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평과 포천은 ‘경기 5악(岳)’의 하나인 운악산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다. 운악산은 ‘경기도의 소금강’이라 불릴 만큼 산수가 빼어나다. 이는 좋은 술을 잉태할 수 있는 천혜의 여건. 운악산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세 곳의 명문 양조장을 둘러봤다. 자연 속 ‘낮술 4차’의 흥취를 더해가면서.
배상면주가의 누마루에서 바라본 운악산.
막걸리 양조장들은 좀 폐쇄적이어서 양조장 탐방이 쉽지 않다. 술이란 어두운 곳에서 혼자 익어가는 것이라 보호가 필요하므로 뭇사람으로부터 격리된 채로 지낸다. 발효되고 있는 술은 양조업자에겐 강보에 싸인 아이와 같다. 누가 보면 탈날까 조바심을 친다. 또한 비법이 새나갈까봐, 세무서나 식약청의 지적사항이 나올까봐 일반인에게 공개하기를 꺼린다.
이번에 막걸리 답사를 준비하면서 섭외 대상으로 삼은 한 양조장에서도 퇴짜를 맞았다. 한두 사람이 오는 것은 환영하지만 40명이 찾아오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그 이유도 딱히 달지 않고 그저 “사장님이 안 된다고 한다”는 통지뿐이었다. 양조장 자체가 관광지나 공개된 공간이 아니니 주인이 못 들어온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 술 기행이 활성화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저간의 사정 때문이다.
다행히 막걸리 바람이 불면서 몇몇 선구적인 양조장이 전시장과 시음장, 체험공간 등을 갖춰가고 있다. 1차 답사를 한 충북 진천의 세왕주조, 2차 답사를 한 경기 포천의 배상면주가, 3차 답사를 한 경기 안성의 정헌배인삼주가, 예산사과와인이 시음장 또는 강의장을 갖췄다. 시음장을 갖췄다는 것은 손님맞이할 준비가 돼 있다는 표시다. 2차 답사를 한 ㈜포천막걸리·포천이동막걸리·상신주가, 3차 답사를 한 충남 당진의 신평양조장, 4차 답사를 한 충남 천안의 입장탁주는 개방할 형편은 못 되지만 막걸리학교와 인연이 있어서 양조장을 개방한 경우다.
오늘 6차 답사의 일정은 탐방객을 위한 시음장과 전시장 오픈을 앞둔 경기 가평의 ㈜우리술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조장을 한 군데만 들르는 것으로는 하루 일정을 풍성하게 하기 어려워서 그 주변 양조장을 함께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술이 위치한 가평은 ‘경기 5악(운악산 화악산 관악산 감악산 송악산)’의 하나인 운악산을 사이에 두고 포천과 접해 있다. 운악산은 ‘경기도의 소금강’이라 불리는데, 가을 단풍이 좋아 10월말이면 단풍객이 줄지어 오르는 산이다. 이렇듯 산수가 좋으니 그 주변 동네들은 좋은 술을 잉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셈이다.
양조문화 새 장 여는 배상면주가
막걸리 원정의 동선(動線)은 이 운악산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잡았다. 첫 번째 방문지는 운악산 서쪽에 자리 잡은 배상면주가(경기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511)다. 1996년 설립된 배상면주가는 2002년 갤러리 산사원의 문을 열었고 최근에는 서울 시내에 연달아 5개의 미니 양조장을 만들어 새로운 막걸리 문화를 이끌고 있다. 산사원은 양조장이 단순히 술을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문화를 만들어내는 공간임을 보여주는 곳이다. 야외에는 소주 항아리 숙성실과 체험관을 마련해 술 테마파크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배상면주가의 배영호 대표는 1988년 강원 강릉시 남항진의 작은 약주 양조장에서 일을 시작할 무렵, 강릉의 자그마한 골동품 가게에서 새끼가 촘촘히 감겨 있는 누룩틀을 사면서 주기(酒器)에 관심을 갖게 됐다. 산사원 갤러리의 1층에는 양조 도구들이 전시돼 있는데, 배영호 대표가 쌈짓돈을 털어 모은 물품들이다. 갤러리에는 술 빚는 법이 적힌 고문헌들과 소주를 내리는 고리 등이 있다.
지하 1층은 술 저장고와 시음장이다. 술 시음장으로 내려서는 계단 옆에는 술빵, 술과자, 술엿, 술약과, 술장아찌 등 술지게미로 만든 가공식품들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시음대에는 다양한 술이 놓여 있다.
술 시음은 막걸리학교 학생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교육과정이다.
배상면주가의 야외전시장에는 용량 650ℓ의 큰 항아리 390개로 미로(迷路)를 만들어놓았다. 연못 위에는 정자가 있고, 물길 위에 술잔을 띄울 수 있는 유상곡수도 설치했다. 운악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에는 누마루가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니 산사원 갤러리 뒤편으로 새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배상면주가를 있게 한 배상면(배영호 대표의 부친으로 국순당 백세주를 만들었고, 현재 배상면 주류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씨가 구상하는 양조학교 건물이라고 했다.
양조학교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 규모가 양조장 건물과 맞먹을 정도인 것도 놀라웠다. 사실 우리 양조교육은 대학에서 손놓은 지 오래된 분야다. 대학에서 발효공학을 가르치긴 하지만, 치즈나 유산균 발효, 김치나 된장 발효를 가르칠 뿐 양조발효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양조발효를 가르쳐놓아도 양조장에서 그런 사람을 뽑지 않으니 가르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걸리 바람이 불면서 양조교육 분야도 많이 달라졌다. 사회교육과정으로 대학과 공공기관이 연계된 양조과정이 생기고, 와인아카데미에서도 전통술 강좌를 접목하며, 구청에서 운영하는 여성대학이나 요리학원에서도 술 빚기 강좌를 개설하는 상황이 됐다. 당장 양조장에 취업할 만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해도 자가 양조를 하려거나 소규모 양조업을 구상하는 이들에겐 의미 있는 강좌들이다.
그런데 배상면씨가 구상하는 양조학교가 설립되어 운영된다면 양조교육은 지금과는 또 달라질 것이다. 취미로 술 빚기를 배우던 차원에서 벗어나 취업이나 창업으로 양조업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본인이 가장 많이 맛본 막걸리 상신주가
배상면주가를 벗어나 운악산 북쪽에 위치한 상신주가(경기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28-5)로 향했다. 상신주가에 들어서기 전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차림은 두툼한 생삼겹살과 된장찌개, 그리고 비빔밥. 물론 막걸리와 함께였다.
음식점에서 맛본 막걸리는 포천막걸리의 이미지를 대변할 만했다. 포천에는 9개의 막걸리 양조장이 있는데, 포천막걸리의 이미지란 무엇일까. 포천막걸리는 1960년대부터 군부대에 활발하게 납품되고, 1980년대에 백운계곡이 관광지화하면서 이동갈비와 함께 인기를 얻어 그 명성을 갖게 됐다. 그 시절의 막걸리는 100% 밀가루 막걸리였다. 밀가루를 원료로 사용하기에 술이 뻑뻑하고 텁텁했다. 우리가 이날 음식점에서 맛본 막걸리도 밀가루 60%에 쌀 30% 올리고당 10% 비율로, 밀가루가 주재료였다. 밀가루 100% 막걸리보다는 깔끔하지만, 쌀 100% 막걸리보다는 묵직한 맛이었다.
상신주가는 포천내촌주조와 더불어 포천에서 뿌리가 가장 깊은 술 회사다. 1932년에 건립된 장천양조장이 1994년에 일동주조 주식회사로 바뀌고 2006년에 ㈜이가로 바뀌었다가 2008년에 상신주가가 됐다. 장천양조장을 운영했던 이진철씨의 사위가 상신주가를 운영하고 있다.
상신주가는 올 들어 진로와 손잡고 주문자상표 부착 형태로 일본 수출용 진로막걸리를 만들고 있다. 올해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맛본 막걸리가 상신주가의 막걸리라고 할 만큼 많은 술을 수출했다. 우리가 양조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에도 컨테이너 트럭이 거대한 몸을 구부리며 양조장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상신주가 정원에서 벌어진 가든파티.
발효실에서는 술이 한창 끓고 있었다. ‘끓고 있다’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 술의 발효과정에선 마치 불을 지펴 액체가 끓는 것처럼 기포가 올라오기 때문이다. 기포 터지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거칠게 쏟아지는 빗소리 같았다. 기포가 터질 때마다 탄산가스가 나와 발효실 안은 숨이 막힐 듯 후텁지근해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살균시설과 병입시설을 본 후 양조장 내부를 빠져나왔다. 상신주가의 잔디마당으로 나오자 시음할 술들이 두부김치와 순대, 도토리묵 등과 함께 놓여 있었다. 가든파티와 같았다. 술은 두 종류였다. 햅쌀로 빚은 막걸리와 밀가루가 주재료인 막걸리였다. 햅쌀 막걸리는 밀가루 막걸리보다 훨씬 가볍고 깔끔했다. 중년의 애주가들은 역시나 묵직한 밀가루 막걸리가 더 편하고 좋다고 했다.
막걸리학교 학생들-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20대에서 한평생 술을 친구로 삼은 60대까지-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수업시간에 술을 마셔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일 게다. 술을 가장 잘 맛본 사람이나 술을 가장 잘 마신 사람이 우등생이 되는 곳, 그곳이 바로 막걸리학교만의 묘미라고 한다. 막걸리 한 잔에 가슴 졸이며 금기의 벽을 넘던 학창시절 추억에 미소 짓기도 한다.
옛사람들도 자연 속에서 마시는 술을 높이 쳤다. 그 이유는 마셔보면 알 만하다. 상신주가 잔디마당에서 술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는데, 소리가 허공으로 퍼져나가 전혀 소란스럽지 않았다. 술이 이끌어내는 얘기들이 따뜻하게 우리를 감싸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양조장 마당에서 술을 마시니 술이 떨어질 리 없었다. 누군가 산 너머로 흰 구름이 연꽃처럼 피어나는 것을 가리켰다. 구름이 좋아 운악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하루에 세 군데 양조장을 찾아가는 것은 좀 빡빡한 일정이었다. 우리는 이미 배상면주가에서 1차, 생삼겹살 음식점에서 2차, 상신주가에서 3차를 하고, 이제 낮술만으로 4차 술자리가 될 ㈜우리술을 향해 가고 있었다. 도수 약한 막걸리 원정이라서 가능한 일이지, 소주 여행이라면 이쯤에서 중단됐을 것이다.
살균탁주 지평 넓혀온 ㈜우리술
㈜우리술(경기 가평군 하면 대보리 427-3)은 운악산의 동남쪽에 있다. 운악산 주변의 물이 좋다는 것은, 주변에 생수 회사가 많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운악산 북쪽의 포천시 이동면에 4개, 가평군 하면에 2개의 생수회사가 있다. 이웃한 가평군 설악면에도 생수회사가 있다. 우리술의 경쟁력은 바로 이 물에서 나온다.
우리술은 1994년에 농주주식회사로 출범해 2000년 운악산술도가를 거쳐 2003년에 ㈜우리술로 이름이 바뀌었다. 출범 첫해인 1994년부터 살균탁주를 만들고, 2001년에는 살균탁주에 탄산을 주입하기 시작한 살균탁주 분야의 선도적인 회사다.
우리술의 박성기 대표가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아줬다. 사실 상신주가와 우리술 모두 막걸리학교 동문이 운영하는 양조장이다. 상신주가 김도현 전무는 막걸리학교 3기를 수료했고, 우리술 박성기 대표는 막걸리학교 1기로 접수했던 동문이다. 하지만 박 대표는 첫날 강의만 들어오고 해외 출장을 다니느라 막걸리학교를 수료하지 못했다. 전체 수강 일정 중 3회 이상 결석하면 수료증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술 시음장에서 박성기 대표가 신제품 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리술은 가장 다양한 종류의 막걸리를 생산하는 업체다. 과일 막걸리와 기능성 막걸리 등 50가지가 넘는다. 15개국에 수출하고 있는데, 각 나라의 입맛에 맞는 맞춤 막걸리 생산을 꾀하고 있다. 예컨대 달콤한 맛의 과일 막걸리를 선호하는 일본 시장을 겨냥해 과일 막걸리 전용 브랜드인 ‘쥬시(Juicy)락’을 출시했다. 중국은 쌉싸래하고 진한 맛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 인삼이나 더덕 막걸리 위주로 수출한다. 우리술은 지난해 50만달러어치를 수출했고, 올해 수출액은 200만달러를 훨씬 넘을 전망.
우리술은 막걸리 시장의 유통 강자이기도 하다. 일본 내 최대 할인마트인 까르푸와 편의점 1위인 세븐일레븐에서 막걸리를 판매하고 있으며, 지난 6월엔 일본 최대 규모의 약국 유통망을 통해 일본 전역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박 대표는 우리 일행에게 쥬시락을 시음주로 내놓았다. 쥬시락은 주스와 막걸리의 만남이었고, 병과 포장도 과일음료 같았다. 박 대표는 쥬시락이 일본에서 인기를 모았던 배 막걸리의 흐름을 이어갈 신상품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1주일 뒤에 열리는 가평 자라섬 재즈페스티벌 행사용으로 재즈 막걸리를 1만병 한정 출시할 예정이라고 했다. 재즈 막걸리는 재즈를 들려주며 지금 한창 발효시키고 있다. 11월부터는 김포금쌀연구회와 계약재배를 통해 막걸리 전용 쌀 안다벼 100t을 공급받아 막걸리를 제조할 예정이란다. 안다벼는 다수확 품종인데 일반 벼보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술맛이 좋은 품종이라고 한다.
쥬시락을 맛보면서 막걸리학교의 40~50대 장년층과 20~30대 젊은 층은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막걸리에 대해 고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장년층은 “이게 어찌 막걸리냐, 주스지” 하는 반응을 보였고, 쥬시락이 한국 막걸리를 대변할까봐 우려했다. 하지만 젊은층과 여성층은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쥬시락뿐 아니라 막걸리를 처음 접하는 많은 외국인이 쥬시락 막걸리를 맛보면서 달콤하고 경쾌하고 산뜻한 저알코올 음료로 여기게 될 거라고 했다. 막걸리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 술에 대한 세대 간, 혹은 남녀 간의 의견이나 취향이 굳이 하나로 통일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호식품인 술의 세계는 다양성 그 자체를 기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술 양조장의 자동 증미기와 자동 누룩제조기를 보고 나자 하루 일정의 양조장 견학이 끝났다. 돌아오는 차 안은 아주 평화롭고 고요했다. 4차에 걸친 낮술로, 낮잠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웬걸, 서울에 도달할 무렵 잠에서 깨어난 학생들은 다시 5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함께 답사한 학생 가운데 북촌 한옥마을에서 운치 있는 막걸리 주점을 운영하는 이가 있어 절반 이상이 그 주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막걸리도 술이다. 어떤 술이든 석 잔까지는 맛이 달라지니 마셔도 좋지만, 석 잔 술을 넘기면 새로운 맛을 느끼기 어려우니 술맛도 모르는 경지로 들어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한 잔 술이란 있을 수 없고, 석 잔 술은 좀 적은 듯하고, 다섯 잔은 적당하며, 일곱 잔은 지나치고, 아홉 잔에는 취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적당해야 한다.
해질 무렵 서울에 도착해 양조장에서 구입하거나 선물로 받은 술들을 양손에 들고 5차로 향하는 한 무리의 막걸리학교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술이 좋아서라기보다 사람들이 좋아서 함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술, 사람들을 순식간에 좋아하게 만드는 술 막걸리,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한지 좀 더 궁리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