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그를 ‘국민배우’라고 부른다. 아마도 이 정도 칭호는 국보급의 대배우들, 즉 프랑스의 장 가뱅이나 일본의 야쿠쇼 코지, 미국의 존 웨인 같은 이들에게 붙는 이름일 것이다.
- 연륜도 연륜이거니와 소탈하면서도 바위 같은 무게중심이 없다면 감히 붙을 수 없는 상찬. 국민이 그렇게 불러줌으로써 안성기는 국민배우가 되었다.
그러나 안성기라는 배우의 삶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 어눌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그만큼 현명하고 처신을 잘하는 머리 좋은 배우도 드물다. 우리들의 아픔을 다 대변해줄 것 같지만 그만큼 기복이 없고 다복해 보이는 가정을 이룬 운 좋은 배우도 드물 것이다. 안성기라는 배우의 삶과 이력에서 질투를 느낄 만한 요소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사람들은 늘 그를 ‘우리의 안쪽’에서 사고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안성기가 20대 후반에 성인 배우로 데뷔했을 때 그는 이미 중견이었다. 아역 배우가 드문 한국 영화계에서 깜찍한 연기로 대략 70편의 영화를 소화한 이력이 있었던 까닭이다. 실질적인 데뷔작인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그는 어눌하면서도 치밀하게 계산된 연기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20여년 전 안성기론을 썼던 ‘월간 경향’의 이열규씨는 안성기를 ‘데포르마시옹’, 즉 모양의 이지러짐, 모양의 흩어짐이 곧 모양이 되는 배우라 일컬었다.
이 글에서 그는 20대의 안성기가 ‘이상하게도 흐느적거림 같은 인상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며칠씩이나 다림질하지 않은 채, 줄창 입고 문댄 바지를 벽에다 걸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고 했다. 아마도 초창기 ‘바람 불어 좋은 날’부터 ‘고래사냥2’에 이르기까지 전과자, 거지, 중국집 배달원, 부랑아, 건달 등을 연기했던 그의 서민적 이미지가 실생활에 투사된 평가일 것이다.
1980년대 전반, 안성기는 대한민국의 밑바닥 인생들과 당대의 사회비판 의식이 폭발하는 지점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에로영화의 가슴에서 흐느적거렸던 당시 한국 영화판에서, 할말 못할 말 모두 가슴속에 담아놓고 집어삼키는 어눌한 그의 앞모습, 혹은 능청스러운 품바 타령에 그저 세월의 한을 흘려보내는 그의 뒷모습은 ‘연기자다운 연기자의 탄생’이라는 후광을 얻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배우 안성기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의 성공의 이면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더욱더 다양한 역할에 몸을 던지는 성실함과 장차 한국영화계를 대표하게 될 신예 감독들과 함께 작업하는 혜안이 자리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장애인, 물불 안 가리고 성공에 매진하는 ‘성공시대’의 세일즈맨, ‘투캅스’의 산전수전 다 겪은 능청스러운 형사, ‘퇴마록’의 신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악역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의 그는 천만 번 변화하는 캐릭터를 연기해내며 어떤 것을 맡겨도 소화할 수 있는 배우로 확고히 자리잡는다.
이를 위해 안성기는 가위를 돌리고, 디스코를 추고, 탱고스텝을 밟았으며, 빗속에서 ‘싱잉 인 더 레인’을 불렀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심지어 악역을 했을 때도 그냥 안성기 하나의 이미지였노라고 술회한다). 이장호, 배창호, 이명세, 박광수, 장선우, 강우석, 임권택의 배우인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배우이기도 한 그는, 이제 자신의 인격의 결이 만들어내는 지름으로, 날카로운 현실의 작두에서도 우리를 보호해 줄 것 같은 생래적인 휴머니즘으로 한국 영화계와 관객들을 감싸 안고 있다.
촬영장에서 보낸 어린 시절
-안성기씨는 아역에서 성인 배우로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김지미씨가 출연했던 ‘황혼열차’에서 처음 데뷔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해서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영화 제작자였던 부친 안화영씨의 영향이 컸으리라는 생각도 들고요.
“아버님이 그 영화에 직접 출연하셨죠. 김기영 감독님과 대학 동창이어서 두어 편 출연하신 적이 있거든요. ‘황혼열차’의 촬영을 준비하는데 대본에 등장하는 아이 역을 맡길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에요. 당시만 해도 아역 배우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고, 진짜 고아를 데려다가 시켜봤더니 잘 못하더라는 거지요. 마침 제가 그만한 나이 또래여서 시켜봤더니 곧잘 하거든요. 그래서 김 감독님이 바로 픽업을 한 거죠.
다음 작품은 조미령, 이민 선생님이 출연하신 ‘모정’이라는 영화였어요. 그때부터 소문이 나서 계속 영화에 출연하게 됐죠. ‘초설’ ‘10대의 반항’ 같은 김기영 감독님의 초기 리얼리즘 계통 영화에 계속 참여했어요. 굉장히 다양한 역할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보면 ‘내가 이런 역할을 했나’ 싶은 것도 많아요. 다 합치면 70편이 조금 넘을 겁니다.
불광동 소년원이며 남대문 지하도 옆에서 깡통을 들고 구걸하는 장면도 있었고, 서울역 앞에서 ‘손님 놀다 가세요’ 하고 외치는 호객꾼 역할도 기억이 나요. 시민회관 공사장에서 소매치기하는 연기도 했고요. 그 영화들은 대부분 필름이 남아 있지 않은데, 개인적으로 ‘10대의 반항’이 가장 보고 싶어요. 그나마 몇 장 안 되는 스틸 사진이 전부거든요.”
-김기영 감독이 영화계로 이끌어준 셈이네요. 어린 나이에 보기에도 김 감독의 스타일이 독특해 보이던가요.
“솔직히 기억은 잘 안 납니다만, 특이한 버릇이 있었어요. 땅 한번 내려다보고 하늘 한번 올려다보고 하는. 나중에 보니까 조감독이었던 분이 그걸 그대로 배우셨더라고요. (웃음) 김기영 감독님이 확실히 기인이기는 했어요. 늘 흰 고무신 신고 다니고 음식도 개장국 같은 묘한 것만 드시고. 그런 면에서는 우리 아버님이랑 굉장히 안 맞으셨다고 하더라고요.”
-부친은 영화제작자로 성공한 케이스였나요? 당시에는 제작자가 굉장히 부침이 심했는데요.
“성공한 작품이 하나도 없어요, 몇 작품 안 하시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세경영화사라는 회사에서 기획 일을 하셨어요. 이후에는 돌아가신 김원두 사장님 청으로 현진영화사에서 잠깐 사장을 지내기도 하셨고요. 그 뒤에는 일을 안 하셨죠. 제가 아들 3형제 중 둘째인데, 어머니는 제가 나중에 영화를 한다니까 많이 말리셨어요. 아버님이 영화 제작일을 하시는 동안 얼마나 고생하셨는지를 잘 아시니까요. 그래도 아버님은 한번도 망설이신 적이 없어요. ‘또 한번 해봐야지’ 그러면서 다음 작품에 나서곤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의 인터뷰나 여러 가지 자료를 보니 안성기씨를 ‘조숙한 아이’라고 평하는 내용이 많더군요.
“진짜로 머리가 좋아 조숙했던 것은 아니고, 당시 신문에서 꼭 한문으로 ‘천재소년 안성기’라는 제목을 붙여줬어요. (웃음) 그 나이에 걸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촬영현장에서 함께 생활하는 어른들이 조숙한 아이를 재미있어했거든요. 또 밤샘촬영이 계속될 때면 어른들이 잠자지 말라고 화투장을 쥐어주는데 ‘섰다’나 ‘도리짓고땡’ 같은 투전판에 끼여들면 돈을 받는 재미도 쏠쏠했어요.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미국식으로 따지면 어린이 학대에 해당할 만한 일이죠. (웃음)
‘평범한 학창시절’은 큰 자산
어렸을 때부터 대중의 관심을 많이 받고 자란 편이지만 크게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아요. 모르겠어요. 잘 몰랐다고 할까, 좋게 얘기하면 그런 것과는 별 상관없는 성격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인기 있다고 으스대는 그런 성격도 아니었던 것 같고.
학교보다 현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 싫은 부분도 있었어요. 그냥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요. 하도 학교를 빠지니까 뭔가 좀 불안했던 거죠. 물론 다른 아이들은 저를 많이 부러워했어요. ‘야, 쟤는 공부도 안 하고 너무 좋겠다’ 그러면서. 중학교 때는 모두 빡빡머리였는데 나만 머리를 기르기도 했죠. 점심시간만 되면 학생부 선생님이 달려와서 머리 끝을 잡고 혼을 내셨어요. 나는 그게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어요.”
-그 당시 충무로 분위기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 무렵 영화사 제작부장들은 전부 주먹 출신이었어요. 그러니 배우들 때문에 서로 힘겨루기를 많이 했죠. 배우들 스케줄이 워낙 빠듯하니까. 요즘에야 남녀 배우 한 명씩에 나머지 조연, 이렇게 해서 영화 하나를 만들지만, 그때는 작품 하나에 황해 선생님, 장동희 선생님, 김진규 선생님, 거기다 신성일 선배, 윤일봉 선배까지 굴비두릅처럼 줄줄이 출연했어요. 여자들도 주연부터 조연, 단역까지 한 묶음으로 다녔고요. 그러다 보니 힘이 좋은 제작부장은 스케줄을 잘 뽑는 거예요. 별일이 많았죠, 현장에서 납치도 하고.
배우마다 서너 편은 겹치기로 출연하던 때잖아요. 그러니 한 사람만 없으면 촬영을 못하고 전부 기다리는 거예요. 선후배 관계가 매우 엄해서 후배가 늦으면 마구 혼도 내고. (웃음) ‘어부들’이라는 영화를 찍을 땐데, 강대진 감독님이 속초로 지방촬영을 가서는 배우들을 두 달 동안이나 올려보내지 않았어요. 서울에서 촬영을 하다 만 영화사들이 난리가 났죠. 하루는 그 중 한 회사 제작부장이 속초에 내려와서 ‘어부들’ 제작부장을 만나서는 상 위에 느닷없이 칼을 딱 꽂더라고요. ‘나 죽여. 어차피 쟤 못 데리고 가면 나는 죽은 목숨이야.’ 그래서 저는 그날 바로 서울로 끌려 올라왔잖아요. (웃음) 그런 일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늘 그런 험한 환경에 노출돼 있으니 그저 순진한 애일 수가 없었던 거죠. 근본은 안 그랬지만 그저 어른들 흉내내고 말투 따라하면 다들 좋아하니까 일부러 더 그랬을 거예요. 어렸을 때 지방촬영 가면 어른들은 다 술 마시러 나가고 여관방에 나 혼자 남아 있던 기억이 많이 나요.”
-아역 배우가 훌륭한 성인 연기자가 된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일 텐데요, 이를 위해 필수조건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제 경우에는 10년 남짓한 공백이 있었던 것이 굉장히 좋았어요.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 다시 일상의 감정을 갖고 사람들이 흔히 마주하는 인생의 계단을 밟으며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됐죠. 정상적인 생활을 해봐야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게 되니까요. 배우의 몸짓이나 눈빛에 그런 경험이 모두 담기게 된다고 봐요. 아역 배우도 아무런 변화 없이 그냥 연기를 계속하면 상당히 힘들죠. 관객들도 배우가 나이 드는 걸 인정해주지 않아요, 항상 아이처럼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본인은 굉장히 부대끼게 되죠.”
1980년작 ‘바람 불어 좋은 날’(좌). 1981년작 ‘만다라’(우)
“경동고등학교를 떨어져서 동성고등학교에 갔죠. 56등을 한 건 고3 때였는데, 그게 수학 때문이었어요. 기초가 부실하니까 수학은 정말 따라가지를 못하겠더라구요. 교과서며 참고서를 달달 외워댔지만 한두 문제 풀면 잘 풀었다 싶을 정도였으니까. 제가 예비고사 첫 세대였는데 다행히도 수학문제가 쉬운 편이었고, 게다가 외대에는 본고사에 수학시험이 없었어요. 아주 절묘했죠. 안 그랬으면 대학 못 갔을 거예요. 내가 합격하고 나니까 담임선생님이 무척 좋아하시더라고요. 무조건 떨어질 줄 아셨던 거죠. (웃음)
고3 때 공부를 무척 열심히 했어요. 도서관에서만 살았어요, 진짜로. 친구들끼리 작심해서 머리도 삭발하고. 그래서 졸업앨범에 보면 친구들 머리가 모두 빡빡머리예요. 지금도 들춰보면 너무 재미있죠. 잊을 수가 없어요.”
“먹고살 길이 배우뿐이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ROTC를 지원했더군요. 그걸 보면 영화를 다시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영화판에 돌아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단적으로 말하면 베트남이 망해서 였어요. ROTC를 했던 것도 베트남에 장교로 가려고 한 거였죠. 그런데 졸업 무렵이 철군이 한창일 때였어요. 결국에는 전방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끝내 베트남이 망했죠.
그 당시는 ROTC 출신이라면 무조건 서류전형으로 대기업에 입사하던 시절인데, 저는 그것도 안 됐어요. 베트남어를 써먹을 일이 없어져버렸으니 안 뽑아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군 생활하면서 받은 월급으로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한 학기 다녔지만 공부는 영 아니다 싶어 바로 관뒀죠.
이거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 하늘만 쳐다보는데 문득 연기를 다시 하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했으니 그래도 남들보다 잘하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그때부터 프랑스 문화원 다니면서 영화도 열심히 보고 운동도 시작하고 또 영어도 배우러 다녔어요. 그러다 아버지한테 ‘영화를 해야 되겠다’고 했더니 당시 아버지가 계셨던 세경영화사에서 만든 ‘병사와 아가씨들’하고 ‘원산공작’에 자리를 만들어주셨죠. 그렇게 다시 연기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1970년대에는 조연 몇 편을 하다가 1980년에 이장호 감독과 ‘바람 불어 좋은 날’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죠.”
-어떻게 보면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진정한 데뷔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런 셈이죠. 배창호 감독도 그때 처음 만났고요. 원래 이장호 감독이 하고 싶었던 영화는 황석영씨의 ‘객지’였어요. 그 영화는 나도 정말 하고 싶었는데 노동문제를 다룬 작품이어서 끝내 포기했고, 대신 ‘바람 불어 좋은 날’을 하게 됐죠. 이장호 감독은 제가 굉장히 날카로운 인상이라고 생각해서 말더듬이 배달원 배역에 맞을까 걱정을 많이 했던 모양인데, 조감독이었던 배창호 감독이 열심히 설득을 했어요. ‘연기력으로 커버할 수 있다’는 거였죠. 저도 그 영화가 참 하고 싶었어요. 우선 시나리오가 좋았죠. 대마초로 감독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4년 동안 이장호 감독이 속에서 쌓은 내공이 그대로 전달되니까 영화가 무척 괜찮았어요.”
-‘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80년대를 시작하는 가장 중요한 영화입니다만, 영화평론가의 눈길로 보자면 형식적으로 두드러진 작품은 아닌 듯합니다. ‘바보선언’이나 ‘어우동’ 같은 작품과 달리 어떤 형식적인 실험도 없었고요.
“형식미가 강한 영화는 아니죠. 대신 인물에 대한 표현을 보세요. 참 매력이 있어요. 영화에 등장하는 누구 한 사람도 그냥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조연이나 아역에 이르기까지. 1980년 무렵 군상의 모습이 굉장히 잘 표현된 거죠. 서울 천호동에서 찍었던 것 같은데, 당시의 신흥주택가가 딱 그런 분위기였어요. 영화 찍을 당시에는 개봉 못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저거 분명히 혼날 거다’ 그러면서 수근거렸거든요. 이 영화는 5·18이 일어나고 한창 어수선한 와중에 개봉을 했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검열이니 뭐니 해서 극장에 못 걸었을 거예요.
영화가 좋으니까 저도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그 영화가 후시녹음이었는데, 촬영 끝나고 녹음실에 갔더니 성우 배한성씨를 섭외했더라고요. 사투리를 많이 쓰는 어려운 녹음인 데다 배한성씨가 저와 목소리 색깔이 비슷한 편이거든요. 직접 녹음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선배님, 이건 이렇게 하시고요’ 하며 참견을 했는데 밖에서 듣고는 괜찮았는지 직접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얼씨구나 잘 됐다 싶어 열심히 녹음을 했죠. 덕분에 배한성씨는 그냥 가셔야 했지만.”
-아까 이장호 감독의 ‘내공’이 이 영화에 녹아들어갔다고 했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이 있을까요.
“시나리오도 장호 형이 직접 썼는데, 본인이 직접 절감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상황이나 대사가 많았어요. 권투하는 장면에서의 독백이나 포장마차 아줌마에 대한 묘사, 주인공이 음식을 배달하러 갔다가 개한테 쫓기는 장면 등등…. 개가 접시를 핥고 있으니까 그 앞에서 개처럼 짖고 나오는 장면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든 거예요. 장호 형이 ‘성기야, 너 한번 개처럼 짖고 나와봐라’ 그래서 찍어본 장면이었는데 참 좋았어요. 원래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잖아요.
이후에도 같이 영화를 많이 했어요. ‘어우동’ ‘외인구단’ ‘어둠의 자식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무릎과 무릎 사이’ ‘천재 선언’까지. 연출 스타일도 재미있죠. 꼭 현장에 나와서 콘티를 완성해요. 언젠가 한번은 집에 차분히 앉아서 짜 갖고 오면 안 되냐고 구박했더니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 순간이 되어야 생각이 난다는 거예요. 직감이 강하고 애드리브가 세다 보니 부침이 심할 수밖에 없는 거죠.”
배창호 감독과의 만남
1980년대 초반에는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가 전성기를 이루던 때였다. 이 시기 안성기가 출연한 상당수의 작품도 이러한 흐름 위에 서 있다. 일반 관객들에게 친숙한 서민 연기자의 이미지로 자리를 굳혀가던 그는 어눌하고 소박하면서도 인간적인 반면 사회적인 폭력이나 자본 앞에 쉽게 무너져내리는 인간상을 주로 연기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의 ‘난장이 아들’로 대표되는 이러한 배역들을 주로 맡은 것은 의도적인 선택이었다는 게 그의 회고다.
1992년작 ‘하얀 전쟁’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경우에는 반 이상이 삭제, 정정되는 바람에 영화의 주제의식이 상당히 모호해졌죠. 그 자체로 보면 큰 하자 없는 영화지만 조세희 선생의 원작소설에는 큰 누가 된 거죠. 집 철거장면이 대표적인데, 원래 그 장면에는 아비규환의 처절함이 있어야 하잖아요. 중장비와 사람들이 엉켜서 싸우는 피비린내 나는 모습이요. 그런데 상징적으로 불도저가 하나 달달달 하고는 쿵 하고 집을 부수는 것으로 끝났으니 표현이 어떻게 살겠어요.
대한극장에서 첫 회를 보고 나오는데 누가 ‘이런 걸 뭐하러 영화로 만드느냐’며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속상해 죽겠는데. 이원세 감독님도 그 영화가 끝나고 나서 굉장히 실망하셨어요. 마음의 상처가 심했죠.”
-1982년에 배창호 감독의 데뷔작이었던 ‘꼬방동네 사람들’에 출연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안성기씨와 장미희씨가 배창호 감독의 페르소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안성기씨의 1980년대 대표작들은 모두 배 감독의 영화였던 것 같아요. ‘적도의 꽃’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기쁜 우리 젊은 날’ ‘안녕하세요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감독이라 할 수 있는 이장호, 배창호와 다 일을 한 셈인데요, 두 사람의 스타일을 비교해보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꼬방동네 사람들’은 원작이 워낙 영화적인 데다, 배창호 감독 자신이 할리우드 키드여서 영화를 많이 봤기 때문에 다양한 기법을 잘 만들어냈어요. 그래서 영화가 멋이 좀 났죠. 배 감독이 말도 굉장히 잘해요. 제작자들 모아놓고 ‘영화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음악은 빠~ 이렇게 가고요’ 이런 일에 강해요. 머리가 좋으니 정확하게 필요한 요소를 집어내서 감동을 주는 방법 같은 것도 잘 알죠.
반면 이장호 감독은 스타일이 있죠. 지금도 굉장히 멋을 내려고 하잖아요. 부츠도 신고 묘한 머리에다. 사람이 상당히 짓궂지만 솔직함이 있어요. 장난스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이 감독님이 배 감독에게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창호야, 너는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나는 꼭 네가 형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배 감독이 정돈되어 있고 여러 일에 대해서 책임감을 갖고 일을 하는 식이었다면, 이 감독님은 그때그때 즉흥적인 감각에 많이 의존하는 스타일이었죠. 배 감독은 아주 자세한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서 정확한 계산에 따라 촬영을 하는 반면 이장호 감독님은 당시의 현장 분위기나 연기자들 사이의 감을 중시하는 편이라고 할까요.
배 감독하고는 영화를 찍으면서 그 다음 영화 얘기를 꼭 했어요. 당시 둘 다 총각이었으니 거의 매일 영화얘기만 하며 같이 살다시피 했죠. 배 감독이 무슨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다음 작품은 말야…’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고, 나는 또 그에 대해 상의하고…. 그렇게 한동안 많은 작품을 같이할 수 있었죠.”
이 시기 할리우드적 영화요소를 과감하게 차용했던 배창호 감독의 스타일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으로 1984년작 ‘깊고 푸른 밤’을 들 수 있다. 시민권을 얻기 위한 위장결혼이라는 소재를 미국 LA 현지 촬영을 통해 담아낸 이 작품에서, 안성기는 영주권을 얻기 위해 이민자인 제인(장미희 분)과 계약결혼을 했다가 결국 욕망과 광폭함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제인과 함께 자살하는 사내 백호빈 역을 맡았다.
배 감독 본인에 따르면, 이 영화는 당시 한국에 쏟아져 들어왔던 B급 미국영화에 대한 울분, 우리도 그런 배경과 조건이라면 손색 없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만든 작품이라 한다. 영화 곳곳에서는 밤이나 사막과 같은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이미지와 필름 누아르적 성격, 배창호 감독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두 주인공이 담배를 나누어 피우는 장면은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에바 가드너와 그레고리 팩이 담배를 나누어 피우는 장면을 차용한 것이고,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총성이 울린 후 남자 주인공의 떨구어진 머리 위로 자동차 경적이 길게 울리는 구성은 분명 로만 폴란스키가 만든 ‘차이나타운’의 그것과 닮았다. 이러한 할리우드적 장치들과 상업영화적인 배려로 인해 ‘깊고 푸른 밤’은 당대 관객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었다.
-‘깊고 푸른 밤’에서는 안성기씨 본인의 연기도 상당히 특이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하지 않았던 악역이었기 때문일까요.
“백호빈을 단순히 악역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뭐랄까, 순수한 악역이 될 수가 없었죠. 그렇게 된 데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사람, 어딘가 아픈 구석이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건 다른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어우동’이나 ‘안개마을’도 악역이라기보다는 비정한 색깔의 캐릭터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도 비정한 살인자이기는 하지만 생존을 위해 비정해지는 역할에 가깝고. 또 그 나름대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떻게든 동생들을 잘 키워놓고 싶었던 타당성도 부여받은 캐릭터였고요.
그런 역이라고 해서 이전과 크게 다르다거나 연기 변신을 한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그냥 그 인물을 자꾸 생각하고 대사를 연습하고 옷이나 스타일을 그렇게 바꾸니까 그런 느낌이 나는 거지, 억지로 어떻게 변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에요. 그 모습이 어디 가겠어요? 그것도 크게 보면 그냥 안성기의 이미지 하나죠. 조금씩 가지를 칠 수는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제가 만들 수 있는 이미지는 하나뿐이에요. 왜 흔히 연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잖아요. 캐릭터를 자기 쪽으로 당겨오는 방식과 자기가 그 쪽으로 가는 방식. 그 쪽으로 가려고 노력은 하지만 다른 사람이 가는 게 아니라 내가 가니까 사실은 그게 그거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표현하려고 의식할 뿐이지 결국 나오는 것은 비슷하다고 봐요.”
“지금도 대사는 부담스럽다”
1980년대의 안성기를 돌아보며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작품이 임권택 감독의 ‘안개마을’이다. ‘만다라’에서 시작된 안성기와 임권택의 인연은 ‘안개마을’을 거쳐 ‘오염된 자식들’로 계속되다가 1990년대 들어 ‘태백산맥’에서 다시 이어진다. 이문열의 소설 ‘익명의 섬’을 원작으로 한 영화 ‘안개마을’은, 폐쇄적인 분위기의 동족부락에 부임한 여교사 수옥(정윤희 분)과 암묵적으로 이 마을 여인들의 성적 갈증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바보 부랑아 깨철(안성기 분)에 관한 이야기다.
예사롭지 않은 깨철의 분위기에서 섬뜩함을 느끼고 있던 수옥은 어느 비 내리는 날 약혼자를 마중 나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깨철에게 겁탈 아닌 겁탈을 당한다. 이후 깨철이 철저히 바보가 되어 익명성으로 이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그녀는 마을을 떠나기로 한다. 그리고 그날 새로 부임해온 여선생을 향해 빛나는 깨철의 안광을 보게 된다.
-이 깨철이라는 캐릭터도 매우 신기합니다.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장장 15분간 계속되는 안성기씨와 정윤희씨의 물방앗간 정사장면이었어요. 남자가 덮치자 거세게 소리지르고 저항하는 여자의 모습이 이전의 도식과는 달리 매우 사실적이었다고 할까, 그런데 그 치열한 분위기가 또 다른 에로틱한 농도를 만들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연기를 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디테일한 감수성을 느끼기가 어려워요. 현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생각에 빠져서 오히려 그런 부분은 그냥 넘어가게 되죠. 작품과는 별도로 그런 장면을 촬영하는 일은 대부분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아요. 그때도 참 여러모로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나네요.
그 영화에서 제가 좋았던 것은 대사가 없었다는 거죠. 주인공이 바보인 동시에 미스터리한 남자니까 대부분의 연기가 눈빛이나 자세로 이루어지거든요. 저는 그런 영화 너무 좋아해요. 대사를 안 외워도 되니까. (웃음) 그래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때도 너무 좋았죠. 대사 많은 역을 하다 보면 대사에 치이는 경우가 있어요. 대부분 말수가 적은 인물은 굉장히 매력 있는 캐릭터예요. 그래서 예전에는 대본을 받으면 배 감독하고 마주 앉아서 ‘어 이건 필요 없으니까 지웁시다, 지웁시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대사를 줄이곤 했죠.”
-안성기씨가 가장 행복해 보이는 역할을 꼽자면 ‘고래사냥’의 거지왕초 역이 아니었나 합니다. 품바타령을 하는 하이라이트에서 신이 난 게 얼굴에 드러나거든요. 그때 연애를 했나 싶을 정도로.
“연애를 해서는 아니고요. (웃음) 그 영화는 삼박자가 다 잘 맞았어요. 대본도 좋았고 김수철씨도 있었고 이미숙이라는 좋은 배우도 새로 들어왔고. 촬영 내내 무척 고생스러웠지만 정말 즐겁게 일했어요. 결과도 좋았죠.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전부 재미있게 보는 영화였으니까요.
지금도 연기하는 인물이 마음에 들 때는 정말 즐거워져요. 촬영하는 날이 기다려지고 아이디어도 막 떠오르고. 몸이 간지러워지면서 ‘이건 이렇게 하면 재미있겠다,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정말 행복해지죠. ‘고래사냥’이 좋았던 건 그런 여지가 많은 영화였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한마디로 이 거지왕초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역할이었거든요. 화를 내도 괜찮고 고집을 부려도 괜찮고 심각해도 괜찮고…. 그렇게 배우가 움직일 공간이 많으니 즐거울 수밖에요. 꽉 막힌 역할을 하면 힘들잖아요.”
지고지순한 남자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안성기씨 내면에 있는 어떤 휴머니즘적인 원형성과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어요. ‘깊고 푸른 밤’이나 ‘어우동’에서는 왠지 자기가 아닌 사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 영화에서는 진짜 자기 옷을 입고 있는 듯한 모습이 보이거든요.
“정말 그랬어요. 겨울 바닷가에서 발가벗고 뛰는 데도 재미있더라고요. 몸은 추워 죽겠는데…. 그 장면이 새벽에 동틀 때 찍은 거거든요. 영하 20℃였어요. 파도가 치고 나면 모래 위에 살얼음이 얼 정도로 추웠어요. 수철이한테 ‘우리 셋이 같이 애들처럼 벗고 뛰는 거야’ 그랬더니 이 친구가 ‘나는 원래 가수인데요’ 그러면서 빼더라고요. 또 이미숙씨는 ‘여자가 어떻게 벗고 뛰어요’ 그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결국 나 혼자 벗고 뛰었는데 두 사람이 나중에 되게 후회하더라고요. 보는 사람도 그게 참 재미있었나 봐요.”
-안성기씨의 또 다른 이미지는 ‘지고지순한 남자’라는 겁니다.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보여준, 여자에게 순정을 바치는 캐릭터가 대표적이겠죠. 영화평론가로서는 ‘깊고 푸른 밤’이나 ‘황진이’가 더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한명의 관객으로서는 ‘기쁜 우리 젊은 날’이 훨씬 오래 기억에 남아요. 그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런 남자가 있었으면’ 하고 부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여성 관객들의 팬터지를 섬세하게 만족시켜주는 캐릭터였죠.
“솔직히 저는 나중에 그 영화를 보면서 많이 웃었어요. ‘야 저놈, 저 한심한 놈’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정이 가는 인물’이 좋아요. 그 영화에도 주인공이 아내가 죽은 후 아이랑 공원에서 삶은 계란하고 사이다를 먹는 장면이 있잖아요. 근데 그게 인생을 보여주는 것 같아 참 느낌이 좋더라고요.
남자들은 그런 정서에 쉽게 동화되기 어렵죠. 시사회 끝나고 제작자였던 태원영화사의 이태원 사장님 인상이 안 좋다 싶었는데, 대뜸 ‘이걸 작품이라고 만들었나, 신혼여행 때 목욕탕에서 옷도 안 벗는 영화가 무슨 영화냐’고 화를 내시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개봉날이 되니까 관객들이 줄을 좍 섰거든. 그걸 보고는 배창호 감독을 불러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이런 영화도 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정말 공부 많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 다음부터 좋은 영화를 많이 만드셨죠.”
-연기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정신지체아 역할을 빼놓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시기 개봉된 ‘레인맨’이라는 영화에서 자폐아 역을 맡았던 더스틴 호프만 얘기를 하며 안성기씨와 비교하기도 했죠.
“그 영화는 표정 하나 때문에 시작된 영화예요. ‘깊고 푸른 밤’ LA 현지촬영을 할 때였는데, 촬영장으로 빌린 집 주인이 워낙 까다로워서 스트레스가 엄청심했어요. 그걸 좀 풀어줘야겠다 싶어 촬영감독에게 입술이 비뚤어진 이상한 표정을 지어줬죠. 제가 원래 짐 캐리 비슷하게 얼굴근육을 잘 움직이거든요. 그 표정을 배 감독이 보고는 무슨 생각을 얻은 모양이에요. 그 표정이 참 좋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입술이 비뚤어진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정신지체아 영화’였던 셈이죠.
최근에는 ‘오아시스’ 같은 영화도 나왔지만, 당시만 해도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아주 힘들었어요. 그래서 사실적인 모습보다는 ‘귀여운 장애인’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죠. 연기는 고생스러웠지만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참 좋아했어요. 거리에서도 잘 봤다는 사람이 많았고. 지금도 사람들이 저를 보며 먼저 떠올리는 건 ‘겨울나그네’와 ‘고래사냥2’에서 낙지 먹는 장면, 그리고 이 정신지체 장애인 역할인가 봐요.”
-그런 면이 있죠. ‘겨울나그네’는 아직도 팬 카페가 있어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에도 있더군요.
“‘겨울나그네’에는 진하게, 아련하게 가슴을 쓸어내리는 느낌이 있나 봐요. 누구나 다 그런 시절을 겪었고 그런 사랑의 감정을 느꼈을 테니까. 386세대의 영화죠. 거기다가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구성도 있고. 사실 삶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 거니까요.”
곽지균 감독의 1986년작 ‘겨울나그네’는 전형적인 순정영화다. 기구한 삶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사랑. 아직까지도 많은 낭만파 관객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이 영화는 그 시절 사람들의 피폐해진 감수성에 어필한 작품이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기쁜 우리 젊은 날’이 남자의 순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어필하고, ‘겨울 나그네’는 여자의 순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남자들에게 어필한 것이 아니었을까도 생각한다.
어쨌든 이 무렵 안성기가 갖고 있던 ‘죽을 때까지 잘해주는 남자’ 이미지는 이후 그가 장선우, 박광수, 이명세 등의 신진 감독들과 작업을 시작한 이래 엷어지기 시작해 1990년대 들어서 한석규에게 그 바통을 넘겨준다.
‘코리안 뉴웨이브’의 복판에서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 같은 작품에 출연하게 됩니다. 몇몇 평론가들이 ‘코리안 뉴웨이브’라고 이름 붙였던 어떤 흐름의 복판에 있었던 셈인데요.
“그때 신인 감독들과 작업을 많이 했어요. 주로 그들의 데뷔작이었는데 저에게도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성공시대’ 같은 경우에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어요. 장선우적인, 만들어진, 어떤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 살아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주제를 위해 어느 정도 도구화된 인물이라는 느낌이 강했죠.
그게 저랑 잘 맞지는 않았어요. 같은 장선우 감독 작품이라 해도 ‘우묵배미의 사랑’ 같은 경우에는 그 인물에게 ‘삶’이 있죠. 그런 의미에서 ‘성공시대’는 재미는 있었지만 조금 낯선 경험이었다고 할까요. 반면 ‘칠수와 만수’는 그런 느낌이 덜했죠. 나와 너무나 닮은 느낌, 실제와 비슷한 느낌으로 연기를 할 수 있었죠.
이명세 감독과 작업한 ‘개그맨’의 경우 흥행이 잘 될 줄 알았는데 결과는 영 아니었어요. 그런 영화가 간혹 있죠, 느낌은 참 좋았는데 흥행은 안 좋은 경우. ‘킬리만자로’ ‘영원한 제국’ ‘안녕하세요 하나님’도 그런 경우죠. 그래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나중에 ‘손님이 안 든 안성기 출연 영화제’ 같은 걸 한번 하면 어떨까 하는. (웃음)
‘개그맨’은 참 재미있게 찍은 영화였어요. 배창호 감독이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연기를 했죠. 사실 배 감독은 연기자적인 자질이 무척 많은 사람이에요. 종교에 심취하고 나서는 많이 줄었지만 예전에는 술 한잔 마시고 나서 스태프들이랑 아주 잘 놀았거든요. 대본 읽을 때 인상을 팍 쓰면 1950~60년대 영화배우 같은 모습이 나와요.
그런데 막상 개봉을 하니까 관객들 반응이 너무 안 좋았어요. 영화에 담긴 정서가 공감을 얻지 못했던 거죠. 가장 황당했던 것은 개봉 첫날 단성사에서 보고 나오는데 관객들이 ‘뭐야? 꿈 아니야, 꿈. 속았네’ 그러는 거예요. 너무 시대를 앞질러 나온 영화라고 할까, 그렇게 생각해요.”
TV 드라마에 출연 않는 까닭
-특이한 것이 다른 배우들과는 달리 TV 출연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이름을 얻고 나서는 방송국에서 제의도 많이 받았을 텐데. 1980년대 ‘형사’라는 드라마에 한 번 출연한 것 외에는 기록이 없더군요.
“거의 안 했죠. 그 드라마도 담당PD였던 분이 아역배우 때 함께 일한 사람이어서 한 거였어요. ‘성기야, 제발 한 번 나와다오’ 그러는데 뿌리칠 수가 없더군요. 단막극의 범인 역할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간단한 역으로 불려나가기를 진짜 잘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TV에 대해서는 아예 꿈도 꾸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촬영장에 갔더니 50분짜리 드라마를 세트 하루, 야외촬영 하루, 그렇게 이틀 만에 찍어내는 거예요. 영화 작업이라면 최소한 한 달 반이나 두 달은 걸릴 분량인데. ‘아니 카메라 이동차도 안 깔아요?’ 하고 물었더니, ‘시간 없어. 얼굴만 나오면 되는데 뭘’ 하고는 막 진행이 되더군요. ‘아, 이게 나하고는 진짜 안 맞는구나. 호흡이 긴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그렇게 결론이 나더라고요. 잠깐 맛본 거지만 일찌감치 맛보길 잘했다 싶어요.”
-다른 배우에 비하면 CF도 많이 하는 편은 아닙니다.
“많은 건 아니죠. 20년 넘게 하는 커피 광고를 포함해서 한해 2~3개 정도죠. 커피 광고는 벌써 CF 같지가 않고 생활 같아요, 안 하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고. (웃음) 사람들도 그걸 CF가 아니라 생활로 보는 것 같아요. CF 분위기도 그런 컨셉트에 가깝고요.”
-1983년에 한 잡지 인터뷰에서 “꼭 영화감독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 꿈은 이제 접은 건가요.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요.
“그런 말을 했어요? (웃음) 쓸데없는 말을 했네. 그렇게 과감하게 얘기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그 기자가 좀 과장을 했네…. 물론 영화감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지는 오래됐어요. 꼭 감독이 될 거라는 결심은 아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죠. 사실 배우에게는 ‘내 작품’이라는 게 없는 거잖아요. 한 편의 영화는 감독의 작품인 거고, 나는 거기 출연한 것뿐이죠.”
지나친 자기비하가 아닐까. 안성기라는 배우는 단순히 어느 영화에 ‘출연’하는 수준의 연기자가 아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2002년 개봉된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을 보면서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 2000년대의 안성기는 이제 하나의 영화를 자기 작품으로 만드는 수준에 올랐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연인’이라는 할리우드 영화를 그대로 모방한 말도 안 되는 기획이나 곳곳에서 발견되는 심각한 수준의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말이 되는 딱 한 가지 이유는 대한민국에 안성기라는 배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 ‘피아노 치는 대통령’은 ‘안성기의 영화’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이명세 감독과 배우 안성기의 합작품 정도가 아닐까 한다.
대략 이런 내용으로 “내 영화가 없다”는 그의 말을 반박하자, 그는 “고맙다”며 겸연쩍은 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만약 영화를 만든다면 대단히 세밀한 영화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요즘 흐름이 그런 영화를 반기지 않는 시대다 보니 걱정이 된다고도 했다.
-이제까지 출연한 그 많은 영화 중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영화를 골라주세요. 20년 전 인터뷰에서는 ‘바람 불어 좋은 날’ ‘만다라’ ‘고래사냥’ 세 편을 꼽았던데요.
“그건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요. 고문이나 다름 없어요. (다시 한번 재촉하자 한참을 망설인 후에) 그때 말한 세 편에 ‘하얀 전쟁’이나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실미도’까지가 일단 집히네요. ‘하얀 전쟁’은 정지용 감독하고 ‘남부군’을 찍다가 내가 만들자고 제안했던 영화예요. ‘투캅스’는 촬영할 때 너무 재미있었어요. 교회에서 회개기도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다들 너무 많이 웃었어요. 내가 ‘할렐루야’ 하기만 하면 여기저기서 와 하고 웃는 거예요. 그러느라 NG를 엄청 많이 냈죠. 시체 현장감식 장면도 그랬어요. (박)중훈이가 그걸 보고 토하는 장면인데 꼭 내 쪽으로만 구역질을 하는 거예요. 해는 떨어져가는데 너무 많이 웃어서 NG가 계속 났죠. 힘들긴 했지만 정말 재미나게 찍었어요. 그런 영화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죠.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우선 대사가 없어서 참 좋았어요. 대사 많은 영화를 하게 되면 숙제 밀린 어린애가 되는 기분이 들어요. 변호사나 검사 같은 역이 주로 그렇죠.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을 찍을 때 내가 얼마나 NG를 많이 냈는지, OK사인 떨어지고 나서 엑스트라들에게 박수까지 받았다니까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사’자로 끝나는 역할은 맡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웃음) 그렇게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가 찍으면서 신나고 재미있었던 영화가 훨씬 오래 기억에 남아요.”
“배우는 버는 만큼 소진한다”
-안성기씨나 강우석 감독처럼, 갈수록 호흡이 짧아지는 영화계에서도 꿋꿋이 장수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비결이 따로 있는 걸까요. 강우석 감독은 “영화에서만은 나한테 운이 있어서 그렇다”고도 이야기하던데요.
“잠깐 강우석 감독 이야기를 하자면, 사람이 진짜 부지런해요. 아주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는 꼭 새벽에 일어나요. 남들보다 훨씬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머리도 좋으니까 판단이 아주 빠르죠. 그러니까 모든 일이 신속하게 이뤄지고 주변 사람을 잘 챙기게 되어 꾸준히 성공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봐요.
저 같은 경우에는 막연한 자신감과 바보스러움이 비결이 아닌가 해요. 그 자신감에는 성실함도 조금 들어 있는 것 같고. 바보스럽다는 건 남들보다 덜 영악하다는 뜻이에요. 한번 결정이 되면 그냥 그걸로 밀고 가는 것, 이것저것 계산 안 하고 가는 것, 그런 거죠.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말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배우는 금방 끝나게 돼있어요.
간혹 그런 핑계로 영화도 CF도 닥치는 대로 하는 후배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러다 보면 금세 에너지가 소모되죠. 간단해요. 버는 만큼 소진하게 돼 있어요. 이것만큼 정확한 걸 못 봤을 정도로. 한 사람에게 주어진 몫은 꼭 그 사람의 그릇 만큼 정해져 있는 거예요. 운명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히 그런 규칙이 있다고 믿어요. 그 믿음 때문에 저는 바보스럽게 ‘내 건 이만큼이니까 그냥 천천히 가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결국 자기가 자기 길을 가야 되는 거니까요.”
그러면서 그는 “초심을 지키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모범답안을 내놓는다. 인기의 허망함, 촬영현장의 중요함, 스태프들에 대한 신뢰 같은 걸 잊어버리면 연기는 그걸로 끝이라는 설명이다. 행사나 CF에서 에너지를 탕진하고 정작 촬영장에서 짜증을 내는 배우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따끔한 지적도 이어진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이런 ‘정답’들을 일찍 체득할 수 있었던 건 아역 배우 시절 봤던 선배들의 모습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변하지 않고 꾸준하게 갈 수 있는 힘은 자신의 아역 시절에서 나왔고, 그런 의미에서 아역 배우 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는 것이다.
가지 못한, 가지 않은 한 발짝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네요. 나중에 사람들에게 혹은 한국영화사에 어떤 배우로 남고 싶으세요. 이미 ‘국민배우’라는 타이틀이 있긴 하지만 부담감도 있을 것 같고요.
“무척 감사한 일이긴 하죠. 하지만 솔직히 어떤 배우로 남는가 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봐요. 종교를 가진 사람이 이렇게 얘기하면 어떨지 몰라도 (웃음) 사람이 살다가 떠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해요. 남은 이들의 시각이지 죽은 사람에게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살아가는 동안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게 가장 중요한 거죠.
배창호 감독이 가끔 저보고 ‘당신은 색깔로 치면 무채색’이라는 얘기를 하곤 했어요. 그래서 그 위에 감독의 색깔을 입히기에 좋다는 얘기였겠죠. 제가 훌륭한 감독들과 많은 작품을 할 수 있었던 것, 덕분에 ‘국민배우’ 소리를 들을 만큼 좋은 영화를 많이 찍을 수 있었던 건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일종의 여백이라고 할까. 요만큼 칠했으면 요만큼 놔둬야 감독들이 그 여백을 보고 나를 찾는 거죠.
그렇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게 한계이기도 했어요, 갈 때까지 끝까지 가지 못한다는. 그게 너무 힘들어요. 분명히 한 발짝만 더 나가면 재미있어질 텐데 본능적으로 끝내 못 나가거든요. 늘 그런 여지, 배우로서의 어떤 선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걸 넘어서면 뭔가가 깨져나갈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그걸 안 깨려고 본능적으로 많이 애썼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