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일본의 FBI’로 불리는 공안조사청은 매년 ‘내외정세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한다.
- 개요는 공개하지만 60쪽 분량의 전문은 대외비로 처리되는 이 보고서는, 일본정부가 국제정세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주요한 자료다. 12월말 제출된 2005년 연례보고서 전문을 입수해 북한관련 부분을 번역한 이 자료는 ‘일본이 과연 북한과 남북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명확히 알게 해준다. [편집자]
‘내외정세의 회고와 전망’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국제 테러 정세와 북한을 둘러싼 핵문제 및 납치문제, 아사하라의 복귀를 더욱 선명하게 내세우고 있는 옴진리교의 움직임 등을 중심으로 2004년의 국내외 공안 동향을 되돌아보고 향후를 전망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세에 대한 공안조사청의 대응과 과제도 함께 기술했다. 본문 중 특별한 언급이 없다면 ‘○월’이라는 표기는 2004년 당해월을 지칭하는 것이다. 본문에 기재한 인물의 직함은 당시 직함을 사용했다.(중략)
(1) 교착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북한 핵문제
2차·3차 6자회담 실시, 북한은 고농축우라늄계획을 부정하면서 제한적 핵 폐기 및 동결 입장을 고수함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대응은 2003년에 이어 북·미·한·중·일·러 6자회담의 틀로 진행되어 서로 강경하게 대립하는 주장 간의 타협을 모색했다. 2차 6자회담(2월25~28일,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은 고농축우라늄(HEU) 계획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면 핵무기 계획을 포기할 것”이며 당면한 제1단계 조치로 “핵무기 계획의 동결”을 제안했다. 또한 그에 대한 보상으로 미국에게 주변국과 공동으로 에너지를 지원할 것,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해 제재를 철회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플루토늄형과 HEU(고농축우라늄)형 핵개발 모두에 대해 핵무기 계획뿐 아니라 평화적 용도의 사용계획까지 포함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CVID)를 요구하면서 그에 대한 보상으로 ‘안전보장’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북미간의 의견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다음 회담을 6월까지 개최” “실무회의 설치” 등의 합의가 의장성명으로 채택되는 것에 그쳤다.
3차 6자회담(6월23~26일)은 이전 회담에서 설치가 합의된 실무회의(1차 5월12~15일, 2차 6월21~22일, 중국 베이징) 후에 개최됐다. 북한은 다시금 HEU 계획의 존재를 부정하고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미국이 적대정책과 CVID를 철회하면 모든 핵무기 계획을 포기할 것”이라며, 그 1단계 조치인 ‘동결 대 보상’에 관한 구체적인 안을 처음으로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대상 : 모든 핵무기 관련시설(5MW 흑연감속로 포함)과 사용후연료봉 재처리를 통해 얻은 플루토늄*동결단계에서는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 않고, 이전하지 않고, 실험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포함동결개시 : 보상이 행해졌을 때사찰방법 : 6자회담 틀에서 협의보상조치 : 200만KW 상당의 에너지 지원(미국이 참여해야 함),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 삭제와 경제제재 철회
한편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폐기할 때까지 3개월의 준비기간을 설정해 그 사이 북한이 HEU 계획을 포함한 모든 핵 계획을 신고하고 IAEA(국제원자력기구) 등에 의한 사찰과 검증을 받아들인다면, 미국 이외의 주변국들이 북한에 에너지를 지원하고 미국이 잠정적인 ‘안전보장’을 제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비록 조건을 달긴 했지만 미국이 이 협의를 통해 ‘핵 동결 단계에서 제3국이 북한에 대해 보상을 제공하는 것을 용인’하는 방침으로 전환함에 따라, 회담 참가국들은 ‘동결 대 보상’안을 1단계조치로 삼아 문제를 해결해나간다는 방향으로 대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북한이 다시 HEU 계획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북미간의 간격은 메워지지 못하고 이전 회담과 마찬가지로 ‘공동성명’이 아닌 ‘의장성명’을 발표하는 것에 그쳤다.
북한은 미국의 제안을 거부, 강경자세를 취하며 4차 6자회담 개최 연기
3차 회담이 끝날 무렵 북한은 미국이 회담에서 CVID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 ‘핵 동결’에 상응한 주변국의 ‘보상’을 용인한 것 등에 대해 호감을 표시했다. 미국의 제안에 대해서도 “유의해볼 필요가 있다”(6월28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고 언급하는 등 일정 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이 보상에 직접 참여해 북미간 신뢰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요구를 미국측이 거절하자 “미국의 제안은 더 이상 검토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비난하면서, ‘전쟁 억지력’ ‘물리적 억지력’의 강화를 반복해서 주장하는 등 강경자세로 선회했다. 또한 “김정일은 폭군”이라는 부시 미 대통령의 발언(8월16일)과 한미연합군사훈련(8월23일~9월3일)을 이유로 9월 말까지 개최하자고 합의했던 4차 6자회담 개최에 난색을 표하기 시작했다.
또한 9월 한국이 과거 IAEA에 신고하지 않은 핵 관련 실험을 행했던 문제가 표면화하자, 북한은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회담에 참가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핵폐기·동결을 할 수 있다는 의향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4차 6자회담은 예정대로 개최되지 못했다.
향후에도 북한은 6자회담을 이용해 미국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려 시도할 것,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려 할 우려도 있음
핵문제에 대해 북한이 취하고 있는 대응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판단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6자회담이 지속되는 한 이라크 문제를 떠안고 있는 미국이 군사공격 등 강경책을 사용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과, 동시에 중국 러시아 한국으로부터 이해와 동조를 얻어 경제원조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기대다. 이렇듯 현재의 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 회담을 지연시켜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핵과 미사일 개발을 진전시키려는 노림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국은 대통령선거에서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향후 PSI(확산방지구상) 등을 활용해 북한의 미사일 수출과 마약·각성제 거래 등을 통한 자금조달을 봉쇄하는 동시에 ‘북한인권법’에 근거해 다양한 행동을 취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북한은 계속해서 6자회담의 틀을 교묘히 이용해 자국의 평화적 기조를 과시하고 미·일·한 공조를 무너뜨려 미국의 고립화와 동요를 부추김으로써 최대한의 양보를 이끌어내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핵·미사일 개발을 계속하면서 핵무기 보유를 반복적으로 시사하고 그것을 기정사실화할 우려도 있다.
(2) 북한은 납치문제의 조기종결을 노리면서 북일 국교정상화 조기실현, 대규모 경제지원 획득 추구
2차 북일 정상회담 결과 납치피해자 가족 8명 귀국
북한은 2004년 초부터 ‘특정선박입항금지특별조치법’ 등 일본의 대북경제제재 관련법 정비 움직임을 반복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북일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일본 외무성 관계자들의 연이은 방북을 수용했고 5월에는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기도 했다.
이 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북일평양선언을 준수하겠다는 의사를 재차 표명하고 납치피해자 가족 8명의 출국을 인정했다. 또한 행방이 불분명한 10명에 대해서는 “백지상태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철저하게 재조사할 것”을 약속했다. 이 결과 납치피해자 가족 8명 중 5명은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귀국했고 남은 3명은 7월 인도네시아를 경유해 귀국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약속한 ‘재조사’는 진전 없어
그러나 북한은 11월 평양에서 열린 3차 실무자협의에서 행방이 불분명한 사람들을 ‘재조사’한 결과 “8명은 사망, 2명의 입국사실은 확인 불가능”이라고 발표했다. 즉 요코타 메구미씨의 것으로 여겨지는 유골 등의 증거 자료를 제공하며 북한으로부터 반출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과 일치하는 실종자 2명에 관한 조회에 대해서도 “입국한 사실이 파악되지 않았다”고 부정했고 ‘재조사’에서 납치피해자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관계는 감추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이와 같은 대응태도는 일본 국내에서 극심한 비판과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북한의 불성실한 자세를 새롭게 각인시켰다.
언론, 국제회의, 인적 왕래 등을 통해 ‘과거청산’을 반복적으로 요구
북한 언론은 “일본은 이미 해결된 납치문제와 같이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을 과거청산 문제와 무리하게 연결시키며 자신들이 한 약속을 이행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로동신문’ 2월20일자)고 비난하면서 일본에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주장을 반복했다. 또한 북한은 한국, 중국, 필리핀 등에 설립을 호소해 2003년 9월 결성한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가 5월 서울에서 집회를 열자 대표단을 파견하고, 각국이 연대해 같은 집회를 평양과 도쿄에서 잇달아 개최하는 방안과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적 서명운동을 전개할 것 등에 대해 참가국 관계자들과 합의했다. 또한 일본의 정계, 재계, 언론계 인사들과 친북단체 관계자들을 북한에 초청해 과거청산 및 조기 국교정상화의 중요성을 호소했다. 그밖에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5월 열린 제20회 전체대회에서 설립한 ‘재일조선인역사연구소’도 재일조선인에 관한 해방 이전의 자료 수집 등에 힘을 쏟으려 하고 있다.
북한이 일본에 대해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행동을 하는 이유는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재개를 위해 일본인 납치문제를 일단락지으려는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청산 주장과 인적 왕래를 통해 친북세력을 양성하고 이를 통해 납치문제에 대한 일본 내부의 북한 비판여론을 완화시키며, 국제적으로 일본 비판여론을 형성하는 동시에 향후 북일교섭에서 과거청산 명목으로 거액의 경제지원을 받아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향후 북한은 이러한 목표에 따라 조총련을 매개로 일본 각계에 대한 공작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계, 경제계 및 언론계 인사들을 북한으로 초청하는 등 친북세력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활발히 전개할 것으로 예상된다.
(3) 체제 불안정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북한
경제개선조치를 통한 재건효과는 제한적임
북한은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2002년 7월 소위 ‘경제개선조치’를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다양한 물자를 취급하는 시장이 개설되고 개인과 기업의 독자적인 영리활동 등이 진전되어 소비물자 유통 등이 일정부분 활성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에너지와 원자재의 부족 및 산업설비의 노령화 등 구조적인 문제는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고 있어 생산증대의 성과는 제한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외자 도입에 있어서도 4월 김정일 위원장, 10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방중에 즈음해 양국의 기업간 교류를 활성화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는가 하면 중국기업에 진출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투자는 중소규모의 소매업과 서비스업 부문 등으로 제한되었고 기대했던 대규모 투자유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한국으로부터의 투자유치도 개성지역을 제외하면 인프라 미비 등으로 인해 별다른 진전이 없어 외자도입을 통한 경제재건은 별다른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플레이션 지속, 사회체제의 이완현상 증가
한편 경제개선조치 실시 직후부터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쌀값의 경우 2004년 봄부터 급등해 여름에는 개선조치 직후와 비교해 약 30배까지 뛰었다. 더욱이 생활물자의 배급이 중단되면서 개인의 영리활동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배금주의가 만연하는 등 부작용이 생겼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무단결근이 늘어나고 절도나 강도 같은 사회 이완현상이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다.
이외에도 현 체제에 반대하는 활동이 활성화될 징후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선군정치’라는 슬로건에서도 알 수 있듯 체제유지의 가장 중요한 축으로 여겨지는 군 내부에서도 비밀문서의 외부 유출, 간부의 뇌물수수, 군기문란, 사기저하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해 북한당국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단속을 강화하며 숙정(肅正)과 통제에 힘쓰고 있지만, 단속 규율이 느슨해짐에 따라 단속의 효과 또한 저하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통제 이완현상의 원인에 해당하는 경제개선조치는 경제난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궁여지책으로 채택된 것으로 보이는 만큼 사실상 폐지가 불가능하고, 이에 수반되는 통제의 이완현상 역시 불가역적이고 구조적인 것이어서 앞으로도 확대될 것으로 판단된다.
고위층 경질과 김정일 위원장 주변인물의 사망·실각설이 이어지는 가운데 후계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움직임도 있음
북한 고위층 가운데 김정일 위원장의 측근으로 여겨지는 장성택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실각과 경질(2월)이 알려진 데 이어 일부 당 간부와 내각 관료들이 연이어 경질되거나 실각했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의 가족 가운데 부인 고영희의 사망설(5, 6, 8월)과 동생인 김경희 당 경공업부장(장성택의 처)의 중병설 등이 흘러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 기관지가 ‘후계자의 영도체계’를 반복해서 강조한다든지 ‘새로운 별’을 찬양하는 노래를 대대적으로 게재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어 후계문제와 관련한 것이 아닌가 주목된다.
다양한 수준에서 체제 불안정 요인이 확대될 가능성 높아
김정일 체제는 파멸에 가까운 경제난으로 인해 인민들의 생활이 궁핍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위원장의 카리스마, 배급제 등에 기반한 ‘사회주의적 평등’, 군과 치안기관을 통한 강권적 통치와 정보통제 등에 의지해 안정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앞으로 경제개혁이 지속될 경우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각종 정보의 증가와 그 영향으로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 빈부격차에 대한 불만과 체제비판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당과 군, 정부 간부 같은 지배층에서도 돈을 벌 기회를 잡아 부를 쌓은 승자들과 그렇지 못한 패자들로 양분되고 서로 대립하게 돼 지금까지 김정일 체제를 지탱해왔던 권력기반에 균열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후계문제와 관련해서는 당 창건 60주년이 되는 2005년 10월 무렵에 후계자 옹립과 선정을 위한 지도부 내의 움직임이 구체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며, 그 과정에서 내외정책의 채택 여부를 둘러싸고 불화나 대립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나아가 북한의 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마약밀수, 통화위조, 대량살상무기 확산 등 불법적이고 유해한 활동이 한층 활발해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4) 남측에 대한 공작을 강화하고 있는 북한
한국은 남북교류를 추진
한국은 국내에서 확산되고 있는 북한에 대한 ‘동족의식’을 배경으로 ‘평화번영정책’에 입각해 적극적인 남북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4월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약진하고 5월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에 대해 기각판결을 내림에 따라 이를 계기로 남북정상회담 이후 4년 만에 장관급 회담·고위급 군사회담을 실시했으며 ‘남북공동선언’(2000년)에 기반한 교류추진에 합의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등을 개최해 경의선·동해선 등의 남북연결공사, 개성공단 정비 등을 진전시키며 식량 40만t, 비료 10만t 등을 북한에 지원했다. 더불어 10월에는 열린우리당이 남북교류를 엄격하게 제한해온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와 같은 정부여당의 태도에 대해 보수세력은 노무현 정권과 그 지지층에 노골적인 친북 성향을 가진 학생운동 출신들이 다수 있다고 지적하는 등 노무현 정권의 대북 유화자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역대 총리들과 보수파 인사들이 참가해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보수시민단체 등 10만명 이상이 모여 ‘국가보안법사수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반대 움직임을 강화했다. 여기에 6월과 10월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대패함으로써 힘을 얻은 야당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정부여당과 격하게 대립했다.
북한은 한국의 정세를 호기로 보고 공작을 강화
북한은 앞서 설명한 노무현 정권의 움직임에서 한국의 정세를 ‘자주통일을 위한 호기’로 포착하고 남북교류를 적극적으로 확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6월 ‘정상회담 4주년’에 즈음해서는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리종혁 부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한국에 파견해 김정일 위원장의 메시지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등 ‘민족공조’를 위한 활동에 힘썼다.
그러나 이후 북한은 한국정부가 김일성 주석 추모행사에 한국측 방북단의 방북을 불허하고 많은 수의 탈북자들을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데려온 것에 반발해 예정돼 있던 각료급 회담과 남북통일대회를 비롯해 각종 정부·민간교류 행사 대부분을 대부분 중단했다(일부 경제실무교류는 지속).
이러한 북한의 태도변화는 앞서의 문제들이 북한 입장에서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간과할 수 없었다는 사정도 있었겠지만, 한국측의 현 상황이 ‘남북 조선민족이 하나가 되어 통일을 향해 가는 길’과 ‘계속되는 미국 지배하의 민족분단을 감수하는 길’의 기로에 놓여 있다는 인식하에서 한국의 정세를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 전개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판단된다. 북한은 앞으로도 자국에 유리한 남북관계 구축을 위해 대화·교류 재개의 시기를 모색하면서 한국에 대해 강온 양면정책을 활용하는 행동을 계속해갈 것으로 생각된다.
(5) 기존의 체제와 노선을 고집하는 조총련
‘납치 인정’ 이후 조직 내 동요를 강경책과 유화책을 병행해 처리
조총련은 1월에 중앙위원회 제19기 제4회 회의를 열고 제20회 전체대회를 5월28, 29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전체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그간 효과를 발휘했던 ‘7개월 운동’(2003년 11월)을 축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사실을 인정한 이후 조직 내에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개혁요구가 커지자 이를 “반조총련, 반동포적 행위”라고 규정하며 억누르는 한편, 중앙 간부를 각 지방조직에 파견해 활동가와 회원들과의 간담회 및 협의의 장을 마련한다든가 대회 보고안을 사전에 배포해 활동가들의 의견을 모으는 등 강경대응과 유화책을 동시에 활용했다.
조총련은 이러한 대응을 거쳐 5월28, 29일 양일간 도쿄 조선문화회관에서 전체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1995년의 강령이 개정되었으며 민족교육의 발전, 민족성 고수사업의 확대, 동포생활 봉사 등의 과제에 적극적으로 임한다는 방침이 제출됐다. 또한 북한을 재일조선인 결집의 ‘조국’으로 보고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다한다는 조직의 기본적 토대를 유지하기로 하고 ‘김정일 장군께 드리는 편지’를 채택하기도 했다. 인사(人事)에 있어 노령화된 간부의 퇴임과 40대 활동가의 발탁을 통한 세대교체를 강조하면서도 서만술 의장·허종만 책임부의장 최고지도체제는 유지했다.
대회 후 ‘민족교육’ 활동 등을 중심으로 하는 ‘8개월 운동’을 전개하기로
조총련은 지방조직과 산하단체 등에 새로운 체제가 들어선 것을 계기로 10월부터 2005년 5월 조직결성 50주년까지 ‘8개월 운동’을 실천하고, 제20회 전체대회에서 채택된 활동방침에 따라 각 지방조직 등이 ① 민족교육과 민족성 고수 활동 ② 동포생활봉사와 복지활동 ③ 지역에 밀착한 대일공작활동에 중점적으로 임할 것을 독려했다.
그러나 5월 고이즈미 총리의 재방북과 제20회 전체대회에 대한 축사(자민당 총재 명의의 고이즈미 총리 축사)가 도착하면서 일시적으로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북일 관계가 교착됨에 따라 침체에 빠졌고, 활동가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수당의 연체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등 재정난이 계속돼 제대로 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으며 조직력의 저하 흐름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편의제공활동 활성화와 함께 조직핵심층 사상교육을 통한 조직 강화 시도할 듯
조총련은 향후 외유내강을 기본으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편의제공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 재일조선인의 조직결집을 유도하고 조직의 이미지 개선을 도모함과 동시에, 활동가들의 사상교육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은 친북세력화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언론계 인사들과 중앙·지방정계 의원 같은 일본 유력인사들에게 방북을 권유하는 등 ‘북일 친선 활동’에도 전념할 계획이다.
이외에도 북한이 2005년을 ‘조국통일원년’으로 내세우고 있으므로 조총련 또한 한국의 통일운동세력과 한국민단 등에 대한 공작을 강화하는 한편, 조선노동당 창건 60주년 기념일에 임박해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