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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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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1923년 무렵, 손자들과 함께한 프로이트.

“나는 인도로 걷겠다”

프로이트의 생애에서 아버지가 차지한 자리는 결코 작지 않다. 프로이트가 인간 사회의 근원을 이룬다고 생각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성(性)적인 환각이 부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가설에서 시작된다. 즉 ‘아버지를 (어머니를 사이에 둔) 경쟁자로 증오하는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할 것이라며 불안해하는데, 여성의 생식기를 관찰함으로써 거세의 실제적인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경쟁하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아버지를 자기와 동일시하고 내면화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다.’(프로이트 ‘여성의 성욕’, 김덕영 ‘프로이트, 영혼의 해방을 위하여’에서 재인용) 사내아이가 최초로 경쟁자이자 분신으로 받아들이는 대상이 아버지인 것이다.

프로이트의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는 보헤미아에서 빈으로 이주한 상인이었다. 장사는 동유럽에서 유대인들이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으나 아이가 많은 프로이트 일가는 늘 가난에 쪼들렸다. 야콥 프로이트는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박학했다. 어느 날 열한 살의 소년 프로이트는 아버지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아버지가 젊을 때, 새 모자를 쓰고 거리를 걷다가 한 독일인에게 모욕을 당한 이야기였다. 독일인은 야콥의 머리를 쳐서 모자를 떨어뜨리며 “이 유대인 새끼, 인도에서 내려가지 못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소년 프로이트는 당연히 아버지가 맞서 싸웠을 거라 생각하며 물었다. 아버지는 대답했다. “차도로 내려가서 진창에 떨어진 모자를 주웠지.” 당시 동유럽에서 유대인이 이런 대우를 받는 건 다반사였으나 프로이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소년 프로이트는 그 자신 어떤 일이 있어도 모욕과 억압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차도로 내려서지 않고 인도로 걷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이를 어기지 않았다.

김나지움(고교) 시절 그리스어로 씌어진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독일어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었던 프로이트는 빈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교수가 되고 싶었으나 가난과 유대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개업의가 됐다. 하지만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빈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교수가 되기까지 평균 8년이 걸렸다. 프로이트는 무려 17년을 기다렸다. 1902년 마침내 의과대학의 부교수가 됐지만 보수가 없는 명예직이었다. 프로이트 교수는 친구에게 비꼬는 듯한 편지를 보냈다. “황제 폐하께서 어린아이의 성의식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라도 하신 걸까, 아니면 의회의 3분의 2 이상이 정신분석학의 존재 의의에 대해 찬성표를 던진 것일까?”



히스테리 환자의 비밀

프로이트는 가난 탓에 아름다운 약혼녀 마르타 베르나이스와의 결혼을 4년이나 미뤘다.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신경과 의사로 개업한 후에야 마르타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8년 사이에 세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이 차례로 태어났다. 프로이트는 아이들과 아내,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처제 민나까지 대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주일에 6일, 하루 열 시간씩 환자를 진료했다. 끊임없이 환자를 보고, 저녁이면 환자들의 용례를 글로 쓰는 일상이 무려 52년간 지속됐다. 이를 통해 ‘꿈의 해석’(1900년)을 비롯한 저서들이 완성되고, 정신분석학이 탄생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를 여럿 만났다. 갑자기 팔다리가 마비되거나 말을 못 하는 등 갖가지 이상증세를 보이는 히스테리 환자들을 진찰하면서, 이들의 꿈에 나타난 상징들을 분석하면 그 사람의 심리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꿈속, 즉 한 사람의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중대한 비밀’은 모든 사내아이가 본능적으로 어머니와 성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아버지에게 살의를 느낀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 기이한 감정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빈 학계는 ‘어린아이에게도 성욕이 있으며 억압된 성욕이 도사리고 있는 무의식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프로이트의 학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전 유럽에 퍼져나간 자유와 진보 사상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늙은 황제 요제프 1세는 고집스럽게 절대주의 왕정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오늘날의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걸쳐 있던 광대한 제국은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외양은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화려했지만, 과거의 환상 속에서 죽어가는 도시, 이것이 19세기 말 빈의 실상이었다.

‘악명 높은’ 프로이트

이런 빈이 성에 대해 파격적인 주장을 하고 나온 프로이트를, 더구나 유대인인 그를 환영할 리 만무했다. 학자와 시민들은 일제히 프로이트에게 야유와 비난을 퍼부었다. 프로이트는 결혼하기 전, 함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약혼녀 마르타에게 ‘나는 빈과 싸움을 시작했소’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정말로 그는 인구 200만의 대도시(20세기 초의 빈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 전체와 싸우기 시작했다. 빈 시민들은 프로이트의 집과 진료실이 있는 베르크가세를 피해 다니고, 거리에서 프로이트를 보기라도 하면 일부러 길을 돌아갔다.

프로이트는 이 같은 경멸과 무시에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친한 친구와 증오하는 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 둘이 있어야 나는 거듭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한 대중이 보내는 비난의 화살에 상처 받지 않았다. 유대인이라는 태생 역시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유대인들은 박해와 모멸의 역사를 견디며 수천년 이상 살아남지 않았는가! 프로이트 역시 성공과 명예, 무엇보다 가족을 먹여 살릴 경제적 안정을 갈망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대중의 인정과 명예가 아니라 스스로 만족할 만한 연구결과였다.

프로이트가 보여준 신념의 절정은 런던으로 피난해서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모세와 일신교’라는 책에서 확인된다. 그가 암과 싸우며 집필한 이 책은 모세가 유대인이 아닌 이집트인이며, 일신교를 최초로 섬긴 이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히틀러와 게슈타포에 의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던 유대인에게 같은 유대인인 프로이트가 ‘사실 당신들에게는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주장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 책의 내용은 실제로 많은 유대인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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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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