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직장문화와 직업교육의 힘

• 직업이 교수나 의사라고 해서 무조건 우러러보지 않고 청소원이나 배관공이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사람이 가진 전문성을 존중한다. 이런 사회적 문화가 가능한 건 스위스의 전문적인 직업교육제도 덕분이다.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70%가 넘지만 스위스에선 20%대에 불과하다. 학문적 공부가 필요한 사람만 대학에 갈 뿐 나머지 사람들은 실용적인 직업교육을 받는다.

스위스에 살면서 한국과 다르다고 느끼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 제일 다른 걸 꼽으라면 단연 직장문화다. 스위스인 남편과 친지들을 통해 스위스 직장문화를 간접적으로만 접하던 나는 올해 초부터 스위스 기업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스위스 직장문화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다. 나는 현재 토종 스위스 기업에서 비즈니스 프로세스 매니지먼트 업무를 맡고 있다. 이전에 한국에서 7년간 경험한 직장생활과는 정말 확연히 다르다.

첫 출근한 날이었다. 직속 상사 다니엘(가명)이 나에게 오리엔테이션을 해주다가 낮 12시가 되자 칼같이 일을 중단했다. “난 이제 집에 가봐야 해요.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거든요. 오후 1시 반쯤 다시 사무실에 올 거예요.”

점심시간마다 집에 가는 상사

40대 초반의 다니엘은 부인과 함께 자녀 다섯을 키우고 있다. 회사에서 자전거로 5분 거리에 사는 그는 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회사로 온다. 초등학교에는 급식이 따로 없다. 점심시간에 어린이들이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 수업을 위해 다시 학교에 가기 때문에 집에서 점심을 챙겨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다니엘은 점심에 집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다. 다니엘뿐 아니라 회사에서 집이 가까운 동료들은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온다. 어느 날에는 오후 2시에 회의가 있었는데 그 시간에 맞춰 복귀한 그는 “딸을 치과에 데려다 주고 오느라 지금 왔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 눈에 다니엘은 육아에 충실한 가정적인 남성이다. 그렇다고 일을 소홀히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업무시간에는 철저히 효율적으로 일하고 나로서는 배울 점이 많은 상사다. 일과 육아에 모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랄까. 그런데 한국의 직장문화를 기준으로 따져보면 그는 고용주나 상사에게 눈칫밥 먹기 딱 좋다. 점심시간에 집에 갔다 온다? 그것도 1시간 반이나 자리를 비운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스위스에서 이런 일상이 가능한 건 오히려 공과 사가 철저히 구분되고 직원의 사생활이 존중되기 때문이다. 스위스 직장인들에게 점심시간은 사적이며 법적으로 보장된 휴식시간이다. 따라서 이 시간에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을 하든, 장을 보러 가든, 집에 다녀오든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다. 또 하루 8시간 근무자라면 점심시간을 최소 30분 이상 갖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 미국 대도시의 직장인들처럼 책상에서 일하면서 샌드위치로 게 눈 감추듯 점심을 때우는 모습은, 쉴 땐 쉬어야 하는 유럽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오후 5시 음악방송 들으며 퇴근

점심시간에 다니엘의 자유로운 이탈(?)이 가능한 이유는 업무시간이 칼같이 지켜지면서도 개인별로 유연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위스에서는 기업에 따라 주당 38.5~42.5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정하고 있으며, 일반 사무직의 경우 주당 45시간 이상 근무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돼 있다. 우리 회사에서는 출퇴근과 점심시간에 단말기에 지문을 찍는 방식으로 업무시간을 집계한다. 점심시간이 길어졌다면 그만큼 더 일하고 늦게 퇴근하거나 다음 날 더 일찍 출근해서 근무시간을 보충하면 된다. 즉 근무시간은 협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 개인의 책임과 재량에 맡기는 것이지, 상사가 눈치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들을 아침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바래다주고 오후에 데려오는 게 중요한 일상인 맞벌이 부부에게, 유연한 근무시간은 일과 육아의 조화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조건이다.

스위스 기업에서는 불필요한 눈치보기식 야근이 전혀 없다. 그 대신 업무시간 내에 맡은 일을 끝낼 수 있도록 철저하게 일에만 집중한다. 당연히 근무시간에 스마트폰을 보거나 개인적 용도로 인터넷 서핑을 하지도 않는다. 스위스 직장에서는 보통 오전에 10분, 오후에 10분 정도 휴식시간이 있는데 이때 동료들이 휴게실에 모여 함께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거나 스마트폰을 본다. 불가피하게 야근을 하는 경우 야근수당을 주는 회사도 있고 휴가로 보상해주는 회사도 있다.

한국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할 때  나에게 ‘오후 6시 퇴근’은 상상 속에만 있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가족보다 직장 동료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중요한 기사를 쓰거나 야근당번을 하는 날에는 오후 10시, 11시에 퇴근했는데, 그마나 바로 집에 가서 잘 수 있으면 다행이었지만 “맥주 한잔만 하고 가자”는 상사의 제안이라도 있을 땐 새벽 한두 시에야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65세에 평사원으로 은퇴하기

스위스에서 결혼할 때 우리 부부의 결혼사진을 멋지게 찍어준 로저도 그렇다. 그의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당연히 그가 전문 사진가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알고 보니 그는 평일에는 인쇄소에서 일하고 남는 시간과 주말에 프리랜서 포토그래퍼로 일하며 자신의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었다. 헬스클럽에서 요가나 필라테스를 가르치는 트레이너 중에도 본업은 따로 있는 사람이 많다.

얼마 전에 남편의 회사 동료가 만 65세로 정년퇴직을 해서 팀원들이 그와 함께 점심에 작별의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 얘길 듣고 남편에게 물었다. “정년퇴직이면 그분 상당히 직급이 높겠네. 임원이야, 팀장이야?” “아니야. 그냥 나와 같은 동료야.” “평사원이 어떻게 정년퇴직 때까지 사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그분 상사는 훨씬 어려?” “임원이 되지 않아도 평사원으로 정년 때까지 계속 회사에 다닐 수 있어. 임원이 되어 큰 책임을 맡기보다 연봉을 적게 받더라도 큰 스트레스 없이 꾸준히 일하길 원하는 사람들도 있거든. 그의 상사는 40대인데 상사가 더 어리다고 해서 별문제 될 건 없어.”

공채와 연공서열제도가 강하게 굳은 한국 직장문화에서는 임원 승진에 탈락하거나 입사 동기나 후배가 자신보다 승진할 경우 자진해서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름난 대기업에 다니면서 만 65세에 정년퇴직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당연히 조기 퇴직 후 노후 대비가 큰 걱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스위스에서 임원이 아니어도 평사원으로 꾸준히 일하면서 정년퇴직까지 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걸 알고서 무척 놀라웠다. 속된 말로 ‘가늘고 길게’ 간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청년실업률이 높은 것도 아니니 스위스 경제와 고용시장이 잘 돌아가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오히려 남편이 한국의 상황을 놀라워했다. 남편은 “오래 일한 사람들은 그만큼 숙련된 노하우가 많은데 비자발적으로 일찍 퇴직할 수밖에 없다면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스위스에서는 정말로 직업에 귀천이 없다. 이는 스위스에서 내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사회적 가치다. 모든 직업은 그 존재 가치가 있고 노동에는 그에 걸맞은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다. 직업이 교수나 의사라고 해서 무조건 우러러보지 않고 청소원이나 배관공이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사람이 가진 전문성을 존중하고, 직업 자체만으로 섣불리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적 문화가 가능한 건 스위스의 전문적인 직업교육 시스템 덕분이다. 한국의 대학진학률이 70%가 넘는 데 비해 스위스에서 대학진학률은 20%대에 불과하다. 학문적으로 공부가 필요한 사람만 대학에 갈 뿐 나머지 사람들은 실용적인 직업교육을 받는다. 이미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부터 진로를 정한 뒤 그에 걸맞은 직업고등학교에 가서 학업과 실습을 병행한다. 예를 들어 목수가 꿈이라면 이미 직업고등학교에 입학한 만 16세부터 가구 공장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전문 목수 밑에서 철저하게 기술을 배운다. 그러니 서른 살쯤 되면 이미 어엿한 중견 목수로 성장해 있다. 은행에 가면 가끔 창구에서 얼굴에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청년이 어색하게 정장을 입고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고객을 대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상업고교에 다니며 은행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는 청년인 것이다.

전문 직업교육 시스템의 위력  

이처럼 비교적 어린 나이에 직업 교육을 받기 시작해 그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니 소위 블루칼라 노동자도 ‘장인’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 게다가 서비스 물가가 비싼 스위스에서는 자동차 수리공, 페인트공, 기계공 등 기술직이 돈도 잘 번다.

어떤 직업을 갖든 적당한 보상이 뒤따른다는 것도 부러운 점이다. 2015년 국제통화기금(IMF) 통계에 따르면 스위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8만2178달러로 세계 2위다. 1위는 10만3187달러의 룩셈부르크이고, 한국은 2만7513달러로 28위다. 스위스에는 법으로 정해진 최저임금은 없는데, 별도의 직업교육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비숙련 노동, 이를테면 식당 보조, 건물 청소원, 가사도우미 같은 직업의 경우 보통 시간당 세전 20~25스위스프랑(약 2만2500~2만8200원)을 받는다. 식당 종업원으로 시간당 25프랑을 받고 100% 일할 경우 한 달에 4000프랑(451만 원)을 받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물가도 비싸니 생활비가 많이 들지만 맞벌이를 한다면 아이를 키우면서도 큰 어려움 없이 산다. 시급이 높아서 그런지 스위스의 식당이나 상점의 종업원들도 꽤 친절하고 제품에 대한 설명도 잘해준다. 스위스보다 훨씬 시급이 낮은 이웃 나라 독일에만 가도 종업원들의 친절도가 눈에 띄게 낮아지는 걸 느낀다.

물론 스위스에도 연봉 수십억 원을 버는 금융권 최고경영자(CEO)도 있고 시급 25프랑을 버는 비숙련노동자도 있다. 하지만 이 사회의 빈부격차는 한국과 비교하면 그리 심하지 않아 보인다. 중산층이 두텁고 대다수 국민이 일정 수준의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대다수의 국민이 탄탄한 공교육을 통해 한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고, 일에서 적당한 보상을 받으며,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린다. 외국인의 눈으로 스위스 사회를 볼 때 가장 부러운 점이다.

신성미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와 동아일보 경제부·문화부, 동아 비즈니스리뷰 기자로 일했다. 2015년부터 스위스인 남편과 스위스 장크트 갈렌(St.Gallen) 근교에 살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스위스 사회, 문화에 대해 블로그(bl- og.naver.com/sociolog icus)에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