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은 늘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다. 언론학자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이번호부터 언론을 중심으로 한 현대사의 흥미로운 뒷얘기를 소개한다.
- 첫 회는 ‘문둥이 시인’ 한하운과 ‘올챙이 기자’ 오소백의 필화사건.
- 1940년 총독부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폐간을 획책하던 시절 악명을 떨친 일제 고등경찰 사이가 암살 사건, 1892년 ‘조선신보’에 실린 보르도 포도주 광고, 6·25전쟁 기간 남북한의 신문전쟁 등이 이어진다. <편집자>
1953년 10월17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한하운 관련 기사.
기사가 나간 후 ‘문화계에 간첩이 있다’는 주장이 떠돌고 국회에서 대책 촉구 발언이 나올 정도로 의혹이 확산되자 시인은 경찰 조사를 받았고, ‘서울신문’ 사회부장 오소백(吳蘇白)과 차장 문제안(文濟安)이 신문사를 떠나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필화(筆禍) 차원을 넘어 1950년대 문단과 언론계를 짓누르고 있던 적색 알레르기 분위기를 가늠하게 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한하운 필화사건의 뇌관에 불을 붙였으며 결국 피해자가 된 오소백은 신문사를 떠나 1954년 2월부터 대중잡지 ‘신태양’에 ‘올챙이 기자 방랑기’를 연재하고, 이듬해 7월에는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도 출간해 일반에도 널리 알려진 언론인이다. 오소백은 ‘올챙이 기자 방랑기’의 ‘라 시인(癩 詩人) 사건’ 편에 한하운의 ‘전라도 길’을 앞에 내세우고 자신이 겪은 사건의 경위를 기록했다. “이 사건을 빚어낸 모략중상과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끝끝내 싸운 경위는 문단, 지식인, 정치인, 수사당국자 및 신문인 여러분에게 많은 참고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히면서. ‘올챙이 기자 방랑기’ 기록을 토대로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자.
‘레프라 왕자’의 근황
1953년 10월15일 오후 ‘서울신문’ 편집국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청년이 나타났다. 오소백은 시청 출입기자를 통해 그가 유명한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란 것을 알고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사회부 차장 문제안에게 한하운에 관해 정확히 취재하도록 지시했다. 마침 얼마 전에 한 주간신문에서 한하운이 실존인물이 아닌 유령인물이라 하여, 화제를 모은 일이 있었던 터라 알리바이와 확증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하운은 운동선수처럼 몸이 튼튼해 보였다. 시인은 기자의 물음에 답한 후 앉은자리에서 한 편의 시를 썼다. ‘보리피리’였다. 오소백을 비롯한 사회부 기자들은 한하운이 돌아간 뒤 시를 보고 매우 놀랐다. ‘보리피리’를 낭독하며 모두 좋은 시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기자들이 한하운이 만진 펜에 레프라(leprae·나병)균이 붙었다고 소란을 피운 통에 오소백은 원고지로 펜을 똘똘 말아 휴지통에 내던졌다. 그리고 10월17일자 신문에 “하운(何雲) 서울에 오다, ‘레프라 왕자’ 환자수용을 지휘”라는 3단 제목으로 한하운에 관한 기사와 그가 쓴 시 ‘보리피리’를 실었다.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면
봄언덕
故鄕 그리워
필- 닐리리
보리피리 불면
꽃靑山
어린때 그리워
필- 닐리리
보리피리 불면
인환(人?)의 거리
人間事 그리워
필- 닐리리
보리피리 불면
放浪의 幾山河
눈물의 언덕과 눈물의 언덕을
필- 닐리리
(1953년 10월14일)
오소백 기자의 책 ‘올챙이 기자 방랑기’ 표지.
초판과 재판의 차이
기사와 시가 신문에 실린 후 의혹 제기가 본격화했다. 한하운은 허구의 인물이며 공산당의 선동시인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신문에 실린 ‘보리피리’ 자체가 이상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어째서 가을에 ‘보리피리’라는 시를 쓴 것인가?”
한하운은 문예지에 추천되거나 신춘문예를 거쳐 등단한 문인이 아니다. ‘서울신문’이 발행하는 종합잡지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라(癩) 시인 한하운 시초(詩抄)’가 실린 뒤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신천지’는 광복 후 6·25전쟁 이전의 해방공간을 대표한 종합잡지다. 시인 이병철이 한하운의 시 머리에 ‘한하운의 시초를 엮으면서’를 통해 한하운이 나병환자라는 사실을 알리면서 문단 등단 절차를 밟은 셈이다. 이병철은 한하운이 나병으로 손가락이 떨어졌고, 지난 겨울 추위에 시력마저 잃어버렸다고 그의 신상을 공개했다. ‘신천지’에는 ‘전라도 길’ ‘벌’ ‘목숨’ 등 13편이 실렸는데, 한 달 후인 5월 정음사에서 ‘한하운 시초’를 출간해 그의 이름이 더욱 널리 알려졌다. ‘한하운 시초’는 70쪽의 얇은 분량이었으나 당시 열악한 출판 사정으로는 이례적으로 모조 100g의 고급 용지를 사용했고, ‘신천지’에 발표했던 13편에 12편을 추가해 25편의 시가 수록됐다. 책 말미에 편자 이병철이 ‘신천지’에 실었던 글을 발문 형태로 수록했다.
이병철은 한하운의 시가 “참을 길 없는 그의 울음이 구천에 사무치도록 처절한 생명의 노래”라며 “역사적 현실 앞에서 건강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부정한 그것을 다시 부정해버린 다음의 높은 경지의 리얼리티를 살린 데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시집에는 장차 문제가 되는 시 ‘데모’도 실려 있었다.
책이 출간되고 6·25전쟁 발발 때까지 1년여 동안 한하운 시에 대한 논란의 흔적은 없다. 그런데 휴전이 성립되기 직전인 1953년 6월30일 재판(再版)이 나오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재판은 초판에 비해 분량과 내용 면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초판에 없던 시 8편이 추가돼 전체 편수가 늘어났다. 해설과 발문에 해당하는 글 또한 초판 끝에 실었던 이병철의 ‘한하운 시초를 엮으면서’가 재판에서는 빠지고 조영암(‘하운의 생애와 시’), 박거영(‘하운의 인간상’), 최영해(‘간행자의 말’)의 글로 대체됐다. 그래서 총 100쪽 분량이 됐다. 장차 문제가 되는 시 ‘데모’는 ‘행렬(行列)’로 제목이 바뀌고, ‘물구비 제일 앞서 피빛 기빨이 간다’로 시작되는 연(聯) 전체와 그 다음 연의 둘째 행이 삭제됐다. 정현웅이 그린 초판의 표지장정은 재판에도 그대로 쓰였는데, 다만 초판에 표시됐던 정현웅의 이름이 빠졌다.
‘데모’ (재판 제목은 ‘행렬’)
뛰어들고 싶어라/ 뛰어들고 싶어라.//
풍덩실 저 강물속으로/ 물구비 파도소리와 함께/ 만세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물구비 제일앞서 피빛 기빨이 간다./ 뒤에 뒤를 줄대어/ 목쉰 조선사람들이 간다.//(*연 전체 삭제)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는 (*한 행 삭제) /아우성소리 바다소리.//
아 바다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 죽고싶어라 죽고싶어라/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재판이 발행된 후 ‘태양신문’은 경남경찰국에서 ‘한하운 시초(詩抄)’를 압수했다고 보도했다. 이 시집은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미 좌익선동 서적이란 낙인이 찍혔던 것으로, 재판 간행을 계기로 치안국이 경찰에 지시, 8월초부터 내사를 거듭해오다 압수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태양신문’ 1953년 8월24일, ‘한하운 시초 압수, 문제의 좌익 선동시집에 斷’)
그러나 ‘한하운 시초’를 정부 수립 이전에 좌익서적으로 낙인찍었다는 ‘태양신문’ 기사는 오보였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 시집은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5월에 정음사에서 발행됐다. ‘태양신문’이 8월24일자 기사에서 세간에 커다란 물의를 빚고 비난을 자아내면서 전국 각 서점에서 한하운 시초가 판매되고 있다고 보도한 것을 보면, ‘서울신문’의 10월17일자 기사는 이미 한하운 시에 대한 논란이 일고, 그의 소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을 때다. ‘한하운 시초’를 발간한 정음사 사장 최영해는 ‘간행자의 말’에서 ‘그(한하운)의 생사를 우리는 모른다. 바람에 들리는 말로 인천 어디서 살아 있다고도 한다. 아 ―불행의 연장이여, 우리는 여기서 그를 추궁치 말자’고 했다. 오소백이 한하운의 시와 함께 그의 존재를 비중 있게 기사화한 목적은 한하운이 사상을 의심받을 필요가 없는 시인이며, 살아 있는 실존인물임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전쟁 전에 초판이 발행된 시집의 재판이 나오자 ‘좌익선동’으로 지목당한 것은 전쟁 후 문화계를 포함한 사회적 분위기가 전쟁 전과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정부 기관지였던 ‘서울신문’이 발행하는 ‘신천지’에 시가 처음 실리고, 정음사가 시집 초판을 내기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전후 재판을 발행하면서 출판사 스스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부분을 삭제했음에도 필화사건으로 비화했다.
공개적인 의혹 제기
초판에 실린 ‘데모’는 ‘물구비 제일앞서 피빛 기빨이 간다’는 구절을 포함해 전쟁을 겪은 당시 정서로는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붉은 색깔을 북한이나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던 시절이었다. ‘피빛 기빨’은 ‘붉은 기, 적기(赤旗)’를 상징한다. 공산주의, 또는 북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소지가 있었다. 출판사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자체적으로 그 부분을 삭제한 것이다.
한하운을 세상에 처음 알리고 시집을 엮은 이병철과의 관계도 의혹을 살 수 있었다. 이병철은 전쟁이 일어난 후 월북했다. 1943년 12월호 ‘조광’에 ‘고향소식’을 발표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나 광복 후에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합동시집 ‘전위시인집’(노농사, 1946, 12)에 들어 있는 다섯 동인의 한 사람이었다. ‘전위시인집’에 실린 이병철의 시 ‘기(旗)폭’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韓人들이 봄의 우름보다도 두려워하는/ 적기가(赤旗歌) 불으며 한기빨 밑으로 모이자/ 옳은 노선으로 나라 이끄는 신호기(信號旗)/ 가슴마다 간직하고 선배들은 죽어갔느니라
전쟁이 일어나자 이병철은 북한의 종군작가로 참전했다가 전후에는 북에서 시인으로 활동했다.
한하운이 나병환자의 전국조직을 관장하는 위원장이고 ‘국립부평성혜원’의 자치위원장이며, 나병환자의 자녀를 기르는 신명보육원(新明保育院)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서울신문’ 특종은 언론계와 문단에 상당한 충격을 주는 동시에 논란에 불을 붙였다. 공개적으로 강력한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이정선이었다. 그는 ‘평화신문’에 11월5일부터 ‘민족적인 미움을 주자/ 적기가(赤旗歌) 한하운 시초와 그 배후자’라는 제목으로 4회에 걸쳐 한하운이라는 인물과 시, ‘서울신문’의 보도태도를 문제 삼았다. ‘서울신문’이 “당국의 조치에 대해 반항하듯” 한하운의 존재를 부각시키면서 그의 사진과 새로운 시를 게재했다는 것이다.
이정선은 ‘서울신문’ 기사가 한하운을 나병환자의 전국적인 지도자로 소개한 미담이 아니라 또 다른 저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한하운은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을 천부적으로 체득한 공산주의 지하운동자의 천분(天分)을 지닌 간사한 인물로 볼 수 있다고 단정했다. “간밤에 얼어서 손꼬락 한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우에 떨어진다”는 구절은 문화당국과 수사당국에 대해 ‘문둥이’와 ‘빨갱이’를 판별 못하도록 하려는 농간이라고 했다. 남로당 시인 이병철이 한하운의 시를 ‘자기를 부정한 그것을 다시 부정해본 다음의 높은 경지의 리얼리티’로 소개한 시집 초판 발문을 보더라도 한하운은 악랄한 공산주의 프로파간디스트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北에 대한 극단적 경계심
한하운은 그 후로 개과천선한 적이 없으며, 그 강렬한 적기의 신념과 사상에서 전향했다는 증거도 없기 때문에 ‘서울신문’에 실린 그의 시를 보면서 모골이 송연해지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고 했다. 가을에 ‘보리피리’라는 시를 지은 것도 이상하다면서 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자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나환자의 이름을 빌렸거나, 그를 매수해 적색선동을 조심스럽게 조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이정선은 대구 출생으로 동경문화학원 문학부를 졸업하고,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하면서 ‘국도신문’ 기자, ‘태양신문’ 문화부장, ‘소년태양’ 편집국장을 지냈다. 언론계를 떠난 후에는 신동아영화주식회사 제작부장을 맡았다.
‘한하운 시초’ 재판이 발행된 후 ‘서울신문’에 그에 관한 기사가 실리기 전인 6월부터 의혹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6·25전쟁 이전의 문단과 언론계는 공산당과 북한에 대해 극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은 후에는 공산주의나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경계심이 극에 달했다. 정음사에서 ‘한하운 시초’의 재판을 발행할 당시엔 남북 양측이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재판이 나오자 이정선을 포함한 몇몇 문인과 언론인은 ‘한하운 시초’를 문화 빨치산의 남침신호로 볼 수밖에 없다고 단정했다.
더욱이 문제되는 구절을 삭제하고, 월북한 원래의 편자 이병철 대신에 민족진영 시인 조영암을 교묘히 책동해 후기를 쓰도록 하고, 시집 자체를 민족적인 서적으로 위장해 전국 서점에 배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북한이 획책하는 새로운 각도의 대남 공작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것이 시문학의 양식을 빌려서 나온 것이므로 문단 전체는 그런 빨치산 식의 출판행위를 지체 없이 고발하고 제압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만약 서울이나 부산에 빨치산이 출현해 행패를 부린다면 당국이나 시민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한하운 서울에 오다’라는 ‘서울신문’의 선언은 공산당을 불법화한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에 대한 대담무쌍한 도전이며 기습만행에 해당한다. ‘서울신문’ 보도는 6·25전쟁 때 북한군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을 점령했던 것과도 비길 수 있는 기세다. 그러므로 시집 발행과 관련한 모든 의혹과 배후를 밝혀야 한다고 이정선은 단호한 어조로 주장했다.
한하운 문제는 국회가 국무총리를 상대로 질의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10월19일 오전 10시에 열린 제17회 임시국회에서 최원호 의원이 한하운의 시집 출판을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전쟁으로 규정하고 나섰다. 최 의원은 “공산주의 전쟁과 민주주의 전쟁의 차이점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된다”고 전제한 뒤 “민주국가의 전쟁은 일정한 군대와 장비, 일정한 기간 그리고 다른 나라의 적병과 싸우는 것이다. 민주국가는 일정한 지역에서 적병과 마주해 총을 겨누는 전쟁을 수행하는 반면에 공산주의 전쟁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나 총을 쏘고 방화하고 사람을 죽이거나 선전과 모략으로 침략한다”고 설명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 우리의 국군은 총을 내려놓고 있지만 공산국가는 휴전기간에도 여전히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하운은 공산주의자 아니다”
이어서 ‘한하운 시초’초판에 수록된 ‘데모’에 나오는 ‘붉은 기빨’과 그의 시를 편찬한 ‘공산당 선봉 문학가 이병철’, 6월에 발행한 재판이 전국에 판매되고 있으며 어떤 지방에서는 아동 청소년에게도 그의 시를 가르치는 현상, ‘서울신문’이 센세이셔널하게 보도한 사실 등을 열거하면서 그 배경에 숨은 의혹을 해명하라고 국무총리에게 요구했다. 당시 국무총리 백두진은 질문 내용에 관해 아직 아는 바 없기 때문에 돌아가서 진상을 파악해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대답했다. 공산당에 대한 증오가 깊었기에 ‘문화빨치산’ 논란으로 규정, 여러 신문이 대한민국 문화전선에 이상이 있다고 보도했다.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한 치안국의 첫 번째 수사 대상은 한하운이었다. 경찰은 부평으로 형사를 파견해 한하운의 뒷조사를 진행했다. 이 무렵 어떤 신문은 오소백이 출판업자로부터 수십만환의 뇌물을 받고 이런 허위보도를 했다고 떠들었다.(오소백, ‘올챙이 기자 방랑기’) 한하운의 실존인물 여부에 대한 논란도 수그러지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한하운이라는 가공인물과 실존인물이 따로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보도했다. 실존 한하운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만 월북 시인 이병철과는 만난 일이 없으며, 좌익 색채가 농후한 정음사 간행 한하운 시집 초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시집을 출간한 한하운은 월북한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기사를 내보내면서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실 여부의 귀추가 주목된다고 보도했다.(‘경향신문’, 1953년 11월23일, ‘한하운은 두 사람인가, 문제의 시집과 무관한 한씨 출현’) 그러나 뒤에서 설명하는 대로 이 기사는 그날 바로 엉뚱한 오보였음이 드러난다.
관심이 쏠린 가운데 시작된 수사는 간단히 끝났다. 사실 어렵고 복잡할 게 없었다. 11월21일 치안국장 이성주는 기자들에게 한하운은 실존인물이고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시집 내용도 좌익을 동정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음사 사장 최영해도 조사해보았으나 사상이 온건한 사람이며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확언했다.(‘조선일보’, 11월23일, ‘한하운씨는 좌익 아니다, 이 치안국장 언급’, ‘동아일보’, 11월23일, ‘문제의 한하운씨 공산주의자 아니다, 이 치안국장 언명’)
이 치안국장은 “우리는 현재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떠한가를 검토해야지 과거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다”고 일반적인 사상문제에 관해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이병철이 시의 내용을 가필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가필하였다고 한이 말하고 있다”고 간접화법으로 대답했다. 원고료에 대해서는 한하운이 명동에서 이병철을 만났는데 시집을 출판하지 않겠느냐면서 1만5000원을 주기에 받았다고 했다.(‘서울신문’, 11월23일, ‘한하운은 실재 인물, 치안국장이 언명’) 치안국장은 한하운의 시에 문제의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현재 공산주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으며, 과거에 쓴 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지 여부를 문제 삼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한하운도 ‘평화신문’과 ‘중앙일보’(현재의 ‘중앙일보’와는 관계없는 신문임)에 나타나 자신의 입장과 시집 출판 경위를 밝혔다. 1949년 어느 봄날 한하운은 명동 뒷골목 청탑다방 출입구에서 우연히 이병철과 알게 돼 시를 주었는데, ‘신천지’ 6월호에 실린 시를 보니 ‘피빛 기빨이 간다’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었다, 며칠 후 이병철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그렇게 되었네”라고 대답하면서 원고료 1만5000원을 주기에 사양했으나 회사에서 주는 돈이라고 해서 받았다고 해명했다. 그 후로도 이병철을 몇 번 만났지만 이에 대한 언급은 피차에 없었고,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언론인의 판단
사건의 후유증이 있었다. 오소백은 앞서 살펴본 대로 한하운 실존 여부를 둘러싼 의혹과 그의 사상에 관한 논란이 일자 바로 보강 취재에 들어갔다. 치안국장이 수사결과를 밝히자 오소백은 편집 간부에게 기사를 크게 다뤄줄 것을 요청했다. 모두 공감했다. 결국 한하운 기사에 4단 제목을 달았다. 그런데 대장을 본 사장 박종화가 제목을 1단으로 줄이라는 지시를 내려 보냈다. 오소백은 4단으로 편집한 기사를 1단으로 줄이는 문제로 사장실에 모인 중역들을 향해 신랄한 공박을 하고 물러났다. 이날 오후 오소백은 “혼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파면당했다. 이튿날 사회부 차장 문제안도 파면당했다. 그렇지만 ‘서울신문’은 다른 신문에 비해 치안국장이 언급한 내용을 가장 상세하게 다루었다.
신문사에서 물러난 오소백은 자신을 ‘올챙이 기자’로 지칭하면서 기자생활을 하며 겪은 일들을 대중잡지 ‘신태양’에 연재했다. 12월이 사흘밖에 남지 않은 밤에 ‘올챙이 기자 방랑기’ 첫 회를 썼다. ‘올챙이 기자 방랑기’는 ‘신태양’ 1954년 2월호부터 11월호까지 연재됐다. 이 가운데 ‘라 시인(癩 詩人) 사건’이 들어있다. ‘서울신문’ 사장 박종화는 실명을 밝히지 않고 ‘P 사장’이라고 이니셜로 지칭했으나, 그가 누구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박종화는 1949년 6월15일에 취임해 전쟁 기간 사장을 맡고 있다가 한하운 사건이 있은 이듬해인 1954년 4월15일에 퇴임했다. 오소백이 ‘올챙이 기자 방랑기’를 연재하고 있던 때였다.
역사적 사건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감안해 고찰하고 평가해야 한다. 필화사건도 마찬가지다. 참혹한 전쟁을 겪고 난 뒤로 공산주의는 포용의 대상이 아니었다. 한하운이 전쟁 후에 ‘데모’와 같은 시를 발표했다면 당장 큰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은 정권통치 차원이 아니라 전체 사회에 확고히 자리 잡은 공산주의를 향한 증오심 차원이었다. 이정선의 문제제기는 역시 이 같은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데모’에 대한 석연찮은 해명
다행인 것은 경찰이 전쟁 전에 발간된 시집에 대해 유연하게 해석하면서 한하운을 처벌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소백은 언론인으로서 용기를 갖고 소신 있게 싸웠다. 전쟁 직후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하던 때에 언론과 문화계에 한가닥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였다. 그러나 경찰 발표에 대한 편집을 둘러싼 ‘서울신문’ 내부 논쟁에서 오소백의 주장이 반드시 옳았는가 하는 점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당시엔 신문이 하루 2페이지 발행됐다. 사장 박종화와 편집국장 고제경은 오소백이 한하운 사건을 4단으로 크게 다루면서까지 센세이셔널하게 몰고 가는 것은 지나치다고 판단해 이를 견제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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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에 나오는 문구를 이병철이 임의로 삽입했다는 한하운의 변명은 믿기 어렵다. 만일 그랬다면 ‘신천지’에 발표하던 때에 들어 있던 문제의 구절을 초판 시집을 낼 때 왜 삭제하지 않았는지 납득할 만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 전쟁 전에 좌익의 주장에 동조하는 심정으로 시를 썼더라도 한하운은 공산주의 문화게릴라는 아니었다. 필화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공산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한하운(본명 泰永)의 시는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필화가 있은 후에도 시 창작을 계속해 여러 권의 시집과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등을 출간했다. 그 후 명동에서 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라는 출판사를 운영할 때는 완치된 상태였고, 1962년 7월 미국공보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구라(救癩) 홍보영화 ‘황토길’을 제작해 전국 영화관에서 상영할 당시 다시 한번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75년 2월28일, 1950년 이후 주로 머물렀던 인천 북구 십정동 산 39번지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