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라디오, 그 황홀한 수양의 공간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7-05-02 17: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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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 그 황홀한 수양의 공간
    개그맨이 무슨 라디오 이야기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 예나 지금이나 개그맨은 라디오의 핵심인력이다. DJ나 게스트로 나와 순간청취율을 올리고 프로그램을 다듬는 데 막대한 공헌을 하기 때문이다. 지금 라디오 채널을 돌려보시라. ‘개그콘서트’나 ‘웃찾사’에서 활동 중인 개그맨 한두 명이 여러분께 웃음을 선사하고 있을 것이다.

    올해로 방송 9년째를 맞는 나 또한 4월 현재 SBS FM에서 ‘김영철, 황보의 싱글즈’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청취자에게 웃음과 여유를 선사하면서 돈을 버니 좋은 것은 물론이지만, 나는 라디오에 출연하면서 그 이상의 만족감을 얻는다.

    나는 나와 비슷한 또래들이 그렇듯 ‘라디오 키드’다. 요즘의 인터넷처럼, 우리가 자랄 때는 유행어며 연예인 뒷이야기 같은 것들이 대부분 라디오를 통해 전파됐다. ‘집에 1대씩’에서 ‘방마다 1대씩’으로 막 바뀌던, 라디오 보급의 절정기였기에 더욱 인기였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6학년 때쯤에 ‘김희애의 FM인기가요’가 무지 인기 있었다. 내 ‘라디오 일기’가 시작되던 순간이다. 매일 밤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고,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두 번, 세 번 들었다.

    나는 울산 인근에서 자랐고, 당시 그 채널에서 지역 자체 방송이 나왔기 때문에 그 재밌다는 ‘별이 빛나는 밤에’는 못 들었지만, 중·고교 때는 그 옆 채널에서 나오는 ‘밤의 디스크쇼’와 ‘고현정의 FM인기가요’를 돌려가며 들었다. 언젠가는 내가 보낸 엽서가 당첨돼 당시 최고 인기 TV프로그램이던 ‘가요톱텐’의 ‘시청자 선정위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내 이름이 라디오에서 호명된 다음날 학교에 가면 나는 이미 스타가 돼 있었다. 그때 그 성취감이란….



    그런 기억 때문인지 나는 요즘도 라디오를 진행할 때 청취자의 이름을 여러 번 불러줄 때가 많다. 어떤 때는 “OO동에 사는 혜련씨가 신청한 노래, 보아의 ‘No.1’ 듣고 올게요”라고 하고, 노래가 끝난 다음에 또 “네, 혜련씨가 신청한 노래 보아의 ‘No.1’이었습니다”라고 소리를 높이곤 한다. 예전 나의 그 희열을 못 잊어서, 아니면 그런 기쁨을 청취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담당PD는 그때마다 “(시간을 잡아먹으니) 이름은 한 번만 부르라”면서 스튜디오 바깥에서 손을 휘젓는다.

    생방송의 묘미는 청취자에서 DJ로 처지가 바뀐 뒤에 더욱 실감하게 됐다. 녹음방송의 스릴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청취자와 만난다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일임에 분명하지만, 진행자는 물론 프로듀서, 작가, 엔지니어들도 한 달 내내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간혹 녹음을 할 때가 있다. 일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주말방송 중 몇 번은 녹음으로 돌리는 수가 많다.

    녹음을 하고 나서 집에 있으면 다행인데, 바깥을 돌아다니는 경우엔 ‘확인사살’을 당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택시를 탔는데 어디선가 많이 듣던, 아니 익숙한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나오고 있었다. 내 목소리였다. 내 라디오 프로그램을 녹음해놓지 않은 이상 나도 듣기 힘든 목소리였기 때문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나의 어색한 목소리도 그렇지만, 고개를 갸우뚱하며 날 쳐다보는 택시 기사 아저씨의 표정도 어색했다.

    “네, 저 맞아요.”

    “그렇죠? 맞죠?”

    라디오에서 갑자기 내가 크게 웃는다. 그러면 택시 안의 나도 따라 웃고, 기사 아저씨도 웃는다.

    “그럼 이건 녹음…?”

    “네 그렇게 됐네요.”

    예전에 KBS FM에서 ‘김영철의 사랑해요 FM’을 진행했다. 그 옆 SBS FM에선 같은 시간대인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박소현씨가 ‘박소현의 러브FM’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무렵 한 방송국 로비에서 박소현씨를 만났는데 그는 “잘 듣고 있어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잘 듣고 있다니? 방송하는 사람들끼리 예의상 주고받는 안부인사 1위가 “잘 보고 있어요” “잘 듣고 있어요”라지만, 같은 시간대에 방송하시는 분이 내 방송을 잘 듣고 있다고? 그분도 말해놓고 보니 좀 머쓱했나 보다. 결국 서로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린 기억이 난다.

    내가 존경하는 개그맨 이홍렬 선배님은 라디오로 방송생활을 시작해서 그런지 라디오 사랑이 남다르시다. 라디오는 사람들의 가슴에 남는 여운이 기니까 라디어 프로그램을 맡게 되면 TV보다 소홀히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을 하셨다. 박미선 선배님은 내게 “라디오는 더 나은 방송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곳이니 1주일에 한 번씩 나가는 게스트라도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모 TV방송의 PD 한 분이 내게 “넌 외모가 비호감이니까 라디오를 해봐라”고 해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당황하는 내 얼굴을 보고 “아니 아니, 넌 목소리가 좋아서 말이야…”라며 얼버무리던 그분이 요즘도 가끔씩 생각난다.

    과거에는 라디오가 방송능력은 뛰어난데 외모가 출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마치 비상구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요즘의 라디오는 많이 진화했다.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이라지만, 그 어떤 디지털 시대의 매체보다 빠르게 디지털화했다. 방송사마다 하나같이 ‘보이는 라디오’ ‘보는 라디오’를 지향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가정에 있는 라디오를 통해 듣는 경우보다는 인터넷이나 자동차 라디오, MP3를 통해 보고 듣는 사례가 더 많다. ‘실시간 참여’는 라디오만의 특기다. 엽서가 사라진 대신 문자 메시지나 인터넷 게시판 참여 등을 통해 “나 우울해요, 이런저런 노래 틀어줘요”라며 조를 수 있는, 쌍방향성(interactiveness) 소통이 가능한 덕분이다.

    쌍방향성은 때로는 청취자보다 진행자인 내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TV는 생방송이 아닌 이상 ‘편집’과정이 있기 때문에 사실 마음은 더 편하다. 하지만 요즘 라디오 진행자는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 라디오 ‘접속자’에게 책 잡히지 않으려 늘 긴장해야 한다. 웬만큼 준비해서는 항상 부족함을 느낄 정도다. 진행자석 바로 앞의 컴퓨터 모니터에는 청취자의 의견이 인터넷을 통해 바로바로 뜬다. “곡 제목 틀렸어요.” “아까 오프닝 멘트 말인데요, 바리스타는 커피 만드는 사람이죠. 소믈리에는 와인과 관련된 직업인을 뜻한다고요!”….

    덕분에 나는 늘 배운다. 그리고 공부한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나는 참 무식하고 세상물정 모르며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예전에 한 라디오 DJ가 인터뷰에서 “(라디오를 진행하며) 2시간 공부하고 왔는데 통장에 돈이 들어와 있네요”라고 한 적이 있는데, 나도 그 말에 100% 동의한다.

    간혹 라디오 진행을 ‘트레이닝복 차림에 머리끈 하나 질끈 매고 하는’ 것이라며 쉽게 보는 분들이 있지만, 라디오 진행에 대한 사람들의 미세한 평가는 받아본 사람만이 실감한다. 그렇다고 라디오라는 것이 조심조심 어렵게만 한다고 말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정말 내 집에서처럼 편안하게만 얘기한다고 잘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가끔 나보다 어린 신인 방송인이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있다. 하루는 최화정씨가 SBS FM에서 진행하는 ‘최화정의 파워타임’에 나와 함께 나온 개그맨 동료이자 후배를 혼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TV에서 활약하는 모습의 반 만큼도 기여를 못하자 최씨가 방송이 끝난 뒤 그 친구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쏘아붙였다. “라디오 말이야, 쉬운 듯해도 이게 정말 어려운 거야.”

    때로는 내가 들어도 그저 가벼운 순발력과 멋쩍은 웃음, 공허한 재치만이 판치는 듯한 라디오에 이런 이면이 있다. 내 처지에서 말하면 베테랑 방송인들로부터 천금 같은 조언을 듣고 수양과 훈련, 내공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이다. 요즘 내가 ‘영철 영어’란 제목의 코너에 게스트로 참여하는 MBC FM ‘정선희의 정오의 희망곡’에서도 많은 자극을 받는다. 정씨는 “영철아 너무 잘하려고 하지마, 가끔 차돌 닦은 양 잘하는 거, 그건 너답지 않거든. 그러니까 일부러라도 가끔씩 틀리라고”라며 충고를 건넨다. 조금씩 일부러 틀릴 수 있는 경지…아,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걸까.

    MBC FM에서 ‘여성시대’를 오랫동안 진행하고 있는 양희은씨에게 “어떻게 하면 선배님처럼 훌륭한 진행자가 될 수 있을까요?”라고 여쭤본 적이 있다. 그 분의 대답은 “들어”였다. “상대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줘.”

    귀를 세우고 듣는 건 힘들지만 확실히 효과가 있다. 청취자의 사연을 글로, 입으로 진지하게 곱씹으면 확실히 세상을 좀더 넓게 사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언젠가 내 방송의 업그레이드를 위한 토양으로 활용되겠지.

    해마다 두 번, 봄과 가을에 라디오 방송국에선 프로그램을 개편한다. 방송사측에서 마음에 들지 않거나 청취자와 호흡을 맞추지 못하거나 또는 진행자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서 관두기도 하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나는 메인 DJ로 활동 중인 SBS FM에서 지난해 개편 때는 살아남았으나 올해는 ‘대폭 개편’을 맞아 떠나게 됐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일부러 선수를 쳐놨다. 개편 전부터 난 “이번에 관둘 것 같아”라고 떠들고 다닌 것이다. 잘리면 “거 봐, 내가 관둔다고 했잖아”라고 말할 수 있고, 살아남으면 “아우, 그만둔다는데도 계속 붙잡잖아…”인 거니까.

    라디오, 그 황홀한 수양의 공간
    김영철

    1974년 울산 출생

    동국대 호텔경영학과 졸업

    1999년 KBS 개그맨 공채 14기

    2000년 백상예술상 코미디부문 신인상 수상

    KBS, SBS 라디오 진행자, ‘개그콘서트‘ 등 출연


    방송사 사정에 따라 진행자의 활동은 약간의 부침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능력이 닿는 한, 장기적으로는 계속 라디오에 남아 진행자로 열심히 활동할 예정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 지금의 인생 공부와 사색, 그리고 어찌됐든 라디오 스튜디오를 둘러싼 묘한 분위기가 무척 재미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마치 라디오에 사연 보내는 기분이다. 편집장님, 제 사연 소개해주실 거죠? 가족들한테 미리 쫙 이야기해도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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