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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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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옛날 문산과 개성을 잇던 의주로의 한적한 주막거리 널문리가 이제는 겨레의 한과 바람이 함께 서린 곳이 되어버렸다. 휴전선 약 250km의 유일한 창구로 민족의 아픔을 해결하려는 장이기도 하고 아직도 휴전협정 위반 사항을 풀기 위해 설전을 벌이는, 긴장이 도사리고 있는 대좌(對座)의 자리이기도 하다. 서울과 평양을 달리던 철마(鐵馬)는 지금 쉬고 있다. 남쪽에서 올라가다 단절된 역이 문산역이고, 북쪽의 경의선을 타고 내려오다 단절된 역이 바로 청교역이다. 그 사이가 겨우 27.3km, 걸어도 반나절이면 이를 거리를 사반세기가 넘도록 국토와 민족과 역사를 이토록 가슴 아프게 단절해놓을 수 있을까.

임진강 철교를 지나 한적한 널문리를 돌아 조금 올라가면 널문리 다리가 나오는데, 사천(沙川) 위에 놓인 볼품없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인상적이다. 취적교(吹笛橋)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다리를 다시 하나 건너면 오른쪽으로 다섯 봉우리가 솟은 오관산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철쭉꽃으로 유명한 진봉산이 있고 그 사이를 지나면 인삼 향이 물씬 풍기는 고도 동개성(東開城)으로 불리는 청교역에 이른다.

예부터 개성상인들이 장삿길 떠날 때 이곳에서 가족과 기약 없는 이별에 울고, 돌아올 때 이곳에서 아낙과 다시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이산과 상봉의 현장이다. 그래서 이곳을 옛 사람들은 눈물들(淚原)이라고 불렀다. 아득한 고려 때부터 약초가 자라고 소쩍새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평화의 마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온 우리 겨레의 삶터, 이제 널문리 콩밭은 전세계에 노출된 분단의 전시장이 되어버렸다.

1970년 3월. 아직 겨울의 냉기가 미처 가시지 않은 초봄, 늦추위 속에서도 봄은 찾아든다. 잿빛 하늘엔 한기가 서려 때 아닌 눈이 내릴 것만 같다. 나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빈 사무실로 돌아와 햇볕이 스며드는 창가를 등받이로 두 발을 책상위에 걸치고 오수를 즐기려는데 양지(경비) 전화가 요란스레 울린다. 유엔군사령부 홍보담당관의 ‘전화통지문’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나는 볼펜을 잡고 메모지에 전화통지문을 쓸 자세를 취했다.

수신 : 중앙정보부 부장

참조 : S 국장

제목 : 판문점 군사정전회담

1970년 3월13일 오전 10시48분 경기도 연천지역 비무장지대 안에 침투해 들어온 북한군 무장공비 세 명과 한국군 수색대의 교전 끝에 공비 두 명을 사살하고 기관단총 두 정, 배낭 석 점을 노획, 한 명은 북상 도주한 사건이었다. 나는 전화통지문 내용을 타자 치고 나서 결재 고무인을 찍고 결재판에 넣어 팀장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문점에서 열리는 군사정전회담은 유엔군과 북한이 맺은 정전협정에 따른 것이다. 한국은 이들의 놀이에서 빠졌다. 정전협상 당시 한국은 ‘통일할 때까지 끝장을 보자’며 협정 체결을 반대했다. 그러나 전쟁의 불리함을 잘 알고 있던 북한은 교묘하게 ‘평화’를 앞세워 휴전협상을 제의했다. 유엔군은 공산주의자들의 끈질긴 전략전술에 말려들었고, 2년 17일간의 협상 끝에 판문점이 탄생했다. 결국 유엔군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전쟁에는 이기고 협상에는 졌다”는 말을 남겨야 했다.

당시 나는 판문점에 출입하는 중앙정보부 보안담당 요원이었다. 판문점에 출입하는 각 신문사와 방송사 기자, 외신기자들의 신변안전과 보안업무, 북한 기자들로부터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띠고 판문점에 출입하고 있었다.

판문점은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적과 적이 만나는 장소다. 적과 적이 만나는 장소는 전쟁터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판문점에는 스릴도 있고, 폭력도 있다. 남과 북 기자들이 서로 거짓 미소를 짓는가 하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공작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어느 날 내가 회담장 창틀에 매달려 험악한 분위기의 회담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는 북한 기자가 취재수첩에 뭔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호기심이 동해 슬그머니 수첩을 훔쳐보았더니, 깨알같은 글씨로 ‘우’자와 ‘적’자로 구분해서 양측의 발언을 적고 있었다. 나는 북한 기자의 팔꿈치를 툭 쳤다.

“‘우’는 뭐고, ‘적’은 뭐야?”

“동무는 판문점에 들락거리면서 그것도 몰라?”

북한 기자가 실눈을 뜨며 내게 면박을 준다.

“그래 모른다.”

나는 빈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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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홍 / 일러스트·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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