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극단 미추(美醜) 대표 손진책

“나는 참배객 없는 사원의 종지기, 예술이 세상 바꾼다는 믿음 있기에…”

  • 황호택 동아일보 수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7-05-04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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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객이 극장 다시 찾는 건 ‘인간의 호흡’ 때문
    • 한국 영화 ‘붐업’ 주역은 ‘진짜 연기’ 하는 연극배우들
    • 마당놀이 ‘별주부전’의 문어는 전두환 상징
    • 연극은 유일한 ‘복제 불가능 상품’…가난은 숙명
    • 내 연극의 기본정신은 ‘인간사랑’
    • 자격 없는 사람이 자리에 연연…민주화 부정하는 행위
    • 예술 대중화가 하향평준화, 우중화(禹衆化) 의미하진 않는다
    극단 미추(美醜) 대표 손진책
    미추산방으로 가는 길은 서울 구파발에서 경기도 송추를 지나 경치 좋은 산들의 허리를 가로지른다.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이다. 송추 장흥 유원지가 가까워서인지 산자수려(山紫水麗)한 골짜기마다 러브호텔 단지가 들어섰다. 구파발 전철역에서 차를 태워준 배우 김동영씨는 “극단에 빨리 가서 연습하고 싶은데, 아베크족 차가 앞길을 막고 시속 30km로 유람하면서 달리면 편도 1차선 도로라 추월할 수도 없고 갑갑하다”고 말했다.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홍죽리 미추산방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극단 미추 손진책(孫桭策 · 60) 대표가 1992년 이곳을 찾아왔을 때 느티나무를 보고 욕심이 생겨 터를 잡았다. 미추산방 사람들은 매해 고사를 지내며 막걸리 열다섯 말을 느티나무에 붓는다. 500년의 갈증을 채우자면 막걸리를 많이 부어야 하는 모양이다. 느티나무 앞에는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이자 장승쟁이 김종흥씨가 깎은 장승들이 도열해 손을 맞는다.

    미추산방 건물 1층은 극장, 2층은 사무실과 배우들의 기숙사 및 식당으로 쓰고 3층은 손 대표와 배우 김성녀(金星女·57) 부부의 살림집이다. 야외극장과 연극학교 건물이 창고처럼 딸려 있다. 단원들이 상추, 가지, 오이, 고추를 심는 채마밭은 아직 철이 일러 비어 있었다. 극단 미추의 단원들은 공동체 생활을 한다. 그래서 연기와 무용의 앙상블이 잘된다고 손 대표는 자랑했다.

    2층 손 대표 집무실에는 한쪽 벽면을 연극, 연희(演戱), 역사 서적이 가득 채우고 있다. 다른 쪽 벽면에는 극단 미추의 공연 포스터들이 붙어 있다. 책과 연극 대본 사이마다 작은 불상이 수십개 놓여 있다.

    손 대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벽속의 요정’ 공연을 마치고 뉴욕에 들렀다가 이날 새벽 4시경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손 대표가 따라주는 녹차를 마시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연극은 가장 오래갈 예술”

    ▼ 교포 관객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생각보다 좋았어요. 두 차례 공연에서 1200석이 거의 매진됐습니다. 교포 사회에서 연극 공연치곤 보기 드물게 관객이 다 찼다고 말하더군요.”

    ▼ 흑자 공연이었습니까.

    “배우와 연출, 스태프까지 16명이 갔습니다. 티켓 판매만으로 비용을 충당하기는 어려워요. 티켓 한 장당 50~70달러 받는데, 그중에는 초대권도 있고…. LA KBS에서 방송협찬 지원을 받고 독지가 몇이 도와줬습니다. 후원자 중 한 군데에서 펑크가 나 초청자가 적자를 냈을 겁니다. 그렇지만 교포들의 칭찬이 자자해 보람을 느낀다고 메일이 왔더군요.”

    ‘벽속의 요정’은 김성녀씨가 1인 30역을 하는 모노드라마. 김성녀의 가창(歌唱)과 연기의 진수를 드러내는 연극이다. 그녀는 국내에서 120회 공연을 하며 동아 연극상 등 주요한 상을 휩쓸었다. 전쟁과 이데올로기가 몰고 온 고통과 가족애를 그린 이 모노드라마는 연극을 보는 재미와 연극을 통한 삶의 재인식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필자는 지난해 7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의 공연을 담은 DVD로 ‘벽속의 요정’을 보면서 몇 번씩 배를 움켜쥐고 웃었고, 더러는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다.

    극단 미추(美醜) 대표 손진책

    미추산방 2층 손진책 대표의 집무실.

    ▼ 뉴욕에서는 어떤 공연을 봤습니까.

    “하루에 한두 편씩 7편을 봤습니다. 세계 연극의 메카인 런던과 뉴욕에 가면 새로운 흐름을 느낄 수 있어 좋아요. 이번에는 좀 쓸쓸했습니다. 뮤지컬만 번성하고 정극(正劇) 극장은 객석이 비기 시작하더군요. 너무 엔터테인먼트로만 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장기 공연하는 뮤지컬로는 어떤 게 있습니까.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맘마미아’ 같은 것들이죠. ‘캣츠’는 요즘 막 내렸습니다. 10년씩 하는 뮤지컬도 있어요. 연극은 그렇게 장기 공연하는 게 없죠.”

    ▼ 대중이 몰리는 영화, 드라마, 뮤지컬의 틈바구니에서 연극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까.

    “연극은 가장 오래된 예술이면서 가장 오래갈 예술이기도 합니다. 연극은 어떻든 복사가 안 되죠. 현장에서 살아 있는 배우와 살아 있는 관객이 만나야 연극이 성립됩니다. 요즘 필름 카메라가 다시 인기를 모은다고 하더군요. 결국 인간의 호흡이 그리운 관객이 다시 극장으로 찾아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엔터테인먼트의 시대라서 연극이 외면당하는 거죠. ‘연극의 위기’ ‘사양예술’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비관적으로 보지만은 않습니다.”

    ▼ 연극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볼 수 없죠. 그래서 수익구조가 취약하고, 어떻게 보면 빈곤의 악순환이 발생하는 듯합니다. 연극을 DVD로 제작해 판매하면 어떨까요.

    “일본에 DVD로 판매하는 극단이 있습니다.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호흡을 서로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런 쿨 매체를 통해 보면 감동이 떨어지죠. DVD로는 연극의 정보는 읽을 수 있어도 살아 있는 감동은 느끼기 어려워요. 마당놀이를 녹화해 방영하는 것을 보면 일반 관객은 재미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보기 민망합니다. 요즘 오페라를 비디오로 찍어 극장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패턴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연극은 역시 현장에서 배우들의 숨소리를 느끼면서 봐야 제 맛이 납니다.”

    연극은 무대예술의 인프라

    ▼ 디지털과 영상의 시대에 책이나 신문 같은 활자매체도 연극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죠. 기초가 튼튼해야 다른 학문과 예술 분야가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연극이 무대예술의 인프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연기예술의 모태(母胎)입니다. 텔레비전 방송이 갑작스럽게 생겼을 때 연극배우들이 뒷받침을 했기 때문에 드라마가 가능했죠. 오늘날 한국영화가 이렇게 붐업(boom up)됐지만, 이것도 연극배우들이 연기를 강력하게 맡아줌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인문학적 바탕이 튼튼해야 학문이 발전할 수 있듯, 그 나라 문화의 척도는 연극 한 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책 지원에서 연극이 괄시를 받고 있습니다.”

    ▼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연극배우 출신의 연기가 훨씬 더 탄탄하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아요. 기초가 잘 닦여서 그런지….

    “영화하는 사람들한테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한때는 충무로 감독들이 연기를 잘 몰랐어요. 거짓말 연기와 진짜 연기를 구별 못했다고 할까요. 이제야 진짜 연기와 가짜 연기를 구별하면서 작품다운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권택 감독이 그렇지요. 진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를 연극 쪽에서 찾게 된 거죠. 연극배우들이 한국 영화의 국제적 크레디트를 높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연극배우 출신 영화배우는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문성근 정진영 김갑수 유오성 김석훈 박해일 김수로 이문식 이원종 임원희 정재영 강신일 성지루 유해진 정은표 박노식 이재용…. 여배우로는 추상미 이혜영 오정해 오지혜가 있다. 연극배우 출신 탤런트는 박인환 김상중 권해효 최종원 안석환 정홍채 최철호 박광정을 들 수 있다.

    극단 미추(美醜) 대표 손진책
    ▼ 1996년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이 동네가 깊은 산골이었다면서요. 비포장도로로 군용트럭만 오갔다고 하던데요. 서울 동숭동 대학로를 버리고 교통 불편한 곳으로 옮겨온 이유가 뭡니까.

    “극단 식구도 많아지고 소품, 의상 같은 짐이 늘어나면서 대학로 사무실이 너무 복잡해졌어요. 북적북적하는 델 떠나서 외진 곳에서 연극만 할 수 있는 센터를 만들었으면 하는 꿈이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양수리 쪽으로 가려고 땅을 계약했어요. 그런데 ‘시간의 그림자’라는 연극을 하다가 크게 밑져서 약속한 날짜에 중도금을 못 줬어요. 계약 파기를 당했지요. 전체 부지는 1000평가량 됩니다. 1992년에 평당 31만원을 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2배 이상 비싸게 샀더군요.”

    극단 미추는 오는 8월27일로 창단 20주년을 맞는다. ‘美醜’라는 극단의 이름은 도올 김용옥이 지어주었다. ‘美’는 羊(양) 자 밑에 大(대) 자가 붙어 있다. 크고 아름다운 양을 놓고 제사를 지낸 데서 ‘美’가 유래했다. 연극의 기원도 제의(祭儀)이다. ‘醜’는 酒(주)를 놓고 무당(鬼)이 춤을 추는 형상이다. 노자(老子)는 큰 아름다움에는 추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미추산방 2층 사무실 입구에는 도올이 쓴 ‘美醜’ 현판이 걸려 있다.

    필자가 “도올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안티도 많은 것 같다”고 말하자 손 대표는 “그런데 도올만큼 열심히 사는 사람도 드물어요. 잠시도 허비 않고 뭔가를 하지요”라고 했다.

    4강 진출에 가려진 월드컵 개막식

    손씨는 2002년 월드컵 개막식과 문화행사 총연출을 맡았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꼬박 1년을 살았다. ‘동방으로부터’(From the East)라는 주제로 환영-소통-어울림-나눔 4개 마당으로 진행된 개막식은 ‘한국 전통예술과 첨단 통신의 조화’(로이터통신)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88올림픽 때도 전야제 연출을 했다.

    그는 월드컵 행사를 치르고 나서 꽁지머리(ponytail)를 지금의 단발 스포츠형 머리로 바꿨다. 포니테일 머리를 하는 사람 중에는 예술인이 많다. 개중에는 원형탈모를 감추기 위해 포니테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손씨도 원형탈모다.

    “월드컵 개막식 끝내고 그냥 마음의 정리를 하자는 의미로 잘랐습니다. 새로운 기분으로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월드컵 개막식을 총연출할 때는 나름대로 국가 대사를 맡아서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죠. 그간 마당놀이라는 공연을 해왔으니까 월드컵 개막식도 일종의 마당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제작단 팀들이 좋았어요. 모두들 정말 열정을 갖고 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한국 축구가 16강에 오르기 쉽지 않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개막식이라도 잘하자는 게 우리 생각이었죠. 그런데 한국팀이 4강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월드컵 개막식은 그 열기에 묻혀서 잊힌 것 같아요.”

    ▼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도 요란하겠죠.

    “저도 기대가 큽니다. 세기의 쇼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 월드컵 때 기사를 읽어보니까 굿, 탈춤, 판소리, 민요에 하이테크를 접목했다는 평이 있던데요.

    “세계적인 행사이니만큼 한국이 IT 문화강국이라는 걸 주지시켜달라는 주문이 있었어요. IT와 관련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냈죠. 예산 때문에 아이디어를 욕심껏 실현하기 어려웠죠. 모니터를 통해 제대로 보여주려면 방송국 하나가 있어야 하는데 출연자들이 캠코더 스위치를 작동하면서 했습니다. 조금 부끄러운 일이지요.”

    ▼ 예술의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듯한 인상을 주더군요.

    “비교적 그랬던 편이죠. 제가 정부 행사도 여러 번 맡아 했습니다. 이벤트 행사도 했고. 마당놀이, 창극, 음악극, 무용, 하여튼 실험적인 장르를 많이 했죠. 연극을 하게 된 것도 연극이 종합예술이라서 연극을 하면 음악, 문학, 미술, 무용을 가깝게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였죠.”

    그는 마당놀이라는 새로운 연희 장르를 개척했다. 판소리, 무용, 창극이 어우러진 연희이다. 1981년 MBC 창사 20주년 작품으로 기획됐다. 마당놀이가 초기에 힘을 받은 데는 당시 이진희 사장의 지원이 컸다. 이 사장은 청사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체육관에 들어와 공연을 끝까지 관람했다. 감동이 컸는지 ‘한국적 코미디의 전형’ 마당놀이를 1982년 1월1일 온 가족이 모여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오전 10시에 방영하라고 지시했다. 마당놀이 ‘허생전’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프로그램으로서도 큰 성공을 거두어 지금까지 맥을 이어온다. 올 6월에는 중국에 수출된다.

    중국 진출하는 마당극 ‘삼국지’

    극단 미추(美醜) 대표 손진책

    극단 미추 단원들과 함께.

    ▼ 이진희 사장은 1980년대 초반 문화방송 사장과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내며 독재정권의 거친 입으로 악명이 높았죠. 그분이 마당놀이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마당놀이는 1회용으로 기획한 것인데 워낙 반응이 좋아 계속하게 됐죠. 이 사장은 대단히 파워풀하고 악명이 높았어요. 그런데 반응이 좋아 두 번, 세 번 하다보니까 그게 전통처럼 돼서 27년을 하게 된 거죠. 당시에는 검열이 꽤 심했기 때문에 행간에 많은 것을 집어넣었어요. 둘째 작품이 ‘별주부전’인데,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내용이 방송될 수 있을까 의아해할 정도였죠.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안종관씨 원작에 김지일씨가 극본을 썼죠. 문어와 싸움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문어는 전두환씨를 상징했거든요.”

    그 살벌한 체제에서 이진희 사장과 검열의 눈을 피한 것이 신기하다.

    “당시 TV 제작국 표재순 부국장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했으면 마당놀이가 없어졌을 거예요. 저한테 연출을 맡기고 시연회 때 한 번 보더니 ‘이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하지 않고 ‘손형, 이것은 이렇게 하면 어때’ 하고 권유하는 식으로 했죠. 그 다음에 방영할 때는 대사를 좀 자르기도 하고 편집해 검열을 통과했지요.”

    마당놀이는 27년째 꼭두쇠는 김종엽, 남자배우는 윤문식, 여자배우는 김성녀로 내려오고 있다. 김성녀는 뮤지컬 ‘에비타’ 초연 때문에 첫회 ‘허생전’에만 빠지고 2회 때부터 계속 주연을 맡는다.

    ▼ 꼭두쇠는 요즘 용어로 하면 MC 같은 겁니까.

    “옛날 유랑 연예집단 남사당패의 대장을 꼭두쇠라고 했거든요. 단원들이 연희를 하는 동안 꼭두쇠가 단체의 대표로 관객하고 얘기하는 걸 맡은 거죠.”

    2004년 말 배삼식 극본의 마당놀이 ‘삼국지’는 8만명이 넘는 유료 관객이 들었다. 마당과 객석을 삼국으로 분할했고 우리나라 지방(전라·충청·경상도)을 중국의 삼국(위·촉·오)에 대입해 구성진 사투리를 썼다. 앙코르 공연까지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 마당놀이 ‘삼국지’가 오는 6월 중국 난징(南京)에서 공연된다죠. 마당놀이의 첫 해외수출이 되겠군요.

    “월드컵경기장 앞 천막극장에서 ‘삼국지’ 공연할 때 중국의 톈친신(田沁)이라는 유명한 연출자가 봤어요. 형식이 재미있고 극본도 흥미롭다고 하더군요. 톈친신이 장쑤(江蘇)성 연예집단에서 ‘도화선(桃花扇)’이라는 연극을 연출할 때 제가 예술감독으로 참가했어요. 장쑤성 연예집단의 연극단, 무용단, 가무극단, 오페라단, 관현악단을 합쳐 유한회사를 만들었어요. 거기서 처음으로 제작한 것이 ‘도화선’인데, 두 번째 작품으로 나한테 ‘삼국지’를 한번 연출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습니다.”

    극본, 연출, 작곡, 안무, 무대미술, 조명은 한국에서 맡고 배우와 나머지 제작은 중국이 하는 방식이다. 난징은 과거 오(吳)나라의 중심이니까 오의 시각에서 해석한 삼국지를 하고, 위(魏)나라 지방에 가서는 위 중심의 삼국지, 촉(蜀)나라 지방에 가서는 촉 중심의 삼국지를 한다. 중국 전역에서 2000회 공연할 예정이다.

    “연극 ‘죽음과 소녀’는 우리 얘기”

    한국 문화가 옛 소련 땅에 처음 선보인 것은 1990년 9월 동아일보가 만든 창극 ‘아리랑’을 통해서였다. ‘아리랑’ 순회공연은 극동지방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돼 겪은 고난의 역사에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국땅에 흩어져 살던 소련 동포들이 한민족임을 확인한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이 창극을 하자기에 저는 신(新)창극을 하자고 제안했지요. 그래서 ‘임꺽정’ ‘윤봉길’ ‘홍범도’ ‘아리랑’을 했지요. 소련 여행이 가능해진 1989년 모스크바에 갔다가 스타니슬라프스키 극장에서 고려인이 만든 ‘트란지트(이주) 37’이라는 작품을 보았습니다.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를 다룬 것이었죠. 고려인 배우들이 서툰 한국말로 연기했지만 대단히 감동적이었습니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김지일씨가 ‘아리랑’ 대본을 썼습니다.

    모스크바, 타슈켄트, 알마타를 비롯해 고려인이 사는 곳이라면 작은 도시라도 찾아가 공연했죠. 한국어를 잘 모르는 동포들도 내용을 쉽게 이해했습니다. 직접 경험한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죠. 조국에서 공연단이 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격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리랑’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잠을 못 잤다는 교포들도 있었어요.”

    극단 미추(美醜) 대표 손진책

    필자와 함께 점심을 먹는 손진책 대표.

    ▼ 칠레 출신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작품을 세 편이나 연출했더군요. ‘죽음과 소녀’ ‘The Other Side’ ‘Readers’. 칠레와 우리는 장기간 군사독재에 시달린 공통점이 있는데요.

    “런던에서 1991년 ‘죽음과 소녀’가 공연됐을 때 반향이 컸어요. 그때 우리도 군부독재가 막 끝나고 민주화로 접어드는 무렵이었잖아요. 저는 번역극을 잘 안하고 주로 창작극을 했죠. 이 작품은 번역극이라기보다는 ‘우리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작가와 연락해 정식으로 로열티를 주고 작품을 공연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원작자의 승인을 받아 로열티 주고 무대에 올린 첫 번째 작품입니다.

    공연 평은 좋았는데 관객은 의외로 들지 않았어요. 아마 한국 관객은 군사독재 이야기가 지겨웠던 것 같아요. 지금 했으면 달라졌을지 모르죠. 1994년 프랑스에서 로만 폴란스키가 영화화했죠. 재연할 때는 아리엘 도르프만이 와서 봤습니다. ‘죽음과 소녀’를 전세계에서 공연 안 한 나라가 없습니다. 도르프만은 ‘한국 고연은 아주 인상깊은 공연이었다’고 하더군요.

    ‘The Other Side’는 2004년 4월 일본 신국립극장 초청으로 일본에서 연출한 작품입니다. 구리야마 다미야와 감독이 도르프만에게 신작을 의뢰해 받은 작품을 제게 맡긴 거죠. 그게 두 번째 인연이죠. 세상을 네 편과 내 편으로 구별하고 상대방을 인정 안 하려는 현실에 대한 풍자이기도 합니다.”

    재인(才人)의 딸

    ▼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예술은 고등사기’라고 말했죠. 그 말에 동의합니까.

    “재미있는 표현이죠. 그러나 예술은 범죄적 의미의 사기와는 다르죠. 예술은 발상을 전환해주는 기능도 하고 일반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의 허점을 치고 들어가기도 하죠. 그런 의미로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작에는 기승전결과 논리에 바탕을 두는 것도 있지만, 역발상으로 돌연변이 같은 창작이 나올 수 있죠. 그런 것이 묘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요. 그런 것을 통해 내가 사기당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죠.”

    손 대표는 정장을 입지 않는다.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는 차이나 칼라를 입는다. 정장 겸 작업복으로 편하게 입기 위해서다.

    “우리는 어떤 데 매여 있지 않으니까요. 경제적으로 뭘 못 누리는 대신에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이죠.”

    ▼ 연극에서 가난은 숙명 같은 것입니까. 영화, 음악, 그림 같은 예술은 돈도 따르는 경우가 많은데요.

    “대학 다닐 때 보면 연극과 학생들은 대부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거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어요. 매스미디어 시대에 유일하게 복제가 안 되는 것이 연극이죠. 경제적인 자생력이 있을 수가 없지요. 저는 연극이 가난하다는 얘기를 싫어합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숙명적으로 가난과 함께 태어난 것 같아요.”

    부인 김성녀씨는 중앙대 국악교육대학원장 겸 국악대학장이다. 김씨는 재인(才人)의 피가 흐르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박옥진씨는 국극(國劇)의 프리마돈나였다. 국극은 일종의 창극으로 여성들만 무대에 나와 남자 역까지 맡는다. 국극 배우는 연기도 좋아야 하지만 판소리와 가창 실력도 뛰어나야 했다. 박씨는 심청이, 춘향이 같은 여성 주인공 역을 주로 했다.

    국극은 일본의 다카라즈카(寶塚)라는 연극을 본뜬 것이다. 다카라즈카는 여자들만 하는 연극으로 100년 넘은 역사를 갖고 있다. 국극은 1950, 6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지금은 소멸했다. 아버지 김향씨는 국극의 극본을 쓰고 연출을 했다. 어머니는 열여섯 살 때 김씨를 낳았다. 김씨는 분장실 의상 바구니 속에서 크다시피 했다. 걸음마를 시작하고 다섯 살 무렵부터 아역배우로 무대에 섰다. 동생 성일(안무가), 성애(국악인), 성아(국악인)씨도 예술인으로 활동한다. 손 대표는 극단 ‘민예’에서 연출을 할 때 ‘한네의 승천’이라는 작품의 여주인공을 오디션 하다가 아내를 만났다.

    “누가 김성녀에 관해 말하길래 ‘그 정도라면 보지 않고 결정할 테니까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박옥진씨 딸이라면 그 정도 역은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씨는 스물일곱 살 때 연출가 손씨를 처음 만났다. 그는 “인접 예술을 잘 알아야 좋은 배우가 된다”며 극장, 박물관, 미술관, 음악감상실, 오페라, 무용 등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김씨를 끌고 다니며 배우수업을 시켰다.

    ‘한네의 승천’이 끝나고 연출자와 배우는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딸이 태어난 날로부터 결혼식 날짜를 역산(逆算)해보면 ‘속도위반’이다. 손 대표의 현재 모습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좀체 구경할 수 없는 단원들은 그가 속도위반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한다.

    ‘떡잎부터 연극인’

    ▼ 부인이 학교와 배우 일로 바빠 내조를 받기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저는 직업 없이 연극만 했기 때문에 집사람이 버는 돈으로 살림을 꾸렸어요. 내 평생 고정급을 받은 것이 결혼 직후 국군방송 PD로 1년 일한 것이 전부예요. 집사람은 국립창극단, 국립극단에서 고정급을 받았죠. 고정 방송프로도 있었고, 음악회와 텔레비전 드라마를 많이 하니까 살림은 김성녀 쪽에서 다 책임졌습니다. 저는 연극만 했어요.”

    두 사람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들이 부부라기보다 작품 완성을 위해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동지에 가깝다고 말한다. 배우 아내가 자기 관리에 바빠 남편을 자상하게 챙겨주지 못할 텐데도 아내의 좋은 점만 이야기했다.

    손 대표의 고향은 부석사가 가까운 경북 영주.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왔다. 그런데도 경상도 억양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배우들한테 연극 대사법을 가르치면서 제 억양도 표준말로 바뀐 것 같아요. 연극은 표준말로 하지만 친구들을 만나면 영주 말로 합니다. 영주가 경상도 중에서도 북쪽이라 남쪽의 짙은 경상도 억양하고는 조금 다르거든요. 영주는 강원도 횡성과 충청도 단양 어름입니다.”

    ▼ 영주읍 장터에 들어온 악극을 자주 봤다면서요. 어릴 때 그런 경험이 인생 행로에 영향을 끼쳤나요.

    “영주읍에 서커스가 들어오면 엄기태라는 선배 집이 크고 마당이 넓어서 그 집에 본부가 차려졌어요. 서커스는 1부 곡예, 2부 연극, 3부 버라이어티 쇼로 진행됐습니다. 2부 연극은 매일 밤 프로가 바뀌었지요. ‘홍도야 울지 마라’ ‘격정 3만리’ 같은 신파극(新派劇)이었는데 그것 보는 재미에 매일 밤 서커스를 갔어요. 악극이나 여성국극이 들어와도 꼭 봤습니다. 초등학교 때 애들 데리고 연극도 만들어봤죠.”

    아버지는 농협에 다니고 어머니(황봉한·1921년생)는 자녀 교육열이 대단해 딸들을 모조리 대학에 보냈다. 완고한 영주 양반 동네에서 여자가 대학에 간 것은 손씨네 딸들이 처음이었다. 큰누나 정숙(서양화가)씨는 이화여대에 진학했고 둘째딸 화숙은 경희대에 다녔다. 셋째딸이 민주당 의원인 손봉숙씨이고 그의 남편은 안청시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위로 매형 셋이 전부 교수다.

    “어머니, 아버지가 어른들한테 핍박을 당했어요. 딸들 시집 안 보내고 대학 보낸다고. 어머니가 초등학교만 다니신 게 한이 돼 못 먹어도 교육은 시켜야 된다는 것이 확고한 철학이셨죠.”

    그 시절에 시골 여성이 초등학교를 마쳤으면 고학력이다.

    끼 많고 속정 많은 경상도 사내

    ▼ 손 대표가 연극할 때도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다지요. 어머니만 역성을 들고….

    “어머니는 내가 하는 거라면 뭐든지 옳다고 생각하고 지원하셨지만 아버지는 실망하셨지요. 맏아들에다가 어릴 때는 공부를 꽤 잘했거든요. 반에서 1, 2등 다투고 월반도 했어요. 뭐가 될 줄 알았는데 예술을 좋아하는 큰누나한테 물들어 연극을 하게 됐죠. 제가 처음엔 음대 가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피아노 치고 다니니까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내셨죠.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간 것도 그 후에 아셨죠.”

    단원들이 언젠가 손 대표 집에 초청받아 한창 흥에 겨웠을 때 그가 갑자가 일어나 나가더니 작고한 어머니 사진을 들고 와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다. “어머니가 혼자 심심하시다”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지만 속정이 많다.

    그의 연극과 연희에는 늘 좋은 음악이 따라다닌다. 그는 브람스와 쇼팽, 베토벤의 현악 4중주를 좋아한다.

    “큰누나가 ‘명동파’였어요. 명동에 유행도 몇 가지 만들고, 명동 예술인들하고 잘 알고 지냈죠. 당시 설파음악실이라고, 클래식 음악 하던 곳에 예술가들이 자주 모였죠. 고등학교 다닐 때 명동에서 ‘산불’(차범석 작) ‘무익조’(이어령 작) 같은 연극을 보며 영향을 받았지요.”

    딸 지원(29)은 예원예고와 단국대 연극영화과를 나온 후 영국의 매킨토시 컴퍼니 멤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2년 동안 뮤지컬 ‘미스 사이공’ 투어를 했다. 매킨토시 컴퍼니는 ‘캣츠’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을 제작한 세계 최대의 뮤지컬 제작회사. 아들 지형(27)은 예술 경영에 관심이 있다.

    손 대표네는 이산가족이다. 부인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중앙대 안성캠퍼스 교수 아파트에서 살다가 주말에만 온다. 주말에도 공연으로 바쁠 때는 만나지 못한다. 아들은 중국에 가 있고 딸은 영국에서 건너온 뒤로 불광동에 방을 얻었다.

    “부모로서 좀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냥 너희가 하고 싶은 거 하라는 것이 우리 생각이에요. 우리 부부는 일하기 바빠서 사실 애들은 어릴 때 어머니와 장모 두 분이 키워주셨거든요. 어머니 두 분이 애들 교육을 잘 시켜서 가치관은 바르게 갖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애들대로 원망이 있겠지요. 우리 딸은 좀 반기(反旗)도 들었지요. 무조건적인 애정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더군요(웃음). 우리가 칭찬을 잘 안하니까요. 지금 스페인에서 800km를 40일간 걸어가는 장정을 하고 있어요. 자기를 새롭게 하는 전기를 만든다고.”

    ▼ 민중예술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기본적으로 내 연극이 조금 그런 쪽에 있다고 평론가들이 얘기하지요. 저는 연극의 사회적인 효용성을 생각하는 편이라 그런 작품을 주로 고릅니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사랑, 인본주의가 내 연극의 기본정신이죠. 가령 사람을 엽기적으로 죽이는 내용이 들어간 작품은 내 심성에 안 맞아요. 제 작품에 나오는 사람들은 따뜻하다고 합니다. 성격이 모질지 못하기 때문이죠. 예술은 인간을 한번 대신 살아보게 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살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나름대로 판단하게 하는 기능을 갖죠.”

    국민 신명나게 하는 대통령…

    ▼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적어도 그런 믿음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믿음이라도 있기에 연극행위가 가능한 것이죠. 돈 벌거나 유명해지기 위해서 연극을 하기에는 여건이 너무 열악하니까요.”

    ▼ ‘참여정부’ 출범 후에 민중예술 쪽 사람들이 예술단체장을 독식한다는 비판이 신문지면에 가끔 보이더군요.

    “저는 사실 그전부터 순수예술, 민중예술 양쪽과 다 친했어요. 마당극운동 하면서도 민중예술 쪽도 잘 알고 지냈는데, 할 만한 사람이 하는 거야 뭐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 같던 사람들이 그런 자리에 연연하는 것을 보면 보기 안 좋습니다. 자기네 스스로 지금까지 한 작업에 대해 나름 자부심도 있었을 테고, 저로서는 그런 자부심을 존경했죠. 그런데 제도권 자리에 집착하는 것은 자기네들이 했던 민주화 작업도 부정하는 행위로 보여 좀 씁쓸합니다.”

    ▼ 손 대표도 자리를 제의받은 적이 있습니까.

    “저도 모르게 이름이 오르내린 적도 있고 또 제의도 받았죠. 그러나 극단 단원들이 사실 저 하나 믿고 여기 와 있습니다. 단원 숫자도 제일 많거든요. 책임 때문에 갈 수 없죠. 사실은 국립극장을 맡아 정말로 내 뜻을 펼칠 수 있다면 한번 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데 괜히 자리에나 연연해서는 우스워질 것 같아 마음을 접었습니다.”

    ▼ 전두환 정권 말기에 호헌(護憲) 철폐를 위한 연극계 서명운동을 주도했더군요.

    “그때 이상하게 제가 주동자가 돼 도망다니고 그랬죠. 문인들 다음에 바로 연극인들이 서명운동을 했죠. 오늘을 사는 지식인의 양심으로 그냥 침묵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의 목소리가 얼마만큼 효용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얘기는 해야 된다 싶었죠.”

    ▼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요즘 연극 때문에 중국을 자주 왔다 갔다합니다. 중국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은 힘이 있어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한국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서 샌드위치 같은 처지라고 했는데, 우리는 국가적인 동력을 왜 잘 살리지 못할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죠. IMF 경제위기 때 금반지 모으기를 한 국민인데…. 다음 대통령은 어떻든 국민이 신명나게 하는, 국민의 흥을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인간 심성이 연극의 재료

    그는 일간지를 4개 구독한다. 아들이 “아버지 돌아가시면 관 속에 신문과 사과를 넣어주겠다”고 말할 정도다.

    “연극하는 후배들이 신문 안 읽으면 나무라죠. 연극이 이 사회와 무관할 수 없는 장르입니다. 사회 문제를 모르고 우리가 뭔 얘기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연극하는 후배들에게 역사 문제나 사회 현실에 대해 공부하라고 채근합니다.”

    그는 아침식사 대신 사과를 깎아 먹는다. 고향 영주에서 좋은 사과가 많이 난다. 기후 온난화로 영주에서도 사과밭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했다.

    ▼ 연극에서는 인물 해석이 중요하다지요.

    “인간이 정형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잖아요. 인간의 심성이야말로 정말로 끝이 없는 무한대의 재료입니다. 연극이라는 작업 자체가 성격 만들기거든요. 배우로 하여금 역할의 성격을 잘 구축해내게 하는 것이 연극 작업입니다. 판에 박힌 인물을 보면 오히려 관객이 식상할 수 있죠. 그래서 인물 분석이 연극에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는 중요한 작업입니다. 인간의 심성이 무한한 깊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 연극 중에는 난해한 작품도 많지 않습니까. 이것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예술가로서의 고민도 있을 텐데요.

    “예술의 대중화는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대중화와 우중화(愚衆化)는 다르다고 봐요. 예술이 하향평준화 하는 것은 아니지요. 저는 대중이 좋아하는 마당놀이 같은 장르를 만들고 그것을 27년간 지속한 것에 자긍심을 갖고 있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대극에도 관심과 애정이 많거든요. 그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대중예술을 만드는 수원지(水源池) 노릇을 하게 하죠.”

    필자는 얼마 전 그가 연출한 ‘열하일기만보’(熱河日記漫步)라는 연극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관람하고 그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 ‘열하일기만보’도 대중한테는 다소 어렵겠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열하일기만보’에서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거기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의 주제를 규정하기 좋아하는데, 그런 것도 좀 서구적인 연극 읽기에 익숙해져버린 탓이죠. 서구 연극은 어떤 집단정신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각자가 자기의 삶, 경험, 환경을 통해 그 작품을 반추해 그중에서 주제를 골라갈 수도 있죠. 그것을 통해서 자기한테 도움이 되는 부분을 섭취해갈 수 있는 겁니다. 기본적인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지만 그속에서 딱 한 마디로 ‘이것이 뭐다’라고 얘기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 ‘열하일기만보’였어요, 작가나 나나 마찬가지로.”

    ▼ 대학의 연극과 학생들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줍니까.

    “연극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성직(聖職)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연극은 ‘참배객 없는 사원의 종지기’입니다. 성직은 억지로 시켜선 안 되죠. 연극은 인간에 대한 얘기이고, 인간에 대해 분석하고,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예술이죠.

    연극과를 나와서 연극을 꼭 하라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죠. 저는 후배들이 연극한다고 찾아오면 ‘꼭 해야 하느냐’ ‘정말로 하지 않고는 못 배길 뭐가 있더냐’ ‘타고난 재주가 있느냐’라고 묻고 이 세 질문에 모두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있을 때 하라고 하죠. 연극해서 성공하기가 공부해서 성공하기보다 훨씬 힘들다고 만류하는 편이지요.”

    ▼ 김성녀씨 외에 연기를 참 잘한다고 생각하는 배우가 있으면….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데 말하기 좀 곤란해요. 연극판이 좁은데 서로 다 알고 있죠. 다른 나라에 비해 연극배우층이 너무 얕습니다. 캐스팅을 가장 이상적으로 하려고 할 때 배우 숫자가 적다는 생각이 들어요.”

    명감독 테오 앙겔로플로스

    ▼ 인접 예술인 영화는 가끔 보는가요.

    “보기는 좋아하는데 생각보다 많이는 못 보죠. 영화를 보면서 연극을 보러 오라고 얘기하는 게 참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는 가까운 곳에서 하루 종일 상영하는데도 가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짧은 일정에 끝나는 연극을 그때 꼭 본다는 게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찾아오는 관객이 정말로 고맙죠.”

    ▼ 영화배우 중에는 누가 연기를 잘한다고 봅니까.

    “메릴 스트립을 좋아해요. 최근에 나온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도 좋았어요. 다양한 인물을 표현해내요. 남자배우로는 로버트 드 니로를 좋아합니다. 연기의 깊이가 있죠. 말론 브랜도도 좋고….”

    ▼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한 편을 꼽으라면 어떤 영화를 꼽겠습니까.

    “프레드 진네만 감독에 버트 랭커스터, 몽고메리 클리프트, 데버러 커 등이 출연한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인상 깊게 남은 영화예요. 정말로 나를 오랫동안 감동시킨 영화죠.”

    이 말을 끝내고 그는 어질러진 책상을 뒤졌다. 그는 “지금 시차 극복이 안 돼 어질어질 해서 사람이름이 생각 안 나요”라고 했다. 한참 뒤진 끝에 테오 앙겔로플로스(Theo Angelopoulos) 감독의 팸플릿을 찾아내 “이 양반이 요즘 제일 훌륭한 영화감독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리스 출신의 앙겔로플로스 감독은 1989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1998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든다면.

    “‘레미제라블’입니다. 책은 젊을 때 많이 읽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시집오자 할머니께서 ‘얘들아, 이빨 좋을 때 많이 먹어라’는 얘기를 자꾸 하시더래요. 어머니는 그 뜻을 몰랐다고 그래요. 나중에 어머니도 나이 드시니까 그 말뜻을 아셨죠. 저도 우리 후배들한테 눈 좋을 때 많이 읽으라고 하죠(웃음).”

    ▼ 용돈을 어디에 제일 많이 씁니까.

    “선배님들을 모셔야 하고 후배들에게도 사야 하니까 아무래도 그쪽에 돈이 들죠. 제가 젊을 때는 가난해서 얻어 먹었지만 이젠 조금은 사줄 수 있는 처지가 됐으니까, 돈 내기 좋아합니다. 돈이 많지는 않으니 소줏집에 갑니다.

    이제는 호기로 마실 때는 아니고 즐기면서 마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6, 7년 전에 와인으로 바꿨어요. 칠레산 에스쿠드 로호를 좋아했는데 그게 요즘 한국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와인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비싼 와인은 잘 안 마셔요. 1만원대 칠레 와인을 주로 삽니다.”

    ▼ 재산을 키운 건 아내 덕이라고 말했는데 어느 정도나 모았습니까.

    “연극 해서 재산을 많이 모을 수는 없죠. 우리가 이 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어머니 덕분이에요. 제가 일을 저질러서 손해가 나면 집사람이 열심히 갚았죠. 김성녀가 사치를 안 하거든요. 알뜰해요. 화장품도 저렴한 피어리스를 씁니다. 신혼 초에는 가계부에 10원짜리도 다 적은 사람이에요. 어머니와 아내 덕에 방배동에 아파트가 하나 있었고 그것을 판 돈이 미추산방을 짓는 재원이 됐죠.”

    연극과 인터뷰의 공통점

    ▼ 삶을 돌아보면서 후회스러운 점은 없습니까.

    “후회가 되는 것은 단지 딱 하나죠. 내 성격이 원만하지 않아요. 선입관을 갖고 사람을 평가하죠. 평생 크게 나쁜 짓 하고 산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게 후회돼요. 제가 두루 넓게 사귀는 성격이 못 돼서.”

    필자가 “싫은 사람은 아예 안 만나는 거군요”라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답변이 짤막짤막해 준비해간 100개가량의 질문이 2시간을 조금 넘겨 동났다. 그는 “제가 원래 ‘단답형’이라 늘 인터뷰가 빨리 끝나죠”라고 했다.

    점심때가 돼 단원들이 식탁을 차렸다. 남녀 구분 없이 당번을 정해 취사를 한다고 했다. ‘식용유와 간장은 특대(特大)를 산다’ ‘우리는 화학조미료를 안 쓴다’라고 쓴 쪽지가 취사장에 붙어 있다. 손 대표가 선물로 받은 거라며 칠레산 아르볼레다 와인을 내놓았다. 전망 좋은 곳에서 와인까지 곁들인 점심 맛이 특별했다.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 오는 길에 보니까 경치 좋은 골짜기마다 러브호텔 단지가 들어섰더군요.

    “여기 와서 제일 괘씸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처음에 올 때는 참 분위기가 좋았어요. 제가 양주시장한테 이 동네에 러브호텔 허가 내주면 극단 미추는 철수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시장이 허가를 안 내주려고 해도 재산권 침해가 돼서 재판을 걸면 안 내줄 도리가 없다는군요.”

    ▼ 그간 스캔들은 없었습니까.

    “없는 편이지요(웃음).”

    ▼ 러브호텔 이용할 일은 없겠네요.

    “만날 러브호텔 옆으로 열심히 지나다니기는 해요.”

    그와 영국에서 함께 자취를 하며 연극 공부를 했던 연출가 윤호진씨는 그를 일러 “사생활도 연극 빼면 없는 사람”이라고 보증을 선다.

    정면으로 보이는 높은 산자락에서 신록(新綠)이 시작되고 있었다. 손 대표는 “신록은 산자락에서 시작해 꼭대기로 점차 올라가고, 단풍은 정상에서 시작해 밑으로 내려온다”고 툭 던졌다.

    식사를 마친 뒤 필자가 청을 넣어 3층 살림집을 둘러보았다. 연극에서 소품으로 썼던 경대, 장롱, 문갑 등으로 집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살림집과 사무실 서재에 책이 많았다. 필자의 인터뷰집도 3권이나 한쪽에 쌓여 있었다. 이 인터뷰를 성사시킨 극단 기획실장 박현숙씨는 대표와 자신이 ‘신동아’ 인터뷰의 팬이라고 말했는데 ‘믿거나 말거나’지만, 연극과 인터뷰가 인간 탐구와 묻고 답하는 소통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한 대목이 있다.

    응접실에는 부처 입상이 자리잡고 있다. 곳곳에 크고 작은 불상이 100여 개 놓여 있었다. 천불(千佛)을 모을 생각이었으나 집착하는 것 같아서 수집 취미를 놓아버리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선물로 하나씩 주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필자에게도 하나 골라보라고 권해 손바닥 안에 들어갈 만한 중국제 밀랍 불상을 집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느끼기에는 작은 불상이었으나 가까운 곳에 놓고 바라다보면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종교에 대해 “불교냐고 물으면 그렇게 답한다”고 말했다.

    산이 파도치는 부석사 안양루

    “우리 어머니가 불자셨고 저도 스님들과 교우가 많습니다. 절에 가기도 좋아하죠. 그렇지만 저는 기독교, 원불교 다 인정합니다.”

    다른 불자(佛子)들처럼 보신탕을 먹지 않는다. 불자는 개를 사람과 한솥밥을 먹는 식구라 여겨 먹지 않는다고 한다.

    ▼ 산과 절에 열심히 다닌다면서요. 절집 중에서 가람의 배치나 조경 예술성에서 추천할 만한 곳은 어디인가요.

    “명찰이야 많지요. 저는 고향이 영주이기도 하지만 부석사를 제일 좋아하는 편이에요. 부석사 안양루에서 내려다보는 산의 파도가 17, 18굽입니다. 그런 절이 거기밖에 없거든요. 계속 산이 끝없이 보이죠. 안양루에 서서 내려다보기를 좋아합니다.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도 많죠. 거기에 여러 가지 전설도 서려 있어요. 초등학교 동창인 이두식(홍익대 미대 학장) 교수와 함께 매년 가을에 부석사에서 화엄축제를 펼칩니다. 초등학교 때 소풍 가던 절이죠. 제가 고향에 대한 선물로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고 시작한 것입니다.”

    ▼ 부석사 외에 몇 곳 더 추천한다면.

    “좋은 절이 하도 많아서…. 순천 송광사도 부처 때문에 아주 좋아하죠. 거기 석불이 많습니다. 전남 화순의 천불천탑(千佛千塔) 운주사도 좋습니다. 미륵사상을 가진 민중이 만든 와불(臥佛)이 좋습니다. 그야말로 민중이 만든 부처지요. 백담사도 좋아하는데 전두환씨가 가서 조금 그렇긴 한데…. 백담사는 계곡이 특히 좋아요.”

    응접실에 통유리를 달아 주위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응접실에서 사계(四季)의 변화를 읽는다고 했다. 미추산방을 떠나 세속으로 나서려니 하늘이 흐리고 비가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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