그럴까? 그와 한참 이야기를 하다 그의 눈을 보면 거기에는 오두막과 같은 집 몇 채와, 그 집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강아지가 마당에서 뒹구는 그런 마을이 숨어 있다.
마침 창으로 폭설이 내려 평창동의 산동네 집들은 감출 게 많은 사람들처럼 숨어 있다. 문득 그의 산문집 생각이 났다. 신경숙의 사적인 기록이 풍부한 그 책에 수록된 글 중에 어머니가 육남매를 목욕시킬 때 볼기짝을 철썩 때리면서 한 놈 한 놈 씻어내는 장면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자 그가 환하게 웃는다.
“정말, 그래요. 가끔씩 어머니가 손바닥으로 철썩 때려줬으면 할 때가 있어요. 얼마나 아픈지 수도승들의 수마(睡魔)를 쫓아내는 큰스님의 죽비 같아요. 그래도 그 두툼한 손바닥이 그리운 건 뭔지. 등짝이라도 한번 맞으면 정신이 번쩍 들 것 같아요.”
어머니의 손바닥으로 등짝을 맞듯이 그는 등단했다. 1985년 중편 ‘겨울우화’로 ‘문예중앙’ 신인상을 받으면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 등단한 지 5년 만에 그녀는 첫 소설집 ‘겨울우화’를 냈다. 이 책은 내게도 추억이다. 광화문의 한 찻집에서 책의 맨 위 귀퉁이에 조심스럽게 서명한 그의 책을 받았다. 그의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다. 참으로 조용하고 단아한 사람이었다. 그게 17년 전이다.
아버지의 회갑 선물
열여섯 살 이후로 그는 한 번도 돈을 벌지 않은 적이 없다. 일하고 글 쓰고 하는 나날들. 출판사, 방송작가 생활을 하면서 여동생에게 용돈도 줬다.
그렇게 서른 살이 되었다. ‘겨울우화’는 그가 20대에 일하면서 쓴 소설이다. 고려원 소설 시리즈의 한 권으로, 이미 이 책으로 그는 소설가로서의 가능성을 독자에게 보여줬다. 이 책은 잠시 절판됐다가 ‘강물이 될 때까지’라는 제목으로 복간됐다. ‘신경숙이라는 작가가 소설미학의 정도를 찾아가는 예술가의 정열이 뜨겁게 지나가는 책’이라는 문학동네의 설명글이 적절했다.
신경숙은 약사인 여동생의 도움으로 서른 살이 되던 해의 1년을 오로지 소설만을 쓰고 살 수 있었다. 그 1년간 쓴 것이 바로 오늘날의 그가 있게 한 ‘풍금이 있던 자리’에 수록된 작품들이다.
서른 살은 그에게 무엇이었나?
“여자 나이 서른이 된다는 건, 뭐랄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나이예요. 거울을 보면 늙은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뭔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러다가는 분열증이라도 걸릴 것 같아서.”
동생에게 1년 동안 글만 쓸 테니 용돈을 달라고 했고, 동생은 한술 더 떠서 유학을 가면 어떻겠냐며 힘을 실어주었다. 29세 겨울, 방송국 클래식 프로그램의 원고를 쓰다가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땐 정말 행복한 나날들이었어요. 동생이 출근하면, 행촌동 독신자 아파트에서 소설을 썼어요.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책상에서 쓰고 싶은 대로 썼지요. 내 맘대로 쓰자. 첫 작품집은 아무래도 소설기법에 충실하게 마련이니까 말이죠. 쓰고 나서 이게 소설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그래서 어떤 날 밤에는 그날 쓴 것을 허수경 시인에게 전화를 해서 읽어주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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