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의원이 발행한 이완용 상해감정서 (원문 5장)
이를 제지하려던 인력거꾼은 청년의 칼을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곧이어 청년은 깜짝 놀라 몸을 숙이는 고관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어깨를 찔리면서 부상한 고관이 중심을 잃고 인력거에서 굴러 떨어지자 자객은 재차 그를 공격해 오른쪽 등을 칼로 찔렀다. 주변은 순식간에 유혈이 낭자한 피바다가 됐다. 그것도 한순간, 자객 청년은 고관을 경호하던 호위경관의 장검에 허벅지를 찔려 현장에서 체포됐다.
엇갈린 생과 사
당시 칼을 맞은 고관대작의 이름은 대한제국의 학부대신이자 을사오적의 대표 격인 이완용. 그는 1905년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게 한 을사조약에 고종 대신 도장을 찍은 원흉 5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완용 암살미수 사건’으로 불리는 이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이재명(1888~1910·일명 수길) 지사. 당시 20대 초반의 청년 이재명은 이듬해인 1910년 9월13일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이재명은 이완용을 찌른 후 그가 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 암살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완용은 많은 출혈로 상태가 중했으나 생명을 유지한 채 서울 옥인동 집으로 옮겨졌다. 연락을 받고 한성병원의 일본인 의사가 급히 도착했고, 이어서 당시 최고의 의료기관이던 대한의원 원장 기쿠치 쓰네사부로(菊池常三郞)가 두 명의 의사와 두 명의 간호원을 데리고 달려왔다. 궁전 전의(典醫) 두 명도 도착했다.
이완용은 밤새 이들 의료진의 치료를 받아 고비를 넘긴 다음, 이튿날 대한의원으로 옮겨져 오후 3시50분부터 50분 정도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완용은 대한의원 홍화당 제5호실(현재 서울 종로구 연건동 소재 서울대학교병원 시계탑 건물 2층)에 입원했다. 이후 이완용은 순조롭게 회복되면서 입원한 지 33일 만에 혼자 보행이 가능했고, 53일이 지난 1910년 2월14일에 퇴원할 수 있게 됐다.
한편 이재명은 ‘이완용 암살미수 사건’ 직후 현장에서 체포돼 인근 구리개(지금의 을지로)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과 심문 과정을 거친 뒤 이듬해인 1910년 1월29일 재판에 공식 기소됐다. 당시는 이미 대한제국의 사법권이 일본에 넘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재판은 통역이 배석한 가운데 일본인 재판관에 의해 진행됐다. 이재명은 재판 과정 내내 기개를 잃지 않고 거사의 정당성을 항변하며 의연한 모습을 보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열린 몇 차례 공판 결과 이재명은 1910년 5월18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어 7월20일 열린 2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됐고 8월13일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후 9월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재명의 삶과 죽음
문제는 오늘날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義士)의 이름뿐 아니라 이완용이 칼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난 사연을 아는 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스물둘의 젊은 나이로 꽃다운 삶을 마친 지사 이재명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실 이재명에 대해선 정확하게 알려진 자료가 거의 없다. 고아로 가난한 양부 밑에서 자라 동향의 여자와 결혼은 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후손이 없다는 점을 보면 결혼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남는다.
출생년도조차 정확하지 않아, 일반적으로는 1888년 4월8일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1886년 또는 1890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현재 명동성당 앞 언덕길 밑에 설치된 이재명 의사 표지석에도 출생년도가 1890년으로 적혀 있다. 지금껏 학계의 연구로 검증된 그의 이력만 살펴보면 대충 이렇다.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재가한 모친을 따라 계부 밑에서 지냈으나 모친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계부 밑을 떠나 한동안 남의 집 사환 노릇을 하고 살았다. 16세 되던 해(1904년)그는 미국노동이민사의 하와이 노동 이민자 모집에 지원해 그 후에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생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