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위스 운전자들은 교통규칙을 잘 지키고 매너 있게 운전하기로 유명하다.
- 본성이 착해서도 아니고 준법정신이 높아서도 아니다.
- 무엇보다도 강력한 법과 무시무시한 처벌 규정이 있기 때문.
스위스에 처음 왔을 때 자주 겪은 일이다. ‘사람보다 차가 먼저’인 서울에서와 달리 보행자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곳에 오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운전자에게 굳이 인사하며 고마워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다른 스위스인들은 자동차가 달려오고 있어도 당연히 자동차가 알아서 멈출 것을 예상하고 도도하게 길을 건넌다. 사람이 차를 피해 다니는 게 아니라 차가 사람을 피해 다닌다.
안전에 목숨 건 운전자들
스위스 운전자들은 교통규칙을 잘 지키고 매너 있게 운전하기로 유명하다. 특별히 안전에 위협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경적을 울리지도 않고, 속도제한과 신호를 잘 따르며 고속도로에서는 추월차선을 철저히 지킨다. 양보운전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지독할 정도로 안전에 목을 매는 게 스위스 사람들이다. 웬만한 시내 중심가는 대부분 자동차 통행이 금지돼 있고, 어린이들은 눈에 잘 띄는 형광색 띠를 목에 걸고 등하교를 한다. 운전자들끼리 차창 사이로 언성을 높이거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버스기사가 다른 차에 방해를 받을 때 욕설을 내뱉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나 역시 보행자이자 운전자로서 다른 운전자들을 신뢰하게 되고 양보운전을 일상화하게 됐다.스위스인들은 왜 이렇게 교통규칙을 잘 지키는 걸까. 본성이 착해서? 준법정신이 강해서? 물론 남들이 양보운전하면 나도 따라 하게 되고, 준법정신이 강한 곳에선 나 역시 법을 잘 따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스위스에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법과 무시무시한 처벌 규정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통규칙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선 안전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답답하다고 안전벨트를 매지 않거나, 아기를 카시트 없이 어른이 안고 타거나, 맥주 한 잔 정도는 괜찮다며 음주운전을 한다. 그런데 스위스에서 그렇게 하면 막대한 벌금을 무는 건 물론 면허정지, 면허취소를 각오해야 한다.
나는 한국에서도 규칙을 잘 지켜가며 조심조심 운전하는 스타일이어서, 시원스럽게 운전하는 사람들한텐 소심하다며 놀림을 받았는데 스위스에 와서는 더욱 더 조심조심 운전하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교통법규도 꼼꼼히 지킨다.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사람도 무조건 안전벨트를 착용해야 하고, 안전을 위해 낮에도 전조등을 켜야 하고, 경적을 울리는 건 금지되며, 도로에서는 무조건 버스에 우선권을 줘야 하고…. 지켜야 할 규칙이 너무 많아 혹시 내가 모르는 규칙이 또 있을까봐 늘 긴장하게 된다.
아, 어린이 카시트!
프랑스 파리에 사는 전 직장 선배가 몇 달 전 여덟 살, 세 살 된 두 아이와 함께 스위스에 놀러왔다. 나는 이들과 함께 하이디 마을이 있는 마이엔펠트까지 한 시간 거리를 자동차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여행 전날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스위스의 이 무수한 교통규칙 속에서 내가 모르는 규칙이 또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뭘까, 이 찜찜한 기분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것은…, 그것은…, 아, 어린이 카시트!’부랴부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린이 카시트 의무 규칙이 있었다. 나는 아이가 없으니 아직 카시트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만 12세 미만에 키가 150cm 미만인 어린이는 무조건 어린이(유아) 카시트에 앉혀야 하며 이를 어기다 적발될 경우 벌금 60스위스프랑(약 7만 원)을 내야 한다. 처음엔 ‘설마 적발되겠어?’ 하는 생각에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남편은 과연 스위스인다운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적발될 경우 벌금을 내는 게 문제가 아니야. 만에 하나 작은 사고라도 났을 경우 아이들을 카시트에 앉히지 않았으니 더 큰 처벌을 받을 수도 있어. 무엇보다도 카시트 장착이 의무라는 건 아이들을 카시트에 앉히지 않을 경우 위험하다는 뜻인데, 아이들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지.”
한밤중에 갑자기 카시트 두 개를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우리는 불편하더라도 기차를 타고 또 한참을 기다려 버스로 갈아타며 느릿느릿 하이디마을로 향했다.
스위스에서 운전하면서 가장 신경 쓰이는 게 바로 제한속도다. 당연히 제한속도를 꼬박꼬박 지키지만, 나도 모르게 시속 몇 km 빠르게 운전하는 순간이 있다. 이때 말 그대로 ‘재수 없이’ 걸리면 초월한 시속에 따라 최소 40스위스프랑(4만7000원)부터 보통 수십만 원에 달하는 벌금을 내야 한다. 예를 들어 제한속도가 시속 50km인 도로에서 시속 66km로 달렸다가 적발되면 벌금 250스위스프랑(29만 원)을 내야 한다. 초과속도에 따라 경찰 및 법원의 행정비용이 부과되거나 형사처벌이 내려질 수도 있다. ‘아차’ 하는 사이 신호위반을 하면 벌금 250스위스프랑(29만 원)이 날아온다.
속도위반도 일수벌금제
2010년 스위스 장크트갈렌 칸톤에서 한 스위스인이 속도위반으로 법원에서 무려 29만9000스위스프랑(3억5000만 원)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그는 페라리 테스타로사를 타고 제한속도 50km인 마을 도로에서 시속 100km로, 제한속도 80km인 외곽도로에서 시속 140km로 달리는 모험을 저질렀다.이처럼 어마어마한 벌금이 부과될 수 있는 건 스위스에서 피고인의 소득에 따른 ‘일수벌금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속도위반의 정도가 심각할 경우 단순히 정해진 벌금을 무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재판을 받게 되는데, 피고인의 소득을 1일치로 환산해 벌금을 정하고 이를 재판에서 선고된 처벌 일수에 곱해 총 벌금이 정해진다.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소득이 높을수록 많은 범칙금을 내는 것이다. 이 최고 벌금의 주인공은 고급차 다섯 대를 소유한 부자인데, 1일당 벌금 2300스위스프랑에 130일을 선고받아 총 벌금 29만9000스위스프랑을 내게 된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운전면허를 딴 뒤 10년이 넘도록 꾸준히 운전해왔다. 쭉 서울에서 살았으니 골치 아픈 도심 운전에도 익숙하다. 그럼에도 스위스에 와서 운전대를 잡았을 때는 다시 초보 운전자가 된 것처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실수로 규칙을 어길 경우 물게 될 범칙금도 무섭지만, 무엇보다 한국과는 다른 지리적 특성이 생소했다.
산이 많은 스위스에는 당연히 좁고 구불구불한 커브 길이 많다. 이런 산속 도로에서 제한속도가 80km나 된다는 게 놀라웠다. 산속의 왕복 2차선 좁은 도로에서 커브에도 아랑곳없이 시속 80km로 쌩쌩 달리는 차들을 보면 맞은편 차선의 차량이 내게로 돌진해오는 것만 같아 진땀이 났다. 안전 제일이라는 스위스에서 어떻게 이런 도로를 시속 80km로 달리게 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또 자정이 넘도록 환한 서울의 도로에 익숙하다가 스위스에서 밤에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한 국도나 시골길을 운전할 때면 다른 운전자들은 어떻게 저렇게 잘들 달리나 당최 신기하기만 하다. 스위스 전역에 철도가 촘촘하게 깔려 있어 운전할 때 기차가 지나가진 않는지 항상 주시하는 것도 중요하다.(물론 기차가 오기 전에 빨간 신호가 켜지고 차단봉이 내려온다.)
도로에 중앙선이 사라졌다?
스위스의 도로는 중앙선이 한국처럼 명확하게 노란색으로 그어져 있지 않다. 흰색 실선이거나 점선이다. 실선이면 어차피 차선을 변경할 수 없으니 상관없지만 중앙선이 흰색 점선으로 그어져 있으면 외국인들은 이게 같은 방향 차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역주행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또 스위스에선 우회전을 할 때도 신호를 받아야 한다. 이를 몰랐을 땐 한국에서처럼 당연하게 우회전을 했는데 조수석에 앉은 남편은 겁에 질린 채 손을 심장 위에 얹고 떨고 있었다.
스위스의 도로는 크게 3가지로 구분되고 이에 따라 제한속도가 정해져 있다. 시내 및 마을에서는 시속 50km, 도시 및 마을의 외곽이나 국도에서는 시속 80km, 고속도로에서는 시속 120km가 기본 제한속도다. 구간에 따라 제한속도가 달라지기도 하는데 이때는 별도의 속도 표지판으로 알려준다. 이 규칙도 내겐 상당히 애매하게 다가왔다. 주변에 온통 들판과 소들뿐인데 속도 표지판이 따로 없어서 여기가 마을인지 외곽인지 구분이 안 갔다. 속도 표지판이 빨간색이 아닌 회색으로 돼 있으면 속도제한이 끝났다는 뜻이다. 주거지에는 시속 30km 구간도 많으므로 늘 표지판을 주시해야 한다. 또 자전거 전용차로가 있을 때에는 우회전 시 옆에 자전거가 달리고 있지 않은지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70여 가지 우선권 규칙
스위스에서 운전하며 가장 많이 마주치는 게 회전교차로(Roundab out)다. 회전교차로 앞에서는 일단 정지했다가 별도의 신호 없이 운전자가 스스로 판단해서 진입하는데, 이미 회전교차로에 진입한 차량, 나의 왼쪽에서 달려오는 차량이 우선권을 갖는다. 이를 잘 보고 진입해서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오른쪽 방향으로 교차로를 돌다가 내가 나가려는 방향에서 깜빡이를 켜고 나가면 된다.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없고 길을 잘못 들었을 경우 간편하게 돌아 유턴할 수 있기 때문에 꽤 실용적인 시스템이다. 또 군데군데 회전교차로가 있으니 과속방지턱 없이도 차량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문제는 회전교차로를 처음 접하는 운전자들에겐 꽤나 겁이 난다는 것.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나도 처음엔 차량들이 마구 돌고 있는 회전교차로에 진입하기가 겁이 났다. 더욱이 회전교차로가 2차선으로 된 곳을 만나면 내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스위스의 운전 규칙 중 가장 복잡한 건 우선권 규칙이다. 한국과 달리 직진이 무조건 우선권을 갖는 것도 아니고, 경사로에선 한국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차량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차량이 우선권을 갖는다.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왜 세계 교통부장관들이 만국교통대회 같은 걸 열어서 운전 규칙을 통일시키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낯선 외국에서 운전할 때 사고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스위스 도로에서 우선권 규칙이 워낙 복잡해 스위스투어링클럽(TCS) 홈페이지에서 우선권 규칙을 찾아보았는데, 우선권 관련 항목만 73개나 되니, 말 다했다. 주도로에서 달리는 차량이 우선권을 갖는데, 그럼 내가 달리고 있는 도로가 주도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도로에 아주 가끔씩 보이는 아주 작은 노란색 마름모꼴 표지판이 있는데 그게 주도로라는 뜻이다. 전혀 친절하지 않은 표지판이다. 신호등이 없는 사거리에서 바닥에도 아무 표지가 없다면 오른쪽에 있는 차량이 우선권을 갖는다.
그러니 이 73개나 되는 우선권 규칙을 몰랐을 때는 교차로에서 우선권도 없는데 일단 멈추지도 않고 쌩쌩 달린 적도 있다. 다행히 한적한 밤중이라 주도로에서 달리는 차량이 없어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편은 또 한 번 겁에 질려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앞서 스위스인들의 운전 매너가 좋은 편이라고 썼는데, 그렇지 않은 흥미로운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다. 스위스 북동쪽 국경을 넘으면 콘스탄츠라는 독일 도시가 나온다. 독일은 스위스보다 물가가 싸기 때문에 주말이면 이곳에 원정 쇼핑을 온 스위스인들로 북적인다. 지난해 여름 콘스탄츠 중심가의 쇼핑몰에 갔다가 자동차를 쇼핑몰 내 지상 주차장 가운데 가장 높은 8층쯤에 주차하게 됐다. 주차된 차량들의 번호판을 보니 절반 이상이 스위스 차량이었다. 마침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16)에서 스위스 대 폴란드의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쇼핑몰 내에서 이를 생중계했다.
차종으로 사람 판단하지 않아
나는 남편과 함께 이 생중계를 보다가 경기가 끝나자마자 집에 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수많은 사람이 경기가 끝나고 한꺼번에 주차장에서 차를 빼 나가려다보니 주차장 안에서 극심한 정체가 벌어졌다. 하필 주차장 꼭대기에 주차했던 우리는 차로 1층까지 내려가는 데만 무려 한 시간이 걸렸다. 당연히 누구나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스위스는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승부차기 끝에 진 상황이었으니 주차장 내 스위스인들의 짜증은 배가됐다. 평소 양보 잘하던 스위스 운전자들이 이 상황에서는 얌체 차량이 끼어들 때마다 경적을 울려대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온화하기로 소문난 스위스 운전자들로부터 이런 군중심리를 엿보다니 참 흥미로웠다.유럽 여행을 가본 사람들은 유럽 사람들이 비교적 작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걸 보았을 것이다. 오래된 유럽 도시에서 운전하려면 좁은 길에서도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작은 자동차가 실용적이다. 또 유럽인들은 외양보다는 실용성과 절약에 가치를 두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해치백 스타일의 소형이나 준중형 자동차가 흔하다.
스위스는 부자 나라답게 도로에서 포르셰, 아우디, 메르세데스, BMW, 페라리 같은 고급차도 흔히 볼 수 있다. 날씨 좋은 여름에는 컨버터블이나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오래된 빈티지 차량을 타고 여가를 즐기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차종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없다. 누가 포르셰를 탄다고 대우해주거나 낡은 소형차를 탄다고 무시하는 법은 없다. 차는 차고 사람은 사람일 뿐이다.
스위스의 도로교통법과 운전문화는 안전 제일과 준법정신이라는 스위스인의 최고 가치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거울이다. 매일 출퇴근길에 운전하면서 나 역시 이런 가치를 배워가고 있다.
신성미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와 동아일보 경제부·문화부, 동아 비즈니스리뷰 기자로 일했다. 2015년부터 스위 스인 남편과 스위스 장크트 갈렌(St.Gallen) 근교에 살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스위스 사회, 문화에 대해 블로그(blog.naver.com/sociolog icus)에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