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신의주고보에서 발행하던 ‘신우(新友)’지 편집인으로 활약하던 구 선생은 지역별 학생회 조직을 규합해 일제 통치 및 노예교육 반대운동 등을 주도했다. 1929년에는 본격적 저항시위인 신의주학생의거를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1930년 임시정부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권유를 받고 흥사단에 가입, 도산의 비서실장으로 일하며 다양한 항일저항운동을 기획,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말 그대로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청춘을 보낸 구 선생은 요즘의 한국 현실을 어떻게 생각할까.
“오늘날엔 사람이 없습니다. 인물이 없어요. 대통령감도 없고, 한마디로 ‘지도자난(難)’입니다. 겨레의 지도자를 육성코자 흥사단을 세운 안창호 선생이 자꾸 떠올라요.”
구 선생은 생일 축하연에서 ‘고향무정’을 부르는 등 정정함을 과시했다.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이어지는 시점에 구 선생 같은 ‘살아 있는 역사’의 존재가 소중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