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한의사들은 우리 정부가 한의사 자격 상호인정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기로 한 것 자체에 분노하고 있다. 미국이 그런 요구를 하더라도 우리 협상단이 그 자리에서 ‘그 문제는 논의 자체가 불가하다’고 싹을 잘랐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한 한의사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1월10일 7000여 명의 한의사가 과천 정부청사 앞에 모여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7000명이면 전국 개업 한의사의 절반 규모로, 한의사가 이런 규모로 집단파업에 나선 것은 근래 들어 보기 드문 일이다. 대한한의사협회는 “한미 FTA 협상에서 이런 논의가 진행된 것은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고 한의학을 뿌리째 뒤흔드는 것”이라며 “한의사 시장 개방 논의가 계속된다면 무기한 투쟁과 전면 파업도 불사하겠다”고 반발했다. 전국 한의과대학 학생들도 지난해 12월말부터 집회와 천막농성을 벌이며 학기말 시험도 거부하고 있다.
언뜻 보면 동양의학의 맹주를 자처하는 우리 한의학계가 뭐가 두려워 그토록 완강히 시장개방을 반대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미국 한의사들이 한국에 들어와봐야 고사(枯死)할 것이 뻔하고, 반대로 우리 한의사들이 미국에 나가 의사자격을 받으면 여러모로 유리할 것 같지 않은가.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1월5일 대정부 투쟁의 선봉에 선 대한한의사협회 엄종희(嚴宗熙·53) 회장을 만났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자리잡은 한의사협회 건물은 규모면에서 의·약사 관련단체 가운데 최대를 자랑한다. 허준 박물관도 함께 있다. 엄 회장은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등산을 갔다가 이렇게 됐는데, 생각보다 빨리 낫지 않네요. 침을 놓았으니 곧 좋아지겠지요.”
엄 회장은 지리산 종주를 10회 이상 한 등산 마니아다. 그의 자연사랑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인천환경운동연합 조직위원장과 푸른생활협동조합 이사장을 지냈다. 한의사협회장이 되기 전, 인천시 한의사회장을 맡고 있을 때까지는 20여 년 동안 개량한복 차림에 머리를 뒤로 묶고 수염을 길렀지만, 2005년 7월 제36대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이 되면서 머리와 수염을 깎고 양복을 입었다. 원광대 한의대를 나온 엄 회장은 경희대 한의대 출신이 아닌 한의사로는 처음으로 한의사협회장에 당선됐다.
“한의학 자존심 무너졌다”
▼ 전문직 상호인정을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문직을 상호인정하려면 미국에도 한의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는 한의사가 없어요. 미국의 한의과대학이라는 곳을 졸업한 사람들에겐 의사 자격이 주어지지 않죠.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면 의사(physician)가 아니라 침술사(acupuncturist·물리요법사)가 됩니다. 침술사에겐 진료·처방권이 없어요. 한마디로 비정규 의료인인 셈이죠. 한국의 한의사는 미국 의사면허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지만, 미국의 침술사는 응시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주장대로라면 자국의 비정규 인력에게 어떤 검증장치도 없이 한국의 의료면허를 주라는 얘기 아닙니까. ‘우리집이 부자이니 초등학생인 내 아들을 대학에 넣어달라’고 떼를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정말 자존심 상하고 모멸감까지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