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야 나는 그게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용이임을 화들짝 깨달았다. 상민이지만 언행과 생김새에 귀족 같은 품위가 흐르던 용이. 과묵해서 좀체 입을 열지 않지만 어쩌다 씨익 웃을 때면 산천초목까지 환하게 밝히던 사람.
‘토지’에 명멸하는 수백명의 등장인물 중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그려내던 용이와 이윤석 회장은 여러 모로 닮았다. 집에 와 급히 ‘토지’를 펼쳤다. 마침 첫 장면은 사물이 돌아치는 마당이다.
별안간 경풍 들린 것처럼 꽹과리가 악을 쓴다. 빠르게 드높게. 꽹과리를 따라 징소리도 빨라진다. 깨갱 깨에갱 더어응응음 -깨갱 깨애갱! ~덩더응응음 - 장구와 북이 사이사이에 끼여서 들려온다. 신나는 타악소리는 푸른 하늘을 빙글빙글 돌게 하고 단풍든 나무를 우쭐우쭐 춤추게 한다.
동네 아낙들이 모여서 수군댄다.
“쯔쯔 저 좋은 목청도 흙속에서 썩을랑가?”
“서서방이 죽으면 자지러지는 상두가 못 들어서 서분을끼요.”
“세상에 저리 신이 많으면서 자기 마누라밖에 없는 줄 아니 그것이 어디 보통 드문 일가?”
“신주단지를 그리 위하까? 천생연분이지 머.”
뒤의 숙덕거림은 목청 구성진 서 서방을 향한 것이지 용이를 두고 한 건 아니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오광대놀음을 구경한 고성의 아낙들은 춤추는 이윤석을 향해 한두 번쯤 저렇게 숙덕거린 적이 있을 것이다. 이윤석은 스무 살에 혼인한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라 거침없이 말한다.
“내 소원이 뭔가 하면 세상에서 우리 집사람보다 더 고운 여자를 한번 만나보는 겐데 그걸 안죽도 못 이뤘구만.”
논길을 가는데 농부 같지 않은 차림에 날씬하게 균형 잡힌 몸매의 여인 하나가 앞서 걷고 있었다. 모르고 지나쳤는데 알고보니 이윤석 회장의 부인이다. 평생 농사일을 도맡아 했지만 어쩌면 얼굴에 그을린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다. 전혀 손자가 넷이나 되는 할머니 같지 않다.
“저 사람 처음 시집왔을 때 인물 좋다고 소문나서 이웃 동네서도 구경 오고 아주 난리가 났다니까요.”
그러면서 용이처럼 또 씩 웃는다.
‘하얀 베수건 어깨에 걸고 싱긋이 웃으며 큰 키를 점잖게 가누어 맴을 도는 이용, 그는 누구니 누구니 해도 마을에선 제일 풍신 좋고 인물 잘난 사나이, 마음의 응어리를 웃음으로 풀며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아낙들은 제 남편 노는 꼴을 반쯤은 부끄럽고 반쯤은 자랑스러워 콧물을 홀짝인다’는 소설 속이 아니라 그대로 어느 날 고성 장거리의 풍경이다.
그 중심에 ‘농부 춤꾼’ 이윤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