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호

신성미의 달콤쌉쌀한 스위스

하이디가 살던 풍경 그대로

국가의 아름다움 원천은 전통문화

  • 글·사진 신성미|在스위스 교민 ssm0321@hanmail.net

    입력2017-05-18 17: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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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융업과 기계 산업이 발달하고 수많은 국제기구가 모여 있는 현대적인 국가.
    • 그런 스위스가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나라가 된 것은
    • 소박하고 담담하게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존재 때문이다.
    해질 녘 알프스 산맥 고지대의 초원에서 목동이 길이 3m가 넘는 스위스 전통 목관악기 알프호른(Alphorn)을 연주한다. 평화로운 알프호른 소리가 바람을 타고 아랫마을에 다다른다. 마을 사람들은 고요한 가운데 목동의 알프호른 소리를 들으며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마을 한가운데서 열린 농부들의 장터에서는 주민들이 민속의상을 입고 둥글게 모여 서서 요들을 합창한다.



    꽃 달고 행진하는 염소들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 나올 법한 이런 장면은 스위스를 상상할 때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다.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목가적 풍경, 그리고 그 속에서 오랜 전통을 지키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분명 스위스의 아동소설 ‘하이디’가 쓰인 19세기 후반에는 그런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스위스에서 살면서 나는 종종 감탄하곤 한다. 이런 풍경이 정말 21세기 현재에도 자연스럽게 눈앞에 펼쳐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금융업과 기계 산업이 발달하고 수많은 국제기구가 모여 있는 현대적인 모습과 함께 소박하고 담담하게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스위스다.

    초여름이나 초가을에 스위스의 산악마을을 지나다 보면 가끔 ‘가축들을 조심하라’는 표지판과 함께 도로의 차량들이 경찰차의 지시에 따라 통행을 멈추고 5분이고 10분이고 줄지어 기다리는 광경을 마주칠 때가 있다. 혹시 스위스 여행 중에 우연히 이런 상황을 만났다면 참 운이 좋은 것이다. 이럴 땐 차의 시동을 끄고 잠깐 밖으로 나와 어떤 장면이 펼쳐지는지 생생하게 봐야 한다. 스위스 낙농가의 오랜 전통을 직접 마주친 것이기 때문이다.



    알프스 지역의 낙농가에서는 초여름에 소와 염소, 양 같은 가축을 고지대로 이동시켜 그곳에서 신선한 풀을 먹이고 날씨가 추워지기 전 초가을에 다시 마을의 농가로 내려보낸다. 가축들의 피서라고나 할까. 이때 농부들과 그 자녀들은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가축들을 몰고, 가축들은 화려한 꽃장식을 머리에 달고 이날의 주인공이 돼 도로를 행진한다. 마을 농가에서 고원으로 올라가는 행사를 독일어로 알프아우프축(Alpaufzug), 고원에서 다시 마을 농가로 내려오는 행사를 알프압축(Alpabzug)이라고 한다.

    지난해 가을 스위스에서도 지역적 전통이 강하기로 소문난 아펜첼에서 알프압축 행사를 보았다. 얼굴이 벌겋게 그을린 투박한 모습의 농부들이 아펜첼 전통의상을 입고 아이들은 하이디와 페터 같은 복장을 하고 자기네 농가의 가축들을 몰고 행진했다. 동물들의 꽃장식도 이들이 정성 들여 만든 것이다. 정말이지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내가 감탄한 것은 이들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 전통을 이어가고 또 축제처럼 즐기는 모습이었다. 물론 아펜첼 관광청에서도 이 행사를 홍보하고 이를 보러온 관광객도 꽤 되는 데다 마을 중심가에서는 축제처럼 먹을거리를 파는 지역주민들도 있었다.



    600시간 들여 만든 전통 모자

    하지만 상업적이고 인위적인 행사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농가들이 이 행사를 치른다고 해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닌 데다(오히려 동물들을 치장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이들은 관광객이 구경하든 안 하든 아랑곳 않고 묵묵히 자신들의 전통을 이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해서 여름에 알프스 고지대에서 생산된 스위스 치즈가 맛과 품질뿐 아니라 이런 전통적인 방식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건 부수적 이익이기도 하다.

    농가의 가족들이 가축들과 정말 한가족처럼 어우러지는 이 전통 행사가 참 정겹고 아름다워서 나는 아펜첼의 화랑에 들러 알프압축 장면을 담은 그림을 구입해 집에 걸어놓았다.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림이다.

    지난해 12월 31일 아펜첼 아우서로덴 준주(準州)의 작은 마을 터이펜(Teufen)에서 본 ‘질베스터클라우젠(Silvesterchlausen)’도 350년 넘게 이어지는 유명한 풍습이다.(신동아 2017년 2월호 참조) 새해를 맞아 마을의 남자 예닐곱 명씩 한 조가 돼 독특한 분장을 하고 무거운 소 방울을 몸통에 단 채 집집마다 들러 종소리를 시끄럽게 울려대며 악귀를 쫓는 전통이다.

    이를 구경하고 온 지 얼마 안 돼 스위스 공영방송 SRF에서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질베스터클라우젠에 참여하는 마을 남자들을 1년간 따라다니며 촬영한 다큐멘터리였다. 이들은 각자 다양한 직업이 있는 평범한 마을 주민들인데 매년 연말과 연초에 두 번 열리는 이 행사를 위해 1년 전부터 부지런히 준비했다.

    가장 중요한 건 개성 있는 의상 제작인데 특히 모자가 훌륭했다. 마스크가 달린 모자를 각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어 디자인한 뒤 온전히 수공예로 제작하는데, 이 모자 제작에만 연간 600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한 땀 한 땀 손으로 바느질을 하고, 좁쌀만 한 구슬을 일일이 꿰고, 모자에 장식하는 동물이나 사람 등의 모형을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들어 붙인다. 모자에는 하나의 주제를 담은 스토리를 장식으로 표현해 넣는데, 요들 합창대회 참가 장면, 질베스터클라우젠의 합창 장면 등 자신이 아끼는 추억이 앙증맞으면서도 섬세하게 들어간다.


    지역색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

    덩치가 산처럼 크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장정이 집 지하에 있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이 모자 제작을 마친 뒤 자신의 작품을 보며 감격해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내가 다 뭉클했다. 이들은 직업적으로 수공예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마을 주민일 뿐이다.

    전문가 못지않은 솜씨도 놀랍지만 더 인상적인 건 이 일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자기네 고장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순수한 열정으로 1년을 꼬박 들여 의상과 장식을 준비하고 최대 30kg이나 나가는 소 방울을 짊어지고 질베스터클라우젠 행사에 나서는 것이다. 부인과 아이들까지 나서서 제작을 돕고 이들을 든든하게 지원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나는 방송을 보고 이들의 열정과 진지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고유의 전통과 풍습을 지키려는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 다채롭고 오랜 문화가 남아 있는 나라 스위스를 만드는 건 당연한 이치다. 대체 스위스인들에게 전통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의욕 넘치고 자부심 있게 만드는 걸까.

    연방국가인 스위스는 1291년 지금의 칸톤(주)에 해당하는 슈비츠, 우리, 운터발덴(나중에 옵발덴과 니드발덴으로 나뉨) 지역이 자신들의 자치를 위협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맞서 함께 싸우기 위해 동맹을 맺은 데서 기원한다. 이후 다른 칸톤들이 가세하면서 지금은 26개 칸톤(20개 주와 6개 준주)이 모인 연방국가로 발전했다.

    스위스의 국토 면적은 한국의 40%에 불과하지만 공식 언어가 4개(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레토로만어)나 되고 26개 칸톤은 고유의 법과 교육과정, 세금 체계 등 상당한 자치권을 갖는다. 미국처럼 땅덩이가 거대한 나라도 아닌데 이 작은 나라 안에서 지역마다 고유의 색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역마다 자신들의 관습을 이어가는 데 높은 자부심과 열정을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전통을 북돋우는 동호회 문화

    스위스인들이 고유의 풍습과 전통을 이어가는 데 큰 동력이 되는 게 바로 동호회(Verein) 문화다. 혼자 하긴 어려워도 여럿이 함께 하면 더 쉽고 재미있는 법. 인구 800만 명이 사는 스위스에 동호회가 10만 개에 달할 정도로 동호회 문화는 스위스인의 DNA에 뿌리박혀 있다고들 말한다. 각종 스포츠와 문화 관련 동호회가 많은데 특히 지역의 전통을 이어가는 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하는 오래된 동호회도 많다. 이를테면 민속의상 동호회, 요들 동호회, 알프호른  동호회, 스위스 전통 씨름인 슈빙엔 동호회 등이 있다.

    지난해 여름 내가 사는 소도시에서 3일에 걸쳐 스위스 북동부 요들 축제가 열렸다. 이른 새벽부터 각 지역의 요들 동호회 회원들이 민속의상을 차려입고 배낭을 멘 채 속속 기차역에 내리고 있었다. 조용한 소도시가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것도 신났지만 이들이 100년 전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 아무렇지 않게 거리에서 민속의상을 입고 악기를 짊어지고 다니는 모습이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야외무대에서 요들을 부르거나 알프호른을 연주할 뿐 아니라 도시 중심의 교회에서 열린 요들 대회에도 나가기 때문에 실력을 발휘하기에 앞서 살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호기심에 나도 교회에 들어가 요들 대회를 참관했는데, 동호회원들이라지만 상당한 실력과 진지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여러 지역의 판소리 동호회원들이 모여 한복을 입고 판소리 축제에 참가해 대회도 열고 구경 온 시민들도 함께 먹고 마시며 다양한 판소리를 즐기는 풍경이라고 할까. 전통이 취미가 되고 취미는 즐거움이 되어 일상적으로 전승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총각파티에서 펼쳐진 요들 합창

    내가 쿨하다고 느끼는 건 비단 나이 든 어르신들만이 이런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젊은이와 청소년들도 자신들의 전통을 소중하게 느끼고 평상시에 이를 즐긴다는 점이다. 지난해 여름 남편의 친구인 미하엘과 미셸 커플이 결혼식을 앞두고 마련한 총각파티, 처녀파티에서 이를 다시 한 번 느꼈다.

    여러 서양 국가처럼 스위스에도 총각파티, 처녀파티 문화가 있다. 결혼식 전에 날을 잡아 신부는 여자들끼리, 신랑은 남자들끼리 밤늦도록 먹고 마시고 놀면서 싱글로서의 마지막 한때를 거나하게 즐기는 문화다. 보통 신랑 신부의 총각파티, 처녀파티는 따로 하는데 미하엘과 미셸은 낮에는 남성팀과 여성팀으로 나눠 각자 놀고 저녁에 산속의 산장에서 만나 마치 대학생들의 MT처럼 밤을 지새우며 놀았다.

    초저녁 여성팀이 산장에 도착했을 때 미하엘과 나의 남편을 비롯한 남자 열댓 명이 이미 모닥불을 피워놓고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스위스의 상징이자 국화인 에델바이스 꽃이 수놓인 하늘색 셔츠를 맞춰 입고 있었다. 이것도 스위스의 전통 셔츠다. 그러고는 모닥불 가에 둘러서서 진지하게 요들을 합창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여자들을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이었는데, 이를 위해 낮에 아펜첼 시내에서 단체로 요들 강좌에 참여했단다. 게다가 연습으로 아펜첼 거리 한복판에서 많은 행인이 구경하는 가운데 강사의 지휘 아래 요들을 부르고 왔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인이라고 다 판소리를 잘하는 게 아니듯 스위스인이라고 다 요들을 잘 부르는 건 아니며 이들은 이날 하루 요들을 배운 초보 중의 초보인지라 썩 멋진 하모니는 아니었지만 이런 깜짝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 자체가 귀엽고 감동적이었다.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총각파티에서 자기 나라의 전통을 이렇게 신선하고 쿨하게 즐길 수 있다니! 이 또한 내게는 신선한 문화 충격이었다.



    수백 년 된 가옥에서  살다

     스위스인들의 전통 사랑은 오래된 집에 대한 애정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스위스에도 다른 유럽의 도시들처럼 100년 넘은, 격조 있는 건물이 많다. 도시뿐 아니라 마을이나 농가도 마찬가지다. 스위스를 여행해본 사람들은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면서도 깔끔하게 관리된 목조주택에 색깔 있는 덧창을 달고 창가에는 제라늄 화분으로 사랑스럽게 장식해 놓은 집들을 보았을 것이다. 전형적인 스위스 민가의 모습이다.

    12년 전 배낭여행으로 처음 스위스를 찾았을 때 이런 집들을 보면서 ‘저런 집에서 사는 기분은 어떨까, 정말 사는 게 동화 같을까’ 하는 상상을 했었다. 그러니 저런 오래된 집에 사는 지인들을 방문할 일이 있으면 은근히 기대가 된다.

    내 친지인 프레니 아주머니는 4대째 내려오는 식당을 운영하는데, 나무로 된 식당 건물이 참 아름다운 데다 지난해 여름에는 장크트갈렌의 한 꽃집에서 개최한 ‘창가 제라늄 꾸미기 대회’에서 당당히 이 지역 3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창가의 꽃 장식에도 정성을 쏟는다. 이 식당 내부의 나무 대들보에 188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기에 처음엔 이 건물이 1883년에 세워진 줄 알았다. 그랬더니 프레니 아주머니 말이, 1883년은 리모델링을 한 해이고 건물이 처음 세워진 건 400년 전쯤 된다는 것이다. 400년 된 건물에서 여전히 사람이 살고 식당이 영업을 한다니!


    전통 민가 꾸미는 데 심혈

    이런 오래된 집들은 지역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집주인 마음대로 철거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증축이나 리모델링에도 엄격한 제한을 받는다. 문화유산이 아니더라도 스위스인들은 낡은 주택을 철거하고 새로 짓기보다 낡은 주택을 뼈대라도 남기고 어떻게든 리모델링을 하는 쪽을 선호한다. 새집, 새 아파트를 선호하는 한국인과는 완전히 다른 마인드다. 이곳에서는 수백 년 된 집들도 내부는 주기적으로 리모델링을 해서 깔끔하게 유지되는 게 보통이다.

    스위스의 투르가우 칸톤에는 색칠한 나무로 벽을 꾸민 수백 년 된 전통 민가가 많다. 지인의 딸이 이런 200년 된 집에서 살고 있는데 최근에 욕실 2개와 주방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관청에 수많은 서류를 내고 허가를 받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인 건 물론이고 이 공사에 들어간 돈이 12만 스위스프랑(약 1억3800만 원)이나 된다고 한다! 지인의 말이, 아예 새집을 지으면 욕실 2개와 주방을 만드는 데 이렇게 큰돈이 들어가진 않는데, 오래된 집에서 기존의 욕실과 주방의 자재를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다시 짓는 과정에 더 큰돈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딸은 이 집에 자부심과 애정을 느끼며 만족스러워한다고 했다.

    나는 한국인이라 그런지 이왕이면 새집이 좋다. 오래된 집이 고즈넉하고 아름답긴 해도 수리, 보수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안전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런데 무조건 새것을 선호하기보다 조금은 고지식할 정도로 오래된 것을 지키고 보존하려는 스위스인들을 보면서 손때 묻은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을 배워가고 있다. 이런 노력이 모여 아름답기로 소문난 지금의 스위스를 유지하는 것이리라.




    신성미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와 동아일보 경제부·문화부, 동아 비즈니스리뷰 기자로 일했다. 2015년부터 스위스인 남편과 스위스 장크트갈렌(St.Gallen) 근교에 살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스위스 사회, 문화에 대해 블로그(bl-og.naver.com/sociolog icus)에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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