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미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집’ 폴링워터

자연을 뛰어넘어 자연에 다가간 ‘유기적 건축’의 결정(結晶)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입력2007-04-11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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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츠버그 대부호의 주말별장 ‘폴링워터’는 미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힌다. 폭포 위에 집을 얹은 듯 보이지만, 실상은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폭포를 집의 일부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 녹색 건축 개념에서 老莊사상이나 禪불교가 떠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집’ 폴링워터

    폴링워터. 녹색의 자연과 폭포, 집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인간은 지상에서 어떻게 ‘시적으로(dichterisch)’ 거주할 수 있을까. 철학자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구를 인용하여 이렇게 물었다. 하이데거의 시대에도 그러했지만, 주택난과 부동산 투기가 극심한 오늘날 이런 질문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시적으로’란 말이 사물의 본래적 상태, 마땅한 존재 양태의 지향을 의미한다면 시대가 그럴수록 집을 짓고 그 안에 거주하는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겨보는 일은 그만큼 더 절실히 요청될 수 있다.

    인간은 거주하기 위해 집을 짓는다. 지상에 거주하기 위해 집을 짓는 것이지 집을 지었기에 거주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거주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존재의 자리잡음이다. 인간은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근본적으로 ‘거처 존재(Dasein)’이다. 따라서 거주란 세계 내 존재인 인간이 지상에 자신의 본질 공간을 만드는 것이면서 존재성을 되새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거주는, 자리잡음이란 말이 암시하듯이 필연적으로 타 존재자와의 관계를 전제한다. 그 관계는 우선 지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인간 존재와의 관계이고, 나아가서 대지를 구성하는 풀, 나무, 돌을 포함한 자연 속 모든 사물과의 관계이며, 또한 대지가 떠받들고 있는 하늘이 필연적으로 상기시키는 신적 존재와의 관계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이런 시각에서 인간의 거주는 대지와 하늘, 다른 인간들과 신성한 존재라는 네 가지 요소가 동시적으로 관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관계를 지배하는 근본정신은 ‘거주하다(wohnen)’라는 단어의 어원적 의미 그대로, 보존하고 보살피는 것이다.



    인간이 집을 짓고 거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지상에서 안식을 얻고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삶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지만, 동시에 다른 인간들 역시 그런 삶의 공간을 향유하도록 배려하는 것일 뿐 아니라 지상의 다른 사물들을 아끼고 보살피면서 그것들과 더불어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철학적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는 집 짓는 일의 근본적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한 드문 건축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건물을 삶의 근원적 본향인 대지의 일부로 인식하고 그것이 들어서는 장소의 공간적 질서를 최대한 존중하는 건축 양식을 모색함으로써 미국의 건축예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비단 미국의 건축예술만을 혁신시킨 것이 아니다. 건축물과 주변 환경의 조화와 통일성을 강조한 그의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 이론은 장식적인 아르 누보 스타일에 젖어 있던 유럽 건축계에 큰 충격을 줬다. 건축의 리얼리티는 벽이나 지붕 같은 건물 그 자체가 아니라 내부 공간이라는 그의 지론은 건축을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볼 것을 요구했다.

    건축의 본질에 대한 라이트의 이런 성찰을 바탕으로 현대 건축은 개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전에 이미 현대 건축혁명의 기수로 존경을 받았지만, 사망한 지 거의 반세기가 흐른 오늘날에도 그는 건축의 근본을 물은 철학적 건축가로서, 또한 이른바 ‘녹색 건축(Green Architecture)’의 선구자로서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 건축예술원(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s)이 최근에 행한 조사에서 라이트는 ‘가장 위대한 미국 건축가(the greatest American architect of all time)’로 뽑혔다.

    ‘미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집’ 폴링워터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

    라이트의 명성은 무엇보다 건축의 본래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가장 미국적인 건축 양식을 창안한 데 기인한다. 건축가로서 그의 입지를 확고히 한 프레리 스타일 주택이나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폴링워터 혹은 구겐하임 미술관 건물은 모두 광활한 ‘자연의 나라’에서나 길어낼 수 있는 독특한 건축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라이트의 건축은 그래서 ‘지방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를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70년에 걸친 건축가로서의 긴 이력에서 라이트는 주택은 물론 오피스, 교회, 학교, 도서관, 미술관 등 다양한 용도의 건물을 남겼다. 그는 평생 1141개의 건축을 설계했고, 이 중 532개를 실제로 건축했으며, 그중 409개의 건물이 현존한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펜실베이니아 밀런(Mill Run)의 에드가 카우프만(Edgar J. Kaufmann)의 집, 즉 ‘폴링워터(Fallingwater)’를 둘러보는 길은 그리하여 건축을 통해서 미국정신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미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집’ 폴링워터

    라이트가 ‘프레리 스타일’로 만든 시카고의 ‘로비하우스’.

    밀런은 피츠버그에서 남동쪽으로 약 63마일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피츠버그에서 차로 2시간 거리. 2003년 4월5일, 나는 앤디 워홀 미술관을 구경하기 위해 피츠버그를 방문한 참에 라이트로 인해 이제는 세계적 명소가 된 이곳에 들렀다. 피츠버그에서 고속도로 70번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지방도 381번을 바꿔타고 밀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밀런을 지나 오하이오파일(Ohiopyle) 쪽으로 가다가 안내판을 따라 오른쪽 소로로 접어들어 차를 잠시 달리니 이내 폴링워터 입구다. 입구 쪽에 방문자를 위한 안내센터와 기념품이며 스낵을 파는 파빌리온이 있다. 안내센터에서 표를 산 후 안으로 들어가 얼마쯤 걸으니 산기슭에 사진을 통해 낯익은 폴링워터가 보인다.

    현대 건축 신기원을 열다

    폴링워터는 피츠버그에서 백화점을 운영하던 대부호 에드가 카우프만이 라이트에게 설계를 부탁해 주말 별장으로 지은 집이다. 라이트는 카우프만의 부탁을 받고 1935년 9월에 건물 스케치를 시작해 이듬해인 1936년 건축에 착수, 1937년 말에 본채를 완성하고 이어 1939년 손님용 객실과 고용인 숙소를 덧붙여지어 오늘날과 같은 모양으로 완공했다.

    카우프만가(家)는 1937년부터 이 집을 주말 주택으로 사용하다가 1963년, 이 아름다운 집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보다는 만인이 보고 즐기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집과 주변 숲 1543에이커를 자연보전 단체인 서펜실베이니아 보존협회(Western Pennsylvania Conservancy)에 기증해 관리하도록 했다. 집이 일반에게 공개된 1964년부터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현재까지 대략 300만명이 이곳을 다녀간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폴링워터는 미국의 건축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최근 125년 동안 지어진 건축물 중 가장 훌륭한 건물로 선정된 바 있다. 본채가 완성된 직후부터 이미 화제의 대상이었다. 1938년 1월17일자 ‘타임’은 폴링워터를 라이트 건축의 백미로 꼽으면서 커버스토리로 다뤘고, ‘건축 포럼’ 또한 이를 계기로 라이트의 건축세계를 특집으로 조명했다.

    폴링워터에 대한 이런 상찬은 우선 폭포 위에 집을 얹어 그것을 완상의 경관으로서가 아니라 건축 공간의 일부로 탈바꿈시킨 파격적인 디자인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폴링워터는 건물과 주변 환경, 건물 외관과 실내 공간, 내부 디자인과 가구, 색채와 조명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모티프로 조화와 통일성이 이뤄지도록 디테일에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지은 집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집’ 폴링워터

    라이트(가운데)가 탤리에신 펠로십에 참여한 학생들과 건축설계도를 검토하고 있다.

    예컨대 집 입구의 다리도 본채의 특징적인 스타일에 미흡하다고 판단되자 새로 만들었다. 폴링워터를 설계한 1936년 라이트는 68세였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라이트 필생의 건축 미학이 집약되어 있고 그의 건축 혼(魂)이 투영되어 있다. 건축을 진행하면서 카우프만과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라이트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건축에 임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건축비평가 폴 골드버거는 라이트의 건축세계에서 폴링워터가 차지하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집은 20세기를 요약하면서 미래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이 뛰어난 건물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반세기 동안 건축가로서 살아오면서 그를 사로잡아온 주제들을 집약해 재현했다. 물론 문자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기에서 관심 범위를 더욱 넓혀 유럽 모더니즘과 자연에 대한 관심, 그리고 건축 구조에 대한 대담한 실험 정신을 결합시켜 하나의 눈부신 총체성을 창조해냈다. 폴링워터는 수평 공간에 대한 라이트의 가장 혁신적인 실험이고, 가장 힘찬 구조적 드라마를 보여주는 작품이며, 인간과 자연의 숭엄한 조화를 구현한 걸작이다.”

    수직과 수평의 긴장과 조화

    집으로 들어가는 다리 입구에 이르자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폭포는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다리 위에 서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폴링워터 건물에 가려지기 때문이다. 나는 집 내부 구경을 잠시 미루고 왼쪽으로 방향을 돌려 폭포수가 떨어지는 계곡 아래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폭포 소리를 좇아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떨어지는 폭포수와 더불어 집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작은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원경 속에 뒤집어놓은 S자처럼 꺾이면서 두 번의 낙수를 만드는 폭포와 그 위에 서 있는 폴링워터의 자태가 드러난다. ‘숲으로 된 성벽’이라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주변의 나무들이 성벽처럼 집을 에워싸고 있다.

    그래서일까. 폴링워터가 집이라기보다 작은 성채라는 느낌이 스쳐 지나간다. 수직으로 높이 솟은 나무들로 인해 그 아래 대지 위에 나지막하게 펼쳐진 건물은 한결 더 자연 속에 아늑하게 안겨 있다는 느낌을 줬다. 건물의 전경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폭포 위에 수평으로 뻗어 있는 두 겹의 테라스다.

    떠받치는 기둥이 보이지 않는 캔틸레버(cantilever)식의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길게 허공으로 뻗쳐 있기 때문에 집은 폭포 위에 떠 있는 느낌이다. 그렇기에 테라스는 수평의 평면이면서도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수직의 제스처를 표출하고 있는 듯하다.

    기실 이 수평과 수직의 키아스머스적 교차 위에 폴링워터의 건축 미학은 구축되어 있다. 테라스와 지붕 평면이 수평선을 이루며 좌우로 펼쳐져 있다면 이들을 떠받치면서 동시에 그 수평선을 분할하는 수직의 석벽이 건물의 중심을 차지한다. 건물은 폭포 위쪽 암반 위에 얇은 자연석판을 길게 쌓아올려 만든 이 수직의 벽으로 인해 안정감을 얻는다.

    이 석판들은 집터 인근에서 채석해 얇게 깎은 것이다. 중앙의 석벽은 물론 사면의 기둥을 석판으로 길쭉하게 쌓아올렸기 때문에 건물은 수직으로 솟아오르면서도 수평의 날렵함과 개방성이 더욱 강화된다. 더욱이 석벽의 색채나 결이 폭포 주변 바위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 중앙 석벽은 집의 기층이 된 암반의 연장으로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석벽은 대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 수직으로 곧추서 있으면서도 수평적인 대지의 일부라는 느낌을 자아낸다. 그 아래로 흘러내리는 폭포 또한 수평으로 날개를 펼치면서 아래로 떨어지기에 수평과 수직이 교차하는 대립의 미학을 매순간 연출한다. 다시 말해 폭포에 내재하는 수직과 수평의 긴장과 조화가 건물에 육화되어 있는 것이다.

    묻혀 있던 자연미의 재발견

    ‘미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집’ 폴링워터

    폴링워터의 1층 거실. 개방감을 강조해 자연과의 접근성을 강화했다.

    폴링워터를 찾기 전 사진으로 건물을 처음 보았을 때, 자연과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전범적인 건축이라는 일반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나는 폭포 위로 길게 드리운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육중한 테라스로 인해 건물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연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가까이서 폴링워터를 바라보면서도 그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내 눈을 길들인 동양적 전통에서 이런 공간 구성을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고 말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동양적 공간 개념에서는, 산수화를 길잡이로 해 말한다면, 무릇 모든 인간적 형상은 거대한 여백으로 표상되는 자연 속에 잦아들어, 전체가 마침내 아토피아(atopia·무장소)의 상태에 이르러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변형을 축으로 한 폴링워터의 예각진 기하학적 구성은 인간의 손길을 너무도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집이 성채 같다는 느낌이 든 것도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라이트는 훌륭한 건물은 주변 풍경을 그것이 지어지기 전보다 더 아름답게 만든다고 쓴 바 있다. 사실 이곳 계곡은 폭포가 있다 하나 펜실베이니아 산간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이 베어런(Bear Run)이라고 부르는 계류(溪流)도 4마일에 불과한 작은 개천일 뿐이다.

    이 평범한 자연의 정경이 폴링워터가 들어서면서 독특한 공간으로 변화한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튼 평범한, 주의해 보지 않던, 늘 묻혀 있던 순수한 자연미를 재발견하도록 자극한다는 점만으로도 폴링워터는 성공적인 건축이고, 나아가서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음악과 기하학의 영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867년 위스콘신의 리치랜드 센터(Richland Center)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니테리언(Unitarian)파의 목사이자 음악가였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바흐와 베토벤을 좋아한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운 라이트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가까이 하며 살았다. 음악은 라이트에게 생활의 윤활유이자 중요한 영감원(源)이었는데, 조화와 리듬을 중시하는 그의 건축 스타일도 아버지를 통해 얻은 음악적 소양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교육에 대한 어머니의 남다른 관심 또한 미래의 건축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유치원을 처음 창설한 독일의 프리드리히 프뢰벨의 교육 방식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프뢰벨 블록을 어린 아들에게 사주었는데, 사면체·원구·삼면체로 된 블록을 가지고 놀면서 라이트는 자연스레 공간 감각을 기르고 사물을 기하학적 형상으로 치환해보는 안목을 갖게 됐다. 훗날 그가 프뢰벨 블록 놀이야말로 자기 건축의 초석이라고 술회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아이오와와 뉴잉글랜드 보스턴에서 유년기를 보낸 라이트는 11세 때 위스콘신의 매디슨으로 돌아와 소년기를 보낸다. 그는 해마다 여름을 스프링그린에 있는 외가의 시골 농장에서 지냈는데, 아름다운 자연 풍경 속에서 뛰놀던 이 시기의 추억은 자연과 일체감을 강조한 그의 유기적 건축 이론 정립의 원동력이 됐다.

    라이트는 1884년 열일곱 살이 되면서 매디슨의 위스콘신 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이미 건축가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라이트는 건축과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위스콘신대에 건축과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토목공학 분야에 적을 두고 공부를 했다.

    그러나 라이트는 두 학기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건축을 공부하고자 1887년 시카고로 간다. 몇몇 건축사무소를 전전하다가 라이트는 마침내 이른바 시카고학파의 대표적 건축가인 아들러(Dankmar Adler)와 설리반(Louis H. Sullivan)이 운영하는 건축사무소의 조수로 일하게 된다.

    라이트가 건축가 생활을 시작한 1890년대에 시카고는 붐 타운이었다. 1871년의 대화재 이후 한때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내 철도를 축으로 한 중서부 교역의 중심지로서 시카고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해외 이민자와 중서부 각지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시카고의 인구는 1890년대에 이르러 100만을 넘어서 필라델피아를 제치고 뉴욕 다음의 대도시로 발돋움한다.

    빛, 공기, 전망을 끌어들이다

    1893년 만국박람회의 성공적 개최는 시카고의 이런 저력을 거듭 확인시켰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도심 개발도 본격화했다. 도심의 지반이 약한 것이 문제였으나 기술 공학의 발달로 새로운 건축 공법이 도입되면서 이 또한 해결됐다. 그리하여 도심에 고층 건물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시카고는 마천루의 시대를 선도해 나갔다.

    이 건축 붐을 타고 재능 있는 건축가들이 모여들면서 시카고는 새로운 건축양식을 창출하는 건축의 메카로 부상했다. 훗날 시카고학파로 불린 이들은 산업화한 미국 사회에 알맞은 미국적 건축 양식을 정립하고자 노력했다.

    철제 프레임으로 건물의 뼈대를 세우고, 석재나 테라코타로 외부 마감을 하고, 넓은 판유리 창을 두름으로써 건물의 꼭대기 부분을 돌림띠로 장식하는 것 이외에는 대체로 단순 소박한 스타일을 지향한 점이 시카고학파 건축의 특징이다. 라이트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카고학파를 대표하는 설리반의 제도사로 일하면서 건축 안목을 키워 나갔다.

    설리반은 특히 새로운 건축이 지향해야 할 바를 “형식은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로 요약한 바 있는데, 라이트가 주창한 유기적 건축은 이 명제를 한 걸음 더 밀고 나아가 형식과 기능이 하나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트는 1889년 결혼하면서 시카고 교외의 오크파크(Oak Park)에 집을 짓고 1893년부터 독자적인 건축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설리반과 달리 상업적 건물보다는 주거용 주택 설계에 집중했다. 라이트는 산업화와 더불어 생활 여건이 바뀐 중산층 가정을 위한 새로운 주택 모델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른바 ‘프레리 하우스’는 그런 노력의 소산이다. 긴 수평면을 특별히 강조해 미국 중서부 대평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평선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된 프레리 스타일의 집에서 라이트가 역점을 둔 것은 실내 공간의 개방이다. 그는 어두컴컴한 상자곽 같은 빅토리아풍 집의 실내 구성은 핵가족을 지향하는 개방적 미국 사회에 맞지 않다고 보고, 프라이버시 공간만 남겨놓고 벽을 허물어 실내 공간을 서로 연결했다.

    프레리 스타일은 내적 개방뿐만 아니라 외적 개방도 중시해, 답답한 벽 대신 창을 넓게 내서 ‘빛, 공기, 전망’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프레리 스타일이 중서부 지역 교외에 사는 중산층 사람들의 취향을 자극하면서 라이트는 1900년까지 60여 채 이상의 건물 설계를 수주했다. 또 토착적 미국 건축을 추구하는 촉망받는 건축가로 유럽에도 소개되며 라이트는 국내외의 주목을 받게 된다.

    프레리 하우스는 라이트 건축의 특징적인 화두가 될 유기적 건축의 실험이자 개화이기도 하다. 그는 일찍부터 건물은 그 터로부터 자생적으로 생기된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레리 스타일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긴 수평면 구조는 중서부 대평원의 끝없는 지평선을, 그리고 대지와 밀착되어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동양사상과의 결합

    그의 말년 대작 구겐하임 미술관 건물은 앵무조개의 형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런 시각에서 건축의 외적 형상뿐만 아니라 실내 가구나 장식품을 디자인하고 문양을 새기면서 주변 식물이나 자연 형상을 추상화해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나무나 돌과 같은 건축 자재의 결과 색조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애썼다.

    건축물과 주변 환경의 유기적 연관성의 강조는 궁극적으로 건축은 형태와 기능이 합치되어야 한다는 그의 핵심적 건축관의 표현이다. 요컨대 라이트는 모든 건축은 장소와 시대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형식으로 설계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시대이건 그 시대의 생활 스타일과 조건과 가치관이 있게 마련이고, 건축이 들어설 장소는 여기에 더하여 그곳 특유의 지형과 기후 조건을 지닐 것이다. 또 사람마다 건축에 대한 취향과 목적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건축은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유럽에서 유입된 빅토리아풍이나 아르누보풍의 ‘국제적 스타일(International Style)’의 건축을 배격하고 미국 땅에 걸맞은 자생적 건축 양식을 정립하고자 애쓴 것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그는 건축 양식의 노예가 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스타일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나, 꼭 한 가지 스타일일 필요는 없다”고 쓴 바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라이트는 자신이 주창한 유기적 건축 이론의 연원을 외부에서 찾는 것을 경계했다. 많은 사람이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 그의 건축관이 그의 일본에 대한 관심과 오랜 일본 체류, 그리고 그가 도쿄 제국호텔(Imperial Hotel)을 설계한 사실과 결부시켜 동양 사상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하곤 했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일본 건축을 처음 접한 이래 라이트는 단순하면서 자연친화적인 일본식 건축에 관심을 가졌고, 소박한 문양의 일본 목판화에 매료돼 이를 수집했고 이에 대한 책을 낸 것이 사실이다. 1904년 설계한 일리노이 스프링필드 대이너-토마스(Dana-Thomas)의 집처럼 물매가 급하지 않은 지붕, 넓은 처마, 그리고 하늘로 약간 치켜든 추녀의 모양에서 일본식 건축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쓴 ‘유기적 건축과 동양’(Organic Architecture and the Orient, 1954)이라는 에세이에서 자연과의 일체성의 중요성이나 공간이 건물의 실체라는 생각은 그의 집안이 대대로 신봉해온 유니테리어니즘 전통과 프뢰벨 유치원에서 이미 싹텄다고 밝혔다.

    마음의 내밀한 움직임과 자연의 형상이 상응한다는 생각은 남북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큰 호소력을 지녔던 초월주의 철학의 중요한 관심사였고, 방향은 약간 다르지만 이전의 청교도들 역시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확인하고자 했다. 요컨대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관심은 노장(老莊)사상이나 선(禪)불교 못지않게 미국적 전통의 일부인 것이다.

    3번의 결혼, 방황의 시간을 접고

    건축가로서 승승장구하던 라이트의 삶은 1909년 마마 체니(Mamah Borthwick Cheney)와 열애에 빠지면서 위기를 맞는다. 마마의 남편은 그에게 건축을 부탁한 고객이었다. 이미 6명의 자녀를 둔 라이트가 부인을 팽개치고 유부녀와 자유분방한 연애 행각을 벌이자 청교도적 금욕의 삶을 고집하며 살아온 보수적인 오크파크 주민들은 눈살을 찌푸렸다(오크파크는 소설가 헤밍웨이의 고향이기도 하다. 남성다움에 대한 헤밍웨이의 자기파괴적 집착을 남성적 기개와 열정을 신앙의 이름으로 짓눌러온 오크파크의 경건주의에 대한 반항의 제스처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의 문체가 장식적 요소를 제거하고 엄정한 기하학적 구도에 의탁하는 라이트의 건축 스타일을 상기시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그는 주민들의 눈총을 견디다 못해 독일에서 자신의 도판 출판 제의가 들어오자 마마 체니와 함께 유럽으로 떠난다. 2년 뒤인 1911년 미국으로 돌아온 라이트는 어린 시절 여름을 나곤 하던 위스콘신 스프링그린에 있는 어머니 소유의 농장에 새로 집을 지어 정착한다. 그는 새로 건축한 집을 외가의 출신지이기도 한 웨일스의 유명한 음유시인 이름을 따서 탤리에신(Taliesin)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탤리에신은 이내 엄청난 시련을 그에게 안겨준다. 1914년, 그의 부재 중에 대우에 불만을 품어온 바베이도스 출신의 고용인이 집에 불을 지르고 마마 체니와 그녀의 두 아이를 포함해 모두 7명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라이트는 충격 속에서 탤리에신 재건에 매달렸으나 심신의 불안정은 그로 하여금 1916년부터 1922년까지 일본과 로스앤젤레스를 오가는 유랑 생활을 하도록 만든다. 1923년 유랑생활을 함께하던 미리엄 노엘과 결혼했으나 1년 뒤 파경을 맞는 비운을 겪는다.

    1924년, 라이트는 마음을 다잡고 탤리에신으로 돌아와 건축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설계 건수는 극히 저조했다. 이런 추세는 1929년 대공황을 맞으면서 더 지속된다. 라이트는 강연과 자서전 집필로 시간을 보내는 한편, 1928년에 세 번째로 결혼한 아내 올기바나 밀라노프의 제안에 따라 1932년부터 탤리에신 펠로십을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이 제도는 라이트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줄곧 지속되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학교(Frank Lloyd Wright Foundation School of Architecture)로 발전하게 된다.

    라이트가 폴링워터를 건축한 것도 이 펠로십과의 인연 때문이다. 1932년에 출판된 라이트의 자서전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에드가 카우프만 2세가 연구생으로 등록했는데, 그의 중개로 라이트를 만난 카우프만 1세는 한때 자신의 여름 캐빈이 있던 베어런에 주말 별장을 지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 무렵 라이트는 설계 수주 실적이 거의 없어서 한가한 편이었다.

    라이트는 즉각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장차 그의 대표작이 될 건물의 설계에 착수한다. 이미 68세였던 라이트는 이때 폴링워터의 건축을 계기로 향후 20년간 지속될, 건축가로서 제2의 황금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물론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개방형 주거’ 시대를 열다

    폴링워터의 실내는 안내인의 인도에 따라서만 구경할 수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한참을 기다린 후 다른 관람객들과 함께 그룹을 지어서 안내인을 따라 실내로 들어섰다. 널따란 1층의 거실은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사면이 유리창이어서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푸르른 자연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라이트가 즐겨 쓰는 체로키 적색의 창문틀과 그 아래로 벽면을 따라 설치된 마찬가지로 밝은 색조의 붙박이 의자, 그리고 곳곳에 놓여 있는 나무 탁자의 색깔이 바깥 녹색과 멋진 조화를 이룬다.

    바닥에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 왁스칠한 돌들이 깔려 있다. 왁스칠된 표면이 사면으로 트인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풍경을 반사하면서 자연이 실내로 깊숙이 들어온 느낌이다. 게다가 천장이 낮아서(7피트1인치) 바닥의 자연석이 온 시야를 장악한다. 건물을 대지와 태양의 아들이라고 한 라이트의 표현이 실감난다.

    넓게 트인 실내 공간은 라이트 건축 스타일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는 거주자의 형편에 따라 필요한 만큼만 공간을 구획하고 나머지는 모두 개방하는 것을 실내 구성의 원칙으로 삼았다. 폴링워터의 거실도 이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널따랗게 터진 거실 공간은 가구들이 적당한 구획을 만들면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편에는 오디오 세트가, 다른 한편에는 책꽂이가 벽면을 따라 설치되어 있다. 테라스 쪽 벽면을 따라 붙박이로 설치된 공간에는 방석과 베개, 화분 등이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어서 편안한 느낌을 북돋운다. 이 같은 개방적 실내 플랜은 실내 공간을 벽으로 둘러막아 상자처럼 첩첩히 분할해온 오랜 건축관행을 파괴한 것이다.

    시대에 따라 건축양식이 달라지더라도 박스 속에 박스를 만들어 나가는 폐쇄적 실내 디자인은 르네상스 이래 변함없이 지속되어온 서양의 건축 관행이었다. 따라서 어두컴컴한 실내 공간을 개방하고 자연 속의 빛과 공기를 내부로 끌어들인 실내 디자인이야말로 라이트 건축 미학의 진정한 새로움이라고 보아 마땅하다. 언뜻 작은 변화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현대 주거문화 전반을 혁신시킨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네 아파트를 비롯해 크고 작은 건물들이 벽 대신 넓은 유리창을 내서 전망과 햇빛을 얻는 건축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도 라이트의 유산이다.

    폴링워터 1층 거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벽난로다. 집터의 자연석을 그대로 살려 벽난로 화덕으로 이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자연을 실내로 끌어들여 안과 밖이 이어지도록 한 건축 의도의 반영이다.

    벽난로는 프레리 스타일이든 뒷날의 우소니안 스타일(Usonian Style)이든 라이트 건축의 키포인트 중의 하나다. 그것은 개방적인 실내공간을 하나로 수렴하는 구실을 한다. 건축미학적뿐만 아니라 실제적 고려이기도 하다. 일터에서 돌아온 가족들은 저녁에 벽난로 앞에 모여 가족애를 돈독히 할 수 있다.

    화덕과 불이 암시하는 원시적 삶의 환기도 중요하다. 벽난로는 자연에 밀착된 삶에 대한 근원적 욕망을 표현한다. 달리 말해 그것은 실내 공간 깊숙이 들어와 있는 자연의 표상이다. 중앙난방 시스템의 건축에서 불필요한 것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라이트가 벽난로를 중시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거실을 가로질러 유리창가에 서니 자연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 더욱 강렬해진다. 창밖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목을 내밀어도 집안에서는 폭포가 보이지 않는다.

    소리에 이끌려 수직으로 난 문을 통해 테라스로 나가야 비로소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폭포를 볼 수 있다. 폭포를 풍경이 아니라 건축의 일부로 끌어들인 라이트의 의도가 이제 이해된다. 시각은 대상을 오히려 멀리 떼어놓을 수 있다.

    하지만 청각은 우원(迂遠)한 듯하면서도 한결같이 대상의 존재성을 상기시키는 법이다. 그는 탤리에신의 건축 과정에 대해 언급하면서 “어떤 집이나 산이든 무엇이든 그 위에 지어서는 안 되고, 그것의 일부로, 그것에 속하도록 지어서, 그로 인해 집과 산이 다 같이 서로 더 행복해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Wright 173). 이런 시각을 존중한다면, 폴링워터는 폭포 ‘위에’ 있다기보다 폭포‘의’ 집으로서 폭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해야 하리라.

    2층의 침실에서 두드러진 것 또한 벽난로다. 커다란 직사각형의 석판이 가로로 걸쳐 있어서 폭포 위, 밖으로 뻗은 테라스를 축소해 재현한 듯한 느낌이다. 유리문 밖의 테라스가 침실보다 훨씬 넓다. 침실이 오히려 테라스의 전실 구실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삶의 오케스트라

    놀라운 것은 침실 유리창의 한 편은 창틀이 없이 바로 석벽에 이어져 있어서 밖이 안으로 통하고 안이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집의 구조적 원칙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중앙의 굴뚝 벽과 서쪽 벽 사이에 3층 전 층에 걸쳐 수직으로 낸 창문 또한 특기할 만하다. 이 기다란 창문은 두 쌍의 유리창을 맞물려놓아서 문을 닫으면 직각의 코너를 이루지만 문을 열면 모서리가 사라지는 이른바 ‘사라지는 코너’를 연출한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상자곽 같은 건물의 폐쇄성을 무너뜨리면서 바깥 자연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현실화한다.

    이렇게 라이트는 건물이 안과 밖으로 나뉘어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디테일에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폭포의 아래쪽에서 폴링워터를 보았을 때 스치고 지나간, 자연과의 조화에 대한 의문은 그리하여 실내를 둘러보면서 말끔히 사라졌다. 라이트가 강조한 대로 중요한 것은 건물 내부 공간의 체험이지 건물 외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이트의 창조적 재능은 비단 건축 설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독특한 문양의 가구, 유리창, 램프, 식기, 옷, 침대보를 직접 디자인했고, 그래픽 아트 분야에서도 일가견을 지녔다. 폴링워터 실내의 여러 가구는 물론 주방의 스토브까지 조화와 실용을 고려해 라이트가 직접 디자인했거나 주문한 것들이다.

    그리하여 폴링워터는 오케스트라적 하모니를 삶의 공간 속에 가시화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건물을 위한 건물이 아니라 삶의 편의와 효율성을 최대한 고려해 주거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집’ 폴링워터
    신문수

    1952년 출생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 학회 부회장

    저서 :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라이트는 기술공학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삶의 양식이 급변하던 시대에 건축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이런 변화를 대담한 실험정신으로 수용하면서도 건축의 본래적 의미를 되살리는 건축 스타일을 추구함으로써 현대 건축을 선도했다. 폴링워터는 바로 그런 건축 미학의 결정(結晶)이다.

    안주인 릴리언 카우프만은 라이트에게 폴링워터에 사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교육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관람객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을 찾아온 사람은 누구든지 자연을 완벽하게 뛰어넘음으로써 자연에 가까이 다가간 한 위대한 건축적 상상력을 체험하면서 새삼 집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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