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호

윤채근 SF 소설

차원이동자(The Mover)

뉴욕의 SF 아티스트 프랭크 폴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19-09-19 14: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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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팩션 ‘고전환담’을 통해 ‘신동아’ 독자의 큰 사랑을 받은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일 계획이다. 소설 ‘차원 이동자’는 신동아 홈페이지와 월간 신동아 지면을 통해 동시 연재된다. <편집자 주>

    1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 엄청난 두통이 동반됐다. 미세한 전류가 퍼지듯 몸 구석구석으로 온기가 번져나가길 기다린 뒤에야 그녀는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공원이었다. 밤 11시. 천천히 벤치로 이동해 몸을 앉히고 휴대전화를 꺼내 위치 정보를 확인했다. 일산 호수공원. 한여름인데도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녀가 방금 겪은 기괴한 체험 때문인 것 같았다. 수첩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증상: 체온이 떨어짐’이라고 간신히 적었다. 

    치매 환자로 산다는 게 이런 걸까 헤아리며 익숙한 번호의 버튼을 눌렀다. 발신음이 한참 울린 뒤에야 통화가 됐다. 술집 안인지 사람 소리와 음악 소리가 뒤범벅돼 배경음으로 들려왔다. 편집장이 취기 오른 목소리로 물었다. 

    “너 반항이야? 취재하러 간 게 언젠데…전화도 안 받고…그런 일은 싫다 이거야?” 

    입을 떼려 했지만 굳은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편집장이 다시 말했다. 

    “공민서! 공민서 기자! 그게 우리 운명이야. 유치한 짓 좀 그만 해…끊는다!” 



    민서는 통화가 끊긴 휴대전화 화면을 멍하니 노려봤다. 침착하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편집장님. 취재는 마쳤고 사정이 생겨 내일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정신이동 체험을 한 것 같아요.’ 

    발신 버튼을 누르려던 그녀가 메시지를 지웠다. 다시 천천히 문자 버튼을 눌렀다. 

    ‘윤회전생클럽 모임 취재 완료. 최면에 걸렸던 것 같음. 몸이 안 좋아 내일 보고 드릴게요^^’ 

    그녀는 택시를 잡기 위해 대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꽤 흐르자 체온이 정상으로 회복되며 주변 사물들도 비로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 앞으로 걸어오던 중년 남성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빙긋이 웃던 그가 물었다. 

    “이제 제 말 믿으시겠어요?”


    2

    ‘윤회전생클럽’이라는 글자와 화살표 표시가 그려진 팻말을 찾기까지 대학 건물을 꽤 헤매야 했다. 어차피 사이비 종교 모임 냄새가 나는 데다 임팩트 있는 기삿거리도 아니었기에 민서는 별 의욕을 못 느꼈다. 유사 과학으로 포장해 헤드라인 뽑고 대중 취향에 맞춰 믿거나말거나식 사례들을 인터넷에서 끌어모으면 기사 분량은 찰 것 같았다. 과학 전문기자 출신이 영세한 과학 잡지 ‘서프라이즈 월드’에서 살아남는 비법이었다. 

    독일의 저명 심리학자 카를 융을 공부했다는 클럽 회장은 긴 인사말을 했다. 맨 뒷줄 구석에서 계속 졸던 민서는 회장이 장광설을 끝낼 무렵에야 수첩에 몇 자 적는 시늉을 했다. 

    ‘카를 구스타프 융. 원형 심리학. 상징과 도상. 윤회의 기억. 만다라. 티베트 달라이 라마. 블라블라…’ 

    옆자리 한 칸 건너 앉아 있던 중년 남성이 그녀의 메모를 힐끗 보고 속삭였다. 

    “기자분이시죠? 독특하군요. 단어에도 꼭 피리어드를 찍으시네.” 

    턱을 괸 채 머리를 돌려 상대를 바라보던 민서가 대답했다. 

    “프리랜서예요.” 

    고개를 끄덕인 중년 남성이 웃음을 머금고 다시 말했다. 

    “공민서 기자님. 동양일보 과학전문 출신 아니세요?” 

    깜짝 놀란 민서가 긴장하며 상대를 노려보자 그가 테이블 위에 던지듯 팽개쳐진 민서의 백팩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펜던트에 걸린 이름표. 주무실 때 검색해봤어요.” 

    백을 발치로 옮긴 민서가 조심스러운 곁눈질로 상대의 이름표를 탐색하려 했지만 남성은 곧 회장의 호명에 따라 앞으로 불려나갔다.



    3

    연설을 시작한 중년 남성은 자신을 심령술사이자 박수무당이라고 소개했다. 회장과의 인연을 짧게 나열한 그가 민서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과학의 관점에서 전생이나 윤회는 종교가 관할하는 별도의 영역입니다. 논리적 탐구 대상이 아닌 거죠. 하지만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과학 수준이 그런 초과학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데까진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이죠.” 

    연설자는 민서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를테면 여기 취재 오신 공민서 기자님? 허락도 없이 죄송합니다만 이분을 예로 들어볼까요? 기자님께선 동양일보의 과학 전문기자셨어요. 작년 블랙홀에 관한 기사를 쓰시기 전까지는. 그 기사를 기억하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겁니다. 오보로 밝혀져 인터넷에선 바로 내렸고 기자님은 퇴사하셔야 했죠. 기자님? 아직 그 기사 내용을 사실로 믿고 계신가요?” 

    상대를 노려보던 민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페이크 뉴스로 밝혀졌고 오보가 맞습니다.” 

    “진짜 그럴까요? 확신하십니까? 그 기사의 소스는 저명한 천문학자의 최신 논문이었습니다. 신뢰할 만한 절차에 따라 공시됐고 말이죠. 아주 멋진 이론을 담고 있었어요. 해커의 장난이었다는 게 유일한 흠이었죠.” 

    사람들이 웃었고 민서는 조용히 제자리에 앉았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건 그녀의 스타일이 아닌 데다 연설자의 발언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해커가 진실을 해킹한 거라고 보면 어떨까요? 밝힐 수 없는 이유로 그런 이상한 방법을 선택했다면? 예컨대 외계인이 말이죠. 해커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 우주는 다소 울퉁불퉁한 부드럽고 큰 원구예요. 럭비공 모양 비슷하죠. 블랙홀은 그 공에 뚫린 구멍인 겁니다. 그럼 구멍은 왜 생겼을까요? 바로 파동의 여파 때문인 거죠.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의 변형체들인 겁니다. 우리 육체도, 이 건물도, 심지어 공기조차도. 말하자면 다양한 운동을 일으키는 파동들이 입자 형태로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이 우주란 그야말로 무차별, 진공묘유의 세계인 것이죠.” 

    누군가 그게 윤회전생과 무슨 관계냐고 질문했다.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려운 얘기죠? 자, 상상해보세요. 물질을 극한까지 자른다고 치면 마지막엔 입자도 파동도 아닌 어떤 확률적 존재 상태만 남아요. 그걸 과연 물질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정신은 그럼 뭘까요? 물질인가요, 아닌가요? 물질과 정신, 존재와 무, 있음과 없음은 실은 같은 현상의 다른 측면일 뿐입니다. 따라서 죽은 자의 영혼이 다른 육체로 다시 태어나는 윤회전생은 가능합니다. 티베트 밀교에서 주장하는 행법, 즉 심령이 육신을 갈아타는 일도 역시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언젠가 파동 원리를 활용하는 능력만 획득하게 된다면 말이죠.” 

    4

    예정에 없는 인터뷰였음에도 연설자는 기꺼이 민서의 요구에 응해줬다. 대학 구내 카페에서 상대와 마주 앉은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긴 한데…그 해커, 혹시 선생님이셨어요?” 

    팔짱을 낀 남성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그게 중요한가요? 아니면, 도를 깨닫는 게 중요한가요?” 

    한숨을 쉰 민서가 수첩을 내려놓고 휴대전화 녹음 기능을 켠 뒤 다시 물었다. 

    “입씨름 싫어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선생님의 정체는 뭔가요? 직업 말고.”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인 그가 속삭이듯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외계인.” 

    상대를 지긋이 노려보던 민서가 녹음 기능을 껐다. 그러자 상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블랙홀을 이용하면 시공간 차원 이동이 가능해요. 단순하게 비유하자면 공 밖으로 나가서 다른 공으로 이렇게 쑥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주는 공 밖에 다른 공이, 또 그 밖에 또 다른 공이 계속 뒤엉키며 겹쳐 있는 형국이죠. 그 사이엔 파동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붕괴된 별들이 만든 시공간의 틈, 바로 블랙홀들이 있고.” 

    “선생님께서 그 구멍들을 요리조리 타고 지구에 오신 외계인이시다?” 

    “네.” 

    “그럼 왜 오셨어요? 하필이면 별 볼일도 없는 이 별에?” 

    “구경하러.” 

    “구경하시겠다고 그 먼 길을 오셨다?” 

    “당연히. 전 시간 이동을 하며 이 별을 관찰하고 있어요. 지금 이 몸뚱이는 말하자면 관광용 탈것이죠. 여기서 쓸 이동 수단 같은 겁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민서가 미동 하나 없이 말했다. 

    “그럼 증명해보세요.”


    5

    일산 도심 심야식당으로 들어선 민서가 상대에게 물었다. 

    “제 정신을 파동으로 장악하셨던 거다? 낮에 그 대학 구내 카페에서부터?” 

    고개를 끄덕인 상대가 대답했다. 

    “증명해보라고 하셨으니까요. 이 몸은 원래 주인에게 잠시 돌려주고 공 기자님 몸으로 들어갔었습니다. 이리저리 걷기도 하고 배고픈 새들에게 먹이도 줬어요.” 

    “최면을 거셨던 게 아니고?” 

    “네. 전 어떤 최면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선생님의 정체는 파동인가요?” 

    “네. 육체 없이 파동으로만 행성 간 이동을 합니다. 설명하자면 끝이 없고 아마 이해하실 수도 없을 겁니다. 저 같은 경우엔 되도록 행성 역사에 간섭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죠. 신내림을 수시로 받는 이런 무당 몸이 쓰기 제일 편합니다. 짧게 이동할 땐 정신병자나 치매환자 또 더러는 술에 취한 사람 몸을 타기도 합니다만.” 

    살짝 미소 지은 민서가 다시 물었다. 

    “그럼 선생님을 뭐라 불러야 될까요? 그 몸의 진짜 주인은 아니시니까.” 

    “이탈자.” 

    “이탈자?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네. 전 이탈자입니다. 무리로부터 벗어난 뒤 이렇게 별들을 옮겨 다니며 영원한 삶을 즐기고 있어요. 물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말이죠.” 

    “하나만 물을게요. 몸만 빌리는 건가요? 아니면 인격을 송두리째?” 

    “제겐 숙주의 인격도 향유 대상입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인격도 본래 주인 것 그대로입니다. 말투나 생각 모두 다. 전 조종할 뿐이죠.” 

    “잔인해요.” 

    “그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공 기자님께서 기억 못 하실 뿐이지 몸을 공유했을 때 저와 같은 경험을 하셨습니다. 그럼 이번엔 공 기자님 기억 능력을 더 활성화하고 다시 시도해볼까요?” 

    “아뇨, 아닙니다! 절대!”


    6

    바에선 본조비 음악이 흘러나왔다. 유난히 손님이 몰려서인지 바텐더는 연신 실수를 저질렀다. 주문한 스크루드라이버 대신 싱가포르 슬링을 서빙하기도 했다. 외톨이 손님이 받는 설움이라 여긴 편집장이 말없이 잔을 집어든 순간 휴대전화 수신음이 울렸다. 아침에 취재 나가 소식이 두절됐던 공민서였다.
     
    “너 반항이야? 취재하러 간 게 언젠데…전화도 안 받고…그런 일은 싫다 이거야?” 

    대답을 기다렸지만 숨소리만 들려왔다. 편집장이 다시 말했다. 

    “공민서! 공민서 기자! 그게 우리 운명이야. 유치한 짓 좀 그만해…끊는다!” 

    휴대전화를 술잔 옆에 내려놓으려던 편집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머리가 육중한 무언가에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뇌졸중을 의심한 그가 바텐더 쪽에 손을 흔들어 도움을 요청했다. 바텐더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그의 행동에 주목하지 않았다. 

    잠깐 졸 듯 머리를 숙였던 편집장은 곧바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가 휴대전화에 뜬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윤회전생클럽 모임 취재 완료. 최면에 걸렸던 것 같음. 몸이 안 좋아 내일 보고드릴 게요^^.’ 

    민첩하게 일어나 술값을 계산한 편집장이 서둘러 바를 나섰다.


    7

    일산 심야식당에서 이탈자와 대화를 나누던 민서는 문득 휴대전화를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팩 안에서 전화기를 꺼내자 다수의 부재 중 수신 기록이 떴다. 편집장이었다. 발신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통화가 됐다. 편집장이 물었다. 

    “어디냐?” 

    망설이던 민서가 대답했다. 

    “일산 어디예요. 죄송합니다. 누굴 만나고 있거든요.” 

    “걱정되니까 주소만 대.” 

    편집장은 누굴 살뜰히 걱정해주는 유형이 아니었다. 이상했다. 빨리 통화를 끝내고 싶었던 민서가 급히 주소를 댔다. 작별 인사를 나눈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는 그녀에게 이탈자가 물었다. 

    “누구죠?” 

    “잡지사 편집장. 전 ‘서프라이즈 월드’의 프리랜서 기자예요. 원래는 한국판 ‘어메이징 스토리’를 표방한 SF소설잡지였대요. 지금은…글쎄요…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윤회전생까지 취재해야 하는 황색 저널리즘이 됐나요?” 

    “그렇지만은 않아요. 꽤 좋은 소설도 자주 수록돼요. 한국이 SF의 불모지다 보니 재정은 안 좋은 편이지만. 저도 소설 몇 편 실었고.” 

    “작가가 꿈이시군요? ‘어메이징 스토리’는 저와 아주 각별한 인연이 있는 잡지였어요.” 

    “어떤 인연? 하긴 파동으로 시공을 넘나드신다니.” 

    “들어보시겠어요?”

    8

    찰스 커티스가 이끄는 미국 공화당이 상원 선거에서 민주당에 간신히 승리했던 1926년, 휴고 건즈백은 동갑내기 삽화가 프랭크 폴을 데리고 뉴욕 퀸스와 맨해튼 사이를 흐르는 이스트리버를 건너고 있었다. 그건 괴짜 발명가이자 라디오방송국 운영자이며 과학소설 작가인 건즈백의 남모를 취미였다. 

    퀸스 쪽에서 저물녘 출발한 배는 퀸스버러 브리지 아래를 지나 루스벨트아일랜드 동쪽에 도착했다. 이스트리버 중앙에 자리 잡은 아담한 섬 루스벨트아일랜드에서 바라보는 맨해튼 야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장관에 넋을 놓고 있던 둘은 북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멀리 어퍼이스트사이드와 브롱스의 불빛이 아스라이 비쳐왔다. 폴이 물었다. 

    “이봐 휴고. 자네 저기 브롱스 출신이지?” 

    고개를 끄덕인 건즈백이 대답했다. 

    “유럽에서 이민 온 가난뱅이는 다 저기서 시작하지. 난 전기전자에 미친 룩셈부르크 출신 젊은 기술자였어.” 

    둘은 다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문 건즈백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나 잡지를 만들 거야. 이번엔 제대로 된 소설잡지를 꾸밀 생각인데 프랭크, 네 도움이 필요해.” 

    할렘 쪽을 우두커니 응시하던 폴이 물었다. 

    “삽화가라면 많을 텐데? 난 화성인이나 우주 전쟁 그리고 또 뭐더라? 자네가 좋아하는 시간여행, 그런 데엔 관심이 없어.” 

    상대방에게 살짝 다가선 건즈백이 속삭였다. 

    “표지를 그려줘. 잡지 제목은 ‘어메이징 스토리’. 미래 문명과 외계인에 대한 얘기가 무궁무진 쏟아져 나올 거야. 에드거 앨런 포와 허버트 웰스 작품도 실을 거고. 소설로 미래를 연다는 거, 멋지지 않아? 네 색채 감각이 필요해.” 

    대답 대신 남쪽 선착장을 향해 앞서 걷던 프랭크 폴이 갑자기 정지했다. 그 모습을 이상히 여긴 건즈백이 황급히 거리를 좁혀 그에게 다가갔다. 폴의 육체가 잠깐 진동하는 듯했지만 어둠으로 인한 착시일 수도 있었다. 건즈백을 향해 빙그르르 돌아선 폴이 말했다. 

    “그려볼게. 내일 외계인 표지 그림부터 시작하지.” 

    다음 날 건즈백의 사무실을 찾은 폴은 신기한 외계인 그림을 수도 없이 척척 그려냈다. 토끼눈을 한 건즈백이 물었다. 

    “프랭크, 넌 미쳤어. 어메이징이란 바로 이런 거지. 마치 외계인을 직접 본 사람처럼 그려내고 있잖아?” 

    놀라운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평범한 일러스트레이터이던 프랭크 폴은 기발한 아이디어들로 건즈백에게 창조의 영감을 제공했다. 미래의 천공 도시, 타인의 몸을 약탈하는 시간여행자, 우주를 왕래하는 광속 비행선, 그리고 외계 식민지 건설 등등. ‘어메이징 스토리’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사이언스 픽션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휴고 건즈백은 건전지 개발 때보다 몇십 배의 돈을 벌어들였다. 

    1926년부터 3년 동안 프랭크 폴이 그린 잡지 표지 그림은 그 자체로 예술로 인정받아 ‘사이언스 픽션 아트’로 불렸다. 그런데 카툰 아티스트로서의 그의 명성이 공고해지려던 순간 대공황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궁핍은 대중의 상상력을 근원적으로 봉쇄했고 외계인들은 초라한 뉴욕을 떠나버렸다. 미래에 대한 낙관 위에 세워졌던 휴고 건즈백의 SF제국도 그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건즈백은 우울증 환자였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프랭크 폴만이 건즈백 내면에 자욱한 안개처럼 도사린 어둠을 이해했다. 잡지가 휴간된 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이스트리버를 함께 건너 루스벨트아일랜드를 산책했는데 불빛이 사라진 어둠 속 맨해튼은 황량하게 파괴된 화성 식민지 같아 보였다. 건즈백이 말했다. 

    “현실만 남아 있는 현실이 난 견딜 수 없어. 이야기가 끝나면 내 인생도 멈추는 거야.” 

    폴이 다가와 건즈백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현실은 항상 현실 그 이상이지. 어메이징한 것들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거든.” 

    “그럼 왜 내 눈엔 안 보이지?” 

    건즈백의 눈을 응시하던 폴이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이를테면 나 프랭크 폴이 외계인이었다던가. 아직도 눈치 못 챘어?” 

    얼빠진 표정이 된 건즈백이 뭐라 말을 하려다 멈췄다. 폴이 다시 말했다. 

    “난 외계인 시간여행자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 그림들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그렸겠어? 의심 안 해봤나?” 

    가늘게 입술을 떨던 건즈백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봐 프랭크…네가 진짜 소설가야. 오늘밤을 잊지 않을게.” 


    9

    이야기를 마친 이탈자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민서가 물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저 유명한 프랭크 루돌프 폴이었단 거예요? 정말?” 

    고개를 끄덕인 이탈자가 피식 웃고 대답했다. 

    “그래요. 기자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전 오랜 세월을 살아왔어요. 영원의 관점에서 오래라는 말은 의미 없겠지만 말이죠. 제가 빼먹은 얘기가 하나 더 있어요. 제 친구 휴고 건즈백은 자기가 그토록 좋아하던 루스벨트아일랜드의 병원에서 숨을 거뒀어요. 반드시 거기서 죽고 싶다고 해서 고생을 좀 했죠. 제가 몇 년 먼저 죽었거든요.” 

    “휴고 건즈백은 선생님의 정체를 끝내 몰랐나요?” 

    “네. 아이러니하죠? 외계인에 대해 가장 왕성한 호기심을 지녔던 그 친구가 바로 옆의 저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아무리 말해줘도 믿지 않았죠. 예수님께서도 저 같은 기분이지 않으셨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 SF 카툰은 그리지 않으셨나요? 다른 몸으로 옮기고 나선?” 

    “네. 전 그 후 앨런 긴즈버그 몸에 들어갔어요. ‘어메이징 스토리’가 만들어진 해에 태어난 문인이죠. 당연히 카툰 작업 대신 시 쓰기에 열중했어요. 굉장한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반항과 파괴, 권위에 대한 도전이 넘치던 시기였죠. 그러다 아서 클라크를 만났습니다.” 

    “앨런 긴즈버그인 상태로?” 

    “아뇨. 1955년 무렵 스리랑카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당시 전 그곳의 소승 불교 승려였죠. 아서는 독실한 불교도였습니다. 그는 건즈백을 빼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걸 누렸어요. 과학소설가로 영국 기사 작위까지 받았으니까 말이죠.” 

    “통신위성 아이디어를 세계 최초로 제안했었습니다. 전 그의 ‘유년기의 끝’의 광팬이었어요. 그래서 과학기자가 됐고.” 

    “지구를 방문한 외계지배자 오우버로오드(overlord)!” 

    “맞아요. 악마 형상을 한! 바로 선생님이로군요?” 

    “천만에.” 

    그 순간 창밖 멀리로 택시에서 내리는 편집장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민서가 그를 가리키며 이탈자에게 속삭였다. 

    “저기 우리 편집장께서 오셨네요. 이 밤에 웬일이시려나?” 

    편집장 쪽을 힐끗 쳐다본 이탈자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민서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급히 말했다. 

    “저건 편집장이 아닌 것 같군요. 선택하세요. 저랑 조금 더 시간을 보내시겠어요? 아니라면 전 이만 사라지겠습니다.” 

    민서는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되도록 주의하지 않으며 무심히 살아온 그녀였다. 삶이 소설이라면 이번엔 장르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녀가 잽싸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물었다. 

    “그럼 저건 선생님을 쫓는 몬스터 외계인?” 

    앞장서 식당 후문을 벗어나며 이탈자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저희 종족의 형사 같은 존재죠. 이탈자를 체포해 소멸시키려는 추격자. 파동의 세계에선 육화가 금지됐거든요.”


    10

    택시는 바람을 가르고 서울 충정로를 향해 돌진했다. 민서의 오피스텔이 있는 곳이었다. 뒷좌석에 민서와 나란히 앉은 이탈자가 앞쪽 운전사를 한번 바라본 뒤 말했다. 

    “공 기자님. 우린 오래 함께하지는 못해요. 이해하시죠?” 

    마찬가지로 운전사를 슬쩍 바라본 민서가 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아쉽네요. 선생님 같은 분 만나는 게 로망이었는데. 이제 어느 별로 떠나시나요?” 

    미소를 머금은 이탈자가 아직 어둠에 잠긴 한강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전 더 즐기고 싶습니다. 아직 이 행성엔 놀 게 많거든요.” 

    “추격자는 어쩌시고요? 계속 도망만 다니셔야 해요?” 

    “다행히 악마 같은 친구는 아닙니다. 쫓는 걸 즐기는 것도 같고 말이죠. 이곳 한국의 역사나 문화, 마음에 듭니다. 조금 더 머물고 싶군요.”
     
    민서를 그윽이 응시하던 이탈자가 다시 속삭였다. 

    “전 육체가 좋아요.” 

    운전사가 기침을 했다. 이탈자가 잠시 머뭇대다 덧붙였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마세요. 혹시 어제 낮에 경험한 걸 다시 겪게 돼도 말이죠. 침착하시면 됩니다. 아시겠죠?” 

    고개를 끄덕인 민서가 상대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의 몸에서 차츰 영기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이탈자가 머물던 육체에 원래 주인이 돌아왔다. 일산 호수공원에서의 민서처럼 그도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몸을 떨었다. 갑자기 앞쪽의 운전사가 말을 건넸다.
     
    “괜찮습니다. 곧 회복될 겁니다. 놀라지 마세요. 접니다.”


    11

    오피스텔로 돌아온 민서는 당장 뭔가를 쓰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침대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탈자가 했던 마지막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 어떤 깨달음에 도달했다. 서둘러 일어선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며 쉼 없이 좌우로 오락가락했다. 당장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경찰에 체포되는 묘수가 떠올랐다. 

    휴대전화를 들어 112를 누르려는 순간 어제 대학 구내 카페에서 인터뷰 도중 찾아왔던 불길한 두통이 다시 느껴졌다. 비명을 지른 그녀가 자기 육체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몸부림쳤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갑자기 침착해진 그녀는 급히 백팩을 챙겨 튕기듯이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건물을 뛰쳐나온 그녀는 도로에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편집장과 마주쳤다. 무척 추워 보였다. 뭔가 말을 해보려 노력하는 그를 지나친 민서는 조금 전 자신이 타고 왔던 택시 번호를 되뇐 뒤 윤회전생클럽 회장에게 전화했다. 이리저리 둘러대 초청 강연자의 집주소를 알아낸 그녀는 택시를 잡아타고 또다시 미명의 새벽 도로 위를 내달렸다. 

    심령술사이자 박수무당인 한상원이 사는 빌라는 한남동에 있었다. 인근에서 하차한 민서는 주차된 택시들의 차량번호를 차례로 확인해나갔다. 일산에서 탑승했던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면 타깃을 변경해야 했다. 택시는 한상원의 집 인근 골목에서 발견됐다. 곧바로 빌라 현관에 다가선 그녀가 호출 버튼을 눌렀다. 한참 동안 반응이 없었다. 다시 누르자 인터폰을 통해 한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민서 기자님? 그렇게 불러줄까?” 

    얼굴을 찌푸린 그녀가 속삭였다. 

    “이미 눈치 챈건가?” 

    잠시 뜸을 들인 후 상대가 대답했다. 

    “추격 솜씨가 날로 늘고 있네? 그래도 아직 어설퍼. 뭐랄까…너무 장식적이야.” 

    “올라가겠다.” 

    “아니, 그러지 마. 사람들 자잖아? 강변에서 파동으로 붙어보는 게 어때?” 

    “또 속이고 이동하려는 건가?” 

    “아냐. 너하고 정도 들 만큼 들었어. 좀 즐겨보자고.”

    12

    민서는 동부이촌동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침이었다. 형편없이 구겨진 단화와 여기저기 찢긴 백팩이 발치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녀의 몸을 밤새 사용한 추격자의 솜씨 같았다. 주변을 둘러봤다. 햇살이 눈부셨고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경비실 수위만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상대를 쏘아보며 관찰했지만 이내 단념했다. 추격자일 리 없었다. 

    충정로 집으로 돌아와 샤워한 민서는 출근을 포기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편집장이었다. 수신 버튼을 누르자 평소답지 않게 공손한 목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공 기자. 나야. 뭐라고 말해야 되나…어제 왜 거기 갔는지 모르겠고…오해는 하지 마. 나 그런 사람 아닌 거 알잖아?” 

    한숨을 내쉰 민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편집장님 잘 알아요. 성질 불같고…가끔 사람 괴롭게 하시지만 인품 좋으시다 느끼고 있었어요. 걱정 마세요.” 

    편집장이 뭐라고 길게 말했지만 그녀는 상대의 말을 건성으로 흘리며 늘 책상 위에 올려두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뒤적였다. 다음엔 ‘에덴의 용’과 ‘컨택트’를 집어 세로로 쌓았다. 프랑스계 이민자 후손 세이건은 건즈백처럼 브루클린의 빈민가 옥상에서 별을 바라보며 외계인을 꿈꿨다. 민서가 커서를 움직여 컴퓨터 화면에 새로 집필할 소설 제목을 적어나갔다. 

    ‘차원 이동자.’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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