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동춘.
몸이 불편한 노(老)배우 김희라(64)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꾹꾹 글씨를 눌러쓰듯 내놓는 말이 귀가 아닌 가슴으로 전해졌다. 군더더기 없는 말투와 툭툭 던지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쌍소리’는 사람을 설득하는 묘한 힘을 담고 있었다. ‘뻥’인 게 분명하지만, 어느새 믿게 되는 그런, 인터뷰 내내 옆자리를 지킨 부인 김은정(57)씨는 몇 번이나 “원래 그래요”라며 눈치를 줬다. 검은색 중절모와 희끗희끗한 수염, 회색 양복에선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영화 속 낭만파 건달의 포스가 흘렀다. 멋있고 좋았다. 1970~80년대 한국을 대표했던 액션배우 김희라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 초상 때 임 감독을 처음 봤거든. 난 아니라고 했지. 돈 벌어서 재벌이 되려고 생각 중이었어. 배우는 생각도 안 해봤고. 그런데도 자꾸 배우 하라고 하더라고. 정말 열심히 버텼지.”
▼ 그런데 결국 영화배우가 되셨잖아요.
“초상 치르고 얼마 안 됐는데 임 감독이 촬영감독 하던 서정민씨하고 나를 잡으러 왔어. 그래서 잡혀갔지. 충무로에 있는 무슨 빌딩 옥상에 끌려가서 카메라 테스트를 받았어. 테스트하더니 좋다는 거야. 필름장사들이. 그때는 필름장사들이 좋다고 해야 영화를 만들었거든.”
▼ 해보니 어떠셨어요.
“내가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데뷔했어. 1969년에. 해보니까 할 만해. 돈도 없었을 때니까. 그냥 했지.”
▼ 당대 최고 배우였던 김승호씨의 외아들이 돈이 없었다?
“아버지가 부도가 났잖아. 대학도 그만뒀어. 2년 다니고. 그 당시 86억이 부도가 났으니까. 1968년에. 한 달 이자만 2200만원이었어. 가난해서 밥을 못 먹었어. 아버지가 남긴 빚을 한 10년 갚았나? 그런데 나중에 내가 유명해지니까 학교에서 졸업장 준다고 하대. 근데 싫다고 했어. 난 그런 부정한 거 싫어해. 난 영화 하면서도 한번도 출연시켜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는 사람이야. 얼마 전 ‘시’ 찍을 때 처음 부탁을 했지. 그러고 보면 이제 나도 끝난 거지.”
▼ 초창기 출연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요.
“임권택 감독이 만든 ‘짝코’, 액션배우로서는 ‘왼손잡이 시리즈’가 제일 기억에 남아. ‘벙어리 삼룡이’도 좋은 영화야. 삼룡이 그거 만들 때는 정말 불에 타죽는 줄 알았어. 한옥을 불지르고 거기에 들락날락했으니까 불에 타 죽을 뻔했지. 대역 같은 것도 없을 때고, 난 그런 거 싫어했으니까. 그냥 얘기만 들어. 왼손잡이 시리즈를 할 때는 물에 빠져 죽는 줄 알았어. 근데 그때는 다들 그렇게 영화 찍었어.”
임권택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영화 ‘짝코’는 30년 동안을 쫓고 쫓긴 두 남자의 기묘한 인간관계를 엮은 영화로 1980년에 개봉됐다. 쫓는 사람은 6·25 때 공비 소탕전에 참가했던 전투경찰 송기열(최윤석 분), 쫓기는 사람은 좌익분자로 만행을 저지르던 짝코 백공산(김희라 분)이다. 이 영화는 제19회 대종상 우수반공영화상, 각색상, 제20회 대종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김희라는 “난 이 작품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 될 줄 알았어. 그런데 그냥 주저앉데”라며 요즘 일처럼 아쉬워했다.
“‘짝코’ 못 봤지. 그거 꼭 봐야 된다고. 꼭 잊지 말고 보라고. 젊은 감독들이 그 영화 보고 ‘내가 영화를 만들면 김희라와 꼭 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대. ‘사생결단’ 만든 최호 감독도 그렇다고 하고. 영화는 원래가 감독 거야. 감독의 새끼야. 그런데 정말 좋은 영화는 상의해가면서 만든 영화야. ‘짝코’는 작가하고 임 감독님하고 나하고 다 의논해서 찍은 작품이야. 그래서 좋은 작품이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