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J 방북, ‘돈 좀 가져와 골짜기에서 놀다 가라’는 것
- 남북공조 폐기하고 한미일 동맹으로 선진화 힘써야
- 학생운동은 1987년 6·29선언으로 제 역할을 다해
- 노 대통령 주위엔 일할 만한 사람이 없다
- 일제시대에도 조선 경제는 성장했다
- 운동권세력, 권력은 창출했지만 지식은 창출 못해
‘신동아’는 당초 안 교수에게 기고를 부탁했다. 지난 4월26일 발족한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을 맡은 그는 1960∼70년대 ‘골수 사회주의자’로 학생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 그가 1980년대 중반, 사상 전환을 한 데 이어 일흔의 나이에 뉴라이트 운동의 선봉에 서서 ‘민족주의적 자주노선에 대항하는 국제협력노선 추구’를 천명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직접 기술해주기를 바랐던 것.
그러나 그는 수술을 받은 뒤라 글을 쓰기 어렵다며 고사했다. 4월초 척추 협착증 수술을 받은 그는 글을 쓰는 대신 식탁 의자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인터뷰에 응했다. 1965년부터 40년 넘게 강단에 선 노(老)교수는 4시간 동안 쉼 없이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들려줬다.
-일본 생활은 완전히 정리하신 겁니까.
“정년이 내년 3월이에요. 한국에서 벌인 일도 있고, 척추수술까지 받게 돼서 학교에 퇴직 처리를 해달라고 했는데 일단 경과를 보자고 합니다.”
-일본에선 어떤 강의를 하셨습니까.
“동아시아 경제사죠. 학부 과목명은 동아시아 경제사, 대학원 과목명은 동아시아 비교 경제 사회론인데, 내용은 마찬가지예요. 중국, 일본, 한국의 경제성장사 비교 연구죠.”
학문 종착점은 ‘동아시아 성장사’
안 교수는 “내 학문의 종착점이 왜 동아시아 비교 경제성장사인가 하는 게 중요하다”며 자신의 역사인식 방법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한참을 설명했다.
안 교수의 전공은 한국 근대경제사, 그중에서도 일제 강점기 경제사다.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된 그는 강의를 위해 조선 후기부터 현대까지의 한국 경제사를 연구했다. 한국 근대사의 흐름을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선행 연구가 없었던 터라 서구자본주의 발달사를 기준으로 놓고 한국 경제사를 보는 방식이었다. 안 교수뿐 아니라 당시 한국과 일본 경제사 연구자 대부분이 그러했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발달하려면 영국의 자생적인 자본주의 발달사와 과정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알려진 대로 영국은 16세기 중반에 태동한 자본주의가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에 걸쳐 본격적으로 성립했다. 자본주의 맹아로부터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초기 자본주의→산업자본주의→독점자본주의→국가독점자본주의로 진행되는 게 자본주의 발달사의 통설. 그런데 한국이나 일본, 중국의 경제사는 그러한 통설에 들어맞지 않았다.
일본 경제사 연구의 주류인 강좌파(講座派)에선 서구 자본주의 발달사에서 왜곡된 일본의 경제사를 ‘반봉건적 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메이지유신은 시민혁명이 아니며, 일본 농촌에서는 여전히 반봉건적인 경제 행태가 지속되고 있고, 도시 일부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경제 범주의 발전도 반봉건적 관계 위에 떠 있는 하나의 성에 불과하다는 것. 이러한 강좌파 이론을 이어받은 오스카 히사오(大塚久雄)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과 중국의 경제사 또한 일본과 마찬가지로 서구 자본주의 발달사를 놓고 보니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서 나온 게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에요. 마오쩌둥이 만든 이론이죠. 도시에 자본주의 같은 게 나타나긴 하는데 외국 자본 차지이고, 농촌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라는 거죠. 저 또한 일제 강점기를 식민지반봉건사회라고 봤습니다.
종속이론이란 것도 있죠. 밖에서 보면 자본주의 형태를 띠지만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는다, 선진국의 자본주의가 저개발국을 개발하는 것 같지만 개발에 따른 축적된 잉여가치는 모두 선진국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저개발국은 껍데기만 남는다는.
그런데 1960년대 이후 한국을 보면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돼요. 그때 성장속도가 엄청났으니까.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을 전개했어요. 식민지이긴 한데 껍데기뿐이라도 국가독점자본주의 형태를 띠고 있으니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거죠. 북에서는 지금도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라고 보는 게 그런 논리죠.”
‘중진 자본주의론’으로 수정
식민지반봉건사회론, 종속이론,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모두 저개발국가의 경제 성장을 부정하는 이론이다. 그러한 시각으로 한국 근대사의 흐름을 보았던 안 교수는 1970년대 말이면 한국의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사회주의로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길밖에는 없다고 확신했다.
“난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민주화운동을 앞장서서 했던 사람이에요. 그때 꽤 유명했죠. 1970년대 말이면 한국 자본주의는 모순이 축적돼 붕괴할 것이고, 그러면 갈 길은 사회주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마침 1979년에 박정희가 죽었어요. 예측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생각했죠. 이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로부터 일탈할 거라 내다봤어요.
그런데 1980년에 전두환이 나타나더니만, 국가 경영능력으로 보면 박정희보다 못한 사람인데, 사회와 경제가 살아나는 겁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사회를 잘못 보고 있다, 내가 반성해야지 사회를 원망할 일이 아니다…. 모든 진리는 현실 속에 있거든요. 연구자는 일정한 이론 틀을 갖고 현실을 보는 것에 불과하죠.”
안 교수는 그 무렵 도쿄대에서 강의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1980년 가을, 신군부에 의해 86명의 교수가 대학에서 쫓겨난 터였다. 대부분 그와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운동은 내가 오히려 더 열심히 했는데 목도 날아가지 않고 나만 훌쩍 일본으로 떠나버리면 친구들을 배반하는 거죠. 그래서 안 가고 그들 뒷바라지를 시작했어요.”
다행히 1984년 9월, 해직교수들이 복직했고, 안 교수는 그 이듬해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서울대 도서관에서 본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의 논문은 그의 사상 전환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나카무라는 서슬 퍼런 1980년대 초에도 학생들에게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던 그가 자주 참고한 책들을 쓴 일본의 저명한 공산주의 이론가다.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사상과,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에 고민하던 그에게 나카무라의 글은 또 한 번 충격을 주었다.
“나카무라가 1984년 ‘역사평론(歷史評論)’이라는 잡지에 글을 썼는데, ‘중진자본주의’에 관한 것이었어요. NICs(Newly Industrializing Countries, 신흥공업국)가 선진 자본주의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여 중진 자본주의로 발전함으로써 세계는 윤곽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자본주의가 성립한다는 거죠. 나카무라는 1960년대 이후 아시아 신흥공업국의 발전을 20여 년간 지켜보고, ‘앞으로 사회주의는 발전 전망이 없다’고 선언했어요. 사회주의 국가 중 어느 한 나라도 붕괴하지 않았을 때 그런 확신을 가졌으니 대단한 이론가죠.”
안 교수는 일본에서, 사회주의 국가에서 온 사람을 여럿 만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가 더 심해졌다고 말한다. 북한은 물론 중국과 소련, 동유럽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독재국가’에서 온 자신보다 훨씬 더 초라한 그들의 차림새와 얄팍한 지식에 실망했다는 것. 그는 결국 나카무라씨와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1985∼86년 일본에 있었는데,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기예요. 도쿄대 교수가 나더러 ‘당신, 일본에서 공부 다 하고 한국 가서 공부 안 하려고 하냐’고 할 정도였으니까. 거기서 한국 근대사를 보는 시각을 수정했어요. 중진자본주의론으로.”
저개발국가가 선진 자본주의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여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중진자본주의론’은 저개발국가의 경제 성장을 부정하는 종속이론이나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의 대척점에 있다. 1987년 안 교수는 2년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와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동료 후배 제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자본측으로의 투항’
“나 혼자 운동을 하다 탈퇴하면 인간적으로 배반한 게 되니까, 함께하던 사람들을 설득했는데 잘 안 되더군요. 그들은 거기에 인생을 걸었기 때문이에요. 결국 이론적으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종속이론에 대한 안티테제로 중진자본주의론을 제기했어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종속이론의 약점은 자본주의화하는 양상을 놓고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겁니다. 그건 논리적 모순이다, 자본주의가 활발히 발전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반박했죠.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는데도 그렇지 않다고 하는 건 ‘사기 치는 것 아니냐’고 공격했어요.”
1980년대 후반 우리 학계의 정치경제학적 논쟁은 ‘종속성’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 교수가 “한국 경제는 저개발국이 아니라 중진자본주의며 종속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립적 자본주의로 발전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니 파장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음은 불 보듯 훤하다. ‘정치경제학적 대선배만이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주장이자 올바른 현실 인식’이라는 평가에서부터 ‘자본측으로의 투항’이라는 극단적인 평가에 이르기까지 반응이 엇갈렸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끝까지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격했어요. ‘당신이 한국에서의 자본주의 발달을 주장하니 결국은 사회주의혁명을 부정하는 것 아니냐’면서. 내가 당시엔 사회주의를 부정하지 못했어요. 도덕적으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는 이념 논쟁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마련하는 연구에 몰두했다. 낙성대연구실을 세우고, 한국경제사 연구 방향을 수량·통계 중심으로 바꿨다.
“한국 경제의 장기적 발전에 관한 데이터를 정리했어요. 데이터를 정리하다 놀란 게 식민지시대에도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했다는 점입니다. 공장 명부를 갖고 민족별 통계를 정리해봤더니 1916년엔 공장 수가 300개밖에 안 되고 그중 조선인 소유는 30%를 밑돌았는데, 1939년엔 공장 수가 7000개에 이르고, 그중 조선인 소유가 60%를 넘어요. 경제성장률도 꽤 높더라고요. 평균 3.6%.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5%임을 감안하면 꽤 높은 수치죠. 일본(4%)과도 비슷하고요. 이건 제국주의에 종속된 나라에선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는다는 기존 이론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죠. 이런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서도 후발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라면 한국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발전 과정도 다 들여다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경제성장사(史) 중심으로 동아시아 역사를 정리해보기로 한 겁니다. 내가 동아시아 경제성장사 비교 연구를 학문의 종착점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죠.”
“후발 자본주의가 더 유리”
안 교수는 자신의 연구에 학문적 뒷받침을 한 여러 학자의 이론도 소개했다. 모두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과정이 근본적으로 다름을 지적하는 이론이다. 19세기에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자본주의 발달에서 국제관계의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선진 자본주의는 자국 내에서 자생적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안으로부터 나온 반면 후발 자본주의는 국제관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내용이다. 이를 일본 경제사에 적용,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인물이 아카마쓰 가나메(赤松要)다. 안 교수는 아카마쓰가나메의 ‘안행형태론(雁行形態論)’에 주목했다.
“안행형태론의 ‘안(雁)’이 ‘기러기 안’자예요. 기러기가 이동할 때 한 마리의 리더가 이끄는 대로 떼지어 움직이는데, 세계 경제의 발전 형태가 그것을 닮았다는 겁니다. 저개발국의 경제 발전은 선진국 사양산업의 이전 과정이라고 주장하죠. 처음엔 저개발국에서 선진국의 상품을 구입해 쓰지만 저개발국 자체적으로 그 상품을 개발하면 선진국에서 만든 상품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그 산업이 사양화한다는 거죠.”
안 교수는 알렉산더 거센크론(Alexander Gerschenkron)의 ‘후발성 이론’도 소개했다. 후발성 이론이란, 후발자본주의는 선진 자본주의로부터 기술이라는 성장잠재력을 이전받고, 선발 자본주의가 이용 못했던 새로운 제도도 이용할 수 있으니 선진 자본주의보다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의 발달은 기업의 자기 발전이었던 반면 후발 자본주의,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은행이 산업 활동을 기획하고 이끌어갔어요. 주식시장을 통해 자본을 끌어들이고, 기업에 투자하면서. 은행이 이러한 구실을 할 수준도 안 되는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나서서 철도를 놓고,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식으로 경제 발전을 이끌었어요. 그러니 후발 자본주의가 선진 자본주의보다 유리할 밖에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 각국의 경제 발전 양상을 비교 분석해 나온 ‘캐치업(Catch up)’ 이론도 안 교수의 사상 전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캐치업 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에 비해 경제적으로 매우 뒤떨어져 있던 나라들이 전쟁 이후 미국을 급속도로 따라붙을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협력체제가 형성되면서 미국에 축적되어 있던 성장잠재력이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로 활발하게 이전됩니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은 그것을 흡수할 능력만 있으면 고도성장이 가능했죠. 그게 바로 캐치업 이론입니다.”
안 교수에 따르면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후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4%였다. 그런데 1960년대 한국을 포함한 NICs의 경제성장률은 8%에 이른다. 연평균 8%의 경제성장률은 세계사적으로 이례적인 수치. 안 교수는 “NICs가 출현하기 전까진 일본이 유일하게 8%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다”고 말했다. 1955년부터 1972년 사이에 일본이 연평균 10%씩 성장했다는 것. 이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일본을 ‘세계 최초의 NICs’라고 하기도 한다.
“자주노선은 멸망의 길”
‘선진자본주의 국가에 축적된 성장잠재력을 적극 흡수해 폭발적으로 발전한 1960년대 NICs의 경제 성장.’ 안 교수가 최근 “자주노선을 고집하는 건 멸망의 길이고, 국제협력노선을 취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근거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한국 근현대사는 제국주의와 투쟁해야 했던 시기도 있지만 광복 이후에는 기본적으로 국제협력 속에서 성공적으로 전개돼왔어요. 역사를 그런 식으로 보면 식민지에서 외세와 타협해 자기 재생을 노린 것을 반드시 나쁘다고만 볼 수 없죠. 1960년대 미국의 자본과 기술에 의존한 산업화를 매판이라고 비난하는데, 사회가 본래 그렇게 발전하는 겁니다. 결과를 봐요. 매국이고 매판이라고 비난받은 남한엔 자유와 번영이 있는데, 고상한 자주 국가 북한에는 빈곤과 기아말고 남은 게 없지 않습니까.”
안 교수는 “지금 2000만 동포가 기아 상태에 있는 것도 가슴이 아파서 참을 수가 없는데, 노무현 정부는 DJ와 함께 나머지 4000만까지 그쪽으로 끌고 가려 한다”며 못마땅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더블 스탠딩’입니다. 미국과 동맹도 하고, 남북공조도 하겠다는 거죠. 그건 안 되는 겁니다. 김정일이 개혁개방하고,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면 가능하죠. 김정일이 완전히 고립돼서라도 핵과 미사일을 개발해 자본주의 시장 바깥에 있는 한 북한은 암적 요소예요. 이른바 ‘민족공조’와 한미동맹은 조화가 안 됩니다. 민족공조는 서쪽으로 가고, 한미동맹은 동쪽으로 가니 가랑이가 찢어지는 거예요.”
-백낙청 교수가 최근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이라는 책을 내놓으면서 통일을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꾸준히 진전되고 있는 것 자체가 통일이 진행되는 과정이며, 이대로 계속 가면 ‘도둑 들듯’ 통일이 된다는 얘기죠. 노무현 정부도 같은 생각 아니겠습니까.
“제가 그 책을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미동맹과 남북공조가 수레의 두 바퀴처럼 잘 굴러갈 수 있다는 게 저 사람들 생각 아닙니까. 난 그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김정일은 어디까지나 자기 주도로 통일하면 하지, 그렇지 않으면 안 할 겁니다. 체제가 엄연히 다르잖아요. 역사상 제3의 체제로 통일을 한 나라는 없어요. 체제라는 건 현실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뒹굴다 만들어진 것이지 이런 체제를 만들자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단적으로 김정일이 지금 통일하자고 하느냐 이겁니다.
통일은 지배자끼리의 통일이 아니에요. 궁극적인 통일은 민중끼리의 통일이어야죠. 북쪽의 인민에게 지금 통일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나요? 남북간 이질화가 너무 심해서 이 상태로 통일하면 북한 주민들이 주체성을 상실해버려요. 통일하려면 먼저 북한 주민의 인권과 재산권을 보장해줘야 합니다. 자기들끼리 체제를 유지하게 한 다음에 밖에서 도움을 주는 거죠. 식량도 지원하고, 철도 도로 항만 등 인프라도 구축해주고요. 그러려면 수천억달러가 필요한데 그건 동포로서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인민은 굶어죽으면서 정치적 탄압을 받고 있는데, 지금처럼 원칙 없이 김정일에게 돈이나 바치고 하는 건 틀렸다고 봐요.”
통일보다 선진화가 우선
-원칙이라면?
“당국간 교섭할 때 늘 상호주의를 견지해야 합니다. 어리광 부린다고 무조건 들어주면 안 되죠. 그렇다고 내가 하나를 줬으니 너희도 똑같이 하나를 내놓으란 게 아니에요.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비료 50만t 줄 테니 납북자 500명 보내달라, 쌀 50만t 보낼 테니 요덕수용소 같은 강제수용소 몇 개 없애라 하는 거죠. 그리고 북한은 남한으로부터 지원받은 것들을 주민에게 분배하는 과정을 투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키면서 교섭해야죠.”
“나는 ‘통일’이 국민을 속이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대북 문제가 존재할 뿐 통일할 수 있는 여건은 전혀 안 돼 있어요. 우선 한미일 동맹을 전제로 한 선진화에 주력해야 합니다.”
“정부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요구를 하면 북한이 우리와 이야기하지 않을 것 아니냐고 걱정해요. 그런데 그건 북한 사정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립니다. 북한은 지금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얻어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지경이에요. 정부도 그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지금과 같은 교섭을 계속하는 것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을 거기에서 찾기 쉽다는 겁니다. 또 과거 했던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정부의 대북정책이 투명하지 않다는 건가요.
“김대중 전 대통령도 처음(6·15 남북정상회담 당시) 이야기와 지금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현 정부도 감추는 게 있다고 봐요. 이번 방북도 김대중씨가 기차를 타고 평양에 갈 거라고 하더니 지금은 또 금강산으로 갈 것처럼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결국 ‘영감님, 돈 좀 가져와 골짜기에서 놀다 가슈’ 하는 건데, 완전히 이용당하는 거죠. 그러니 정부가 국민에게 감추는 게 있거나 아니면 바보처럼 북한에 할말도 못하는 거죠.”
-통일보다 선진화가 우선이라고 봅니까.
“선진화 단계에 이른 다음에 통일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도저도 아닌 게 됩니다. 그럴 리 없겠지만, 김정일이 얌전하게 국토를 내준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시기상조예요. 한국은 선진화를 서둘러야 합니다. 중진자본주의 단계인 한국이 선진화를 추진하는 데에는 한미일 동맹이 전제조건입니다. 우리는 아직 선진국으로부터 성장잠재력을 흡수해 캐치업해야 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남북공조를 폐기해야 합니다. 남북공조를 하면 자주성이니 하는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거든. 북한과 교섭한다고 해서 남북공조를 전제할 필요는 없어요. 그보다 한국이 선진화하는 데 기초가 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완벽하게 자리잡도록 한미FTA(자유무역 협정)와 한일FTA를 반드시 체결해야 해요.”
-남북공조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통일을 포기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을까요.
“나는 ‘통일’이 대중을 속이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통일할 수 있는 조건이 전혀 없어요. 대북 문제가 존재할 뿐이지 통일할 수 있는 여건은 전혀 안 돼 있어요. 통일해서 북쪽 동포가 행복해지는 방법이 있다면 내가 왜 마다하겠습니까.”
잘못된 자주의식
-선진화를 위해선 ‘한미일 동맹’이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하시는데, ‘우리는 자주적으로 선진화할 수 없는 것인가’ 싶어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여기서 자주라는 건 북한처럼 폐쇄적인 것과는 다른 의미지만요.
“‘우리 스스로’라는 의미겠죠.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 힘만으로 선진 대학을 만들려면 100∼200년 걸리지만 외국과 협력하면 10∼20년 만에도 가능해요. 그런데 왜 그걸 안 하고 버티느냐는 게 제 얘깁니다. 삼성이 IT분야에서 세계 최강이 된 것도 미국이나 일본에서 유학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데려다 썼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삼성을 만든 게 미국이나 일본이라고 말하지 않잖아요. 삼성이 잘해서 그렇게 된 거죠. 캐치업이란 선진국이 후진국에 일방적으로 주는 게 아니라 후발국이 선진자본주의로부터 성장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획득하는 거예요. 주체가 후발국인 거죠. 그럼에도 자꾸 내 말을 오해하는 건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잘못된 자주의식을 갖고 있나 하는 방증이죠.”
-선진화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캐치업 단계를 벗어나야죠. 선진화하면 자기 기술은 자기가 개발할 수 있어요. 삼성 같은 기업은 이미 선진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죠. 조선, 철강도 선진화 단계에 있고요. 반면 대학은 가장 뒤떨어져 있지요. 그리고 공무원 세계. 기업이 가장 앞서 있죠. 왜 그런 것 같습니까? 세계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렇죠. 정부나 대학도 다 개방해야 합니다.”
4·19혁명으로 사회에 눈떠
-그런 국가관은 언제 만들어졌나요.
“1980년대 중반부터 이러한 사고방식을 갖기 시작해 1990년대에 확고해졌죠.”
-그전까지는 선배로서, 또 스승으로서 운동권 세력이 모인 자리에서 강연을 많이 했는데, 주로 어떤 이야기였습니까.
“학생들 선동하러 다닐 때니까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이야기했죠. 그때 쓴 ‘3·1 운동’ 이라는 책이 굉장한 호응을 얻었어요. 그때는 전형적인 학생운동, 독립운동 사상을 좇았죠.”
안 교수는 1936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부산공고를 졸업하고 재수해서 1957년에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갔다. 원래는 국문과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집안에서 “사치스러운 생각 말고 상과대에 진학하라”고 밀어붙인 터라 입학해서도 취직하거나 고등고시를 보려고 준비했다. 먹고 살 걱정을 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던 중 4·19혁명이 일어났다. 4학년 때다. 얼떨결에 후배들을 따라 나간 게 광화문까지 갔다. 그날 이후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 밥 먹고 사는 게 다가 아니라는 자각을 한 것이다. 이 사회가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4·19혁명 때문에 사회에 눈을 떴어요. 학생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4·19혁명 직후죠. 한국사회를 공부해야겠다 마음먹고 가장 먼저 접한 것이 마르크스주의예요. 선배들 중에 6·25전쟁 이전에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이 많았어요. 나중에 인혁당을 만든 사람들이 나를 지도했죠.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1970년대엔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람이 됐어요.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건 거기에 모든 걸 빼앗기지 않고 내 스스로 응용해서 받아들였다는 점이죠.”
-1960년 후반, 벽사 이우성 선생의 연구실에 있던 북한 저서나 논문을 안 교수께서 독차지했다던데요.
“이우성 선생에게서 한문을 배웠는데, 그분이 일본에 가서 북한의 역사와 관계된 책들을 복사해온 게 있었어요. 나를 믿었기 때문에 다 빌려줬지요. 그때까지는 북한의 연구가 참 잘 돼 있었어요. 1960년대에 그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한국근대사에 한해서는 지식인 중에 날 따라올 사람이 없었어요. 그때 이미 마오쩌둥 선집을 다 읽었어요. 그러니 한국경제사 강의를 참 당당하게 했죠.
그런데도 뭔가 부족하다 싶었어요. 한국인만의 특징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게 만해 한용운과 단재 신채호에 관한 연구죠. 그래서 1970년대 내 글이 인기가 좋았어요. 그냥 사회주의 이론이 아니라 그것을 한국사회에 맞게 변형시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적 이론이었는데, 지금은 국제주의적, 자유주의적 이론으로 바뀌었어요.”
-민족주의와 결합한 사회주의였군요.
“그게 바로 ‘동아시아적 민족주의’라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은 그걸 진보적이라고 하는데, 실은 가장 보수적인 사상이에요. 본래 사회주의는 매우 진보적입니다. 마르크스, 스탈린만 해도 민족주의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어요. 민족주의는 보수적이니까 적대적으로 봤죠. 마오쩌둥이 민족주의를 끌어들였어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해 동아시아적 사회주의 혹은 동아시아적 민족주의를 만들어냈는데,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죠. 독립운동을 할 때는 진보적이던 사람이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고 난 다음 보수적으로 변했잖아요. 개혁개방을 추진한 덩샤오핑이 오히려 진보적이었죠. 본래 서구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했어요. 국민국가가 자생적으로 발전해 시장을 형성하려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필요하니까요. 반면 우리처럼 캐치업해야 하는 사회는 국제주의와 자유주의가 결합해야 합니다. 그 점이 다르죠.”
-4·19혁명 이후 민주화운동에 관심은 가졌지만 몸으로 직접 뛴 적은 드문 것 같습니다.
“학생들에게 이념적으로 운동 방향을 제시하는 노릇을 했죠. 내가 직접 운동조직을 만들기보다는. 학생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이 대부분 내 제자니까 강연하러 많이 다녔죠. 실은 그게 가장 위험해요. 노출되어 있으니까.”
“中情은 조작하지 않았다”
-몇 차례 중앙정보부에도 잡혀가셨다죠.
“그거야 내 운이죠. 다만 한 가지 이야기할 것은 당시 중정(中情)이 엄청나게 고문을 했지만, 요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조작을 하진 않았다는 거예요. 물론 극단적인 경우에 조작을 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적어도 내 경험에 비춰 보면 조작이란 건 없었어요. 사실을 들이대면서 인정하라고 고문하는데도 내가 부인했던 적은 많아도, 조작을 해서 나에게 인정하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당시 교수님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가 중정에서 조사를 받고 투옥된 사람들은 조작됐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글쎄…. 그 사람들에겐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경우엔 조작은 없었어요. 예를 들어 기자와 나랑 나눈 이야기가 문제가 돼서 기자가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고백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나도 데려다가 조사하면서 이러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물을 게 아닙니까. 난 두드려 맞는 한이 있어도 그런 적이 없다고 부인했어요. 왜냐하면 교수로서의 자존심 같은 게 있었거든. 차라리 맞고 말지, 대학교수나 돼서 후배가 잘못한 것을 법정에 가서 증언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러면 중정에선 나더러 ‘저 놈이 더 빨갱이일지 모른다’고 하면서도 증거가 없으니까 풀어줬어요. 박현채(경제학자, 전 조선대 교수, 인혁당사건과 통혁당재건기도 사건으로 투옥)씨가 내 선배인데, 그도 그렇게 고문을 당했지만 내게 조작이라고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럴 수 없었던 게,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주시하고 있었어요. 수사기관이 조작을 하면 그냥 두지 않죠. 김대중씨를 잡아다 해치려 했을 때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씀은 당시를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하는 좌파적 시각을 인정하는 셈 아닌가요.
“제국주의 시대에는 힘 있는 나라가 힘없는 나라의 주권을 빼앗을 수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강국이라고 해서 약소국의 주권을 빼앗을 수는 없게 됐어요. 미국이 헤게모니 국가로서 박정희 정권을 감시했지만 민중을 제재한 건 아니에요. 그런 차원의 이야기죠. 간섭한다고 다 제국주의는 아닙니다.”
학생운동의 유용성
-1960, 1970년대 사회주의에 심취했을 때 북한과의 연계 필요성을 느낀 적은 없나요.
“당시 사회주의 사상 자체는 큰 문제가 안 됐어요. 중앙정보부에서 문제 삼은 건 국가 전복 행위였죠. 북한과의 연계 속에서 국가 전복을 꾀하거나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이 조직을 만들어 전복을 시도하려는 그런 행위 말이죠. 마르크스의 ‘자본론’ 같은 책을 보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었죠. 내가 참여한 운동조직에선 북과의 연계를 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실정과 상관없이 북의 지시를 받아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죠. 북이 한국의 운동에서 헤게모니를 쥐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통혁당은 북이 가진 힘을 이용하려고 했던 게 맞아요. 물론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사형이나 15년, 20년 하는 중형을 받을 만한 죄를 지었느냐 하는 건 별개의 문제죠. 나도 그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해요. 당시 정권이 튼튼하지 못하니까 통치자들이 신경질적이어서 사형언도를 내리자마자 집행하는 식이었는데, 그것이 가혹하다는 건 충분히 동의하지요. 그러나 무조건 조작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신영복 교수도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이죠?
“동생 같은 후배였어요. 그 친구 부모님도 잘 알고요.”
-그러고 보면 인혁당 사건, 통혁당 사건 같은 굵직한 사건들의 중심에 서울대 경제학과가 있었습니다. 당시 운동권에서 서울대 경제학과의 위력이 대단했을 것 같은데요.
“서울대 경제학과가 운동권의 헤게모니를 잡기 시작한 게 1970년대부터죠. 1980년대 들어오면서부터 서울대가 운동권에서 멀어지기 시작해 1980년대 후반, 1990년대에 들어서는 비운동권화됐죠.”
-왜 그렇게 됐습니까.
“학생운동의 유용성이 없으니까요. 학생운동은 1987년 6·29선언으로 제 역할을 다한 겁니다. 이후에는 생산적인 역할을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권력화해서 사회를 자꾸 어지럽혔죠.”
“기존 역사책은 일종의 픽션”
-지금은 대학의 분위기가 1960, 1970년대와 많이 다르죠?
“당시엔 대학에 패기가 있었죠. 학생들도 목숨을 걸고 뭘 했으니까. 난 아주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새 애들은 방향이 없어요. 편하긴 한데. 이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주는 것이 이 시대 지식인의 과제예요. 전상인 교수가 쓴 ‘우리 시대의 지식인을 말한다’를 방금 다 읽었는데, ‘오월의 권력’ 이야기가 나와요.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권력은 창출했으나 지식을 창출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거죠. 그러니 이 시대 학생들이 방향을 잃을 수밖에. 내가 ‘뉴라이트 운동’에 나선 이유 중 하나가 학생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할 것 같아서예요.”
-전상인 교수는 우리 지식인 사회를 ‘죽은 지식인 사회’라고 규정하고, 그렇게 된 원인이 대학다운 대학이 없다는 데서 찾고 있죠.
“대학은 지식을 창출하는 곳이죠. 대학이 자기 전통과 자기 이념, 자기 이론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 대학은 선진국의 것을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요. 1960년대 이후 경제 발전은 세계사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것이에요. 과거 반세기 동안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모두 달성한 나라가 우리밖에 없거든요.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설명하는 연구는 세계적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어요. 그런데 한국 근대사를 외세의 수탈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 보려고만 하지, 개발과 협력의 시대로 봐야 한다는 이론을 전개하는 곳은 낙성대연구소밖엔 없어요. 그래서 연말까지 한국근현대사를 완전히 새로 쓴 대안 교과서를 만들 겁니다. 지금까지는 한국근현대사가 독립운동사와 민주화운동사 중심으로 씌어졌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선진화를 중심으로 서술할 거예요.”
-기존의 역사교과서와 가장 구별되는 점이라면.
“기존의 역사책은 우리의 근대화를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내재적으로 자생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ought to be(당위성)’에 맞춰 썼기 때문에 일종의 픽션이죠. 앞으로 만들 대안 교과서는 국제관계사로부터 시작해 강대국의 파워 게임이 한국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근대화를 수행하고, 민주화운동 예술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를 볼 거예요.”
“뭘 청산합니까?”
-박정희 정권은 어떻게 그려지나요.
“일단 방향만 정해놓았는데 대강 이렇습니다. 근대 국민국가가 되려면 두 가지를 갖춰야 해요. 첫째 국민군인데, 우리나라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국민군을 형성했어요. 둘째는 재정 자립인데, 외국 원조에 의존해오던 우리나라가 재정 독립을 한 게 바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 때문이죠. 이승만과 박정희가 사실상 한국이라는 국가를 창출했다고 봅니다.”
-현 정부는 박정희 정권을 청산해야 할 과거사로 보고 있어요. 일제 강점기와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과거사에서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부채감 같은 건 일반인도 갖고 있고요.
“과거사 청산을 할 수가 없어요. 뭘 청산합니까?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항상 선진국과 타협하면서 지식을 축적했어요. 지금 그때 타협한 것들을 왜 안 없애느냐 이건데, 김일성이 지식인들 다 없애고 머슴에게 면장을 시켜놓으니 근대화를 이끌어갈 수 없었어요. 독재밖에 안 되죠. 이승만이 광복 후 일제 관료들을 그대로 기용한 것도 그 사람들이 아니면 근대 사회를 건설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건국을 준비한 민족주의자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들은 단재 신채호 선생 말마따나 만주에서 찬바람 맞으며 배불린 사람들인데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 지금 노무현 정권 근방에 있는 사람들도 지식이 전혀 없어요. 아는 척하지만 내용으로 들어가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짧은 시간 내에 고도성장을 하느라 생긴 부작용이 많은데,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지금은 부작용을 없애는 것보다 성장에 주력해야 합니다.”
-부작용이나 그 부작용을 겪는 사람들은요?
“참는 수밖에 없어요. 참지 않으면 달리 구제할 방법이 있나요? 재정에 여유가 있어야 지원할 텐데, 성장을 안 하니까 현상유지하기도 힘들어요. 고도성장을 할 때 분배가 더 잘 이뤄집니다. 저 성장을 하면 분배가 힘들어요. 실업이 발생하니까요.”
-정부가 예산을 합리적으로 짜서 해결하길 기대하는 건 비현실적인가요.
“정권을 잡은 지 3년이나 됐어도 한 게 없는데 뭘 더 기대하겠습니까. 멀쩡한 사람 실업자 만들어 실업수당 주는 것보다는 성장에 주력해 일자리를 만드는 편이 낫습니다.”
-선진화가 사회의 병폐를 자연스럽게 없앨 거라고 보는 건 너무 낙관적인 전망 아닙니까.
“선진화를 위해 개방을 하면 경쟁이 불가피해지니 안 망하려면 변화하는 수밖에 없죠. 물론 경쟁이라는 게 다 좋은 건 아닙니다. 피해자를 낳게 마련이죠. 특히 약자에겐 정말 가혹하죠. 그런 약자는 사회가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복지제도가 필요한 거죠.”
-무한경쟁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시장은 무한경쟁을 해야죠. 다만 그로 인한 피해에 대해선 재분배를 통해 자꾸 시정해 나가는 겁니다. 가장 먼저 장애자와 노약자를 보호하고, 그 다음에 실업자를 구제해야죠.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기거든요. 그러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어요. 성장하지 않고 구제부터 하려고 하니까 문제죠.”
-어느 정도 성장해야 합니까.
“우리나라가 제대로라면 연 6% 성장이 가능해요. 그렇게 15년을 계속하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죠.”
-지금 연 6% 성장이 안 되는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지금 이나마 경제가 유지되는 건 기업이 잘해서고, 성장이 잘 안 되는 건 정부가 엉망으로 놀고 있으니까 그렇죠. 과거사 청산이다 뭐다 해서 쓸데없는 데 돈을 쓰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결점
-노무현 정권이나 지지세력 중에 교수님 제자도 있죠?
“많죠.”
김근태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이 그의 제자다.
-만나서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나요.
“안 돼요. 이해관계가 달라서. 이해관계가 다르면 자기 이익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논리 갖고는 안 되고, 이익을 교환해야 하죠. 제자들 중에도 운동하다 죽은 경우가 있는데, 내가 가서 설득해도 안 들었어요. 그들은 자기 인생의 전망을 그쪽에 걸었기 때문이죠. 부딪혀서 코가 깨지고 나면 알겠죠.”
-개인이면 코가 깨지는 것쯤이야 상관없지만 정권은 시행착오를 줄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안 주려고 노력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 이익이거든요. 강만길(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씨는 저와 20년간 다산연구회 활동을 같이 했어요. 제가 이미 이야기했어요. 역사적으로 큰 과오를 범하는 것이니 될 수 있으면 (과거사 청산)하지 말라고. 더군다나 난 일제시대 전공자입니다. 그 분은 조선후기 전공이고. 그런데도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니까 안 되는 거예요. 김대중씨하고 평양 간 것도 못마땅하다고 말했어요. ‘그 주변에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우리 동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당신이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거기 가서 그럴 수 있는 거냐’고 했어요. 화를 내더군요. 이해관계 때문에 그래요. 그 사람 자체는 양심적인 사람이에요.”
-현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첫째는 사상의 방향이 한국현대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건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무능력이죠. 대통령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할 능력이 없어요. 무능력하니까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 아침저녁으로 달라요. ‘대한민국호’라는, 항공모함의 수백배 되는 큰 배를 끄는 대통령이 아침저녁으로 방향을 이리 틀었다 저리 틀었다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대통령 말이 참말이라고 믿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신용이 없어요.”
안 교수는 또 이 정부에는 민주주의 성립에 필수적인 ‘관용과 설득’이 결여돼 있다고도 지적했다.
“민주주의에선 모든 시민이 우정관계예요. 관용과 설득의 관계죠. 현행 법을 지키는 한 모든 사상이 자유롭게 얘기될 수 있어요. 심지어 공산주의까지요. 이게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인데, 사회 일부를 가리켜 ‘저런 사람들하고 우리 일 못한다’ 하고 선을 긋는 건 적을 만드는 거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그러한데, 자기들 무리에서는 민주적이고 우정관계인지 몰라도 그 밖에 대해선 독재를 해야 된다는 거죠. 사회주의 역사 70, 80년 동안 민주주의를 해본 적이 없어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느라고. 누구는 배신자니, 수정주의자니 하면서 말이죠. 현 정권이 지금 이런 의식을 일부 갖고 있어요.”
‘창비’와 ‘역비’
-올해로 만 70세시죠.
“일본의 어떤 스님이 나이 60에 영주가 돼 70세에 전국시대 어느 지방을 평정했다고 해요. 그 사람은 전쟁터에서 말 타고 칼 들고 싸웠지만 나야 의자에 앉아서 하는 건데 지금부터 한 5년은 사회봉사를 해도 되지 않겠나 생각했어요.”
-교수님을 ‘피 끓는 투사’라고도 표현하더군요.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조선일보’에서 그렇게 표현했어요. 지금 우리 근대 사학계가 너무나 잘못 돌아가고 있어서 그걸 좀 바로잡아놓는 게 내 가장 중요한 임무예요.”
-일각에서 예고하는 ‘창작과 비평’ ‘역사비평’과의 사상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창비’나 ‘역비’하고는 마찰이 일어날 겁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주노선이고, 난 국제협력노선이니까요. 그런데 아마 그들이 날 상대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기득권자인데, 나와 논쟁하면 내가 살아나잖아요. 그러니 날 무시하겠죠. 20년간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해서 비판했지만 대답 한마디 없어요. 그러나 앞으론 무시 못 하도록 만들 겁니다. 대안교과서를 내면 더는 침묵 못하겠죠.”
-논쟁과 담론이 활성화되는 건 좋지만 인신공격도 더러 있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70인데, 점잖게 해야죠.”
-학자로만 있을 때와는 다를 텐데요.
“각오하고 있습니다. 나는 칼을 뽑았는데, 상대방에겐 칼을 뽑지 말라고 할 수 없죠. 다만 비겁한 짓은 하지 말자는 거죠.”
‘뉴라이트’는 사상운동단체로 남아야
-일본에 있는 동안 뉴라이트 운동의 추이를 지켜보셨나요.
“‘동아일보’에서 가장 먼저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했을 때 그걸 보고 올 것이 왔구나 싶었어요. 나 혼자 고고하게 생각해왔는데 이제 드디어 원군(援軍)이 나타났구나 싶었죠.”
-후쿠이 대학 임기가 1년이 채 안 남은 시점에서 뉴라이트 수장으로 나선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 시점에서 정리를 좀 해야겠다 싶었어요. 지금 정권이 너무 위험해 보여요. 북쪽하고 어디로 갈지 모르거든. 이 사람들이 지금 이대로는 대선(大選)에 전망이 없어 보이니까 뭔가 판을 깰 궁리를 하고 있어요. 김정일과 합작해서 판을 확 바꿔버릴 가능성이 다분해요. 그래서 내가 국제협력이 아니면 망한다고 계속해서 예방주사를 놓고 있는 겁니다.”
-뉴라이트는 대선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뉴라이트는 사상단체입니다.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진리 추구가 목적이에요.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데 목표가 있지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지면 안 됩니다. 반면 정당은 이해관계에 자유로울 수 없어요. 그러니 이 두 단체가 합치면 둘 다 망하죠. 그렇다고 정치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건 아니에요. 큰 영향을 끼치죠. 정치라는 게 사회 분위기에 좌우되는데, 한국인의 의식과 생활양식 같은 것들을 사상운동이 바꿔 나가거든요.”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뉴라이트 세력의 정치 참여 가능성은요?
“뉴라이트 재단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뉴라이트를 탈퇴하고 정치계에 입문할 수는 있죠.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니까요. 뉴라이트재단 자체는 끝까지 사상운동 단체로 남는 게 바람직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