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구적 보수와 개혁적 보수의 충돌지점에 내가 서 있다
- 대통령과 자주 통화하며 세상 걱정 한다
- 조기 전당대회 거부는 기득권 사수하려는 수구적 행태
- 빨리 정치 중심에 서기 위해선 당대표도 한 방법
- 화합 당사자인 나를 빼고 자기네끼리 화합하겠다는 건 독주(獨走)
- 박근혜와 회동?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어야
- 돈 봉투 들고 왔다가 퇴짜 맞은 사람 많다
- 아내보다 먼저 신혼방 이불 편 정보과 형사들
● 1945년 경북 영양 출생 <BR>● 1964년 중앙대 농촌경제학과 입학<BR> ● 1965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제적 <BR>● 민주수호청년협의회장, 국제인권위원회 한국지부 사무국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조국통일위원장, 민중당 사무총장 <BR>● 1996년 중앙대 경제학과 졸업 <BR>● 한나라당 원내총무, 사무총장, 원내대표, 최고위원 <BR>● 현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권력 2인자’ 소리를 듣는 이 전 의원은 재산이라고는 이 집밖에 없다고 밝혔다. 부동산도 없고 주식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2008년 3월 18대 총선 당시 공개한 재산은 3억1523만8000원.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다시 말해 그에게 숨겨둔 재산이 있다고 주장할 어떠한 근거도 없기에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나는 그가, 살아온 길이 대조적이고 수백억원대 재산가로 전국에 부동산을 깔아놓았던 이명박 대통령과 그토록 의기투합했고 지금도 통한다는 게 좀체 믿기지 않았다. “안 맞을 것 같은 사람들이 합쳐야 일이 된다”는 그의 설명을 들어도 말이다.
인터뷰는 주말 이틀에 걸쳐 그의 사무실과 집에서 6시간 동안 진행됐다. 기사는 1, 2부로 나눴다. 1부에서는 정치 얘기를, 2부에서는 그의 삶을 다뤘다. 보수 진영 일부에서 ‘빨갱이’, 진보 진영에서 ‘변절자’ 소리를 듣는 그가 투쟁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사를 이토록 소상하게 털어놓은 적은 없다.
구릿빛 피부와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그는 인터뷰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때로 한숨을 내쉬었고 오래 삭인 듯한 분노의 자락을 드러내기도 했다. ‘피할 수 없는 잔’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관련된 질문을 맞아서는 말을 삼키느라 숨을 골랐다.
‘1부’ 돌아온 실세
그는 “산이 내 생활”이라고 말했다. 동네 뒷산에 매일 올라가고 일요일엔 북한산 관악산 수락산 도봉산에 오르는데 주로 혼자 다니고, 한 달에 한두 번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명산을 찾아갈 때만 산악회원들과 어울린다고 한다. 내가 알기로 산에 혼자 오르는 사람은 대체로 생각이 많거나 의지가 굳은 사람, 혹은 삶의 고독과 덧없음을 관조하는 사람이다.
“산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절박하게 호소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요. 경제의 기준은 서민입니다. 나는 정치를 그렇게 해왔습니다. 상대적으로 없는 사람이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 정치라고. 두 번째로 이명박 정부가 하려던 게 정치개혁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4·19혁명, 5·16쿠데타, 10월 유신, 그리고 전두환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을 겪었습니다. 산업화로 국민이 먹고살게 되었지만, 산업화 과정에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가 억압됐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그래서 오늘날 여기까지 온 거죠.”
여기서 잠깐 그의 표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2·12쿠데타를 ‘전두환 군사반란’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학살’로 표현하는 사람이 한나라당 의원들 중에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얘기를 마저 듣자.
2007년 11월27일 서울역에서 유세하는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후보와 이재오 의원.
“물을 바꾸는 게 쉽지 않다”
▼ 물고기가 급수 맞는 물에서 놀아야 하듯이 의원님(편의상 질문할 때는 의원으로 표기함)은 왠지 맞지 않는 환경에서 고생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고기가 물에서 놀아야 하는데, 물이 썩으면 물을 바꿔야 하지요. 그래야 고기가 살지. 물을 바꾸려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이 전 의원은 정치철학을 묻자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이 나라의 크고 작은 권력이 정의로워야 해요. 정의의 기준은 공직자의 부정부패가 없어지는 것이죠. 둘째, 모든 영역에서 공평해야 합니다. 기회와 사회적 조건이 누구에게나 공평해야지요. 셋째,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져야 합니다. 행복의 정도는 희망의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정치란 국민에게 희망과 행복을 보장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오랜 민주화투쟁을 하면서, 감옥에 살면서 가졌던 꿈이고 가치관이고 철학입니다. 그걸 개념적으로 말하면 공동체자유민주주의입니다. 자유민주주의에 공동체적 가치관을 부여하는 거죠. 그 핵심은 정의와 공평, 행복입니다.”
▼ 이명박 정권의 2인자라는데, 맞나요?
“무슨 2인자? 1인자가 있을 뿐이지.”
▼ 어떤 뜻으로 하는 말씀인지.
“권력에 무슨 2인자가 있나요. 권력은 1인자만 갖는 거지. 뭘 보고 나를 2인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어요. 내가 무슨 직책이 있나, 자리가 있나.”
▼ 보이지 않는 힘 아니겠습니까.
“내게 보이지 않는 힘이 있나요?”
▼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지요.
2007년 8월13일 이명박 후보에 대한 검찰의 도곡동 땅 관련 중간수사 결과 발표에 항의하러 대검찰청을 찾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정문 앞에서 비를 맞으며 농성하고 있다. 우산 아래 가운데 있는 사람이 이재오 의원.
▼ 실세라는 표현도 씁니다. 2인자와는 조금 다르지만. 김대중 정권의 권노갑, 박지원씨처럼.
“그 사람들은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실세인지 모르지만 나는 자리에 없잖은가, 지금. 그러니까 실세는 맞는데 ‘잃을 실’자의 실세(失勢)지. 내가 뭐 세력이 있나. 나는 야인이고 대학교수일 뿐이죠.”
▼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비칠 만한 언행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지. 대통령께서 서울시장에 출마할 때 내가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서울시장선거를 총괄하지 않았습니까. 또 대통령후보로 나섰을 때 경선캠프의 실질적 책임자였지. 당내 경선을 치를 때 당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국회의원은 나 하나밖에 없었어요. 형님(이상득 의원)이야 형제 사이니 그런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 처음 시작할 때 말입니까.
“그렇죠. 누가 있었나요. 아무도 없었지요. 한나라당 안에 이른바 이명박계라고 할 수 있는 의원이 있었나요. 사람들이 그런 걸 기억하고 뭐라 말할 수는 있겠지. 서울시장, 대통령 될 때 항상 내가 옆에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권력이란 걸 놓고 보면 나는 2인자도 실세도 아니야. 그런데 남들은 그렇게 안 봅니다. 내가 미국에 간 것도 그래서죠. 야당 10년 해보니 정권을 잡지 않고는 나라를 변화시키기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일을 했던 거지, 정권을 잡아 무슨 권력을 행사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서울시장 선거대책본부장, 서울시장 인수위원장을 맡았지만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임 4년 동안 단 한 건의 인사청탁이나 다른 부탁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아마도 상당수 한나라당 의원이 청와대 인사수석한테 한두 번씩은 전화했을 겁니다. 누구 어디 좀 부탁한다고. 나는 지금까지 단 한 통도 청탁전화를 넣은 적이 없어요.”
▼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 양심입니다. 그런 걸 거짓말 할 수 있나.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정권 창출에 참여한 것이므로 공적으로 일할 처지가 아닌 지금 그런 일에 관계하면 그야말로 권력을 행사하는 거지요.”
예나 지금이나 실세의 기준은 최고 권력자와의 거리다. 이 전 의원은 지금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을까.
▼ 사람들이 의원님을 실세라고 부르는 건 대통령과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건 부정할 수 없지 않겠어요? 같이 걸어온 길이, 함께 만들어온 역사가 있으니까. 내가 부인한다고 부인될 수 없겠죠.”
“대통령 재산과 비교한 적 없어”
이 전 의원과 이명박 대통령의 인연은 1964년 한일굴욕수교회담 반대투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 전 의원은 중앙대 구국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이 대통령은 고려대 상과대 회장 및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벌였다.
“그때는 누가 각 대학의 대표라는 정도만 알았어요. 이 대통령을 깊이 알게 된 것은 6·3 동지회 활동을 하면서부터입니다.”
6·3 동지회는 1964년 6월3일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대학가 시위를 주동했던 사람들이 만든 모임이다. 이 대통령은 1992년 6·3 동지회장을 맡았는데, 그때 부회장이 이 전 의원이었다. 이 전 의원은 2003년 제16대 6·3 동지회장을 맡았다.
“일을 같이 한 것은 15대 국회 때지요. 1996년 총선에서 나는 은평구에서, 대통령께서는 종로구에서 당선됐습니다. 나는 초선이었고 대통령께서는 재선이었지요. 둘 다 신한국당이었지요.”
15대 국회 때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계기는 두 가지였다. 이 대통령의 경부운하 구상에 이 전 의원이 깊이 공감했고 반대로 이 대통령은 이 전 의원의 행정구역 개편안에 적극 찬성했다.
“알려진 얘기지만, 그때 이 대통령께서 경부운하에 대한 구상을 죽 설명하셨는데, 막연히 운하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 즉 물류 양과 모래자갈, 총공사비가 얼마인지 매우 구체적으로 얘기하시더라고요. 국가에 대해 이렇게 깊이 연구하는 사람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그랬죠. ‘형님, 대통령 하시라’고. 나는 재야에서 운동만 하다가 의원이 됐기 때문에 국회에서 별로 어울릴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주로 어울린 사람이 이명박 의원, (민중당 출신으로) 나와 함께 당선된 김문수, 이우재 의원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의원이 선거법 위반 문제로 일찍 그만뒀잖아요.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지요. 그때 내가 그랬어요. 국회의원 어차피 오래 할 것도 아닌데 미련 갖지 말고 다음에 서울시나 나라를 경영할 계획을 세워보자고.”
▼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크게 다를 것 같은데 어떻게 의기투합이 됐는지 궁금하네요.
“일을 두고 이야기할 때 의기투합하는 거죠. 정치인과 정치인이 만나면 일을 두고 얘기해야 정상적인 관계지, 사인(私人)도 아니면서 사사로운 얘기만 한다면 공인이 아니잖아요.”
▼ 대선 때 도곡동 땅 문제를 비롯해 이 대통령의 막대한 부동산을 두고 시비가 벌어졌을 때 곤혹스러우셨겠습니다. 재산이라고는 달랑 집 한 채인 의원님과 영 딴판이잖아요.
“남들 이야기, 다른 세상 이야기니까.”
▼ 그래도 가장 가까운 사람인데.
“가까운 사람이긴 해도 그런 건 다른 세계 이야기니까. 도곡동 땅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잖아요. 또 서울시장 출마할 때 한 번 걸렀던 문제이기에 나는 사실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어요. 나는 한번도 대통령 재산과 내 재산을 비교한 적이 없으니까.”
다정했던 한때. 2006년 2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이재오 원내대표한테 54송이의 노란장미를 생일선물로 받으며 활짝 웃고 있다.
“서로 존중해주면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대통령께서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것도 아니잖아요.”
▼ 열심히 일하신 대가겠지요. 그렇지만 재산 규모나 막대한 부동산에 비춰 보면 부(富)에 대한 가치관이 의원님과는 크게 다르죠.
“나는 부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 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죠.”
그는 “대통령 되고나서 몇 번이나 만났느냐”는 질문에 “그거는 뭐…” 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거북스러워하는 표정이다. 자꾸 묻자 마지못해 “한번도 안 만났다고 하면 남들이 믿겠느냐”고 반문했다.
▼ 통화도 자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같은 세상에 사는데 전화도 안 하고 살면 되겠어요?”
▼ 대통령과 전화하는 건 특별한 거지요. 아무나 합니까.
“나와의 관계에서 전화쯤이야….”
▼ 통화하면 주로 무슨 얘기를 하십니까.
“(웃음) 뭐 세상 걱정 한다고 보면 되지요.(웃음)”
▼ 최근엔 어떤 대화를 나누셨죠?
“원래 사적인 얘기는 안 하는 사이입니다. 주로 일 얘기하죠.”
▼ 대통령에게 편지도 쓰신다면서요?
“경선과정이나 대선 때 내가 대통령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떨어져 만나지 못할 때 편지를 쓴 적이 있지요. 요즘은 전화로 하는데 편지 쓸 거 뭐 있습니까.”
▼ 전화는 주로 의원님이 하시나요?
“내가 주로 하고요. 대통령께서도 하시고요.”
▼ 통화는 다이렉트로 하나요, 아니면 누가 연결해줘서?
“주로 다이렉트로 하지요.”
▼ 아, 역시 실세시네요.
우리는 같이 웃었다.
“진짜 집권당 맞나”
한나라당은 최근 9월 조기 전당대회 개최 문제로 내홍을 겪었다. 조기 전당대회는 이른바 이재오계 의원들이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조기 전당대회를 통해 지도부를 바꾸고 이 전 의원을 당 전면에 내세우려는 속셈이다. 물론 친이(MB) 직계나 친박 쪽에서는 반대한다.
▼ 조기 전당대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 4·29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한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이후 정치권을 정리할 필요가 제기됐지요. 여당이 국민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려면 전당대회를 통해 지도부를 바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당이 갈라져 있잖아요. 집권 중반기의 동력을 끌어 모으기 위해선 현 지도부가 물러나야 해요. 그런데 지도부가 물러나지 않으니. 재보선 참패 책임에 대해 국민의 이해를 구하지는 않고 정파적 잣대만 들이대니….”
▼ 답답하시겠네요.
“답답하죠. 뭐하는 당인 줄 모르겠어. 정권을 창출한 집권당 하는 꼴이. 심하게 말하면 가관이지. 정권 잡을 때 국민에게 약속한 게 있잖아요. 정치를, 사회를, 경제를 어떻게 바꾸겠다고. 그런 걸 당이 추동해야지. 그런데 추동은커녕 정부 하는 일에 엇박자만 놓으니. 사안마다 대처하는 걸 보면 진짜 집권당이 맞나 의심이 들어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누구처럼 작정하고 그의 화를 돋울 생각은 없지만 그가 인터뷰 내내 부처처럼 미소만 지었다면 아마도 내가 화가 났을지 모른다.
▼ 전당대회 열리면 당대표로 나설 건가요?
“그건 열려봐야. 열릴지 안 열릴지 지금은 모르니까.”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이 전 의원은 현재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다.
“말이 내년 초지. 이번에 안 하면 사실상 물 건너 간 거지. 정기국회 전에 못하면 못하는 겁니다. 해 넘기면 지방선거 준비하기 바쁜데 언제 전당대회를 하겠어요. 그야말로 기득권 사수지. 그런 게 수구적 행태란 말이지. 그토록 권력의 수구적 행태를 비판하면서 정작 당은 늘 수구적 행태에 머무르고 있단 말이지. 그런 게 안타깝지요.”
그는 당과 청와대가 따로 노는 원인을 사람의 문제로 진단했다.
“책임 맡은 사람의 능력이 문제지. 당도 청와대도. 정국 풀어나가는 능력의 문제예요. 정무적 판단의 문제이고. 정무수석실뿐 아니라 모든 수석과 장관이 정무적 판단을 해야 합니다. 소관 업무를 잘해야 하는 건 당연하고.”
촛불사태 때도 내각과 청와대가 무능해 초기에 해결할 기회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협상 자체는 국제관계를 존중해 그대로 두더라도 국민이 불안해하고 오해하는 부분에 대해 정부끼리 양해해 조치할 수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내각과 청와대 참모진이 무능해 허둥대기만 했어요. 내가 미국에서 보니 아무것도 아닌 문제던데. 불씨는 쇠고기지만 배경엔 집권 초기 정권에 대한 반감과 경고가 깔렸던 거지.”
“재산가는 공직 사양해야”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는 참여정부의 실정(失政)에 따른 상대적 기대감이기도 했다. 그런데 집권 초부터 ‘고소영’이니 ‘강부자’니 해서 민심과 괴리되면서 국정이 흔들렸다. 이 전 의원은 “정권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진단했다.
“(대통령직)인수위 때부터 국민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정권 교체에만 신경 쓰고 정치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선 소홀했던 거죠.”
그는 지난해 2월28일 장관 인사청문회 때 “재산이 많은 사람은 공직 제의가 오면 스스로 사양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이 사실을 언급하자 그는 지론인 듯 공직과 재산의 상관관계에 대해 열을 내면서 설명했다.
“그때 내가 세게 얘기했지. 진짜 화가 많이 났거든요. 임명권자야 세세한 건 잘 모르고 내정할 수 있죠. 추천이 들어오는 대로. 그러면 당사자가 알아서 판단해야죠. 자신이 국무위원 할 자격이 있는지. 나는 돈이 있다는 것만으로 누구를 나무란 적은 없어요. 돈이 많으면 좋지. 세금도 많이 내고. 그런데 정치는 있는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죠. 국민 다수가 없는 사람에 속하니까. 재산이 많으면 그것을 잣대로 사물을 보게 돼요. 없는 사람 처지를 이해하기 어렵죠. 정책이나 법안을 재산가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런 태도는 공직에 적합하지 않죠.”
▼ 그 기준으로는 이명박 대통령도 해당되지 않나요?
“국민이 선출했잖아요. 그런 줄 알고 뽑은 건데. 그리고 나중에 (사회에) 환원했잖아요. 300억원인가. 임명직과는 다르죠.”
▼ 돈 많은 사람들은 수긍하기 힘들겠는데요. 돈과 공직이 무슨 상관이냐고.
“공직은 봉사지. 봉사를 하려면 자기 것을 내놓을 줄도 알아야 하고.”
그는 해마다 농촌봉사활동을 한다. 그게 여름휴가란다. 이번 여름엔 수재 지역을 일주일간 둘러보고 왔다. 충남 금산의 인삼밭에 가서 썩은 인삼을 들어내고 깻잎 농장에서 깻잎을 따고 전남 순천에 가서는 물이 찬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를 따냈다.
“내가 아는 장관한테 말했어요. 8시간 근무하면 2시간만 사무실 지키고 6시간은 현장에서 보내라고. 국민의 고충은 현장에 있지 책상 서류 속에 있지 않다고. 현장 속으로 들어가 발로 뛰는 행정. 그게 바로 이명박 정부의 특징인데, 그렇지 못하니 답답하죠.”
“참고 또 참았다”
당내 일부에서는 이 전 의원이 장관과 같은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아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에 대해 그는 “일리 있는 말이지만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내가 뭐 장관 하려고 정권 잡은 것 아니지 않아요?”
▼ 자리에 앉아야 공식적으로 일을 할 것 아닙니까.
“특정 부처 업무에 관계없이 서민의 고충을 해결하고 공직자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권력이 깨끗해지는 데 이바지하는 역할을 해야죠. 그 점에서 가장 좋은 게 국회죠. 국정 전체를 감시하니까. 당이 정권을 창출한 주체이고 내가 당인(黨人)이잖아요. 당이 민주정당으로 개혁정당으로 거듭날 때 정권을 뒷받침하는 힘이 생기지요.”
▼ 정치란 뜻이 맞는 동지끼리 집단이나 세력을 형성해 하는 거죠. 일부에서 “이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라고는 이재오밖에 없는데 이재오가 중심에 서지 못하고 외곽에 있으니 ‘형님정치’ 얘기가 나오고 소망교회파가 어떻다는 둥 이 정권이 중심을 못 잡는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 의원께서 빨리 정치 중앙무대로 진입해야 MB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 점도 있지요.”
정보부에서 조사 받다 맹장이 터진 이 전 의원은 복막염으로 구치소에서 마취도 없이 12번 수술을 받았다.
“그것도 방법이지. 그런데 맘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웃음)”
▼ 당내에서 이재오 의원을 견제하고 경계하는 목소리가 꽤 있죠? 최근 서울시당위원장에 선출된 권영세 의원도 언론 인터뷰에서 이 의원의 역할론을 부정하는 얘기를 했더군요.
“그 사람들 사정이 있겠지요. 내가 당의 중심에 서면 불편한 사람들이 있겠지.”
▼ 가장 흔한 얘기가 “당 화합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거죠.
여기서 그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당 화합이 뭐냐.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합치는 거죠. 그런데 한쪽은 쏙 빼버리고 한쪽만 있으면 당 화합이 되나요. 친박 쪽에서 ‘이재오가 들어오면 당 화합이 안 된다’고 하는데, 자기네끼리만 있으면 그게 화합인가요, 독주(獨走)지. 정말 화합을 원한다면 같이 모여서 같이 해야지. 화합의 당사자가 나인데 나를 밖으로 밀어내놓고 자기네끼리 화합한다는 건 앞뒤가 안 맞지요. 사심에 찬 억지논리입니다.”
▼ 대선 직전 친박계로부터 ‘오만의 극치’라는 공격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지요? 그때 나간 건 잘못을 인정해서입니까.
“경선에서 진 쪽에서 내가 있으면 협조하지 않겠다고 해서. 대선을 치르려면 서로 협조해야 하는데 한쪽이 나 때문에 안 하겠다니 내가 그만두겠다고 한 거지. 그런데 내가 그만뒀는데도 협조가 안 됐어요. 그러니 그 요구가 정당한 게 아니었던 거지.”
그는 처연한 표정으로 “지금까지 한나라당에서 참고 또 참아왔다”고 했다.
▼ 재야 기질이 한나라당과 잘 안 맞지요?
“그래도 적응했으니 원내총무도 하고 사무총장도 하고 원내대표도 하고 최고위원도 한 것 아니겠어요? 나의 정치적 신념은 대한민국이 발전하려면 보수세력이 변해야 한다는 겁니다. 보수의 본류라는 한나라당이 시대 흐름에 맞게 변화·발전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정치도 발전하지 못해요. 내가 민중당 해봤잖아요. 말로는 진보정당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선거하면 표 안 주잖아요.”
“박근혜, 만나고 싶지만…”
▼ 생각하신 것만큼 한나라당이 변화했나요?
“어쨌든 이명박 대통령을 배출했잖아요. 중도실용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 수구적 보수가 아니라 개혁적 보수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됐다는 것 자체가 발전이지요. 여기서 조금 더 발전해야죠. 솔직히 한나라당 안에 이재오 같은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 왜 없겠어요?”
▼ 그런 사람들이 주류인가요?
“지금까지는 그랬죠. 그래서 주류 자리를 내놓지 않으려는 거지.”
▼ 10월에 서울 은평을 재보선이 이뤄지면 출마하실 거죠?
“봅시다. (재보선이) 있는지 없는지.”
그는 7월21일 자신의 트위터에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일가이귀 사내무공(一家二貴 事乃無功: 한 집안에 귀한 사람이 둘 있으면 일하는 데 성과가 없다)’이라는 구절을 올렸다가 삭제했다. 박근혜 의원을 겨냥한 것이라는 지적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묻자 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좋은 말이라서 별생각 없이 올렸다”고 대수롭잖게 말했다.
▼ 박 전 대표에 대해 요즘 당 안팎에서 비판하는 여론이 있지요? 자신의 정치적 입지만 생각해 당과 정부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당 화합에도 도움 안 되고.
“그 점은 노코멘트입니다. 그분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죠.”
▼ 그쪽은 의원님과는 도저히 한길로 못 간다는 생각을 굳힌 것 같죠?
“그건 모르죠.”
▼ 정권 잡기 전에는 그럴 수 있다 쳐도, 정권 출범 후에도 계속 대립각을 세우잖아요?
“그게 자기들 정치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의 말에서 찬 기운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가 벼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문 안쪽에 선 부부. 이 전 의원은 결혼 첫날부터 수배자로 쫓기는 신세였다.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이 모여 하나의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게 정당이잖아요. 똑같은 생각만으로 모이면 공산당이고 계급정당이지.”
2004년 8월 그는 “한나라당은 민주화와 산업화 세력의 결합체”라며 “해원(解寃)상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당시 박근혜 대표최고위원에게 “유신독재를 사과하고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 일을 언급하자 그는 웃으면서 “박 의원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했다.
▼ 그런 게 지금까지도 두 분이 화합하지 못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싶어서요.
“화합하지 못할 일이 있겠어요?”
▼ 두 분이 화합하면 당이나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겠죠?
“난 언제든지 열린 자세입니다. 지난 일은 빨리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 해원상생이 아니어도 말이죠?
“서로 화합해 함께 가다보면 해원상생이 될 수도 있겠죠. 그때 그런 얘길 한 건 그 문제가 정치적 쟁점이 됐기 때문이었죠. 당시 여당에서 제기한 과거청산이 이슈였잖아요.”
그는 “그쪽에 만나자는 얘기는 안 했느냐”는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누르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자리 봐가면서 발 뻗으라고, 서로 형편 봐가면서 해야죠. 만나자 해도 안 만날 줄 뻔히 알면서 자꾸 만나자고 하는 건 상대방을 어렵게 하는 거니까. 시간 가다 보면 만나게 되겠지. 같은 당에서 정치하면서 어떻게 안 만나겠어요. 어차피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뭘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잖아요.”
▼ 저쪽에서도 만나자는 얘기는 없었나요?
“물론이죠. 나야 만나고 싶지요. ”
▼ 재보선과 조기 전당대회가 무산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가 중앙대 교수잖아요.”
그는 10개월간의 미국 연수에서 돌아온 후 지난 4월부터 모교인 중앙대에서 국제대학원 초빙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존스홉킨스대학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연구한 ‘동북아평화번영공동체’와 ‘공동체 자유민주주의’가 그의 강의 주제다.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지”
“때가 오지 않으면 기다릴 줄 알아야지. 때가 아닌데 의욕만 앞서서 무엇을 하려 들면 미래를 그르칠 수 있지요. 기다리든지, 아니면 판을 엎든지 해야 하는데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판을 엎을 상황이 아니잖아요.”
▼ 판을 엎을 만한 지지세력이 없지 않나요? 예전만 못하잖아요?
“예전엔 내가 무슨 세력이 있었나요. 대통령 만들 때 얘기지. 안 되면 기다려야지. 기다리는 것도 아름다운 거요.”
▼ 계속 기다릴 순 없잖습니까. 정권 창출 주역으로 책임감도 있을 텐데.
“길이 있겠지, 기다리다보면. 사람들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느냐, 그건 아니잖아요. 이재오가 이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잖아요. 그럴 때 기다릴 줄 알아야지.”
▼ 지나온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신다면?
“긴 터널을 지나온 투쟁의 삶이었지. 싸워서 얻은 게 아니라면 내 것이 아니라는 게 민주화운동하면서, 부정부패와 싸워오면서 얻은 교훈입니다. 개인이나 국민이나 마찬가지예요. 공짜로 얻어진 역사는 없어요. 미국의 역사는 미국 국민이 피 흘려 일군 것입니다.”
그의 투사본색이 드러난다.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투사의 피. 역사를 투쟁의 산물로 보는 진취적 시각.
▼ 정치인생에서 마지막 큰 싸움을 앞둔 것 아닌가요?
“이제는 싸우더라도 주변을 배려하려고 해요. 지금까지는 옳은 일이면 내가 나서서 싸워야 한다는 게 내 철학이었어요.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잖아요. 내가 이루려던 일의 한 단계가 끝난 거죠. 옳은 일이라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가 나선다는 걸 배웠어요. 지금부터는 굳이 투쟁하지 않더라도….”
▼ 당 안팎의 상황은 다시 한번 싸울 것을 요구하고 있죠?
“그렇다고 내가 투쟁을 회피하거나 겁내는 건 아닙니다.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죠. 싸움을 능사로 생각하면 안 되지만.”
▼ 대통령이 의원님을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요. 의원님을 둘러싸고 분란이 끊이질 않으니.
“뭐 인간의 깊이를 서로 잘 아니까. 정치적 상황 때문에 부담스러워할 관계는 아니지. 내가 국민이나 국가에 부담 주는 일을 한 게 없잖아요.”
▼ 서로에게 어떤 보완재가 되죠?
“내가 정의롭지 않은 일이나 남한테 피해 끼치는 일을 하지 않잖아요. 늘 옳은 일에 자신을 내던졌고.”
▼ 이 대통령의 장점이라면?
“인내심이 강하죠. 대통령께서는 많이 참으면서 지혜를 얻는 것 같아요.”
‘2부’반골(反骨)의 길
오늘날 족보(族譜) 하면 케케묵은 냄새가 나지만, 더러 어떤 사람의 정서나 기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재오 전 의원은 소설가 이문열씨와 같은 재령(載寧) 이씨다. 재령 이씨 가문에는 반골의 피가 흐른다. 그 상징적 인물은 모은공(茅隱公) 이오다. 고려 중기 상장군을 지낸 재령 이씨 중시조 소봉(小鳳)의 손자인 이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고려가 망하자 충신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쫓겨나와 정착한 곳이 경남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다. 그는 집 주변에 담을 쌓고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자손들에게 담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엄명했다. 사람들은 이 지역을 담안마을, 혹은 고려동으로 불렀다. 밖은 조선왕조 영토지만 안은 고려의 유민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뜻에서다.
조선조에서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대표적 인물이다. 영남학파의 거두인 갈암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성리학을 계승한 인물로 숙종 때 대사헌·이조판서에 올랐으나 정쟁에 휘말려 10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 사망했다.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후예가 우리 재령 이가(李家)지요. 영남에서는 재리(載李)라고 하지요. 재령 이가에는 벼슬한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내가 재야를 오래 한 것도….”
이 전 의원의 말에는 조상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뭔가 통한다”는 내 말에 그가 “뼈다귀는 못 속인다, 이거지” 하고 웃었다.
“DNA는 못 속인다고, 그래서 경우 바른 소리 잘하고 적당히 살지는 않지, 우리 집안 내력이.”
그의 호 남산(南山)도 그런 뜻을 담고 있다. 1980년대 초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옆방에 있던 홍남순 변호사가 ‘남인의 맥을 잇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여준 것이다.
그는 해방둥이다. 1945년 1월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전기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강원도 탄광지대에 정착해 전기기사로 일했다. 1948년 탄광이 문을 닫자 그의 가족은 고향인 경북 영양으로 돌아왔다. 3형제 중 둘째인 그의 부친은 땅이 없어서 소작을 했다.
교장 전근반대 시위 주동
가난한 시절이었다. 소년 이재오는 친구들과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속피를 긁어내 나무에 배인 물을 빨아먹었다. 껍질은 집에 가져가 물에 우려내 밀가루와 섞어 떡을 해먹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그의 동네친구 한 명이 흙가루로 만든 떡을 먹다가 기도가 막혀 숨지기도 했다.
4남1녀 중 3남인 그와 부친의 나이 차이는 38세.
“나도 그런 성향이 있는데,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얘기를 잘 안 하셨다. 무슨 일을 가족과 상의해서 한 적이 없다. 어머니는 그게 늘 불만이었다. 두 분이 두 살 차이인데, 하여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다정하게 말하는 걸 한 번도 못 봤으니까.”
한양 조씨인 그의 어머니는 문학적 소양이 깊었다. 소설을 많이 읽고 자식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걸 즐겼다. 그가 중학생 때 소설에 심취하고 뒷날 국어교사를 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릴 적 그의 꿈은 농촌지도자였다. 이광수의 ‘흙’에 나오는 허숭과 심훈의 ‘상록수’ 주인공 박동혁이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 없었다. 당시 농촌에는 청소년사회교육운동인 4H구락부(클럽)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중학생 때 면의 4H구락부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고등학생 때는 경북 4H연합회장을 맡을 정도로 이 운동에 열성적이었다.
그의 투사적 기질이 첫선을 보인 것은 1960년 영양고등학교 1학년 때다. 교내 독서클럽을 이끌던 그는 그해 4·19가 일어나자 교장 전근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학생들에게 존경받던 영양고 교장이 경북 교육감에게 밉보여 시골 중학교로 발령 난 것에 분개해서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영양경찰서 유치장에서 20여 일을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영양군청 서기로 특채됐다. 농작물 재배기술 보급과 관리가 주된 업무였다. 그해 여름 외지에 나갔던 친구들이 놀러왔는데, 그들과 얘기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영 물이 다른 거라. 나는 만날 촌 이야기만 하는데 얘들은 서울이 어떻고 부산이 어떻고 공장이 어떻고. 그래서 농촌운동을 하더라도 좀 더 배우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해 10월 군청서기를 그만두고 대학 입시공부를 시작했다. 때마침 중앙대 경상대에 농촌사회개발학과가 생겼다. 5·16군사정부가 농촌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국책사업으로 신설한 학과였다. 3개월간 교과서와 참고서를 달달 외우며 공부한 끝에 그는 1964년 중앙대 농촌사회개발학과에 합격했다. 입학성적이 좋아 4년 장학생 대우였다.
4H구락부 활동 경력을 인정받은 그는 과대표를 맡았다. 입학 후 열흘 만에 대학가에서 한일굴욕수교회담 반대시위가 시작됐다. 그는 과대표 및 경상대 대의원으로서 시위의 선두에 섰다. 6월3일 계엄령이 선포됐다. 이른바 6·3사태다. 군인들이 대학에 진주했고 휴교령이 떨어졌다.
이듬해 한일회담 국회 비준을 앞두고 또다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2학년이던 그는 중앙대 구국투쟁위원장으로서 다른 대학과 연계하면서 중앙대 시위를 주동했다. 8월에 위수령이 떨어졌고 계엄당국은 시위주동 학생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그는 수배자 신분이 돼 도피생활을 했다. 그가 체포된 것은 한일수교 비준이 이뤄진 후였다. 수습 국면이라 ‘구류 29일’이라는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고문경관’ 이근안과의 만남
1966년 4월 그는 군에 입대했다. 강제 징집이었다. 1969년 만기제대를 한 후 복교 신청을 했다. 하지만 학생처장은 당국의 지시라며 거부했다. 이 일이 반독재민주화투쟁에 나선 계기가 됐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군대 3년 갔다 오면 당연히 복교시켜줄 줄 알았다. 졸업하면 농촌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복교를 안 시켜주니 참담했다. 그때 느꼈다. 개인이 아무리 행복하게 살려 해도 사회적 조건이 안 맞으면 안 되는구나. 개인의 희망이라는 것이 정치적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구나. 내가 뭘 하려면 먼저 군사독재정권부터 무너뜨려야겠구나. 그때부터 운동을 시작한 거다.”
그는 민주화투쟁을 하면서 유신치하에서 네 번, 6공 때 한 번 모두 5차례 구속됐다. 그가 처음 구속된 것은 1973년 서울대생 유신반대 시위와 관련해서다. 당시 서울 영등포 장훈고등학교 교사이던 그는 자신이 이끌던 민주수호청년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거리에 유인물을 뿌리며 서울대생 시위를 지원했다. 경찰은 그를 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했다. 이때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그를 조사한 사람이 뒷날 고문경관으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씨였다.
“그때만 해도 이근안이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다. 잡혀간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까. 재야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고문을 당한 셈이지. 웃기는 것은 담당검사가 이한동이었다는 거야. 나중에 내가 우리 당의 대표로 모시기도 했으니까.”
당시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남산 1호 터널 앞에 있는 붉은 벽돌집이었다. 거기서 그는 알몸으로 양손과 양발이 묶인 채 얼굴에 덮인 물수건에 고춧가루가 쏟아지는 고문을 당했다. 숨이 막혀 기절했다 깨어나면 다시 고춧가루를 쏟아부었다. ‘북한에서 돈 얼마 받아왔느냐’는 게 주 신문내용이었다. 서울대 유신반대 시위의 배후를 북한으로 몰고 가려는 각본이었다. 검찰로 넘겨진 그는 이한동 검사 앞에서 혐의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
“사실대로 말하라기에 조서내용을 부인했지. 그러자 이한동 검사가 ‘이 사람은 다시 좀 갔다와야겠네’ 하더라고.(웃음) 다시 대공분실에 가서 맞고 오라는 얘기지. 겁주는 거였지.”
1심에서 징역 3년, 2심에서 2년형이 선고됐다. 그가 두 번째로 구속된 것은 1977년 2월 서울 갈현동 대성고 교사로 재직할 때였다. 당시 그는 극단 ‘상황’을 만들어 대표 겸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민’이라는 가명을 썼다. 이민은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매달 연극평론을 쓰기도 했다. 검열이 엄격했기 때문에 우회적인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주로 일제 강점기 민족의 수난을 소재로 한 창작물을 공연했다.
어느 날 단원들끼리 MT를 가서 유신치하 인권탄압을 풍자한 10분짜리 단막극을 즉석에서 연출했다. 그 얘기가 중앙정보부 귀에 들어갔다. 그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고 극단은 해체됐다. 설립된 지 3년 만이었다.
세 번째 구속된 것은 1979년 8월. 이른바 오원춘 사건(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에 연루돼서다. 이 사건은 불량감자종자 피해보상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농민 오원춘씨를 정보부가 납치·폭행한 데 대해 가톨릭교회가 대규모 기도회와 가두촛불시위를 벌이면서 불거졌다.
“10분이면 된다”
“국제앰네스티(국제인권위원회) 한국지부 사무국장을 할 때였다. 김수환 추기경한테 전화가 왔는데, ‘안동에서 오원춘 사건 기도회를 하는데 같이 내려가자’는 거야. 추기경 말이니 무조건 따랐지. 김승훈 신부와 함께 차를 타고 내려갔다.”
안동에 내려가 기도회에 참석한 그는 추기경 강론이 끝난 다음 한국의 인권탄압 실상에 대해 강연했다. 행사가 끝난 후 700여 명의 참석자가 성당 밖으로 나가 야간촛불시위를 벌였다.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 출근했는데, 정보부 요원이 찾아와 ‘갑시다’ 하더라고. 10분이면 된다면서. 잠깐 확인할 게 있다고. 우리는 그 소릴 하도 많이 들어서…(웃음). 내가 ‘10분이 10년이 되겠지’ 하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
그는 남산 정보부 감찰실로 끌려가 20일가량 조사를 받았다. 거기서 맹장이 터졌다. 급성이었다. 정보부는 꾀병이라며 수술을 해주지 않다가 복막염으로 번지자 서대문경찰서로 이송시켰다. 경찰서 앞 한 개인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수사관의 재촉에 의사가 서두르다가 가제, 솜, 실 따위를 뱃속에 남긴 채 봉합해버렸다.
“서대문구치소에 갇혔는데, 일주일 만에 곪아서 터져 나왔다. 12번이나 재수술을 했다. 마취도 없이, 구치소 안에서. 그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옷을 헤쳐 흉터를 보여줬다. 깊게 파인 고랑 같은 흉터 몇 개가 뒤엉켜 있었다.
10·26 직후인 1979년 11월 그는 구치소 안에서 한 차례 더 구속됐다. 애초 그의 구속사유는 긴급조치 9호 위반이었다. 10·26으로 긴급조치가 소멸되면서 석방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출소도 못한 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죄로 재구속됐다. 그가 이끌던 민투(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가 남민전 산하 단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국은 남민전을 광복 이후 최대의 자생 공산주의 조직이라고 발표했지만 뒷날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졌다. 2006년 3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남민전 관련자 2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때 재판에 관여했던 검사가 박철언 전 의원이라는 것.
“다른 건 기억 안 나고 이 말은 생각난다. 유신체제에 반대한 피고인은 장기간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한다고. 징역 15년을 구형하더라고. 악독하기보다는 좀 정상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지.”
그는 이 사건으로 4년간 옥살이했다. 두 사람은 1996년 15대 국회에서 만났다. 박씨는 자민련 의원이었다.
“의원회관 로비에서 마주쳤는데 내 눈길을 피하더라고. 그래서 쫓아가 ‘박 의원님, 제가 이재오입니다. 처음 들어왔으니 잘봐주십시오. 나는 지난 일은 다 잊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했지. 그러자 ‘재야활동 오래 하셔서 국회의원이 잘 맞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더라고.(웃음)”
1982년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그는 재소자 인권투쟁을 하면서 23일간 단식했다. 그해 부친이 돌아가셨다. 그 사실을 알려주려 면회를 왔던 큰형은 동생이 단식투쟁하는 걸 보고 차마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는 이듬해 출소할 때까지 이미 세상을 뜬 부친에게 간간이 편지를 써 보냈다. 모친은 199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부모 얘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두 분 다 임종을 못 지켰으니 큰 불효를 한 거지.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아버지께서 면회 와서 이런 말을 했다. ‘네가 한 일이 옳다고 생각하면 감옥생활이 편할 테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고될 것이다.’ 또 어머니는 ‘여기도 사람 사는 데 아니냐. 마음 크게 먹어라’고 나를 위로했다. 부모님은 한 번도 내가 한 일에 대해 ‘왜 그런 짓 하냐’고 나무란 적이 없었다.”
그가 다섯 번째로 구속된 것은 1989년 4월.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조국통일위원장으로서 범민족대회를 추진하는 과정에 문익환 목사의 방북 배후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그는 범민족대회 실무회담을 하러 판문점으로 가다가 체포됐다. 당시 이 사건을 지휘한 서울지검 공안2부장이 최병국 한나라당 의원이다.
그가 5차례 구속되면서 선고받은 형량을 다 합하면 징역 12년6개월이다. 하지만 실제로 복역한 기간은 6년10개월이다. 감형이나 사면 등으로 형기가 줄었기 때문이다.
“내일부터 잡으러 갈게”
이쯤에서 그의 아내와 아이들 얘기가 궁금해진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유지하기가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결혼식부터 파행이었다. 박정희가 근소한 차이로 김대중을 누르고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던 해인 1971년 10월의 일이다.
원래 그가 잡아놓았던 예식시간은 10월9일 낮 12시. 장소는 서울 남산드라마센터였다. 그런데 전날 김지하 시인한테서 연락이 왔다. 원주천주교구에서 원주MBC 문제로 철야농성을 하는데 내려와서 농성을 이끌어달라는 거였다. 자기네는 3일간 해서 인력이 바닥났다면서. 그는 낮에 내려가 밤새 농성하고 다음날 낮 12시쯤 원주에서 출발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3시쯤 됐다. 그런데 주례가 보이지 않았다.
“한 달 전에 부탁해놓고 온 건데 데모하러 돌아다니느라 확인하는 걸 잊어먹었던 거야. 이 양반이 나한테서 연락이 없으니 그날 등산을 가버렸어.(웃음) 그 양반 등산코스를 알기에 산 밑에 가서 기다렸지. 만나서 ‘주례가 등산 가면 어떡하느냐’고 따지니까, ‘나도 오늘인가 내일인가 싶었는데 연락이 없기에 자네한테 또 사정이 생겨 못하는 줄 알았지’ 하더라고.(웃음)”
예복도 문제였다. 집에 붙어있을 때가 없어 양복을 맞춰놓기만 하고 가봉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양쪽 팔 길이가 다른 양복을 걸쳤다. 와이셔츠와 넥타이는 친구 것을 빌렸다. 식장에 나타난 정보부 이모 대령이 축하금을 건네면서 속닥였다. “오늘은 축하하고. 수배가 떨어졌으니 내일부터 잡으러 갈게.”
신혼여행은 경주로 떠났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넘쳐 방을 구할 수 없었다. 몇 시간 돌아다닌 끝에 개천가에서 여인숙 하나를 찾아내 신혼 첫날밤을 보냈다. 여인숙에서 심부름 하는 여자가 자는 문간방이었다. 다음날 그는 부산으로 튀었고 부인 혼자 서울 불광동에 마련한 신혼집으로 올라왔다.
“아내가 문을 여니 신혼방에서 종로서 정보과 형사들이 우리가 아직 덮어보지도 못한 이불을 깔아놓고 앉아 있더라는 거야. 아내가 그 자리에서 기절해 서대문병원에 입원했지.”
그가 수감생활 하는 동안 집안생계는 부인의 몫이었다. 부인은 쇠락한 집안의 무남독녀였다. 어릴 때 어머니 어깨너머로 배운 바느질이 돈벌이가 됐다. 한복 바느질방을 내고 몇 가지 장사를 하면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는 2녀1남을 뒀다. 딸 둘은 결혼했고 아들은 군복무를 마친 후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다. 아이들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정보과 형사들을 아버지 친구로 여겼다. 형사들은 허구한 날 집에 없는 그를 대신해 동사무소에서 영세민에게 나눠주는 라면과 쌀을 타서 집에 갖다주곤 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일 리가 없었다.
“거리감이 꽤 있었지. 어릴 때 하도 떨어져 살아서. 데면데면했지 뭐. 내가 무슨 말해도 잘 먹히지 않고. 커서는 그런 게 없어졌지만.”
그는 “민주화투쟁 하면서 가족한테 안겨준 건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심어줬다”고 자부심을 내비쳤다.
“옳게 살아야 한다는 것, 부정부패하면 안 된다는 것. 이 정신은 온 가족이 공유하고 있다. 가끔 내가 없을 때 누가 집에 찾아와 뭘 놓고 갈 때가 있다. 그럼 다음날 반드시 돌려준다. 자식들이 그거 하나는 확실히 배웠다. 추석 때 과일상자가 들어오면 딸들이 ‘이거, 뇌물 아니야’ 했을 정도니까.”
그는 3선 하는 동안 세비를 받으면 지구당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면 지구당에서 그의 부인에게 300만원씩 월급을 보내줬다는 것이다.
“‘4선이 되면 무조건 세비 봉투를 당신 앞으로 보내주겠다’ 약속했다. 그런데 떨어졌지 않나.(웃음) 집사람은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중앙대 초빙교수 월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 달에 250만원 나오는데 세금 떼고 220만원이 집사람 통장에 입금된다. 집사람은 국회의원 할 필요 없이 교수나 계속하라고 한다.”
“식사 때마다 서글펐다”
▼ 돈에 대해 결벽증이 있나.
“돈이 생기면 쉽게 일을 하려 한다. 정치를 돈으로 하려면 안 된다.”
▼ 그래도 정치하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나. 더욱이 무리를 이끌려면.
“있으면 좋겠지. 나하고 친한 의원들은 무슨 일 있으면 다들 자기 돈 낸다. 미국 갈 때도 의원들이 돈 모아서 비행기표도 끊어주고….”
▼ 몇몇 기업체에서 돈 대줬다고 하던데.
“기업체는 무슨? 내가 그걸 받기나 하겠나.”
▼ 깨끗하게 사는 건 좋은데 가장으로서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사는 데 별로 불편하지 않다. 이 생활이 몸에 배어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 이 대통령과 친한 기업인이 건넨 돈 봉투를 거절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2007년 경선 때다. 누군가를 보내 돈봉투를 건네기에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이런 건 (기사로) 쓰지 않으면 좋겠다.”
측근에 따르면 정치권 인사들 중에도 그에게 돈 가져왔다가 퇴짜 맞은 사람이 여럿 있다고 한다. 후원금도 50만원 이상이면 ‘뇌물 성격이 있다’며 돌려보낸다고 한다.
▼ 가까운 친구 중에 기업인이나 재력가가 없나.
“유유상종이라고 어떤 기업인이 내 주변에 얼씬거리겠나. 자칫 빨갱이 도와준다고 망하기 십상이지. 이번에 미국에 가서 앨라배마의 현대공장과 텍사스의 삼성공장을 가보고 남미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을 둘러보면서 기업이 애국자라고 느꼈다. 기업이 돈 안 벌면 나라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인들과 얘기를 나눠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미국에 가 있을 때 그는 버지니아주에서 살았다. 그가 연수를 했던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인 주용식씨의 집이었다. 두 남자가 자취를 했다고 한다. 그는 “식사 때만 되면 서글펐다”고 털어놓았다.
“밥도 가끔 했지만 주로 라면이나 국수, 감자, 고구마를 많이 먹었다. 밥을 하면 반찬도 해야 하니.”
존스홉킨스대는, 학부는 몬트리올에 있지만 국제대학원은 워싱턴에 있다. 그는 자전거로 통학했다. 1시간20분 거리였다. 어느 날 내리막길에서 과속하다가 5m쯤 날아가 거꾸로 처박히는 사고를 당했다. 보도블록 턱을 들이받아 땅바닥에 머리가 부딪혔는데 헬멧이 박살났다. 그는 2주간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그의 집 거실엔 ‘不勞無榮(불로무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노력하지 않으면 영광이 없다’는 뜻이다. 가훈을 묻자 “가난하더라도 정의롭게 살자”라는 ‘고전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내심 공감하면서도 짐짓 이렇게 물어봤다.
▼ ‘정의’ 이런 말은 지난 시대의 단어 아닌가.
“그렇지만 그게 핵심이지. 나라가 발전하려면 그게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