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산의 광부 7500여 명은 9월24일 유고 대선 직후 파업 농성에 돌입했다. 대선 이후 처음 본격화한 이 광산의 ‘외로운 싸움’은 마침내 유고 민중혁명에 불을 당겼다. 코슈투니차 대통령으로선 혁명의 방아쇠를 당겨준 광부들에게 사의를 표시하기 위한 행차였다. 코슈투니차는 감개 무량한 표정으로 “여러분들이 없었다면 이 엄청난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느냐”며 광부들을 치하했다. 광부들도 대통령으로선 처음 ‘누추한’ 광산을 찾은 코슈투니차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콜루바라 광산이 유고 혁명의 ‘성지’로 등장한 것은 대선 직후부터 2주 가까이 지속된 농성에서 대오가 흩어질 줄 몰랐던 광부들의 ‘뚝심’ 덕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코슈투니차 대통령의 용기도 큰 역할을 했다. 대선 이후 코슈투니차 후보는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이 광산에 잠입했다. 군경의 이반 현상이 처음 나타난 것도 코슈투니차의 농성지지 연설 도중이었다.
유고 혁명을 돌아보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같은 이 혁명이 과연 성공할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 서방 전문가가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13년 철권통치 동안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힘이 국가 전역에 뿌리를 내렸고 야당은 분열돼 있었다. 이 열악한 상황에서 국민과 야당을 통합한 것은 코슈투니차의 ‘도덕성의 힘’이란 것이 유고 내외의 평가다.
18개 야당을 세르비아민주야당(DOS)이라는 연합으로 묶어 대선과 총선을 승리로 이끈 것은 코슈투니차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세르비아 정교의 독실한 신자로 헌법학자이자 변호사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한 코슈투니차는 밀로셰비치의 야당 분열과 회유 공작 속에서도 밀로셰비치와 타협하지 않았다. 유고 정치인 중 보기 드물게 부패 스캔들도 없었다.
코슈투니차가 세르비아 국민의 마음을 끈 것은 그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이기 때문. 그는 밀로셰비치의 ‘인종청소‘에 따라 가해진 서방의 경제제재에 대해 ‘세르비아인에 대한 모욕’이라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밀로셰비치를 전범재판으로 넘기는 문제에 대해서도 “전범재판소는 미국의 정치 도구에 불과하다”고 날을 세웠다.
국민의 눈에는 그가 ‘고개 숙이지 않고 대 서방 관계개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물’로 비쳐졌음은 물론이다. 서방에서는 그를 4번의 전쟁을 일으킨 밀로셰비치와 달리 ‘온건한 민족주의자’로 보고 있다. 대선 직후부터 그에 대해 서방의 ‘지원사격’이 쇄도한 것도 그가 녹록해서라기보다는 ‘그래도 밀로셰비치보다는 낫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국민과 서방의 전폭 지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의 입지는 그리 단단해 보이지 않는다.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 잔존세력의 저항 및 몬테네그로의 독립 움직임 등 내우외환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세르비아사회당(SPS)과 극단적 민족주의 정당인 세르비아급진당(SRS)은 혁명세력과의 세르비아 과도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는 등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권좌에서 쫓겨난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의 처리도 코슈투니차 대통령의 골칫거리다. 미국과 유럽 각국은 밀로셰비치의 전범재판 인도를 요구하고 있으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를 자임해온 코슈투니차 대통령은 ‘전범재판 인도 불가’를 못박은 상태.
외부적으로는 세르비아와 함께 유고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몬테네그로 공화국의 독립 움직임이 큰 짐이다.
이외에도 코소보의 민족 문제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 철수, 황폐화된 경제 재건이 코슈투니차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코슈투니차 대통령은 최근 뉴욕타임스지와의 회견에서 “정권 이양의 표면 아래서 활화산이 타고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역사의 시계바퀴를 뒤로 돌리려는 세력과 코슈투니차의 싸움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