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이진영은 고금의 책을 폭넓게 읽어 학식이 풍부했다. 고된 농노생활을 하다 풀려나 글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었는데, 새 통치자 요리노부에게 정중하게 번정 건의문을 올렸다가 존경받는 시강(侍講)이 된다. 끝내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책과 원고는 장남 매계를 유신(儒臣)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매계는 일본인의 교육헌장이나 다름없는 ‘부모장’을 만들어 이름을 날렸다.
이진영·매계 부자를 기리는 현창비. 1998년 합천 이씨 종친회와 와카야마시가 공동으로 오카 공원에 세웠다.
큰길가에 우뚝 선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이진영 매계 현창비(李眞榮 梅溪 顯彰碑).’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왔다가 끝내 일본의 흙이 된 조선 선비 이진영과 그의 아들 이매계를 기리는 비석이다. 높이 2m가 넘는, 현대식 디자인의 석비다. 뒷면에는 이만섭 전 국회의장, 이상희 전 건설부 장관을 비롯한 합천 이씨 종친들의 이름이 보인다. 1998년 7월 종친들과 와카야마시가 협력해서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이진영. 귀향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이역만리 섬나라에서 이울고 만 삶. 그의 이루지 못한 귀향을 생각하니 문득 강항(姜沆)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봄비가 한번 지나고 나면(春雨一番過)돌아가고 싶은 마음 한층 더 하네(歸心一倍多)언제께나 우리 집 담장 밑 돌아가(何時短墻下)내가 심었던 꽃 다시 볼까나(重見手栽花)
왜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선비 강항이 지은 시다. 전남 영광이 고향인 강항은 1597년 남원성 전투때 납치됐다가 요행히 3년 만에 귀향했다. 그는 일본에서 겪은 일을 ‘간양록(看羊錄)’으로 남겼다. 이진영은 강항 같은 행운을 잡지 못했다. 임란이 끝나고 조선 정부가 피랍자 송환을 위해 쇄환사(刷還使)를 보냈지만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와카야마성에 올라가 본다. 천수각의 맨 위층에 이진영의 아들, 매계의 ‘가르침’이 걸려 있다. 과연 이진영과 매계 부자가 이 지역 유학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고 있음을 확인해준다. 매계가 설파한 ‘부모 모시는 글(父母壯)’이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법도를 지키며, 염치와 겸손을 제일로 중시해야 하는 것, 정직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좀더 다짐하기 위해서는 항상 가르치고 타이르는 것이 옳다.’
이 짤막한 글은 에도 시대 일본인들의 자녀교육지침이 되었다. “메이지 천황 시절인 1890년 교육칙어가 나오기 전까지, ‘부모장’이야말로 일본인의 ‘교육헌장’이었다”고 전해온다.
지옥보다 처참한 납치
이진영은 1571년 지금의 경남 창녕군 계성면 명리의 영취산 서쪽 산기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공제(李公濟)는 진사였다. 합천 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꽤 여럿일 정도로 면학의 기풍이 잡힌 곳이었다.
어린시절 이진영은 ‘천자문’ ‘동몽선습’, 그리고 ‘소학’ ‘사서삼경’에 이르기까지 한학을 두루 배웠다. 소년시절에는 주역(周易)도 깊게 배워 나름대로 괘(卦)를 빼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물론 목표는 과거 시험이었을 것이다.
이진영이 22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92년 4월 1만8700명의 왜병이 대마도에서 병선을 타고 와 부산성을 급습한 것이다. 진영은 의병장 곽재우 휘하에 의병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그러다 진주성 전투 때 수비군으로 가담해 싸우고,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 아사노 유키나가 부대의 포로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진영 부자의 묘가 있는 해선사 입구.
이진영은 다른 포로들과 함께 부산으로 끌려갔다. 왜군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납치해서 끌고 갔다. 일본인 종군 승려 게이넨의 기록에도 참혹한 납치 장면이 나온다.
“일본 병사들은 포악하고 잔인했다. 백성의 집은 말할 것도 없고, 들이며 산이며 태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태워버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흰옷을 입은 사람은 눈에 띄는 대로 베어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서 사슬로 목을 묶어 끌고 왔다. 부모는 자식을 찾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울부짖는 그 광경은 지옥도(地獄圖)에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비참한 것이었다. 오늘도 조선사람의 아이를 빼앗아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를 무엇에 쓸 작정인가. 한 병사는 손을 모아 애원하는 조선인 부모를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버리고, 아이는 끌고 갔다.”
이진영은 부산에서 배로 옮겨져 대마도, 규슈의 시모노세키를 거쳐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통과해 오사카로 갔다. 밧줄에 묶인 채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배에 실려 가는 동안 먹고 마실 것을 제대로 줬을 리도 없다. ‘간양록’에 실린 강항의 증언을 보자.
“잡혀서 여기(오사카)까지 오는데 아흐레가 걸렸다. 그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았다. 사람의 목숨이란 것이 이리도 모진 것일까. 도착한 뒤에야 왜녀(倭女)가 밥 한 공기를 가져다주는데, 쌀에는 모래와 뉘가 섞여 있고, 생선은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선루(船樓)에 묶인 채 대마도 이키(壹岐) 시고쿠(四國)를 거치는 여정을 9일간 계속했다. 묶였던 손은 3년이 지난 지금도 굽히고 펴기가 어렵다. 시고쿠에 상륙했지만 굶주려 허기진 나머지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 열 걸음 걷다가 아홉 번은 넘어지고 말았다.”
포로수용소가 있을 리도 없었다. 왜군은 조선에서 납치해온 사람들을, 왜병 징발로 부족해진 농촌 일손을 보충하거나 무사(관리)의 집에 잡역 노비로 배치했다. 도자기 기술을 지닌 도공(陶工) 같은 우수 인력을 납치하는 ‘기술노예 사냥’은 그보다 5년쯤 뒤인 정유재란 이후에 나온 간지(奸智)였다.
이진영도 나니와(難波·오사카의 옛 지명)의 어느 농가에 배치됐다고 하나 어디, 누구 집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농노 생활은 고단하고 힘들었다. 그렇게 6년여 세월이 흐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1598)과 더불어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시련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었다. 돌연 다른 농촌으로 팔려가게 된 것이다. 나니와의 주인이 지금의 와카야마시 마쓰에니시초에 해당하는 기이구니 가이소군 니시마쓰에무라(紀伊國 海草郡 西松江村)에 사는 니시유 에몬에게 그를 팔아넘긴 것이다.
조선인 승려 사이요
낯선 주인을 섬겨야 하는 머슴살이는 더 고됐다. 거기서는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라, 산에 올라가 나무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영은 산에서 한 스님을 만났다. 이진영에게 말을 건 스님은 그의 말투가 이상하자 관심을 보였다. 이진영은 결국 “전쟁 때 포로로 잡혀와 지금은 니시유 에몬 집안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스님 사이요(西譽)도 조선사람이었다. 스님은 ‘어떤 이유’로 일본에 건너와 지금은 인근 해선사(海善寺)라는 절의 승려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금세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진영은 사이요에게 해선사에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농노 생활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면 참으로 백골난망입니다” 하며 매달렸다. 결국 스님이 주인을 찾아가 이진영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스님은 해선사에 돌아와 주지 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진영의 학문적 자질이나 능력에 비추어 농노로 썩히기에는 아깝지 않으냐면서. 마침내 주지 스님이 허락해 절에서 니시유 에몬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이진영을 절로 데려올 수 있었다.
기복신앙과 뒤섞인 일본 불교
사이요 스님과 이진영의 자취를 찾아 해선사를 찾았다. 와카야마시 도조초(道場町) 1번지. 절은 지금도 건재했다. ‘해선사’라는 큼직한 간판과 번듯한 사찰건물로 미루어 재정적으로 윤택한 절임을 느낄 수 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일본 최대 명절 오봉(お盆) 시즌의 피크인 8월16일이었다. 절에서는 오봉을 맞아 기원(祈願)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오봉은 집안 대대의 조상 영혼이 사후세계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불사(佛事)를 벌이는 철이다. 절은 조상의 평안을 비는 신도들로 붐비고 북소리와 목탁소리가 요란했다.
해선사 주지의 부인 다무라 노리코씨가 이진영의 묘를 가리키고 있다.
각목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니, 기원 무대에는 머리도 깎지 않은 젊은 스님 대여섯이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한 스님이 각목을 받아가더니, 이름을 부를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보아하니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신도 20여 명이 내 앞 서열인 듯하고, 순서가 돌아오면 단 위로 올라가는 모양이다.
일단 각목을 제단에 놓고, 향 연기를 쏘여가면서 스님의 간절한 기원을 들은 뒤에 각목을 돌려받아 나오면 된다. 그 ‘영험의 각목’을 선조의 무덤 옆에 꽂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라고 한다.
내 차례가 되자, 스님은 절절한 목소리로 뭔가를 빌어주었다. 스님이 나무아미타불을 후렴처럼 외치지만, 중간중간에 ‘삼계만령(三界萬靈)’ ‘수륙(水陸)’ 어쩌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완전한 불교식 공양은 아니다. 일본의 토속 기복(祈福)신앙에 불교가 뒤섞인 행사이려니 싶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난 다음 난처한 일이 벌어졌다. 각목을 꽂을 묘소가 없는 나로서는 그 거추장스러운 것을 절에 되돌려줘야 했다. 이런 상황을 행사 보조원에게 알리자 놀라더니, “절에서 되돌려받을 수 없으니, 윗분에게 물어보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일본인은 매뉴얼에 없는 상황이 닥치면 임기응변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반드시 누군가에게 묻거나 규정집을 꺼내들어 확인한다. 빈틈없는 신중한 일처리 같으면서도, 어떤 때는 책임회피나 융통성이 없다고 느껴져 짜증스럽기도 하다.
보조원이 돌아와서는 나를 기품이 엿보이는 어느 중년 부인에게 안내했다.
“주지의 처입니다.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네, 신문기자입니다. 취재차 왔습니다”
“아,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이진영을 취재하러 오셨군요. 저희 주지 다무라 간코(田村歡弘)가 마침 저쪽에 가 있어서, 제가 안내하지요”
‘波臣의 눈물’ ‘웃는 얼굴’
그녀는 이진영의 아들 매계의 글 ‘부모장’이 적힌 부채를 기념품이라며 내밀었다. 이어 이진영 부자 일대기를 소개한 이상희 전 내무부 장관의 저서 ‘파신(波臣)의 눈물’(일어판)과 ‘웃는 얼굴’이라는 초등학교 5, 6학년용 일본어 교과서를 가져다 보여주었다.
‘부모장’ 부채는 이진영 부자가 이 절의 세일즈 포인트가 되어 공짜로 주는 것이라고 했다. ‘웃는 얼굴’에는 이진영 부자의, 소설보다 기구한 운명과 ‘와카야마의 스승’이 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잠시 후 주지 다무라 간코씨가 다가왔다. 훤칠하게 잘생긴 얼굴이다. 결혼도 하고 돈도 버는 일본의 대처(帶妻) 불교에는 이런 스님이 적잖을 것이다. 고행의 길을 걷는 수도승이라기보다,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 같았다. 절에서 돈벌이가 잘되는 것도 부처님 은덕일까.
문득 유명한 교토의 금각사(金閣寺)가 생각났다. 금각사 방문 코스의 마지막은 매점이다. 거기서 50엔짜리 부적을 파는데, 부적에 적힌 ‘효험’이 실소를 자아낸다. ‘취직성취 학업성취 진학성취 가내안전 교통안전 상매(商賣)번창 연애성취 인연연결 무병식재(無病息災) 스트레스 제거 암 방지…’ 부적으로 만병을 통치하고 재액을 막는 등 그 어떤 소원이라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속(巫俗) 기복(祈福)과 섞인 일본 불교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본의 불교는 세상에서 가장 세속화된, 좋게 말하면 대중에 가장 깊게 뿌리내린 종교일 듯싶다.
명함을 내밀자 다무라 주지가 ‘동아일보’와의 인연을 얘기했다.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기념해 이진영을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 ‘현해탄에 핀 매화꽃’을 서울에서 ‘동아일보’ 후원으로 공연했지요. 저도 서울에 가서 보았는데 정말 성공적인 공연이었습니다”
유학·역학·불학
이매계가 만년에 낚시를 즐기던 천신산 기슭엔 요즘도 강태공들이 몰린다.
절을 세운 잠해상인(蠶海上人)은 아시카가 장군의 동생이다. 그래서인지 군사적인 용도로 활용된 흔적이 엿보이고, 특히 20세기 쇼와 시절에도 절에 500명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커다란 병사용 목욕탕도 있었는데, 1945년 7월9일 미군의 공습으로 완전히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조선 출신의 승려 사이요에 대해 알고 싶어 어떤 기록이 남아 있는지 물었다.
“글쎄요. 사이요가 조선사람으로 여기에 머물며 승려가 됐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만,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해선사에 머물다가 떠나서 간토(關東·도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어느 곳엔가 큰 사찰을 지었다는 설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소문일 뿐이니….”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사람이 어떤 경로로 일본에 들어와 중이 됐을까.
“그것도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요. 하지만 학자나 승려 같은, 선진 문물을 습득하고 지식을 지닌 분들이 일본의 요청으로 올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다무라 주지의 말로는 사이요가 와카야마와 쓰시마(對馬島)를 오가며 ‘가라쓰모노(唐津物)’의 교역에도 참여해 통역을 맡은 것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정유재란 이후 일본에서 도자기 생산이 시작되므로 사이요의 행적은 그럴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수수께끼 인물이다. 이상희 전 장관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마찬가지다.
“사이요가 조선의 ‘하급관리’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어느 기록엔가 남아 있습니다. 말 못할 사연으로 도리 없이 일본으로 망명해 해선사의 스님이 됐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데, 진위는 알 길이 없어요.”
어찌됐든 이진영은 사이요를 만나 운명이 바뀐다. 해선사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다소 안정된 삶을 되찾았다. 그는 유학을 했기 때문에 불학(佛學)의 진전도 매우 빨랐다. 정진을 위해 해선사의 본산인 소지지(總持寺)에 들어가 공부하기도 했다. 그 절은 해선사에서 멀지 않은 데 있었다. 이진영은 계율이 엄하기로 유명한 소지지의 생활도 잘 견뎌냈다.
그러나 승려 생활과 불학에 깊이 빠지지는 않았다. 유생이 불도가 되는 데 한계가 있었을까. 어쩌면 유학의 불모지인 일본에서 자신의 유학 실력과 역학(易學) 재능을 살려 독자적인 삶을 개척하고 싶은 꿈이 움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사이요에게 자신을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사이요가 만류했지만 이진영은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오사카로 옮겨갔다. 그러나 9년 뒤 와카야마의 해선사로 돌아왔고, 죽은 뒤에도 해선사에 묻혔다.
쇄환사절과 애절한 사연
필자를 사찰 경내에 있는 이진영·매계 부자 묘로 안내한 사람은 주지의 아내 다무라 노리코(田村紀子)였다. 그녀를 따라 일어서자 이미 오봉 행사는 끝이나 있었다. 방문객들을 위해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던 젊은 스님들은 승복을 벗고 모두 사복으로 갈아입더니 각각 타고 온 오토바이와 스쿠터를 타고 흩어졌다. 정오경, 사찰의 ‘영업’이 끝난 것이다. 문득 머리를 깎지 않은 젊은 승려들이 어느 스파게티 집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해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편리한 나라다.
진영의 비석 옆에 아들 매계의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 오봉 시즌이어선지 사과 세 개가 놓여 있고, 꽃다발도 놓여 있었다. 다른 묘소에는 그런 게 없었다. “해선사에서 갖다놓은 겁니까?” 하고 물으니, 노리코 부인은 아니라고 했다.
“글쎄요. 누가 이렇게 정성을 들였을까요. 우린 아닌데…. 때때로 이렇게 공물을 놓는 사람이 있는데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한국인일지도 모르죠.”
노리코 부인은 “매계의 동생으로 입탁(立卓)이 있었는데, 그가 의사가 됐다고 한다”는 말도 했다. 돌아서서 헤어지려는데 뜻밖에도 5000엔을 내민다. 놀라서 “아, 기원행사에서 빌었지 않습니까. 내 조상도 좋아했을 테니까…”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한국 분인 것을 몰라서, 일본 손님으로 알고 받은 거니까…” 하며 한사코 돌려주려 했다. 나는 뿌리치기를 거듭했으나, 끝내 지고 말았다. 일본 나름의 정직함이라고 생각했다.
이매계가 쓴 ‘부모장’.
그는 고국에 돌아갈 꿈을 품고 오사카에 갔는지도 모른다. ‘파신의 눈물’의 저자 이상희씨는 몇 갈래의 추론을 제시한다. 첫째, 이진영이 일본 이름을 갖지 않고 그때까지 조선 성과 이름을 지니고 있었던 점. 둘째,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서른다섯이 되도록 살아온 점(결혼은 46세에 했다). 셋째, 와카야마에서 오사카로 간 것은 조선 정부의 쇄환(刷還)사절단이나 통신사가 지나가는 길목을 택한 것 아닐까 하는 점. 그리고 은인인 사이요가 만류하고, 승려 생활이 그다지 불편한 것이 아닌데도 굳이 오사카로 독립해 나간 것은 귀국 일념 때문일 것이라는 게 이씨의 의견이다.
1605년 사명대사가 쇄환사절을 이끌고 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을 벌이고, 납치된 조선인 3000명을 데리고 귀국한 사실이 기록에 나온다. 당시 조선의 쇄환사절이 왔다는 소문이 일본 열도의 조선인들에게도 널리 퍼졌던 것 같다. 1607년엔 여우길(呂祐吉)을 정사로 하는 쇄환사절이 일본에 와서 1418명을 송환시켰다. 그때의 기록에는 애절한 사연들로 가득하다.
“사절 숙소가 있는 문 밖에 조선 피로인(被虜人) 남녀가 양식을 싸가지고 몰려와 흩어지지 않았다. 역관 박대근으로 하여금 ‘조선에 돌아갈 때 데려간다’고 일러주며 돌려보내게 했다. 더 먼 곳에 있던 피랍자들은 편지를 보내서 자기들이 붙잡혀 있는 곳을 알려왔다. 그 가운데는 2∼3명의 여자가 언문(한글)으로 진정 편지를 보낸 것도 있어서 역관이 회답해주었다.”
“포구의 갈대밭에서 어떤 남자가 뛰쳐나와 부르짖기를 ‘나, 조선사람이요. 돌아가는 배에 실어주시오’라고 해서 태워주었다. 그 사람은 일본인 주인이 놓아주지 않아 도망쳐 이곳 갈대숲에 숨어 있다가 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한 여인은 도망쳐 배 있는 데로 왔는데, 일본인 남편이 칼을 들이대며 놓아주지 않으려 하므로, 다치바나라는 대마도 출신 통역이 타이르고 말려 겨우 물러나게 했다”
마흔일곱에 낳은 아들 매계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들에게는 목숨을 건 엑소더스였다. ‘남녀 수십명이 갈대밭에서 뛰쳐나와 울부짖으며 모두 배에 오르려 해서 태워주었다’는 기록도 있고, ‘쇄환사절의 배를 타기 위해 몸이 바닷물에 반이나 잠기도록 목 놓아 부르며 쫓아온 자들도 있었다’는 처절한 대목도 나온다.
도대체 몇 명이나 일본에 납치되어 몇 명이나 돌아왔을까. 연구자들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임진·정유 양란 중에 최소 2만∼3만, 많게는 10만명 내외가 일본으로 끌려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나이토라는 일본 학자는 2만∼3만으로 본다. 야마구치는 5만 이상, 한국 학자 박춘일은 6만, 유명종 이장희 두 학자는 10만명 내외라고 주장한다. 돌아온 사람 숫자는 비교적 정확히 나온다. 이상희씨가 임란 전후의 문헌을 종합한 바로는 8482명이라고 한다.
이진영은 오사카에서 9년 남짓 살았다. 거기서 한학을 가르치고, 사람들의 운명을 예견해주며 지냈다. 그가 조선의 쇄환사 일행과 만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의 아들 매계가 훗날 조선통신사를 만나 아버지에 관해 “갖은 고생이 겹쳐도 호소할 데가 없고, 외로운 신세로 혼자 고독하게 지냈다(顚連無告 孤身獨守)”고 한 것으로 미루어, 쇄환사를 만나는 행운을 잡지 못했던 듯하다.
1614년 오사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정권의 명맥을 끊으려는 전쟁이 발발한다. 오사카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고, 이진영은 다시 와카야마로 돌아갔다. 해선사의 스님 사이요는 다시 진영을 따뜻하게 맞아줬다.
그는 절 앞 구보초에 사숙(私塾)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오사카에서의 경험을 살린 것이다. 입소문이 번지고, 사숙은 번창해갔다. 경서와 사서에 조예가 깊은 그에 대해 좋은 평판이 번져나갔다.
그 무렵 이진영은 결혼 상대를 소개받았다. 아리타군(有田郡) 토호의 딸로, 39세의 과부였다. 1617년 46세이던 이진영은 그녀와 결혼했다. 포로로 잡혀 온 지 25년째 되던 해다. 그는 귀국을 포기했던 것 같다. 그 이듬해 아들 매계가 태어났다.
새 통치자 요리노부의 侍講
1619년 와카야마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열 번째 아들 요리노부가 입성했다. 기이국(紀伊國)을 다스릴 새 다이묘(大名)로 부임한 것이다.
이진영은 새 통치자 요리노부에게 1336자에 달하는 번정(藩政) 건의문을 올렸다. 정중한 방식으로 일종의 제왕학을 제시한 것이다.
해선사 주지 다무라 겐코씨가 노산 이은상 선생이 번역한 한글 부모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의문을 본 요리노부는 이진영에게 시강(侍講)이 되어주기를 청했다. 요리노부는 처음에 신하가 되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진영이 “나는 조선에서 섬기던 임금이 있습니다. 두 임금을 섬기는 것은 천리에 맞지 않습니다”라며 시강만 맡겠다고 한 것이다. 그는 시강의 대가로 매년 쌀 30석을 받았다.
이진영이 1626년부터 2년간 대마도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번의 명령으로 대마도에서 조선국 사신과 응대한 일이 있다’(和歌山史要), ‘대마도에 가서 선박거래품에 관한 요무(要務)를 띠고 한상(韓商)을 만나고 구매 담당을 했다’(和歌山縣誌), ‘대마도에 건너가서 조선사람들과 대담하기에 이르렀다’(南紀德川史).
대마도에서 다시 와카야마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요리노부의 시강을 계속했다. 그러다 1633년 6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일본인 부인과 17세의 매계, 그리고 13세의 입탁을 남긴 채.
“간절히 아뢰나이다”
아들 매계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매계는 호이고, 본 이름은 전직(全直)이지만, 일본에서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총명한 매계는 교토에 유학을 간 적도 있는데, 번주(藩主) 요리노부는 특별히 은 2관을 주어 그의 공부를 격려했다. 그리고 이진영이 죽은 뒤에도 그의 가족들에게 해마다 공미(功米) 30석을 주었다.
매계의 처는 나가타 젠사이(永田善齋·진영의 유학 제자)의 딸이다. 매계도 번(藩)의 유관(儒官)직을 맡아 요리노부를 도왔다.
1655년 매계는 조선통신사로 일본 에도(江戶·도쿄)에 도착한 남용익(南龍翼) 이명빈(李明彬) 일행을 찾아갔다. 남용익은 ‘문견별록(聞見別錄)’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전직(매계)의 아버지 진영은 조선 사람이다. 전직은 사람됨이 순박하고 후중하며 다소 시율(詩律)을 알고 글씨와 그림도 꽤 정밀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말할 경우 유연하고 옛 인연을 느끼며, 근본을 생각하는 듯하였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아마 천성으로 타고난 양심은 없어지지 아니한 것 같았다.”
매계는 남용익에게 써 가지고 온 서한(한문)을 바쳤다.
“이전직은 두 번 절하고 조선 사절에게 아뢰옵니다. 나의 아버지 진영은 경상도 영산 사람입니다. 포로로 잡혀와서, 쇄환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귀국의 희망이 좌절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고국을 그리는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죽고, 저는 아버지가 물려준 책과 원고를 읽으며 공부해서 번의 유신(儒臣) 반열에 있고, 동생 입탁은 의술을 배워서 의관으로 있습니다.
이제 다행스럽게도, 여러분께서 이곳에 오셨으니 저의 선조의 내력이나 그 언행을 아시는 것이 있다면, 저의 이 심정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 자, 한 줄이나마 써주시되, 각인이 어느 고을에 살고 어떤 관위에 있었던가를, 자(字)는 무엇이고 호(號)는 무엇인지를 기록하여 제게 주시면, 선조의 흔적으로 알고 보존하겠습니다. 오직 이렇게 간절히 아뢰나이다.”(‘문견별록’에서)
매계가 나중에 일본의 교육헌장이 된 ‘부모장’을 짓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다스리는 구마노(熊野) 지역에서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殺父)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범행을 저지른 청년이 참회하는 빛이 없이 “방탕하여 가족을 괴롭히는 아버지 죽인 것이 무슨 대단한 죄인가? 남의 아버지를 죽인 게 죄라면 몰라도 내 아버지는 죽을 짓을 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요리노부는 “짐승도 저지를 수 없는 대죄를 범하고도, 뉘우침이 없는 것은 나의 부덕의 소치요, 효도의 정신을 함양케 하지 못한 내 탓도 있다”고 자탄했다. 그러면서 즉각 처형하기보다 스스로 회개케 한 후에 형을 집행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요리노부는 매계를 불러 그 청년을 가르쳐 깨우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청년은 매계에 의해 마침내 크게 뉘우치고 대죄를 깨닫게 되었다. 요리노부는 크게 기뻐하면서 “법은 법이니 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한 뒤, 매계에게 “이번 일을 계기로 영민(領民)에게 인륜의 요도(要道)를 담은 교훈이 될 글을 지어주시오” 하고 청했다. 이렇게 해서 ‘부모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가르침은 와카야마를 넘어 일본 전역의 자녀 교육 지침이 됐다.
조선인의 코를 베어 염장해 묻은 ‘코무덤’. 메이지 시대, 해외침략을 고취하는 역사 자료로 삼기 위해 증축되었다고 한다.
이진영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의 휘하 왜장들의 조선 침략과 전투 지휘는 잔인하고 지독한 것이었다. 히데요시 군대의 가증스런 죄악중 하나가 ‘코무덤’ 이다.
“히데요시는 장수들에게 명했다. 인간에는 두 개의 귀가 있으나 코는 하나다. 조선인의 목 대신 코를 베어 증빙으로 대신하라. 병졸은 각각 코를 베어 한 되씩 소금에 절여 일본의 히데요시에게 헌납토록 지명하고, 그 책임을 다한 자에 한해 (값나가는 포로) 생포를 허가했으므로, 그 비참함은 필설로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강항의 ‘간양록’에서)
아수라 같은 원혼의 울음
교토의 코무덤으로 향했다. 교토시 히가시야마구(東山區) 아마토오지(大和大路) 차야초(茶屋町) 조그만 공원 옆에 우뚝 솟은 무덤이 있다. 무덤 위에 석비가 얹혀져 있다. 5만명의 피와 눈물과 한이 묻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무거워지고 눈시울이 젖어왔다. 왜병이 산 사람의 코를 베어가기도 해, 삼남 지방에 코 없는 사람이 숱하게 있었다는 기록이 떠올랐다. 나라가 짓밟힐 때 백성이 겪는 고통이란 이토록 가혹한가.
기록에는 히데요시 군대가 15개의 대형 나무통에 염장(鹽藏)한 코를 5만개나 보냈다고 되어 있다. 이 전리품(?)을 교토의 대불사(大佛寺)에 매장하여 ‘귀무덤(耳塚)’이라 이름 붙였다. 코무덤이라고 하기엔 그들의 짓이 너무나도 잔악무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일사학자 강재언씨가 하루 전날 오사카에서 가르쳐준 대로 무덤의 개축연대를 찾아보았다. ‘메이지 5년 5월30일’ 확실히 새로 만든 무덤이다.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에 의해 철저히 부정됐습니다. 그래서 코무덤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가 되었지요. 그런데 메이지 정부가 제국을 표방하고 해외침략을 시도하기 위해 역사에서 국민교육 재료를 찾던 중 이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이 국민 교육용으로 부활시킨 것이 오늘의 무덤입니다. 히데요시가 이루지 못한 해외진출의 꿈을 이루자는 취지지요”라고 강씨가 설명했다.
코무덤 옆에 세운 관광객용 게시판 기록이 눈길을 끈다. 밑에는 한글 번역도 있다.
‘전쟁은 한반도 민중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 무덤은 전란으로 당한 한반도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 전하고 있다.’ 1969년 ‘사적 지정’
코무덤을 둘러보고 나자, 대로 건너편에 ‘풍국신사(豊國神社)’ 간판이 보인다. ‘풍(豊)’자로 미루어, 틀림없이 도요 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곳일 터이다. 일부러 찾아가 신사의 자료를 집어보니, 과연 히데요시 신사다.
죽은 지 400년이 넘어도, 그 잔혹했던 왜국 장수의 영혼에도 귀가 있어, 애꿎게 코 베인 조선사람들의 신음과 절규가 들릴 것인가. 코무덤과 신사의 공교로운 배치가, 피할 수 없는 연기(緣起)의 끈으로 묶인 것만 같다. 그래, 연년세세(年年歲歲) 그 히데요시 영혼의 귓전에 아수라 같은 조선 원혼의 울음이 들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