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 시드니 ‘힐스 센터’를 뜨겁게 달군 박강성의 열정적 무대.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먼 길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해외동포들 대부분이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잘 아는 박강성은 ‘사랑하는 그대에게’ 등의 노래로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하긴, 그 누구의 삶인들 쓸쓸하고 고단하지 않겠는가.
그 다음은 박강성이 위로받을 차례였다. 그는 히트곡 ‘문밖에 있는 그대’를 부른 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던 자신의 젊은 날을 담담하게 회상했다. 오랜 무명시절을 겪으며 술과 담배에 절어 살던 얘기를 신음하듯 털어놓았다. 잘나가는 동료와 후배를 보면서 좌절했던 얘기도 들려주었다. 자살을 생각할 만큼 심각한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애’에 속절없이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얼음장보다 더 차갑게 반응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박강성 자신을 죽여야 했다.
얼마나 죽고 못살았던사랑이기에, 저토록치명적인 어둠이 되었을까?
널 죽이고 싶어
치사량에 가까운 극약처방; 비상(砒霜)독을 품은 칼끝으로독을 잘라내야 하는 슬픔을
알겠니? 독약의 전신(前身)은따뜻한 돌가루, 죽고못사는 사랑이었다는 걸
-윤필립의 시 ‘독약(毒藥)’ 전문
아무런 꾸밈 없이 자신의 속이야기를 털어놓은 사람에게선 청량감이 배어나온다. 그런 점에서 박강성은 ‘산소 같은 남자’다.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잡초처럼 견뎌낸 무명시절
[ 화려한 중앙무대를 일부러 외면했다면 그건 거짓말이지요. 제가 지금은 라이브 가수로 자리매김했지만, 솔직히 원해서 된 게 아닙니다. 그 길밖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도 있지만,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차례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남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서툴렀고, 누구에게 사랑받는 일도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1982년 MBC신인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으며 비교적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그건 잠깐일 뿐이었습니다. 동료나 후배들은 펄펄 날아가는데 저는 혼자서 바닥을 박박 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 수 있는 무대는 술집밖에 없었습니다. 온갖 상처가 제 젊은 날을 할퀴었습니다. 때로는 술집에 온 손님들과 주먹질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자꾸만 안으로 움츠러들었고, 모든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어준 게 있다면 술과 담배였습니다. 혼자 취하고, 혼자 앉아서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망연히 바라보는 날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냥 담배연기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술에 취해버렸지요.
그러다 문득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내려설 곳이 없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왔다는 절망감이 오히려 나에게 힘을 준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상처만 받고 살아야 하는가?”
저는 그렇게 막 울부짖었습니다. 눈물범벅이 되어 이를 악물었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다시 태어난 박강성이다. 어제의 박강성은 가라! 죽어버려라!”
그건 밟히면 밟힐수록 더욱 강하게 일어서는 잡초의 생리였고, 열패자의 끈질긴 생명력이었습니다. 때늦은 참회였지만, 그날 아침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뒤돌아보니 저는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세상 탓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허황한 꿈만 꾸고 있었을 뿐, 그 꿈을 펼치기 위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더군요. 그야말로 준비되지 않은 가수 그 자체였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선 삶을 바꾸어야 했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열심히 해야 하고, 누가 나를 열심히 하도록 만드는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청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