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생활의 역사’(전 5권) 필립 아리에스·조르주 뒤비 책임편집, 성백용 외 옮김/새물결/각 1000쪽 내외/각 4만3000원
“역사는 도처에 있다”
역사에서 보편적 법칙을 구하던 시대는 지나고 개별적 사례들에 천착하는 미시사(微視史) 연구가 등장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아마도 ‘역사주의’ 의식이 쇠퇴한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계급해방의 서사든, 국가통합의 서사든, 과거의 이데올로기는 역사철학의 뒷받침을 받는 거대담론이었다. 문자문화의 종언과 더불어 그 거대한 이야기(grand recit)가 무너지자, 역사학 역시 미시사라는 이름의 자디잔 일상의 이야기들로 해체된 게 아닐까.
비슷한 시기에 푸코는 거시권력에 대한 관심을 미시권력으로 돌려놓았다. “권력은 도처에 있다”는 그의 명제를 “역사는 도처에 있다”로 바꿔 쓸 수 있지 않을까. 푸코를 연상시키는 어조로 조르주 뒤비는 공(公)과 사(私)를 나누는 벽의 정치성을 얘기한다.
“이 ‘벽’의 양편에서는 수많은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사적인 힘은 외부적으로는 공적인 힘의 공격을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이 울타리 안에서는 독립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욕망을 일정한 한계 내로 억제시켜야 한다.”
‘공적인 것(les publica)’에 가려 있던 ‘사적인 것(les privata)’을 조명하려 할 때, 가장 먼저 문제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사생활’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 이 책을 읽기 어렵게 하는 혼선은 ‘사생활’이 ‘국가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 데서 비롯된다.
가령 아리에스는 ‘공적인 것’을 주로 ‘타인에게 공개된 것’의 의미로 이해한다. 이 경우 현대적 의미의 사생활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확립된다. 여가를 공개된 장소에서 이웃과 더불어 보내던 사람들이 외부로부터 고립된 가정이라는 공간으로 돌아가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게 된 게 바로 그 시기이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학자들처럼 ‘공적인 것’을 ‘국가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경우, 현대적 의미의 사생활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형성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바로 그 시기에 국가권력에 대한 개인의 투쟁이 가장 활발하고, 또 그 성과가 법적·정치적·문화적 제도로 침전됐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공적인 것’을 ‘공무를 담당한’이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공사의 구별이 있다고 해서 오늘날처럼 뚜렷했던 것은 아니다. 로마인들은 ‘청렴한 공직자’란 관념을 알지 못했다. 온통 뇌물로 점철된 그들의 공직생활은 공익의 추구와 사익의 도모가 혼재한 영역에서 이뤄졌다.
중세문명을 담당한 게르만인들은 아예 공사의 구별을 몰랐다. 왕은 자신의 국가를 사유재산으로 생각했고, 때문에 왕의 사후에 왕국은 상속되기 위해 분할되곤 했다. 예를 들어 프랑크 왕국은 샤를마뉴 대제의 사후에 몇 개의 나라로 쪼개져야 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이라는 오늘날 유럽의 지형이 국가를 국왕의 사유물로 여기던 관습의 산물이라는 분석이 흥미롭다.
근대적 의미의 사생활이 탄생하기까지 크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고 한다. 첫째, 근대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근대적 사법체계가 도입된 것. 이로써 과거에 사생활에 속하던 결투, 복수, 전쟁, 재판의 권리가 국가에 양도된다. 둘째, 인쇄술의 발달로 낭독이 묵독으로 변한 것. 이때부터 개인은 독서와 사유를 위한 고독한 장소를 원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심성이 변한 것. 교회를 통해 신과 연락하던 인간은 이제 신 앞에 단독자로 서게 된다.
노동자의 사생활
‘사생활의 역사’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노동자의 사생활이다. 19세기에 현대적 의미의 사생활이 형성됐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르주아 개인의 전유물이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작업장은 사회적 노동이 행해지는 공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지만, 과거엔 기업주의 사적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기업주는 직공에게 제 집을 청소하는 일을 맡기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