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가사와라 제도는 일본 본토에서 1000km 남쪽에 위치한 중부 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다. 그중에서 가장 큰 섬인 치치지마(父島)는 이오지마(硫黃島) 북쪽 200km에 있는 섬으로, 일본 본토와 이오지마를 연결하는 보급의 중계지였다. 치치지마에 대한 공격이 그날 부시 중위의 임무였다.
제51 뇌격대(VT-51)의 일원으로 출격한 부시 중위의 애기(愛機) 애칭은 ‘바버라’, 고향에 두고 온 약혼녀의 이름이다. 그런데 ‘바버라’는 8000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중 일본군의 대공포에 맞아 화염에 휩싸였다. 다행히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부시 중위는 낙하산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탈출하면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지만 무사히 바다에 떨어진 부시 중위에겐 계속 행운이 따랐다. 구명정은 상당히 먼 곳에 떨어졌지만 우군기가 강하와 상승을 반복하면서 위치를 가르쳐준 덕분에 그는 헤엄쳐서 구명정에 도달했다. 일본군 함정 두 척이 그를 생포하러 쫓아왔지만 우군기들이 물리쳤다. 부시 중위는 그렇게 두세 시간가량 치치지마 앞바다에서 표류했다. 그후 풍향이 바뀌면서 구명정이 치치지마 쪽으로 흘러가던 도중에 미군 잠수함이 그를 구조했다.
당시 오가사와라 제도를 겨냥한 수차례의 폭격 와중에 미군기가 격추돼, 미국 9명이 바다에 떨어졌는데, 조종사 가운데 부시 중위만 유일하게 생환했다. 운이 조금만 나빴더라도 그는 8명의 동료와 함께 처참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그들은 일본군의 엽기적 식인(食人) 만행의 대상이 됐다. SF영화에서 나옴직한 이야기지만, 부시 중위마저 희생됐다면 그는 물론이고 아들 부시 대통령 역시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늘날의 국제정치 상황, 그리고 현대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치치지마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육군은 다치바나 요시오(立花芳夫) 소장이 이끄는 5개 보병대대 등 약 9000명의 병력으로 이뤄졌으며, 해군은 모리 구니조(森 國造) 소장 휘하에 치치지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약 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1945년 3월 이오지마의 일본군이 전멸하자 일본 본영은 치치지마의 다치바나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제109사단장에 임명했다. 해군도 모리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최고 지휘관이 된 두 장교는 미군 포로 학대와 처형, 그리고 식인이라는 엽기적인 사건을 직접 지휘했다. 그들 외에도 마토바 스에이사무 육군 소령과 요시이 시즈오 해군 대령이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한두 명의 정신이상자가 포로를 학대하거나 즉결 처형하는 경우는 당시 일본군대에서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부대의 최고지휘관들이 관여해 직접 포로를 구타, 학대, 고문하고 인육을 먹은 사건은 치치지마를 제외하고 달리 예가 없었다.
군의관, 처형 입회한 뒤 장기 적출
사건은 다치바나와 마토바의 광기가 어우러져서 불거졌다. 다치바나 중장과 마토바 소령은 광포한 성격으로 평소에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1947년 1월13일 도쿄재판에서 로빈슨 검사가 일본군의 전시 만행을 밝히기 위해 제출한 마토바의 진술서에는 식인 만행이 시작된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인육사건은 1945년 2월23일부터 25일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나는 사령부로 불려가서 다치바나 장군에게 ‘미군 비행사는 스에요시부대에서 처형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사령부에서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했습니다. 화제는 부건빌이나 뉴기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으로 옮겨졌으며, 일부 부대에서 비축된 식량이 동나고 추가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중에 가토 다케무네 대령이 우리를 위해 연회를 베푼다고 해서 갔는데, 술과 안주가 충분하게 마련되지 못한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불만을 표시하면서 뭔가 육류와 술을 준비할 방도가 없냐고 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