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도 나이키나 코카콜라와 다를 게 없다.’
정치인들이 들으면 과히 기분 좋을 소리는 아니지만, 사실이다. 사실일 뿐만 아니라, 정치인이라는 상품을 유권자라는 소비자에게 팔아먹고 사는 정치 컨설턴트들의 세계에서는 진리로 통하는 말이다.
2000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미국은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올 대선의 경우 민주당 앨 고어 후보와 공화당 부시 후보 간의 대접전은 역대 어느 대통령 선거보다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두 후보가 내세운 정책의 차이가 뚜렷하지도 않고, 주목할 만한 대형 이슈도 없다는 점이 오히려 두 후보의 대결을 첨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선거판일수록 두 진영의 정치 컨설턴트들의 구실이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짝수 해의 황금 노다지, 미 선거판
미국 정치판은 짝수 해와 홀수 해가 엄격하게 나뉜다. 짝수 해에는 올해처럼 대통령 선거를 비롯해, 상하원 의원 선거, 주지사 선거에서부터 지방정부의 각종 선거직 자리의 임자를 뽑는다. 중간 선거도 물론 짝수 해에 치러지며, 간혹 일부 특수 선거만이 홀수 해에 치러질 뿐이다. 그러므로 짝수 해에 특수 경기가 조성됨은 물론이다. 이른바 정치 산업 경기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정치 생명을 걸지만, 정치인이라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컨설턴트들도 정치인 못지않게 눈에 불을 켜고 정치 시장을 파고든다. 돈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치시장이야말로 노다지다. 일확천금을 노렸던 서부 개척시대를 무색케 할 컨설턴트라는 이름의 ‘총잡이’들이 혈혈단신으로 혹은 무리를 지어 정치 마켓을 누비고 다닌다. 무법 천지, 배신, 일확천금 등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의 상징어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것이 짝수 해 미 선거판의 진풍경이다.
돈은 미국 정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미국 선거를 정의 내릴 때 역시 빼먹을 수 없는 단어가 돈이다. 지하 수맥처럼 잠복해 있던 돈이 선거 때에는 지표로 솟아올라 지표면을 따라 흐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정치 컨설턴트들이 그리는 족적과 행동 반경은 이 지표수 지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올해 미 대통령 선거와 의회 의원 선거에 뛰어든 후보들이 쓸 선거 비용은 대략 3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유권자의 표를 현금으로 사들이는 매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미국의 정치 풍토를 감안할 때, 후보들이 책정한 선거 비용의 태반은 결국 정치 컨설턴트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이다.
올해의 선거 비용은 1996년 선거 때보다 50%나 많아진 액수이다. 이런 인플레이션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정치 컨설턴트들이다. 이들은 후보를 만들어내고, 개조하고, 어떤 이슈가 중요한지 결정하며, 선거 자금을 모으고, 텔레비전 광고를 만들어내는 대전략가들이자 고도의 특수 지식과 노하우를 갖춘 고급 기능 보유자들이다. 정치 캠페인이 무엇인지는 이들이 정의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도 대선 후보로 나섰다가 또 도중 하차한 백만장자 스티브 포브스의 1급 선거 전략가는 한 달 만에 22만3000달러를 챙겼다. 앨 고어 부통령이 올해 예비선거에서 컨설팅 비용과 언론 광고에 들인 돈은 자그마치 1000만 달러가 넘는다. 거액이 오가다 보니 선거 캠프에 고용된 회계사들이 만지는 떡고물도 만만치 않다. 조지 W. 부시와 공화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맞붙었던 존 매케인 상원 의원 캠프에서 회계 장부를 정리했던 회계사들도 1500만 달러를 거머쥐었다.
정치 컨설턴트의 꽃, 미디어 전략가
정치 컨설턴트의 꽃은 뭐니뭐니 해도 언론 전략가다. 이른바 ‘정치 광고’가 이들의 손에서 주물러진다. 선거 분석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올 한 해 미국의 선거판에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인쇄물 등의 매체를 통해 정치 광고에 이미 지출되었거나 앞으로 수개월 안에 쏟아부을 돈은 무려 6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92년 대선 때 썼던 3억 달러의 딱 2배이며, 96년 대선 때의 4억 달러에 비하면 40% 증가한 액수이다.
정치 광고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매체는 물론 텔레비전이다. 1998년의 짝수 해에 정치 광고로 지출된 비용 가운데 텔레비전이 차지한 비율은 전체의 83.5%에 달했다. 라디오가 10.2%, 신문이 4.6%를 차지했고, 옥외 광고판과 잡지가 각각 1.5%와 0.2%였다.
주요 광고 회사 가운데 허스트-아가일(Hearst-Argyle)이 58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려 선두였고, 2위 벨로(Belo)가 3600만 달러, 3위 스크립스(Scripps)가 2000만 달러의 수익을 챙겼다. 또 1998년 한 해 동안 전체 텔레비전 광고 가운데 물량 면에서 정치 광고가 차지한 비중은 자동차(25%)와 소매업(15%) 광고에 이어 세 번째(10%)였다.
미디어 컨설턴트, 정치 광고 제작자, 애드 메이커, 애드맨 등은 모두 언론 전략가를 지칭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언론 전략가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소리는 ‘미디어 귀족(media baron)’이라는 호칭일 것이다.
미 전역을 누비면서 선거운동을 벌이는 고어나 부시 후보의 사진이 신문에 실릴 때마다, 비행기 안이든, 버스 안이든, 호텔 방이든, 선상이든, 기차 안이든 후보 바로 옆에는 늘 이 미디어 컨설턴트들이 후보와 코를 맞대고 앉아 최측근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순간들이다.
공화 민주 양당은 평균 4~5개의 미디어 컨설턴트 그룹을 고용하고 있다. 어느 한 그룹에게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민주당 앨 고어 대통령 후보 진영만 해도 슈럼 디바인 앤 도닐런(Shrum, Devine · Donilon)이라는 컨설턴트 펌(firm) 외에 스퀴어(Squier) 컨설턴트 펌 두 곳에 미디어 전략을 맡겼다.
이중 슈럼 펌은 대대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의 연두교서 작성을 도맡아온 민주당의 대표 주자 컨설턴트 펌이다. 클린턴 대통령의 연두교서 문장도 슈럼 펌이 만들었고, 케네디 가문의 모든 연설문도 슈럼 펌의 작품이다. 지금은 앨 고어 후보 진영 미디어 전략의 최선두에 서 있다.
미디어 펌들은 나름대로 비장의 주무기를 한두 개씩 보유하고 있다. 위의 슈럼 펌이 대통령 연두 교서 등 주로 문장과 정책 이슈 다듬기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면, 스트러블(Struble) 펌은 민주당 현역 상원 의원이 주고객이다. 스트러블이 관리하는 상원 의원 고객 명단이야말로 스트러블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하원보다는 상원 의원 선거가 늘 경쟁이 치열하고 긴장감 높고 박진감 넘치고 돈도 많이 돈다. 민주당 상원 캠페인을 도맡아 장기 집권(?)하고 있는 스트러블 펌은 민주당 하원 캠페인 위원회도 맡아달라는 ‘구애’를 받고 입이 벌어져 있다.
공화당의 단골 미디어 전략 팀 가운데 알렉스 캐스텔라노스(Alex Castellanos)가 이끄는 캐스텔라노스 펌은 가차 없는 공격용 비난 광고로 명성을 떨치는 미디어 귀족이다. 1996년 보브 돌 캠페인도 이 캐스텔라노스의 작품이다. 캐스텔라노스 펌이 공격 광고 외에 하나 더 감춰놓고 있는 비장의 무기는 자사 고객들에게만 제공하는 특유의 하이테크 서비스다. 이른바 광고 추적 시스템인데, 텔레비전 라디오 등 전파를 타고 나가는 모든 정치 광고를 일일이 추적해낸다. 네트워크는 물론 미 전역에서 방송되는 스폿 광고나 로컬 광고의 방영 여부 및 시간, 횟수 등을 모두 추적 점검해주는 이 서비스야말로 고객 만족의 으뜸가는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캐스텔라노스 펌은 올해 부시 후보 진영의 광고 캠페인도 맡고 있다.
마이크 머피(Mike Murphy)가 수장인 머피 펌은 1992년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재선 캠페인 언론 전략을 담당했던 ‘3 아미고스’ 가운데 하나. 올해는 존 매케인 상원 의원 캠페인에 합류했다가 결국 도중 하차의 쓴잔을 마셨으나, 매케인 의원이 도중 하차하기 한 달 전 먼저 손을 터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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