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무료 전원주택, 축령산 ‘세심원’ 지킴이 변동해

“먹이고 재워줄 테니 마음이나 닦고 가소”

  • 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입력2005-08-24 17: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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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원생활은 현대인의 꿈이자 생의 종착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청담 변동해 선생은 10여 년에 걸쳐 완성한, 조선 송진방이 부럽지 않은 세심원을 활짝 열어놓았다. 누구나 찾아와 지친 심신을 위로받고 돌아가길 바라며 그는 오늘도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청에서 꼬박 30년을 일한 그는 “‘철밥통’을 포기하고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보니 이제야 사는 맛이 느껴진다”고 한다.
    무료 전원주택, 축령산 ‘세심원’ 지킴이 변동해
    “장성(長城)에는 변만리(邊萬里)요, 고산(高山)에는 백운기(白雲起)라!”

    예부터 전라도 지역의 풍속에 조예가 깊은 어른들에게서 많이 들은 말이다. 전남의 장성에선 변씨가 유명하고, 전북 고산에선 백씨가 유명하다는 말이다. ‘긴 성’이라는 뜻을 가진 장성이라는 지명에는 ‘변방이 만리’라는 의미를 지닌 ‘변만리’라는 이름이 대구(對句)가 되고, ‘높은 산’이라는 뜻을 가진 고산이라는 지명에는 ‘흰구름이 일어난다’는 뜻을 지닌 ‘백운기’라는 이름이 대구가 된다.

    장성은 문사들이 좋아하던 곳이다. 그래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고 일컬어진다. ‘문장은 장성만한 곳이 없다’는 뜻이며, 장성에서 문사가 많이 배출됐다는 말이기도 하다. 산세를 봐도 인물을 많이 배출할 듯하다. 호남고속도로 장성IC에서 들어와 장성군의 전체 산세를 바라다보면 가히 선비가 많이 배출될 만한 산세다. 둥그런 금체(金體)의 산봉우리나 목체(木體)의 문필봉이 여기저기 솟아 있다. 문필봉이 있으면 학자가 나온다. 이러한 봉우리들이 단정하면서도 힘있게 솟아 있다. 산세를 보고 그 지역의 인물을 짐작하는 감여가(堪輿家)의 관점에서 보면 장성은 학자가 한번 살아볼 만한 형국인 것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주변 30리를 둘러봐도 모양을 갖춘 볼 만한 봉우리가 포진해 있다.

    장성군청 앞에 ‘文不如長城’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돌비석이 서 있는 것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보여준다. 영남을 대표하는 서원이 퇴계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면, 호남을 대표하는 서원은 장성에 있는 필암서원(筆巖書院)이다. 필암서원은 전국의 서원이 수난을 겪던 대원군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됐다. 호남 최고의 대학이던 필암서원이 장성에 자리잡고 있음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문향(文鄕)의 고을 장성에서 오랫동안 터 잡고 살아온 집안이 바로 변씨 집안이다. 필자는 어느 곳이든 ‘그 지역에서 수백년 동안 터 잡고 살아온 집안에는 반드시 들어볼 만한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이번에 만나본 청담(靑潭) 변동해(邊東海·51) 선생은 그 지론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다.



    열쇠 100개를 나눠주다

    그에 대한 소문을 처음 접한 것은 작년 가을 무렵이다. 장성에 사는 어떤 사람이 산속에다 ‘세심원(洗心院)’이라는 하는 별장을 만들어놓고 그 열쇠를 100개나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는 것이 소문의 내용이었다. 세심원을 이용해본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그 이야기가 내 귀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열쇠를 100개나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은 누구나 원할 때 제 것처럼 편하게 사용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엉뚱한 일을 벌였을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도록 만든 주인공을 마침내 만났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중년남자다. 다만 중년남자의 얼굴치고는 근심과 세파에 찌든 구석이 별로 없다. 인생을 활기차게 사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건강함이다.

    인터뷰하기 전, 지인지감(知人之鑑)을 위해 생년월일시를 물어보니 갑오(甲午)년, 기사(己巳)월, 기사(己巳)일, 경오(庚午)시가 나온다. 지지(地支)가 모두 불이다. 불이 이렇게 많은 사람은 자기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고스톱을 치다가 패에 고도리 원단이 들어오면 기뻐하는 기색이 바로 얼굴에 나타나는 스타일이다. 감정에 솔직하다 보면 손해 보는 경우가 많다.

    한편 불이 많다는 것은 아이디어가 많다는 의미다. 불은 스파크가 튄다는 것을 뜻하고, 스파크는 곧 아이디어로 연결된다. 그런데 밑바닥이 모두 불이면 욕심이 없어서 자기 것을 모두 퍼주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성직자의 사주’다. 신부님이나 목사님, 스님의 사주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런가 하면 불은 직감력을 상징한다. 불이 많은 사주는 직감이 대단히 발달해 논리에 앞서 직감으로 어떤 일을 계획하거나 판단하는 수가 있다. 이렇게 ‘감 잡는’ 능력은 예술품에 대한 안목으로도 연결된다. 그림이나 공예품에 대한 안목을 타고난 경우가 많다.

    -무슨 동기로 세심원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열쇠를 100개나 만들어서 지인들에게 나눠준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의 대다수 샐러리맨이 갖고 있는 바람 가운데 하나가 전원주택을 한 채 갖는 것이다. 별장이라 해도 좋다. 공기 좋은 산골 동네에 삼 칸 흙집 한 채 지어놓고, 채마밭을 가꾸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 아마도 도시에 사는 40대 중반 이상의 월급쟁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활을 꿈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전원생활이 꼭 큰돈을 들여야만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나 역시 이런 꿈을 갖고 살아왔다. 집안이 어려워 대학 입학은 일찍이 포기하고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 곧바로 9급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중간에 군대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30여 년 동안 장성군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마음 한구석에는 늘 출퇴근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의 삶을 살고픈 소망이 있었다. 대자연 속에 파묻혀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먹고 사는 일이 문제였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리는 게 인생인 듯하다.

    1980년대 후반, 우연한 기회에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文岩里)의 축령산(鷲靈山) 자락에 쓸모없어 보이는 땅을 구입했다. 누에를 기르던 허름한 잠실(蠶室)이 세워진 산자락이었다. 시나브로 이 잠실을 손봤다. 사람이 거처할 수 있는 집으로 개조하는 작업이었는데, 이쪽을 고쳤다가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저쪽을 손보는 식이었다. 큰돈 들이지 않고 시간 날 때마다 매만졌다. 마침내 사람 살 집의 모양새를 갖춘 건 1999년이다. 인건비 한푼 들이지 않고, 34평형의 본 건물과 12평짜리 흙집이 완성됐다.

    당호를 뭐라 할까 고민한 끝에 ‘세심원’으로 정했다. 먹고 놀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마음을 닦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하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이름이다. 마음의 때를 닦는 일이 곧 쉬는 일이지 않은가. 사람은 쉬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그동안 일을 너무 많이 했다. 쉬어야 자신에 대한 성찰이 온다고 생각한다. 성찰이 있어야 자연이 눈에 들어오고, 삶에 대한 허무감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세심원을 짓고 나니까 ‘나만 이 집을 이용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이용하게 하자, 다른 월급쟁이들도 얼마나 이런 집을 갖고 싶어할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주변의 지인들에게 자유롭게 드나들라고 열쇠를 나눠줬다. 그렇게 만든 열쇠가 100개나 됐다. ‘나는 관리인일 뿐이다. 주인행세를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열쇠를 모두 나누어주고 나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뿌듯해졌다. 열쇠를 받은 사람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꼈다. 이렇게 해서 세심원이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려진 것 같다.”

    한 해 1500명 방문

    -열쇠는 여전히 100개인가.

    “아니다. 그동안 자물쇠가 몇 번 망가졌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세심원 아래에 있는 마을 사람에게 열쇠를 맡겨놓았다. 아랫마을이 임권택 감독이 영화 ‘태백산맥’을 찍었던 금곡마을이다. 그래서 ‘영화마을’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마을에 사는 두 사람에게 열쇠를 맡겨놓았다. 세심원에 오고 싶으면 이 집에 가서 열쇠를 달라고 하면 된다.”

    -누구라도 세심원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가. 그동안 어떤 사람들이 다녀갔는가.

    “마음을 닦거나 쉬려고 오는 사람은 언제든 환영이다. 그러나 유흥을 위해 한번 와보려는 사람은 거부한다. 세심원이 술 먹고 화투 치는 장소로 전락해선 안 된다. 전화로 몇 마디 나눠보면 대강 어떤 의도에서 세심원에 오려는지 감이 잡힌다. 그동안 세심원을 다녀간 사람은 어림잡아 5000∼6000명이다. 요즘은 연간 1500명쯤 방문한다. 처음에 열쇠를 받은 100명과 그 100명의 소개로 알게 된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성직자도 여러 분 있다. 스님이나 목사님, 신부님, 원불교의 교무님도 상당수 다녀갔다. 대부분 아주 깨끗하게 이용하고 돌아간다.”

    -세심원 이용객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고 들었다. 이용객들이 사용하는 전기요금, 전화요금, 음식값 등 제반 비용은 어떻게 충당하는가.

    “세심원 운영비가 한 달 평균 30만원이다. 먹는 거야 집에 있는 쌀과 반찬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식비는 운영비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30만원은 전기요금, 전화요금, 난방비로 나간다. 이 돈은 내 월급으로 충당해왔다. 사실 그렇게 큰 돈은 아니지 않은가. 한 달에 30만원을 들여 여러 사람에게 기쁨과 휴식을 줄 수 있다면 아주 싸게 먹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손님은 미안했던지 베개 밑에 돈 봉투를 놓고 가기도 한다. 아무튼 운영비 30만원은 전혀 아깝지 않다. 세상에는 소유의 기쁨도 있지만 반대로 나눔에서 오는 기쁨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족의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는가. 평소 살림하는 공간은 어디인가.

    “2005년 3월에 장성군청을 그만뒀다. 정년까지 7∼8년이 남았는데도 직장을 그만두려 하자 주위에서 모두 말렸다. 요즘같이 불안한 때 왜 안정된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려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1999년 세심원을 열 때부터 염두에 두었던 일을 실행에 옮길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연금으로 생활한다. 한 달에 186만원을 받는데, 이중에서 대학생인 딸 학자금 대출받은 것을 갚기 위해 30만원을 공제하고 나면 156만원이 남는다. 아들은 직업군인이고, 딸도 이제 4학년이라 앞으로 목돈 들어갈 일이 거의 없으니 두 부부가 한 달 동안 생활하는 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형님이 쌀 2가마를 보내주고, 처가에서도 1가마를 얻는다. 시골생활이 이렇다. 도시와 달리 아무래도 생활비가 적게 든다.

    사는 곳은 장성읍에 있는 25평짜리 아파트다. 아파트에서 세심원까지는 승용차로 25분쯤 걸린다. 1300cc 소형 승용차를 타고 아파트와 세심원을 하루 한 번씩 오간다. 1t짜리 소형트럭도 한 대 있다. 농사일을 돕거나 짐을 옮길 일이 있으면 트럭을 이용한다. 한 달 생활비중 자동차 유지비가 가장 많이 든다. 월 평균 50만원가량 들어가는 것 같다. 이 부분은 좀 부담스럽다.

    장성군청에 있을 때 직책이 생활민원팀장이었다. 장성군내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주민의 어려움을 전해듣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장성군의 지형과 군에 속한 마을, 주민의 인적사항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 군민의 밑바닥 인심이 어떤지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울러 주민들과 정도 많이 들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과 연락을 자주 하고, 직접 만나기도 하는데 주로 차를 이용하다 보니 기름 값이 많이 든다.”

    바닥에 편백나무 원목 깔아

    필자도 변동해 선생이 운영하는 세심원에서 며칠을 묵었다. 사찰이나 암자는 그냥 둘러보고 가는 것하고, 하룻밤을 지내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다. 하룻밤을 자봐야만 그 터가 지닌 전체적인 기운과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고택이나 일반 집터도 마찬가지다.

    세심원은 겉에서 보기에는 특별할 게 없는 그저 평범한 시골집이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니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거실과 방의 바닥이다. 바닥이 두꺼운 원목으로 되어 있다. 완전 수제품이다. 나무 바닥에서 나는 향이 독특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향기인 것은 분명했다. 어떤 나무냐고 하니 편백(扁柏)나무라고 한다.

    편백은 일본이 원산지로, 일본사람들이 ‘히노키’라고 부르며 고급수종으로 친다. 다 자라면 높이가 40m, 직경이 2m에 이른다.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어 삼나무와 같이 하늘로 쭉쭉 뻗는다. 고급 건축자재로 많이 쓰인다. 외관은 삼나무와 비슷하지만 잎 형태가 서로 다르다. 편백은 잎이 넓지만, 삼나무 잎은 뾰쪽하다. 편백나무가 풍기는 독특한 향은 벌레가 달려들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집을 지을 때 실내를 편백나무로 시공하면 모기가 별로 없다. 편백의 잎은 모기향의 재료가 된다고 한다.

    세심원이 자리잡은 전남 장성군 북일면 일대의 축령산에는 약 300만평 규모의 편백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축령산 휴양림으로 우리나라에서 편백나무가 가장 넓게 밀집한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인공으로 조림한 결과다. 장성에 편백나무가 심어진 게 언제부터인가. 일제 강점기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이 일본에서 들여와 처음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촌은 울산 김씨다. 호남에 사는 울산 김씨의 중시조격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이 바로 장성의 필암서원에 모셔져 있다. 인촌이 장성에 편백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이렇듯 선대 집안과 연고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바통을 이어받은 인물이 1980년대 후반에 작고한 임종국(林種國)이다. 임종국은 1958년부터 전 재산을 털어 편백나무 조림을 시작했다. 편백나무가 수익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축령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심었다. 임종국은 자신의 전 생애를 축령산 편백나무 숲 조성에 바쳤다. 가뭄이 들어 나무가 말라죽어가면 온 가족이 동원돼 물지게를 지고 물을 날랐다.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기에 50여 년이 지난 지금 축령산 전체가 울창한 편백나무 숲을 이루게 된 것이다. 축령산은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인공조림에 성공한 사례로 손꼽히며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나무 전문가들이 자주 답사하러 오는 곳이다.

    축령산 편백나무는 다른 지역의 편백나무보다 높게 평가된다.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장성의 축령산은 전북 고창군과 경계지역에 있다. 겨울철 서해안의 찬 기류가 내륙으로 들어오다가 해발 640여m의 축령산에 부딪혀 눈을 쏟아붓는다. 그 때문에 축령산에 눈이 많이 온다. 눈이 오는 지역의 편백나무는 향이 좋고, 재질이 단단하고, 무늬도 아름답다.

    일본에서도 눈이 내리는 지역의 편백나무를 상품으로 친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잘 자란 편백나무 한 그루 값이 도요타 승용차 한 대 값과 맞먹는다고 한다. 독일인도 나무를 좋아한다. 특히 참나무를 좋아하는데, 잘 자란 참나무 한 그루의 값이 벤츠 한 대 값과 같다고 전한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무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 인색한 편이다.

    무료 전원주택, 축령산 ‘세심원’ 지킴이 변동해

    세심원 별채인 흙집은 작설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세심원엔 널찍한 거실과 차 마시는 방, 그리고 잠자는 방이 두 칸 있다. 별채인 흙집에는 작설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쉴 수 있도록 꾸민 방이 두 칸 있다. 전국 제일의 축령산 휴양림에서 나온 편백나무로 바닥을 깔아 집안에 있으면 편백나무 향기에 정신이 맑아지는 게 느껴진다. 이런 향기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자면 숙면을 취할 수밖에 없다. 피로를 푸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땅의 기운과 공기가 좋은 곳에서 숙면하는 것이다. 필자도 편백나무로 된 바닥에서 자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바위에서 올라오는 지기(地氣)의 효능에만 초점을 맞췄는데, 나무바닥의 좋은 점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황토, 숯, 죽염

    대학원생 시절 답사를 다니면서 조선시대에 만석꾼 집에서는 방바닥에 소나무에서 나오는 송진을 깔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하인들을 시켜 채취한 송진을 방바닥에 두껍게 칠하고, 중간중간 솔잎을 깔았다는 것이다. 송진을 칠하고 솔잎을 뿌리고, 그 위에 다시 송진을 입히고, 솔잎을 뿌리는 식이다. 이렇게 하면 송진과 솔잎이 시루떡처럼 층을 이루는데, 두께가 5∼6cm 될 때까지 계속하면 방안에 송진 냄새가 가득 찬다. 송진 냄새와 솔잎향이 가득 찬 방에는 여름에도 모기나 파리가 날아들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서까래, 문틀, 가구의 재료를 홍송(紅松)으로 하면 소나무 냄새가 방안에 진동한다. 홍송의 기분 좋은 냄새와 송진 냄새가 어우러진 방은 생각만 해도 환상적이다.

    지금은 조선시대처럼 송진이나 홍송을 구하기가 어렵고 인건비도 워낙 비싸 조상들이 그런 방을 만들어 살았다는 사실이 부러울 뿐이다. 세심원의 편백나무 향을 맡으면서 조선시대 송진방(松津房)의 호사가 생각났다. 죽기 전에 이런 호사는 한번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세심원 바로 옆에 대규모 편백나무 숲이 있어서 편백나무를 구하기가 수월했다. 편백나무 숲은 매년 일정구역을 간벌(間伐)하기 때문에 이때를 이용하면 간벌한 나무를 싸게 사들일 수 있다.

    세심원 바닥의 다른 특징은 편백나무 밑에 무려 2t의 숯을 깔았다는 점이다. 흙집에는 벽에 1t가량의 숯을 집어넣었다. 숯만 넣은 것이 아니다. 숯 밑에 죽염도 넣었다. 세심원을 지을 때 가장 밑바닥에 황토를 깔고, 그 위에 죽염을 깐 다음 숯을 얹은 것이다. 숯의 두께만 7cm. 그 위에 1cm의 공간을 남겨두고 편백나무 마루를 깔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조선시대 만석꾼의 송진방에 밀리지 않는다. 비록 송진은 없지만 대신에 숯과 죽염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일단 저질러라!

    숯은 습도 조절에 탁월하다. 습기를 잘 머금어서 마룻바닥이 장마철에도 항상 뽀송뽀송한 느낌을 준다. 그런가 하면 숯은 속이 비어 있어 열을 잘 보존한다. 그래서 냉난방 조절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그외에도 냄새를 없애주는 탈취효과, 공기정화, 개미를 비롯한 해충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세심원이 바로 그렇다. 고대에 사찰을 지을 때 간혹 연못을 메우고 그 위에 절을 지은 경우가 있었는데, 연못을 메우는 과정에 숯을 사용했다고 한다. 백제 무왕(武王) 시대에 지은 익산 미륵사지, 통일신라시대에 진표율사가 지은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 전남 장흥의 보림사 터가 그런 경우다. 세 곳 모두 원래 물이 많은 늪지대나 연못이었는데, 대량의 숯을 투입하고 그 위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필자는 이때 숯이 단순히 습기제거만 하는 줄 알았지, 이렇게 인간이 사는 데에 여러 가지로 쾌적한 효능을 선사하는 줄은 몰랐다. 숯이 깔린 방에서 잠을 자보고나서야 실감했다. 옛날 사람들은 숯이 지닌 놀라운 효능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숯과 편백나무가 조화된 세심원은 피로 회복에 좋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은 세심원에서 지내는 동안 하루 3∼4시간만 자도 피로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전원생활의 꿈을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부부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무리 원해도 부인이 반대하면 결국 전원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둘째는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 걸림돌이 된다. 셋째는 처음부터 완벽한 집을 짓고 싶어하는 욕심 때문이다. 그림 같은 집은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든다.

    결국 그림 같은 집을 꿈꾸는 사람은 십중팔구 전원생활을 실행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대충 시작해야 한다. 살면서 서서히 고쳐 나가는 게 합리적이다. 넷째는 아이들 교육문제다. 청소년기 자식을 둔 부부에겐 교육문제가 가장 큰 장애물이다. 시골에 들어오면 자식교육을 망친다고 생각한다. 다섯째는 저질러버리지 못하는 소심함 때문이다. 일단 저질러야 한다. 마음속으로만 몇 년 후에 오겠다고 다짐하면 결국에는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영원히 꿈만 꾸다 끝날 것이다. 아니면 죽은 후에 뼈만 돌아온다.

    그런데도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의 숫자는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5년 전이 다르고, 3년 전이 다르고, 올해가 되니까 또 다르다. 5년 전만 하더라도 시골에 들어와 살려는 사람들은 대개 정년퇴직한 고령층이거나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양상이 달라졌다. 우선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다. 30대 초반중에도 전원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특별한 취미나 신념 없이도 시골에서 사는 삶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 같다. 한국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가 변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특히 중년 남성의 경우 십중팔구는 도시를 떠나고 싶어한다. 그들은 삶에 지쳐 있다. 그에 대한 동경으로 전원으로의 회귀를 원하는 것 같다.”

    혼자 있지 못하는 병

    -30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나는 산을 좋아했다. 산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에서 사는 삶을 평생 동경해왔다. 또 나무에 관심이 많았다. 좋은 나무를 보면 애정이 가고, 그런 나무를 가꾸고 싶었다. 나무에 대한 애정이 전원생활에 동기를 부여한 요소 중 하나다. 그 다음에는 숯에 관심이 갔다. 1998년 무렵에 내가 만든 각종 숯 공예품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이 축적되면서 자연스럽게 직장을 그만둔 것이다. 직장을 그만둔 후 내게 일어난 작은 변화는 라디오를 듣지 않게 된 점이다. 직장에 다닐 때는 사무실에 늘 라디오를 켜놓았다. 그 다음엔 자연 풍광이 한 폭 그림으로 눈에 들어왔다. 안개가 산을 감싸는 광경, 저녁 무렵 해지는 풍경, 산에 비가 내리는 모습, 달이 뜨는 모습,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이 전부 한 폭의 산수화처럼 다가온다. 그전에는 이런 걸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이제 방외(方外)의 일사(逸士)가 되니까 마치 내가 시인이 된 것 같다. 세상을 보는 눈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이야기도 된다.”

    -세심원을 관리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관찰했을 듯한데….

    “세심원에 머무는 도시 샐러리맨들을 가만 보면 대부분 혼자 있지를 못한다. 요즘 사람들은 홀로 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혼자 있지 못하는 것은 큰 병인 것 같다. 혼자 있어야 세상을 볼 수 있다.”

    청담이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스스로 다짐한 일이 있다. 규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궁리하다가 발견한 일이다. 그 일은 모두 3가지다. 첫째는 매일 세심원의 흙집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이다. 매일 오후 6시경 장성읍내의 아파트에서 나와 세심원으로 향한다.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면 환하게 불꽃이 피어오르고, 그 불꽃을 바라보면 온갖 잡념이 사라진다고 한다.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삶에 대한 의욕도 솟는다. ‘나도 저 불꽃처럼 훨훨 타는 인생을 살아봐야지’ 하고 스스로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새로운 꿈이 생기고, 생명이 연장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어디 멀리 출타하는 날이면 후배에게 대신 불을 때달라고 부탁해둔다.

    둘째는 보리를 열심히 키우는 일이다. 보리는 농약이 필요없다. 보리밭은 겨울에도 푸르다. 눈이 오면 다른 작물은 죽지만, 보리만큼은 혹독한 추위를 견디면서 사람을 반기는 것 같다. 이런 보리밭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청담은 식물의 성장과정을 보면서 사람의 마음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언젠가 겨울에 보리밭을 지나다 시 한 수를 떠올렸다.

    심을 때는 힘이 들어 잊었지요. 새싹을 보니 반갑네요.모두 다 겨울잠을 자는데, 너는 살아 움직이는 구나.너의 맑음, 너의 푸르름을 보니 내 마음의 고향을 찾았구나.미안하다, 보리야! 왜 이제야 알았느냐!자나 깨나 생각나는 자연의 소리. 보고 있으면서 그리워지는 생명의 소리.보리야! 보리야! 반갑다! 내 마음의 고향

    청담이 유념하는 세 번째 일은 차(茶)씨를 주변에 뿌리는 일이다. 차를 번식시키기 위해서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하고 각종 성인병을 예방해주는 효과가 있다. 청담은 한국사람이 술보다 차를 더 많이 마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주위 산비탈에서 빈터를 발견하면 어김없이 차씨를 뿌린다. ‘내가 지금 씨를 뿌리면 후손들이 찻잎을 따서 먹을 게 아닌가.’

    무료 전원주택, 축령산 ‘세심원’ 지킴이 변동해

    올초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두 부부 사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차에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 조상들의 섭생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됐다. 조선후기 홍만선이 저술한 ‘산림경제(山林經濟)’가 이러한 의도에 딱 맞는 책이다. 우리 조상들의 섭생과 복거(卜居)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다. ‘산림경제’를 보면서 조상들이 먹던 전통식품에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섭생은 먹을거리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청담은 ‘산림경제’가 좋아서 이 책의 번역본을 대량으로 구입해 주변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 필자도 한 권 선물로 받았다.

    ‘덕을 쌓고 살아라’

    청담 변동해는 외관상 특별한 요소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지극히 평범하다. 농고를 졸업한 뒤 군청의 민원팀장(계장)으로 일한 경력이 있고, 장성 읍내의 25평짜리 아파트에 살며 1300cc 승용차를 갖고 있다. 겨우 밥 먹고 사는 사람이다. 이처럼 범범(凡凡)한 제원(諸元)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인생을 살고 싶어한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다. 필자는 청담과 대화를 나누면서 줄곧 그 마음이 어디에서 왔을지 궁금했다. 청담에게 물어봤다. “변씨 집안의 조상들이 지녔던 정신을 계승하고 싶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길손이 집에 찾아오면 손자, 손녀에게는 찬밥을 주더라도 길손에게는 따뜻한 밥을 내주던 할머니. 그때는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4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비로소 그때 할머니가 왜 그랬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덕을 쌓고 살아라’가 그의 집 가훈이다.

    장성에 입향한 황주(黃州) 변씨(邊氏) 집안의 중시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1546∼1611)이 나온다. 변이중은 발명가였다. 임진왜란때에 화차(火車)를 발명한 인물이다. 화차는 수레 위에 총을 수십 자루 장착해 이동하기 쉽고, 한 번에 여러 발의 총을 쏠 수 있게 한 무기다.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 싸움에서 적을 무찌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변이중이 만든 뛰어난 성능의 화차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변이중은 당파싸움에 휘말려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청담은 망암 변이중의 12대 손이다.

    청담의 증조부 변승기(邊昇基)는 대한매일신보 주간을 지냈다. 낙향해 위정척사 운동을 했으며 신학문에 관심을 갖고 호남학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변승기는 일제 강점기 때 전국적으로 벌어진 ‘균세(均稅) 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제의 엽전수탈이라는 경제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벌인 운동이다. 이로 인해 농민의 세 부담이 경감됐다.

    청담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조부인 변진갑(邊鎭甲)이다. 그는 광복 이후 2∼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 농림분과위원장을 지내면서 ‘대한잠사회’를 창립했다. 별다른 수출품이 없던 1950년대에 잠사(蠶絲)는 중요한 수출 품목이었다. 잠사 농가를 보호하기 위해 ‘잠사법’을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잠사법’을 보류해달라는 로비를 받았다고 한다. 잠사수출업자가 법안 처리를 1년만 늦춰주는 조건으로 당시 30억원이라는 거액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진갑은 이를 단박에 거절했다. 청담은 이 일화를 지금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사회에 갚아야 할 빚

    변진갑은 은퇴 후 고향 장성으로 내려와 노인들에게 지팡이(죽장)를 만들어 선사하는 일을 했다.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주민에게 미력이나마 보은을 해야 한다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다. 청담은 어릴 적 할아버지가 죽장을 만들어 노인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보며 자랐다. 하지만 청담의 집안엔 돈이 없었다. 국회의원의 손자였지만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했다. 집에 쌀이 없어서 옆집에 보리를 꾸러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집에 돈이 없다 보니 변진갑의 손자 17명 중 대학을 나온 사람은 2명뿐이다. 나머지는 먹고 살 방도를 찾기 위해 농업고등학교까지만 나왔다.



    그는 사회에 빚진 것이 하나 있다. 중학생 시절 안평역에서 광주까지 기차로 통학하면서 2년간 무임승차한 일이다. 한 달 차비가 445원이었는데, 그때는 그 돈이 무척 커 보였다. 그 돈을 아끼면 살림에 보탬이 될 거라는 생각에 2년씩이나 몰래 기차를 탔다. 청담은 “쉰 살이 넘고 보니 35년 전에 도둑기차를 타면서 내지 않은 차비가 생각나더라”며 “앞으로 갚아야 할 빚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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