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랑이가 목재운반 트럭에 부딪쳐 죽는 인도네시아 정글이 승은호 회장의 무대였다.
- 적수공권으로 뒤어든 그는 철저한 현지화로 사양산업인 합판사업을 성공시키고 이제는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잇는 경제 파이프 라인이 되었다.
- '붕가왕 솔로' '할로살로 반둥' 등 인도네시아 민요를 즐겨부르는 승은호 회장의 인도네시아 착근기(着根記)를 소개한다.
그런 와중에 이번 달 ‘이 사람의 삶’에서는, 30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데다 연간매출 8억 달러를 기록하고 있는 만만찮은 기업집단의 총수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재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팽배한 이 시기에 하필 거대 기업집단을 이끌고 있는 사람을 초대했느냐고 타박할지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우선, 나라 안에 있는 기업집단이 아니니 부담없이 찬찬히 들여다보자”고 권한다.
인도네시아 합판의 10% 생산
동티모르 독립, 관광 명소 발리 섬, 노래 ‘붕가왕 솔로’, 불안한 정정(政情), 그리고 수하르토 혹은 와히드… ‘인도네시아’라는 정답을 유도하기 위한 요즈음 방식의 퀴즈식 힌트들이다.
그러나 20∼30년 전만 해도 한국인들에게 인도네시아를 연상시키는 코드는 단연 ‘나무’였다. “인도네시아 산(産) 원목을 직접 갖다 만들었다”는 가구 선전이 대유행이었을 만큼 인도네시아는 가장 중요한 원목 수입 대상국이었다.
바로 이 원목사업을 기반으로 조성된 인도네시아 현지 기업 ‘코린도’와, 그 기업집단을 창업해 지금까지 이끌고 있는 한국 사람 승은호씨(承銀鎬·58)가 만나볼 대상이다.
코린도그룹의 주 업종은 합판 생산업이다. 칼리만탄(보르네오) 섬 동부에 위치한 발릭파판과 중부의 방갈란푼에 대규모 합판공장이 있고 싱가포르와 인접한 빈탄 섬, 그리고 요즘 자치독립운동이 끊이지 않는 이리안자야에도 코린도의 합판공장이 있다. 이 네 군데 합판공장에서 연간 70만∼80만㎥의 합판을 생산, 3억 달러 이상의 수출실적을 올리고 있다. 이 나라 전체 합판 생산량의 10분의 1을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합판생산에 필요한 원목도 절반 가량은 직접 생산하여 조달하고 있다.
수도 자카르타에서 남동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제지공장 역시 합판사업과 더불어 코린도를 지탱하고 있는 주력 공장이다. 신문용지만 생산하는 이 제지공장에서는 연간 43만t의 종이를 생산, 1999년도의 경우 1억7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미국, 대만, 인도, 스리랑카 등지에 수출할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국내 신문용지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역시 자바 섬 안에 있는 컨테이너 공장은 월 4000 박스의 철 컨테이너를 생산하여 미국, 독일, 중국 등지에 전량 수출하고 있다.
“IMF 때도 문닫지 않아”
이외에도 한국의 동양화학과 합작 설립한 화학공장이 있고, 육로 및 해상 운송회사, ‘이글(EAGLE)’이라는 독자 브랜드를 가진 신발공장에다 파이낸싱·증권·보험 회사 등 금융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이 간단치 않은 기업군을 진두 지휘하고 있는 승은호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떤 연유로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창업을 했는가. 그의 성공 요인은 무엇인지, 더불어 ‘한국인 승은호’와 그의 코린도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등을 탐색해보기로 한다.
미국지사에서 업무를 마치고 인도네시아로 향하는 길에 잠시 한국에 들른 그를 서울 강남의 코린도 지사에서 만났다.
―정확히 코린도의 계열회사는 몇 개입니까?
“글쎄요, 30개쯤 될 겁니다 아마.”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인도네시아 현지에 머물면서 경영을 직접 챙기시는 걸로 아는데, 그런 분이 자신이 경영하는 계열회사를 ‘아마 30개쯤’이라 말하니 좀 어색하게 들리는데요?
“허허허, 그렇게 들렸나요? 그런데 그게 이렇습니다. 가령 운송회사의 경우 트럭을 이용한 육상운송과 해운, 그리고 통관업무를 처리하는 회사가 각각 따로 있는데 이것들을 뭉뚱그려 하나로 볼 것이냐 세분할 것이냐에 따라, 서른 개가 못 될 수도 있고 넘을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인도네시아에도 코린도 같은 기업집단이 많습니까?
“많은데 우리처럼 조직적으로 하는 데는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업집단이 은행 돈 끌어다가 무분별하게 사업을 벌였다가 지난 IMF 때 와르르 무너졌어요. 하지만 우리 코린도 그룹 회사는 단 한 군데도 문 닫은 데가 없습니다.”
―혹독한 불황기를 망한 회사 없이 끌어갈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와 경쟁하던 컨테이너 공장이 IMF 이전에 다섯 군데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황이 닥쳐서 수출이 둔화되자 전부 문을 닫고 우리 코린도만 남았습니다. 불황을 견뎌낼 힘이 없는 회사들이었기 때문에 문을 닫은 거지요. 장사라는 게…”
장사꾼이란 어려운 시기를 버텨낼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공장을 하나 세울 때 항상 2년이나 3년 동안은 밑질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시작한다. 문제는 기초 자본을 은행돈으로 끌어대거나, ‘밑지는 기간’의 손실을 빚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예전 한국의 풍토 같으면 은행 돈 끌어다가 일단 사업을 벌이고 봤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기도 힘들겠지만, 운이 좋아 성공했더라도 거기서 무슨 기업가 정신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승회장은 오늘날의 코린도 그룹을 어떻게 일궈낼 수 있었을까. 그의 동력은 무엇이었고 창업과정은 어떠했을까? 그 과정을 알아보기 전에 승 회장에게 이런 질문을 툭 던졌다.
―그렇다면 코린도가 인도네시아 경제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떻습니까?
큰 그룹이라는데, 도대체 인도네시아에서 몇 등이나 되느냐는 질문을 그렇게 건넸던 것인데 나는 금세 후회하고 말았다. 외형만 가지고 재계 몇 위라고 자랑하던 재벌 기업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연일 목도하고 있는 지금, 덩치의 크고 작음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돌을 깎아 만든 불상(佛像)도, 개신교의 교회 건물도 동양 최대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에 몸담고 있지 않은가. 기왕에 한국인이 이끄는 기업이니 인도네시아 재계에서 손가락을 여러 개 구부리지 않아도 되는 순번에 들었으면 하는 천박한 의문이 솟구친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몇 번째 가는 기업이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 나라에는 한국처럼 개개의 기업은 물론이고 그룹단위로 내는 통계자료가 없습니다. 어느 기업이 1등이라고 자랑하면 1등인 줄 알아야 해요. 눈에 잘 띄면 1등이고 잘 안 띄면 조그만 업체지요. 나는 한국 사람들이 그런 질문할 때가 제일 난감한데, 그럴 땐 이렇게 대답해버리지요. 인도네시아에서 발행하는 신문용지의 80%를 우리 제지공장이 공급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문 닫으면 인도네시아 일간지가 최소한 1주일은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 정도면 우리 코린도가 그 나라에서 꽤 영향력 있는 기업 아니냐…”
하기야 1만70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인데다, 인구도 예전에 한 번 조사한 수치를 기준으로 매년 출산율을 곱해서 ‘2억2000만 정도’라고 어림하는 실정이라니 경제 통계자료가 제대로 갖춰져 있을 리 없다. 그냥 속 편하게, 코린도의 계열사 하나가 인도네시아의 전체 일간신문을 1주일 동안이나 나오지 못하게 만들 만큼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승은호 회장의 부친은 목재회사 ‘동화기업’을 창업했던 승상배씨(承相培·80세)다. 평안도 정주 출신인 그는 광복 후 월남, 미군의 군납공사 등으로 돈을 벌어 1951년에 동화기업을 세웠다. 60년대에 원목수입으로 재미를 본 그는 이왕이면 인도네시아 밀림에서 원목을 직접 생산하기로 결심하고 1970년에 ‘인니동화’라는 회사를 현지에 설립한다. 한국남방개발, 경남기업에 이어 세 번째로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셈이다.
현지인으로부터 벌채권을 사들인 인니동화는 한국인 기술자들(주로 서울농대 임학과 출신)을 파견해 본격적인 벌목사업을 벌인다. 원목들은 원목 운반선을 통해 인천 저목장으로 운송되었고, 그곳에서 합판이나 가구의 재료로 변모했다.
1975년, 승상배 당시 동화기업 사장은 사정기관으로부터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도피자금을 제공하지 않았느냐는 추궁을 받다가 결국 탈세혐의(후에 무혐의 판결)로 구속되고, 그의 회사는 부도를 맞는다. 인도네시아의 인니동화도 현지의 외환은행 관리로 넘어가게 된다. 여기까지가 코린도그룹의 전사(前史)다.
그의 아들 승은호는 부사장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사업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뭔가 해보려 해도 비빌 언덕이 없었다. 이때 승은호로 하여금 새로 시작해볼 수 있도록 원군이 되어준 것은 일본 기업이었다.
승은호가 동화기업 미국 지사장으로 근무할 당시 후세라는 한 일본인과 가깝게 지냈다. 그가 나고야에 근거를 둔 ‘고아’라는 회사 관계자를 연결시켜준 것이다.
“고아 그룹에 목재가공회사가 있었는데, 그 회사의 원목담당자에게 1원 한 푼 조달할 수 없는 회사 형편을 얘기하고, 만일 나한테 원목 생산에 필요한 장비 구입비만 빌려준다면 나무를 베어서 갚겠다고 했지요. 원목 장비를 구비하자면 100만 달러 이상이 소요되는데 그런 거액을 담보 하나 없이, 더구나 남의 나라 사람한테 빌려달라는 건 무모한 요구였지요.”
‘망명기업’ 코린도
그런데, 그 무모한 요구가 통했다. 일본 기업이 승은호의 신용을 담보로 100만 달러의 벌채장비 구입자금을 빌려준 것이다. 물론 ‘고아’측도 빌려준 장비 구입자금을 원목으로 상환받는다면 싼값에 나무를 살 수 있다는 이점을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야 빈 손바닥뿐인 사람에게 그런 거액을 지원하겠노라고 나섰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인니동화와는 별개 사업이므로 회사 이름을 새로 지어야 했어요. 처음엔 ‘코리아-인도네시아’라 할까 생각했는데 그건 너무 단순 나열하는 것 같아서 제외했고, 그 다음에 ‘인도코’가 어떨까 생각해봤는데 한국에서 ‘코’는 안 좋은 얘기에 쓰이는 수가 많잖아요.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 코가 석 자나 나왔다. 등등. 그래서 궁리 끝에 얻어낸 이름이 코리아-인도네시아를 합성한 코린도(KORINDO)였어요.”
그러니까 명색만 ‘동화기업 창업주 2세’였지 승은호가 코린도를 창업할 때 종자로 삼았던 돈은 일본 기업으로부터 빌린 장비구입자금이 전부였던 셈이다. 흔히 “빈손으로 시작했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코린도야말로 승은호가 완벽하게 빈손으로 이국땅에 세운 기업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일본 기업의 지원으로 130만 달러어치의 벌목장비가 인도네시아로 들어갔고, 장비만으로 원목을 생산할 수 없어 추가로 30만 달러의 운영 자금까지 지원받았다. 당시 인니동화에 있던 기술자들을 확보하여 원목 벌채에 나섰는데, 승은호 회장은 이 무렵의 코린도를 ‘망명기업’이었다고 회상한다.
말이 쉬워 ‘원목생산’이지 인도네시아 밀림에서의 원목 벌채작업은 장난이 아니다. 대학 임학과를 나온 한국인 기술자와 현지인 길잡이로 구성된 임상조사팀이 밀림에 들어가 어느 지점에 어떤 크기, 어떤 종류의 나무가 얼마나 있는지, 벌채를 한다면 도로를 어떻게 내면 좋은지 따위를 일일이 지도에 표시하여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를 분석하여 채산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 벌채권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내 벌채권 매매협상을 벌인다. 당시만 해도 인도네시아는 군벌(軍閥) 등 권력 실세들이 벌채권을 가지고 있었다.
벌채권을 확보하면 임상조사 보고서에 따라 도로를 내고, 본격적인 벌목에 들어간다. 벌목 생산팀은 불도저 석 대와 톱질하는 세 사람이 한 팀이 된다. 불도저는 나무를 운반할 길을 닦거나 베어낸 나무들을 도로까지 옮기는 일을 담당한다.
일정 규격으로 자른 나무는 도로로 옮겨져 수십대의 트럭에 실어 운반한다. 한국의 트럭 운전수들 사이에서 “인도네시아로 돈벌이 가자”는 말이 유행하던 때가 이 무렵이다.
나무 중에는 물에 뜨지 않고 가라앉는 나무가 있는데 이것들은 트럭에 실어 원목을 선적할 수 있는 항구나 합판공장으로 직접 운송하고, 물에 뜨는 나무는 강물에 띄워 뗏목으로 묶은 다음 모터보트가 끌고 강을 따라 내려간다.
신발사업에도 진출
코린도의 임직원 중 상당수는 이 무렵부터 산판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은 역전의 용사들이다. 밀림 속 임시 숙소인 나무 캠프에 머물다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맞기는 예사고, 사슴을 삼킬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뱀의 먹이가 될 뻔했던 직원도 있다. 밤중에 도로로 튀어나온 호랑이가 목재운반 트럭에 치여 죽었는데, 한국인 인부들이 호피를 벗겨 말리고 호랑이뼈를 드럼통에 고아 환(丸)으로 만들어 귀국했다는 일화는 코린도 직원들 사이에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승은호 회장이 코린도를 설립하면서부터 원목경기가 되살아났다. 그는 일본 회사로부터 빌린 장비구입자금을 3년 만에 모두 상환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70년대 말부터 원목수출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잡아나가다가 85년도에 시행에 들어갔다. 합판 등으로 가공수출해서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목적이었다. 예고된 정책이었는데도 85년이 되자 수많은 원목 생산회사들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승은호 회장은 79년도에 한국의 합판공장 기술자들을 영입하여 현지에서 합판사업을 벌였다. 국내 업체로는 인도네시아에 처음으로 세워진 합판공장이었다.
주력인 목재사업과 전혀 관계 없는 사업도 벌였다. ‘이글’ 상표의 신발 공장이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수출드라이브와 고용증진 정책에 부응해, 1985년에 설립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신발산업이 사양길에 있었다. 승 회장은 경험 많은 부산의 신발공장 기술자 80여 명을 데려가 신발생산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나이키나 리복 등과 주문생산계약을 맺어 납품했으나, 지금은 이글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인도네시아 내수시장에만 공급하고 있다.
코린도의 ‘역전의 용사들’은 “더위나 말라리아나 맹수보다 훨씬 무서웠던 것이 현지 일꾼들이다”고 입을 모은다. 회교도인 이들은 오른손을 신성하게 여기는데, 만일 생각없이 왼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날에는 금세 전투자세로 돌진해오기 일쑤였다. 종교와 관련해서 초기에 겪었던 애로사항 중 하나는, 그들의 기도습관이었다.
“합판공장에서 한창 일하던 현지 직공들이 작업을 하다 말고 갑자기 알라신께 기도 올릴 시간이라면서 작업장을 빠져나가서는, 바깥 한적한 곳에서 물로 손을 씻고 엎드려버리는 겁니다. 합판공장의 경우 라인별로 작업이 분담돼 있기 때문에 갑자기 몇 명이 빠지면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거기서 외국진출 기업의 현지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깨달았지요.”
승은호 회장은 궁리 끝에 작업장 곳곳에 기도실을 따로 만들어 직공들이 교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승회장의 현지화 노력은 신입사원들의 채용과 수련과정에도 잘 나타난다. 현지인들과 의사소통이 중요한만큼 코린도에는 한국외국어대 인니-말레이어과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신입사원들은 사무직일지라도 일정기간 현장 근무 경험을 쌓아야 한다. 생산현장에서 현지인들과 맞부딪치는 것 이상으로 현지화의 효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사건은 곳곳에서 터졌다. 결근을 밥먹듯이 하고 작업시간에도 말썽만 부리는 한 현지인을 노동청 지부를 통해 절차를 거쳐 해고한 적이 있었다. 해고 통지를 한 다음 날 아침, 노무를 담당하는 한국인 총무가 일찌감치 출근해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뒷목 근처가 서늘하더란다. 돌아보니 해고당한 그 인도네시아 남자가 나무 자르는 톱을 가지고 자신의 뒷목을 ‘썰고’ 있더라는 것. 피투성이가 된 총무는 황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제 중견 사원이 된 이 사람은 흉터 때문에 무더위에도 뒷머리를 기르고 다닌다.
현재 코린도는 250여 명의 한국인 직원과 2만 명이 넘는 현지인을 고용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인 직원들은 그 나라로 귀화하지 않는 한 주기적으로 비자를 연장해야 한다.
인도네시아 노동청이나 상공부에서는 되도록 현지인들의 고용기회를 늘리기 위해 한국인 직원들의 비자연장에 대단히 까다롭다. 기술을 인도네시아인에게 빨리 이전해주고 한국인들은 본국으로 돌려보내라는 것이다. 승회장이 코린도의 한국인 직원들에게 인도네시아의 생활문화를 터득하여 그들과 원만하게 지내라고 채근하는 것이 ‘현지화’를 위한 것이라면, 인도네시아 정부가 코린도 같은 외국기업에 요구하는 것은 ‘현지인화’다.
그런데 문제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요구대로 현지인화를 하고 싶어도 그것이 쉽지 않다.
“제지공장에 대졸 출신 현지인 셋을 고용한 적이 있어요. 그 친구들을 초기에 현장에 투입했더니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다 나가버렸어요. 나는 펜대 굴리면서 사무 보기 위해 회사에 들어왔지 고등학교 졸업자들하고 기름때 묻히면서 일하러 들어온 게 아니라는 거지요. 나중에 공장장이 되더라도 현장을 알아야 직공들을 관리할 수 있을 것 아니냐, 한국에서 일류 대학인 서울농대 출신도 처음에는 현장에 가서 일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아무리 설득해도 안 들어먹습디다.”
20억 달러를 200달러로
그래서 비자연장 시기가 되면 코린도측과 노동청 관리 사이에 한바탕 설전이 벌어진다. 노동청 관리는 “왜 우리 나라 사람에게 기술이전 안 시키고 한국인을 계속 눌러 있게 만드느냐”고 시비를 걸고, 코린도측은 “아니, 임업과 나온 사람이 산판에는 들어가보지도 않고 사무실에서 펜대만 잡겠다니 그걸 어디다 쓰겠느냐”고 항변한다.
인도네시아 동부의 이리안자야에도 코린도의 합판공장이 있는데, 그곳 주민 대부분이 기독교도다. 이곳은 문명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않아 ‘어떤 곳에 출근한다’는 개념이 없다. 월급을 받은 다음날이면 상당수 직공이 결근해버린다. 돈이 생겼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논 다음에, 돈이 떨어지면 나가서 일하면 될 것 아니냐는 식이다.
또한 이들은 동티모르의 영향을 받아서 자치독립을 요구하며 ‘투쟁’을 하고 있어, 승 회장은 현지 합판공장에 투자를 늘리고 싶어도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처음 우리 합판공장이 이리안자야에 들어섰을 때 그곳 독립군 사령관이라는 사람이 회사로 찾아와서 돈을 내라는 겁니다. 얼마를 주면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20억 달러를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20억 달러는 너무 많으니 200달러로 깎아달라니까 두말없이 그렇게 하자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2조 몇천억원을 요구했다가 이십 몇 만원으로 깎아 준 것이다. 그만큼 돈에 대한 인식도, 수(數)에 대한 개념도 없는 사람들이다.
코린도의 합판공장 인근 주민들은 공장이 있는 일대를 ‘코린도 타운’이라 부른다. 집 한 채 없던 외진 곳에 합판공장을 지어서 현지 직공들을 채용하면, 그 직공의 가족들이 모두 공장 부근으로 몰려와 집을 짓고 거대한 마을을 형성한다. 땅값을 내지 않고 자유로이 집을 짓고 살 수 있으니 한국 사람에게는 부러운 광경이다. 코린도에서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학교도 지어주고 교회도 짓는다. 물론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도 회사에서 채용하고 월급도 코린도측에서 지급한다. 승 회장의 철저한 현지화 노력의 일환이다.
승은호 회장이 인도네시아에 코린도를 설립할 때 한국으로부터 한 푼의 시드머니(종자돈)도 내간 게 없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그에게 “당신과 코린도가 한국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느냐?”고 따질 수 없다.
그런데 그는 “한국정부는 한국의 사업가들로 하여금 여건이 맞는 외국에 나가서 사업을 하도록 적극 권장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코린도에 원자재를 수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사가 코린도 서울 지사에 있는 ‘코린교역’이다. 이 회사가 한국의 원자재를 인도네시아로 수출한 액수가 연간 5000여만 달러에 이른다. 96년도에는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과 함께 ‘수출의 탑’을 받기도 했다. 그러니까 인도네시아의 코린도는 한국으로부터 원자재를 수입하고, 한국에 있는 코린도 계열의 코린교역에서는 모기업에 수출하는 형식이다.
인도네시아에 나가 있는 한국인 코린도 직원의 급여는 대졸 신입의 경우 월 3000여 달러. 세금은 회사에서 별도로 내주고, 의료비도 회사에서 지원한다. 가족이 한국에 있는 경우 대부분 한국으로 송금되니 그렇게 벌어들이는 돈도 적지 않다.
나무 벤 후 의무 조림해야
이제 좀더 대국적인 견지에서 문제점을 따져볼 차례다.
―환경문제는 어느 대륙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전지구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원목을 베어내서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을 망가뜨리는 셈이니, 그런 점에서 원목을 생산하고 가공하는 사업을 하시는 분으로서 해명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벌목을 한다니까 산을 아예 다 깎아내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쓸모 있는 나무만 베어내고 또 베어낸 자리에는 의무 조림을 하게 돼 있습니다. 물론 어떤 원목회사들은 눈속임으로 대강 심고 마는데 우리 코린도는 철저합니다. 그리고, 이건 학자들의 조사로 이미 밝혀진 내용인데, 수령이 오래된 나무는 새로 심어서 자라나는 나무에 비해 산소배출량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승 회장은 그 정도로는 만족할 만한 대답이 아니다 싶었는지 코린도가 대대적으로 펼치는 조림사업을 소개했다. 별도 회사가 진행해오고 있는 이 조림사업은, 나무 벤 자리에 의무조림하는 것과는 별도로, 중부 칼리만탄 지역의 9만㏊를 허가받아 유카리투스라는 개량 씨앗을 뿌렸다. 식물이 금방금방 자라는 열대성 기후 지역이라 2년 전에 심은 나무가 벌써 10∼15m로 자랐다는 것이다. 이제 머잖아 조림목으로 합판공장의 자재를 댈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더불어 조림업자에게는 나무 한 그루가 배출할 수 있는 산소량을 계산하여 환경기여기금을 받을 수 있는 국제협약이 준비되고 있다고 소개한다.
그는 11년째 인도네시아의 한인회 회장직을 ‘장기집권’하고 있다. 회장 선거하는 날이면 그는 회의장에 나가지도 않는다는데 교민들이 자꾸 그를 천거하는 바람에 교민회장직을 연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는 2만여 명의 교민이 살고 있는데, 일본과 중국을 제외하고는 아시아에서 한국사람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다.
승은호 회장이 교민사회에서 쓰고 있는 감투 중에는 한인상공회의소 소장도 있다. 코린도와 승회장은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해보겠다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안내창구나 마찬가지다. 자카르타의 코린도 본사에는 인도네시아의 각종 경제관련 법률이나 세법 규정들이 바뀔 때마다 한글로 번역해서 고국에 보내주고, 한국의 그것들을 받아서 인도네시아 교민들에게 전해주는 일을 전담하는 직원이 있다.
“우리 코린도는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있는 한국기업들에 현지 사정에 밝은 인재를 공급해주는 논산훈련소입니다.”
승 회장의 얘기다. 처음 진출해서 사업을 벌이는 기업은 현지경험을 쌓은 직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때문에 코린도 직원을 뽑아가는데, 승회장도 협조차원에서 그들을 붙잡지 않는다.
인도네시아에서 코린도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케 해준 사건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는 연간 300만t을 생산하는 국영 제철소가 있었는데, 인도네시아 정부는 외국의 제철회사와 합작으로 제2제철소 건설을 추진했다. 합작 파트너가 되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다. 일본의 신일본제철과 오스트레일리아의 BHT 등 세계 굴지의 제철회사들이 눈독을 들였고, 한국의 포항제철도 경쟁대열에 뛰어들었다. 애당초 포항제철은 가망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승은호 회장이 수하르토 당시 대통령의 측근 실세를 만난 후 판세가 역전되어 포항제철로 낙찰되었다.
결국 건설공사 중에 IMF라는 복병을 만나 현재는 지지부진한 상태지만, 앞의 사례는 코린도와 승은호 회장 같은 선구적인 기업과 기업가가 현지에 버티고 있는 것이 후속진출을 꾀하는 업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증명하는 사례라 하겠다.
승은호 회장이 즐겨 부르는 노래는 인도네시아 민요 ‘붕가왕 솔로’와 ‘할로할로 반둥’이다. 현지 인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르면 인도네시아의 고관대작들이 기립박수를 보낸다고 한다. 그의 이런 현지화 노력이야말로 코린도 성공에 가장 중요한 열쇠가 아닐까 싶다.
피카소의 대표작은 ‘게르니카’다. 검은 색 바탕의 대형 캔버스에 할 말을 다 못했는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사람, 죽은 아이를 부둥켜안고 목이 빠져라 흐느껴 우는 어머니, 옷이 벗겨지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서 빠져나가려는 여인, 이제 어떻게 할 수 없다며 ‘만세’ 부르는 사람, 쓰러지며 울부짖는 말, 근엄한 표정을 지은 황소….
‘게르니카’는 평온과 정상이 아니라 파괴된 일상에 대한 분노와 절규, 절망, 죽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1937년 4월26일 스페인의 한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퍼부은 나치 독일의 폭격에 대한 한 예술가의 분노와 항의의 표현이긴 하지만 그것은 1만 권의 스페인 내란 역사서보다 더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예술의 위대성을 ‘게르니카’가 증명했던 것이다.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전시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게르니카는 그 직후 가진 유럽 순회전시회가 끝나자 곧바로 뉴욕 현대미술관으로 옮겨졌다. 화가가 ‘스페인에 공화정이 들어설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그걸 맡겼기 때문이다. 81년 프랑코가 죽자 작품은 마드리드의 프라도박물관으로 되돌아왔고, 마치 파리의 오르세처럼 현대미술만 전시하는 소피아왕비미술관이 92년 마드리드에 문을 열면서 그곳으로 이전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소피아왕비미술관에는 ‘게르니카’ 원작뿐 아니라 습작과 드로잉도 함께 전시하고 있어 대작의 출산과정을 더듬어볼 수 있으며 후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등 스페인 현대미술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다.
‘게르니카’를 보고 마드리드를 떠난 나는 바로셀로나를 거쳐 마르세유에서 아프리카 민속가면들을 집중 전시하고 있는 인류학박물관을 관람했다. 아프리카는 순수했다. 그러면서도 역동적이었다. 프랑스인들이 즐겨 말하는 ‘에랑 비탈(생의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젊은 시절 피카소도 파리의 인류학박물관을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아프리카 민속가면들을 그렸다고 하니까. 내가 느꼈다고 해서 특기할 일은 아니다.
나는 다시 니스로 향했다. 그곳은 문명의 이름으로 걸쳤던 가면들을 모두 벗어버린 듯 사람들은 벌거숭이에 가까웠다. 그리고 ‘꼬뜨다쥐르’라 부르는 푸른 바다 위로는 파도가 넘실댔다. 내 눈에는 그게 꿈과 낭만의 조각 같아 보였다. 니스는 그렇게 부담 없는 도시였다. 여기에는 멋진 미술관들이 곳곳에 박혀 있어 시간을 죽여야만 했다.
남불은 19세기에 들어 유럽의 예술가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물가가 싼데다 광선이 투명하다고 소문이 나서였다. 샤갈, 마티스, 르누아르, 피카소, 모딜리아니, 시냑, 콜레뜨 등의 화가와 장 콕토, 사르트르, 보부아르, D.H. 로렌스 등의 문학가, 소피아 로렌, 그레타 가르보, 카트린 드뇌브 등의 영화배우들이 이곳을 찾았다. 자연 그들의 작품이 이곳에 남게 됐고, 이를 소장한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먼저 찾은 것은 샤갈미술관(정식 명칭은 국립샤갈성서메시지미술관). 보라색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앞뜰을 지나 미술관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무중력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새, 꽃, 천사들은 어느 한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시간도 멈춘 듯했다. 에덴동산 이전의 세계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샤갈의 그림은 그렇게 신비로웠다.
샤갈은 1887년 러시아의 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1년 이스라엘을 여행하고는 잇따라 시리아와 이집트도 여행하게 됐는데, 그때 성서의 분위기를 체득했다. 그것을 토대로 1954년부터 13년 동안 17점의 연작 ‘성서의 메시지’를 제작했다. 천지창조, 다윗, 노아, 모세, 이삭 등의 인물을 환상적인 기법으로 그렸던 것이다. 그는 그 그림들을 67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고, 프랑스는 그 답례로 니스에 이 미술관을 지어 73년 샤갈의 86회 생일날에 맞춰 개관했다. 살아 있는 화가에게 바쳐진 프랑스 유일의 미술관이었다.
‘색채의 반란’. 이것은 샤갈미술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마티스미술관이 내게 던져준 인상이다. 마티스만큼 색채의 천재가 있었던가. 넓은 전시공간에 포진해 있는 그림, 도자, 포스터 등에 구사된 색채 감각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는 색채와 색채의 관계, 색채의 구조 등에 관해 치밀하게 연구한 것 같았다. 거기에 표현된 적·청·녹의 색채는 자연 속에서는 볼 수 없는 마티스만의 것이었다. 그는 그런 색채로 인간을 그렸다. 그것도 살아 움직이는 여인들을.
니스 시내의 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작품 등을 관람하고, 르 콜레트라는 교외 마을에 들러 신경통과 류머티스로 고생하던 르누아르가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죽을 때까지 12년간 작품활동을 계속했던 아틀리에를 찾아서는 아직 식지 않은 그의 체취를 느꼈다. 그리고는 산길을 따라 20여 분 달려, 작으나 아주 아름다운 생폴 마을에서 벌레와 새들이 우짖는 깊은 숲 속에 자리잡은 마그재단 미술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서울 충정로에 있는 프랑스대사관저를 닮은 2층 건물과 굴곡이 많은 정원으로 구성된 미술관에는 그림보다는 조각이 많았다.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 미로의 ‘미궁’과 ‘태양 새’, 칼더의 움직이는 조각들이 인상적이었는데, 거기에 샤갈의 환상적인 모자이크와 유화,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브라크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보태져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예술공간이 됐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아직 언급하지 못한 것으로 내가 보기에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 찾기를 권하고 싶은 유럽, 아시아의 박물관, 미술관의 이름이라도 열거해야겠다. 뮌헨의 과학박물관, 동서양의 도자작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독일 드리스덴의 쯔빙거궁, 로마의 바티칸미술관과 로마문명박물관, 빈의 미술사박물관, 리스본의 항해박물관, 바르셀로나의 후안 미로재단미술관,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과 고흐미술관, 오슬로의 콘티키박물관(헤이에르달의 문명탐험 관련), 튀니스의 바르도박물관(세계 최대의 모자이크 컬렉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박물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박물관과 성서의 전당(Shrine of Book), 이스탄불의 톱카프박물관, 파키스탄의 페사와르박물관, 뉴델리의 인도박물관, 베이징의 고궁박물원, 타이페이의 고궁박물관, 상하이의 상해박물관, 도쿄의 동경박물관, 오사카의 동양도자박물관 등이 그것이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뛰어난 기획력
미국은 유럽인들에게 자유와 희망의 땅이었다. 정치적·종교적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은 물론 기아에서도 벗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 관문인 뉴욕에는 그래서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졌다. 이런 뉴욕에는 세계적인 미술관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현대미술관(MoMA)과 구겐하임미술관, 휘트니미술관이 특히 유명하다.
맨해튼 53번가의 모마는 한때 ‘게르니카’를 소장했다. 피카소가 왜 그렇게 했을까. 그를 세계적인 예술가로 만든 저 유명한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이곳에 있어서였을까. 모마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백과사전처럼 나열하는 곳이 아니다.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들을 선별하여 보여줌으로써 ‘작품을 통한 미술사 학습공간’이기를 지향한다. 생각해보라. 1년에 수백 점이나 되는 대작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걸 무슨 수로 구입하고 전시할 수 있겠는가.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들에 집중 투자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또 그래야만 그 대열에 들고 싶어 작품을 기증하는 작가가 나타날 테고. 피카소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미술관 운영에는 이런 고도의 지적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곳엔 유럽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인상파 대가들의 것도 있지만 그곳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데 쿤닝, 잭슨 폴록 같은 미국산 대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모마는 또 기획전도 자주 갖는데, 그때마다 세계의 주목을 받곤 한다.
21세기 첫 전시회를 백남준에게 헌정한 구겐하임미술관은 달팽이 모양의 독특한 외관과 현대미술의 최첨단 흐름을 반영하는 수준 높은 기획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추상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작품의 최대 컬렉터이기도 하지만 피카소, 콘스탄틴 브란쿠시, 알렉산더 칼더 등 유명 작가의 작품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달팽이처럼 생긴 통로를 따라 6층까지 올라가면서 작품을 볼 수 있는데, 끊기지 않고 그 느낌이 계속될 수 있어 좋았다.
모마와 구겐하임이 전세계 작가를 대상으로 한다면 매디슨 애버뉴 75번가의 휘트니미술관은 미국 현대회화가 주 전공이다. 전시작품들을 보면 왜 뉴욕이 20세기 들어 세계미술의 메카가 될 수 있었으며, 그 주역들이 누구였는지 알 수 있다. 미국현대회화사의 학습장인 셈이다.
뉴욕에 이런 미술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영박물관에 맞먹는 규모와 질을 자랑하는, 흔히 ‘메트’라 부르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세계 최대 규모의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그레이트 홀이라 부르는 로비에서 시작되어 이집트관, 로마관, 중세관 등으로 이어지는 메트는 센트럴 파크에 연해 있는데, 유럽 박물관이 미처 갖지 못한 마야와 잉카, 인디언 관련 유물이 풍부하다. 세계의 정치·경제·군사·외교를 주름잡는 미국이 문화재 분야에서도 결코 남들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듯했다.
중생대의 거물 ‘바로소루스’ 공룡이 마치 ‘여기는 우리 같은 동물의 세계야’ 하며 안내하는 자연사박물관은 며칠을 보아도 다 못 볼 정도로 표본이 방대했다. 동물을 박제해서 그들의 생활환경을 재현한 것에서부터 조개와 어류, 양서류와 파충류, 포유류, 운석, 광물, 보석, 나무와 풀, 그리고 인간. 이들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공룡들의 세계…. 4층의 공룡전시실은 그들이 어떻게 그 오랜 세월, 지구상의 왕자로 군림할 수 있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것을 보노라면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묘안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보스턴엔 보스턴미술관이, 시카고엔 시카고미술관이, LA엔 게티미술관이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이 최고다. 16개 박물관과 7개 연구기관, 그리고 9개 교육시설과 동물원. 이 모두를 아우르는 거대한 문화시설은 놀랍게도 시 외곽이 아니라 한복판에 있었다.
‘용산시대’ 개막에 붙여서
스미소니언은 제임스 스미손(1765~ 1829)이란 영국 과학자의 이름에서 나왔다. 그가 죽기 전 조카 제임스 헝거포드에게 유산을 남기면서 “네가 만약 자식이 없이 죽게 되면 내 유산을 모두 미국에 기증하여 지식 증대와 보급을 위한 시설을 건립하는 데 쓰도록 해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헝거포드가 자식이 없이 1835년 일찍 죽게 되자 그의 유언대로 미국에 맡겨졌고 그리하여 이 박물관이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미손이 모국인 영국이 아니라 평소 별다른 인연도 없었고 한번도 찾은 적도 없었던 미국에 유산을 기증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미국 의회는 1846년 그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을 설립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했다.
본부 기능을 하는 스미소니언 캐슬에서 얻은 팸플릿을 보니 없는 게 없었다. 박물관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은 실로 넓었으며 또 깊었다. 인류가 도달한 항공·우주 분야에서의 기술발전과 그 가능성을 함께 보여주는 항공우주박물관, 미국의 과학적 발명의 성과와 미국 역사를 들려주는 미국역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는 세계적인 대가의 미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내셔널 갤러리, 현대미술과 야외조각에 초점을 맞춘 허숀미술관, 아프리카미술관과 아메리카미술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아시아 미술의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는 새클러미술관과 프리어미술관, 미국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의 초상화를 모아놓은 초상화박물관, 20세기 미국 공예작품의 컬렉션인 렌윅갤러리, 산업미술의 역사를 보여주는 산업미술관, 여기에 분점으로 뉴욕에 쿠퍼 휴트미술관과 인디언미술관이 있었다.
부러운 것은 이런 것만은 아니다. 창립 이래 150여 년 동안 지켜오고 있는 무료입장 전통,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연중 무휴 개관, 무료 짐 보관시설, 완벽한 안내정보 시스템 등도 그러했다. 그렇지만 내가 제일 감탄했던 것은 연방정부가 예산의 75%를 부담하면서도 종신직(본인의 의사에 의한 사임은 가능)인 박물관장에게 운영의 전권을 맡긴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공정하고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17명으로 구성되는 ‘평의회(Board of Regents)’를 두고 있다. 평의회는 당연직인 대법원장(감사 겸임)과 부통령, 상원에서 추천하는 3명의 상원의원, 하원에서 추천한 3명의 하원의원, 그리고 6년 임기의 사회 각 분야 저명인사 9명으로 구성된다. 관장은 평의회의 간사지만 표결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평의회가 있다고 해도 제도와 사람에 대한 신뢰 없이는 이런 제도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미국인들은 박물관장을 단순한 행정관료로 보지 않기에 이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창의적이어야 하기에 대통령도 간섭이나 지시를 할 수 없다. 세계의 박물관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개가 창의적인 개인의 아이디어와 노력을 씨앗으로 해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공한 박물관의 수집과 운영, 전시기획 등 모든 일은, 그것이 국립이건 시립이건 관료적인 분위기 속에서가 아니라 창의적이고 열성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용산 시대’의 개막을 앞두고 있다. 박물관 건물의 건축도 중요하지만 그걸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밝히는 종합운영계획의 수립이 사실 더 중요하다.
거기에는 박물관 직제의 개편, 필요한 인력의 확보와 양성, 기자재의 확보도 포함돼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정부와의 관계 정립, 다시 말해서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 또는 예산 당국과의 관계 정립이다. 그들로부터 독립하지 않고서는 중앙박물관은 제 구실을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긴 중앙은행인 한국은행도 아직 그런 위상을 갖지 못했는데, 우리가 언제 중앙박물관의 독립을 보겠는가. 관장을 임명식이 아니라 개방형으로 채우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문화의 세기에도 후진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