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 씨는 1996년 서울메트로에 입사해 구로공단·방배·잠실역에서 역무원으로 일하다 2003년 승무원으로 전직해 2호선 전동차 차장으로 일한다. 기관사 면허를 갖고 있다.
“예전에는 탈북자 특채 제도가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죠. 60세로 정년이 연장돼 근속 40년을 채울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입사해 막내 생활을 10년 동안 했습니다. 1997년 입사자가 있는데, 나이가 저보다 많아 선배 노릇을 못했거든요. 외환위기 이후 공채가 끊겼다가 2006년 신입사원을 뽑았습니다.
고등교육 받아도 직장 잡기가 어렵잖아요. 예전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은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요즘에는 있어요. 좋은 대학 졸업하고 왜 우리 회사 들어왔느냐고 물으면 ‘선배님, 이런 직장 없어요’라고 답하더군요. 서울메트로가 첫 직장입니다. 첫 사회고요. 북한에서 왔다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잖아요. 20년 일하면서 지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손가락질 받지 않으면서 일해야 나중에 북한에서 온 사람들에게 마이너스가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용수 씨는 2010년 늦깎이로 대학 공부를 시작했다. 명지전문대 철도전기과에 입학했다. 같은 학교 전기과를 2년 더 다녀 학점은행 제도를 통해 학사학위를 받았다. 가슴속에 품은 꿈을 털어놨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통일을 이루려면 경제 교류가 중요한 것 같아요. 기회가 닿으면 남북철도 연결사업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석사 공부를 하면서 기술사 시험을 준비할 계획이에요. 박사 공부도 해보려고 합니다. 북한 출신이라는 배경도 있으니 기회가 주어질 것도 같고요. 역량을 갖춰놓아야 꿈을 이룰 기회가 왔을 때 요구할 수 있겠죠.
딸이 결혼해 낳을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통일에 작게나마 기여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모는 기차가, 내가 연결한 철도를 달리는 것보다 더 이상적인 일은 없습니다. 고향 땅에도 철로가 들어갑니다. 기차를 타고 고향에 가고 싶습니다. 꿈이 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꿈을 이루지 못해도 공부를 더 하면 몸담은 조직에 도움이 될 것이고요.”
“코피 터져봐야 정신 차려”

한용수 씨는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탈북자들이 안타깝다고 했다.
“탈북한 고향 선배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다 떼였습니다. 탈북자는 한 번쯤 사기도 당해보고 망해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정신을 똑바로 차립니다.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불성실한 사례가 있어요. 적응하면서 코피 터져봐야 정신을 차립니다.
농협, 한전 같은 좋은 직장에 취직한 선배들이 만족을 못하고 큰돈 벌겠다고 장사 시작했다가 하나같이 망했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선배들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과거보다 사정이 더 나빠진 것 같아요. 고급 승용차부터 사려는 녀석들을 보면 너도 한번 망해봐야 정신 차리겠구나 싶죠.”
용수 씨는 선배에게 자신 명의의 신용카드를 건네주고 마이너스 통장도 만들어줬다. 선배는 교도소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교도소에서 나오면 용수 씨를 찾았고 돈을 빌려 쓴 뒤에는 다시 교도소에 갔다. 용수 씨는 결혼 후에도 한동안 이 선배에게 돈을 계속 빌려줬다. 2002년에는 아내와 이 일로 크게 다퉜다. 광숙 씨가 “도저히 더는 못 살겠다”고 했다.
광숙 씨는 “언젠가 가족을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열심히 돈 벌고 저축해야 하는데, 남편이 외로워서 고향 선배에게 다 줬던 것 같다. 한국에서 오래 살았는데도 외로움을 느끼는 모양이다”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이제는 외로운 것에도 익숙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남편 선배가 교도소에서 나오면 갈 데가 없다면서 주민등록을 우리 집으로 옮겨놓곤 했습니다. 그러다 출소 후 3일 만에 교도소에 다시 간 적도 있어요. 호주로 일하러 갔는데 빌린 돈 이자를 보내주겠다고 하더니 감감 무소식이에요.”
용수 씨는 “수원 아파트, 자동차 등 전 재산이 광숙 씨 명의로 돼 있다”면서 “아내가 힘들었죠. 돈 퍼주고, 날려 먹고…”라고 말끝을 흐렸다. 급여 통장을 광숙 씨에게 맡기고 매달 용돈 50만 원을 받는다. 광숙 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용수 씨가 저처럼 못되질 않아서, 어려운 사람을 보면 없어도 다 퍼주는 스타일이에요. 경제권을 넘겼다간 큰일 날지도 모릅니다.”
용수 씨는 북한에 사는 형, 누나를 찾으려고 수소문했으나 아직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형, 누나의 주소를 얻으려 중국 칭다오를 찾아 북한의 가족을 찾아주는 사람을 만났으나 성과는 없었다. 상당수 탈북자가 북한의 가족과 연락하면서 지낸다. 돈을 송금하는 경우도 많다.
“군에 있을 때 누나가 시집을 갔고, 형도 군인이어서 주소를 모릅니다. 그래서 가족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처갓집이 부럽냐고요? 이젠 한국 생활을 오래해 그렇게 외롭지는 않아요. 한국, 북한에서 반반 살았죠. 외국 여행 갈 때 대한민국 여권이 자랑스러웠는데 요즘 정치권을 보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 성격도 너무 급해진 것 같아요. 처음 왔을 때보다 인성이 나빠졌어요.”
광숙 씨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여행이다. 지난해에도 어머니, 언니 등과 함께 미국, 일본을 다녀왔다.
“돌아다니는 것을 참 좋아해요. 가고 싶은 도시가 생기면 책자, 인터넷으로 자료를 섭렵하면서 공부를 합니다. 남편이 이런 성격을 잘 알아선지 두말없이 보내줍니다.”
용수 씨가 곶감을 내왔다.
“처갓집 뒷산에서 딴 감을 말린 겁니다. 먹어보세요. 파는 것과 달라요. 어릴 적 먹던 그 곶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