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식주 중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순서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소한 일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무릇 찬물도 위아래가 있고, 사소한 것이 주객을 전도시킬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와 외국의 사정이 다른 것을 보면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듯하다.
의식주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역시 식이 으뜸일 터이고, 의와 주 순으로 이어지는 것이 상식에 부합한다. 옷이야 입지 않아도 그만이고 집이 없으면 노숙으로도 버틸 수 있지만, 먹지 않고는 생존할 재간이 없다. 그러니 중국인들의 음식 사랑은 그들이 먹는 기쁨을 우리보다 중요시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중국인이건 미국인이건 한국인이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식이 먼저다.
食-衣-住
그렇다면 왜 우리는 중국이나 미국과 달리 의를 앞세우는 것일까. 혹자는 한국인의 체면의식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입은 거지는 얻어먹어도 벗은 거지는 못 얻어먹는다’라는 말도 있듯 남의 눈을 심하게 의식하고 겉치레에 치중하는 문화적 특성을 의식주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은 “식을 앞세우는 나라는 우리와 달리 실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주라는 표기에 실용주의를 등한시하는 한국 문화의 성격이 반영돼 있다는 주장을 곧이곧대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일본도 의식주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의 설명에 따르면, 의식주는 일본에서 건너온 번역 술어(術語)일 가능성이 높고 발음도 더 편하다.
다시 정리하자면 우리에게도 역시 식이 으뜸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우리 문화 역시 먹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식민지 경험의 유산으로 의식주가 일반화하기는 했지만, 밥을 중요하게 여기고 생존을 위한 실리를 도모한 것은 우리나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다. 또한 의식주가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기는 하지만, 한국인이건 미국인이건 인간에게는 때로 의식주 못지않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삶의 끈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그때의 대의나 사랑의 무게를 헤아리기는 쉽지 않지만, 의식주에 견주어 말하자면 밥만큼의 무게를 지닌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밥이 무엇보다 먼저이고, 그래서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집 대신 자유
무엇이 밥만큼 무거운지는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인 소월 김정식에게 그것은 자유였다.
공중에 떠다니는
저기 저 새여
네 몸에는 털 있고 깃이 있지.
밭에는 밭곡식
논에 물벼
눌하게 익어서 수그러졌네.
초산 지나 적유령
넘어선다.
짐 실은 저 나귀는 너 왜 넘니?
-김소월, ‘옷과 밥과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