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폰의 국내 출시로 소프트웨어 파워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소프트웨어 경쟁력 없는 제조업체는 ‘껍데기’만 찍어내는 비주류로 전락한다. 문제는 이런 IT 패러다임이 휴대전화를 넘어 TV, 자동차까지 확산된다는 점이다. 아이폰의 국내 출시와 동시에 한국의 ‘IT두뇌집단’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수장으로 부임한 김흥남 원장을 만났다. 소프트웨어 전문가인 그는 “지금이라도 소프트웨어 플랫폼 개발에 나서 잃어버린 중원(中原)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1956년 대구 출생<br>●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전산학 박사, 미국 MIT 경영학(Strategy & Innovation) 자격증 수료<br>●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시스템공학연구소 연구원<br>●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내장형 SW연구팀장, 임베디드SW연구단장, Smart Grid 기획 TFT장<br>● 연구업적 : ‘모바일 컨버전스 컴퓨팅을 위한 단말적응형 임베디드 운영체제 기술’ ‘조선산업 초일류화를 위한 IT 기반 융복합기술개발 과제 연구’ ‘스마트폰용 임베디드 리눅스 솔루션(QPlus) 기술 개발’등<br> ● 특허 : 컨텐츠 변환을 지원하는 통신 단말, 서버 시스템 및 그 변환 방법(공저·2007), 동적 이동형 네트워크에서의 루트 이동 라우터 및 그 운용 방법(공저·2007) 외 다수.<br>● 대한임베디드공학회 학회장
애플의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스마트폰이란 인터넷 정보 검색, 그림 및 동영상 송·수신 등의 기능을 갖춘 차세대 휴대전화를 일컫는다. 그런데 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IT강국이라는 한국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세계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에서 점유율 30%를 자랑하던 한국이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10위에 불과하다. 1위는 아이폰. 매출 기준으로 30%에 가까운 점유율을 과시한다. 여기에 구글 안드로이드폰(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탑재한 스마트폰을 통칭하는 말. 줄여서 구글폰이라고도 한다)이 아이폰을 맹추격하는 양상이다. ‘스마트폰 월드’에서 한국의 존재는 미미하기 짝이 없다.
아이폰이 국내 첫 출시된 지난해 11월, ‘IT코리아의 산실’로 불리는 국책연구기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하 ETRI)의 수장이 바뀌었다. 새로 부임한 김흥남(54) 원장은 마침 소프트웨어 연구개발(R·D)에 평생을 바쳐온 인물. 소프트웨어 경쟁력으로 아이폰 신화를 일궈낸 애플이 ‘소프트웨어 약국(弱國)’에 상륙한 시점에 소프트웨어 전문가가 국내 최대 IT연구기관장을 맡았다는 사실이 의미 있어 보인다.
4월13일 서울 서초구 ETRI 서울사무소에서 만난 김 원장은 “이러다 휴대전화를 넘어 TV, 자동차까지 애플과 구글에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며 “모바일 소프트웨어 플랫폼(이하 SW 플랫폼)이란 중원을 탈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아이폰을 쓰시는군요.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니까요. 한 달 전쯤 ETRI 간부 전원이 휴대전화를 아이폰으로 교체했습니다. 얼마 전에 모바일용 e메일 서버를 만들어 아이폰으로 e메일을 확인하기 시작했어요. 올 하반기엔 결재까지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입니다. 본원이 있는 대전과 관계 부처가 있는 서울을 오가느라 이동하는 시간이 많은데, 아이폰으로 결재를 하게 되면 업무 효율이 많이 올라갈 것 같습니다. 노트북을 갖고 다니긴 하는데, 부팅도 해야 하고 번거롭잖아요.”
▼ 요즘 아이폰 ‘갖고 놀기’가 유행입니다. 업무 이외는 주로 뭘 하시나요.
“틈틈이 날씨를 확인하고 뉴스를 봐요. 그리고 제 취미가 지도 보는 겁니다. 어릴 때부터 각종 지도를 보며 가상으로 해외여행도 하고, 등산도 하곤 했어요. 그러면 잡념이 없어지고 집중도 할 수 있거든요. 요샌 아이폰으로 위성지도를 많이 찾아봅니다. 기상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실시간 위성사진을 보면서 혼자 기상예보도 해보고요.”
내 손 안의 컴퓨터
세계인이 아이폰에 열광하는 이유는 앱스토어(App Store)에 있다. 앱스토어란 아이폰에 탑재할 수 있는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이하 어플)을 판매하는 온라인 장터. 스티븐 잡스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4월 초 밝힌 바에 따르면 앱스토어에서 거래되는 어플 개수는 18만5000개에 달하고 다운로드 횟수는 40억회를 돌파했다. 아이폰 사용자들은 자기 입맛대로 어플을 다운로드해 게임하고, 신문 읽고, 트위터(twitter·단문 메시지 서비스)를 한다. 심지어 골프장 잔디에 숨은 골프공을 찾아주는 어플도 있다. 휴대전화라기보다 전화 기능을 갖춘 ‘내 손 안의 컴퓨터’라고 일컫는 게 본질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SK텔레콤이 판매하는 모토로라의 구글 안드로이드폰 ‘모토로이’
“아이폰의 강점은 무엇보다 앱스토어입니다. 이 비즈니스 모델은 참으로 기발해요. 애플은 어플 판매수익의 7을 개발자가, 3을 애플이 가져가는 상생의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높이 평가할 대목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통신사업자가 7, 개발자가 3을 가져가는 구조여서 상생하지 못했고요.”
이런 아이폰의 대항마로 등장한 게 구글 안드로이드폰이다.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제어해 사용자가 컴퓨터를 쓸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운영체계(OS·operating system), 다른 말로 ‘플랫폼’이라고 한다. 보통 우리가 쓰는 PC의 하드웨어(HW) 플랫폼은 인텔, 그리고 SW 플랫폼은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즈’(Windows)다. 구글은 안드로이드를 스마트폰의 ‘윈도즈’, 즉 SW 플랫폼으로 삼았는데, 이는 아이폰의 ‘닫힌’ 운영체계와 달리 개방형 플랫폼. 누구나 안드로이드를 가져다가 자기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있다.
▼ 구글 안드로이드폰은 아이폰을 견제할 대항마가 될 수 있을까요.
“구글폰은 개방형 플랫폼이라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아이폰보다 경쟁력 있다고 생각해요. 단말기 제조업체나 이동통신사(이하 통신사)가 아이폰으로는 차별화된 기능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지만, 구글폰으로는 할 수 있거든요. 또 구글은 막강한 모바일 검색 및 서비스 파워를 가졌습니다. 지금 구글은 자동통역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고 해요. 중국인을 만났을 때 스마트폰을 들고 ‘안녕하세요’ 하면 스마트폰이 ‘니하오’ 하고 자동으로 통역해주는 겁니다. ETRI도 5년 전 이런 서비스를 개발한 적 있는데, 스마트폰에 맞게 다시 해보려고 합니다.”
▼ 휴대전화 단말기 강국인 한국 입장에선 애플과 구글의 등장이 당혹스럽습니다.
“삼성전자, LG전자가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톱에 올랐다는 뉴스를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자리를 애플, 구글이 가져가버렸습니다. 삼성전자는 단말기를 연간 2억대 팝니다. 애플은 10분의 1인 2000만대에 불과하고요. 하지만 순익은 애플이 훨씬 큽니다. 이게 충격이에요. 그렇다면 애플이 어떻게 큰 수익을 얻고 있는지 봐야지요. 구글도 마찬가지지만 애플이 가진 건 우리처럼 하드웨어 경쟁력이 아닙니다. 소프트웨어 경쟁력이에요.”
애플TV, 구글자동차 멀지 않아
▼ 애플과 구글의 소프트웨어 경쟁력의 실체는 뭔가요.
“애플은 아이폰의 SW 플랫폼을 장악함으로써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애플은 삼성전자처럼 단말기를 제조하지 않습니다. 외부에 맡기죠. 네트워크도 통신사 것을 활용하고요. 또 콘텐츠(어플)는 앱스토어를 통해 개발자들에게 넘겨줬습니다. 그런데도 애플이 아이폰을 작동시키는 SW 플랫폼을 꽉 쥐고 있으니까, 이들이 애플 중심으로 모이는 겁니다.
이제 플랫폼 없이 하드웨어 경쟁력을 가질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우리는 플랫폼 경쟁력이 없어요. 문제는 그 때문에 휴대전화뿐만 아니라 TV, 나아가서는 자동차 등 전체 제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에요.”
애플과 구글이 휴대전화 다음으로 TV에 도전할 것이란 전망은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듯하다. 최근 구글은 소니, 인텔 등과 손잡고 ‘구글TV’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TV, 구글TV가 등장하면 TV는 방송 콘텐츠 수신기를 넘어 ‘스마트 TV’로 진화한다. 하나의 콘텐츠를 휴대전화, PC, TV 등 단말기 구애 없이 자유롭게 즐기고, TV를 통신장비로도 활용하게 된다.
잠깐 스마트 TV 시대를 상상해본다. 등산 가서 스마트폰으로 찍은 가족사진을 집에 와서 대형 TV 화면으로 보고 곧장 다른 가족들 스마트폰으로 보내준다. 스마트폰에 깔아놓은 자동차 경주 게임을 TV 화면으로 즐긴다. 스마트폰에 걸려온 전화를 TV로 당겨 받아 화상통화를 한다. 김흥남 원장은 “애플이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그 다음엔 아이TV, 그리고 아이카(Car)로 이어지는 로드맵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 TV 다음은 자동차라고요.
“자동차 회사들과 구글, 애플 사이에 전략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BMW가 자동차 하드웨어를 만들고 애플이 자동차용 SW 플랫폼을 제공하는 거죠. 아이폰에 넣어놓은 음악을 자동차의 빵빵한 서라운드 시스템으로 즐기고, 전화가 걸려오면 자동차가 자동으로 당겨 받는 거지요. 이런 지능형 자동차가 곧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 이처럼 IT 중심축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 우리로선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IT산업은 크게 4개 계층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네트워크 ▲단말기 ▲SW 플랫폼 ▲콘텐츠 및 서비스가 그것입니다. 이중 네트워크와 단말기는 우리의 경쟁력이 매우 우수합니다. 와이브로(WiBro·이동하면서 초고속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무선 휴대인터넷)는 저희 ETRI가 삼성전자와 함께 세계 최초로 개발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국산 단말기도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콘텐츠 및 서비스 수준도 상당하고요. 문제는 SW 플랫폼 경쟁력이 제로라는 겁니다. 이 때문에 지금이 위기상황이라 할 수 있어요.”
▼ SW 플랫폼 없이 경쟁력을 유지하기란 어려운가요.
“물론입니다. 플랫폼이 비어 있다보니 나머지 3개 계층도 각개 약진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말기 업체는 애플에 부품 납품하는 것에 만족할까 구글폰을 만들까 갈팡질팡하고, 통신사는 아이폰을 팔까 구글폰을 팔까 고민합니다. 각 계층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요.”
▼ 하지만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쓰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PC가 등장했을 때,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컴맹이 됐어요.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 휴대전화만 쓰다보면 ‘스마트폰맹’이 될 겁니다. 나아가 스마트폰은 앞으로 클라우딩 컴퓨팅(외부 서버에 데이터를 저장해놓고 사용하는 기술)을 통해 완전한 PC로도 발전합니다. 지금은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에 피로감을 느낄지 몰라도 대세는 이미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 사용자가 비사용자에 비해 정보 활용 면에서 대단한 우위에 설 거예요. 저는 2015년이 되면 전체 휴대전화 시장에서 스마트폰의 점유율이 60%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봅니다.”
IT코리아 , 시너지 발휘 못한다
▼ 한국은 하드웨어 강국이지, 소프트웨어 경쟁력이 없다는 건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은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된 이슈입니다. 하지만 하드웨어와 달리 눈에 보이지 않아 소홀히해왔던 게 사실입니다. 특히 소프트웨어에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에 아주 인색했기 때문에 소프트웨어 시장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아이폰이 국내 출시되면서 다들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잘된 일이라고요?
“직접 아이폰을 경험하면서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눈으로 보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요즘 국내 기업들이 굉장히 긴장하고 있습니다. 입안자들도 소프트웨어 경쟁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략회의를 열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위기를 기회로 삼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그렇다면 정부나 기업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주도권을 갖는 SW 플랫폼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TV, 자동차 시장의 우위를 고수할 수 있습니다. 플랫폼은 접착제입니다. 플랫폼으로 네트워크, 단말기, 콘텐츠 및 서비스 등 각 계층을 잘 엮어준다면 우리는 막강한 경쟁력을 갖추게 됩니다. 이를 아예 패키지로 만들어 선단식 수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SW 플랫폼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리모코리아’로 위기 타개
직원들과 대화하고 있는 김흥남 원장. 그는 매주 금요일 오전 9시, 도너츠를 들고 직원들을 찾아가 편안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지난해 11월 지식경제부 주관으로 SK텔레콤, KT, LG텔레콤, ETRI, 삼성전자, LG전자 등 6개 통신 관련 기업·기관이 ‘한국리모(LiMO)진흥협회’ 창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리모를 활용해 SW 플랫폼을 개발하자는 의지에서다. 리모란 2007년 창설된 모바일 제조 및 서비스사 컨소시엄으로 소스가 공개된 OS 리눅스를 모바일 단말에 맞게 최적화해 나가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SK텔레콤, 영국 보다폰, 일본 NTT도코모와 NEC, 미국 버라이존 등 전세계 수십 개 관련 기업이 참여해 리모 진영을 구성하고 있다.
▼ SW 플랫폼으로 리모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IT산업을 구성하는 4개 계층 중 경쟁력이 부족한 SW 플랫폼을 빠른 시일 내에 확보하기 위해서는 리모와 같은 소스가 공개된 개방형 SW 플랫폼을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리모 플랫폼을 우리가 개발해 세계에 포진한 리모 진영의 동참을 이끌어내자는 겁니다.”
▼ 리모 진영에선 한국의 이런 의지를 반가워하나요.
“리모 진영의 핵심은 처음 리모 컨소시엄이 구성될 때 참여한 이사회 멤버들입니다. 보다폰, NTT도코모, NEC, 삼성전자 등이 그들이에요. 이들이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이사회를 열었는데, 한국리모진흥협회 MOU 체결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이뤄졌어요. 리모 진영은 한국의 참여를 대단히 환영하고 있습니다. 안드로이드를 구글이 가져갔듯, 리모 진영에도 주도할 세력이 필요하거든요. 오픈 소스 플랫폼은 주인이 없으면 발전 속도가 느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모바일 인터넷 플랫폼에서 쓴잔을 마신 기억이 있다. 바로 일반 휴대전화에 쓰이는 한국형 무선인터넷 플랫폼 위피(WiFi)다. 2005년 4월부터 출시되는 신규 단말기엔 위피 탑재가 의무화됐고, 이는 외산 단말기의 국내 진입장벽으로 작용했다. 위피는 해외 진출을 꿈꿨지만 아무도 위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지난해 4월 위피 의무화가 해제됐다. 이 같은 ‘위피의 좌절’에는 위피를 적극 활용하는 주도세력이 없었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제조사가 위피 소스 공개를 원했지만 주도권이 제조사로 넘어갈 것을 우려한 통신사의 반대로 소스는 공개되지 않았다.
▼ ‘리모코리아’를 만든다고 하니, 위피가 생각납니다. 결국 위피는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어요. 리모도 결국 제2의 위피가 되는 건 아닐까요.
“국내에서 출발한 위피는 국내 무선인터넷 플랫폼을 표준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해외시장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리모는 해외에서 먼저 시작된 겁니다. 전세계적으로 수십 개 기업이 리모 진영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리모 플랫폼으로 성공모델을 만들면 세계 리모 회원들이 동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건은 우리가 리모 플랫폼을 선도적으로 잘 만드는 것이지요.”
▼ 안드로이드도 오픈형 소스입니다. 리모가 안드로이드와 차별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안드로이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완전한 개방 형태이고, 둘째는 구글과 계약을 맺어야 하는 제약적 개방 형태입니다. 검색엔진으로 구글만 쓸 수 있게 한 점 등 여러 제약이 뒤따르지요. 지금 널리 쓰이는 건 후자예요. 그러므로 비즈니스 전략을 고려할 때 안드로이드가 완전한 개방형인가,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리모는 완전한 개방입니다. 어떤 검색엔진이, 어떤 서비스가 올라가든 전혀 제약이 없습니다. 따라서 더 많은 환영을 받으리라 생각합니다.”
▼ 리모코리아 확산으로 우리가 얻는 이득은 뭘까요.
“지하철에서 아이폰으로 영화를 보다간 요금 폭탄을 맞기 쉽습니다. 이동 중엔 공짜 인터넷인 와이파이에 접속할 수 없고, 유료인 3G를 써야 하니까요. 와이브로에 접속할 수 있으면 간단한데, 아이폰으로는 와이브로에 접속할 수 없지요. 하지만 리모 플랫폼이 개발되면 이동 중에도 와이브로에 접속할 수 있게 됩니다. 즉, ‘리모폰’으로는 이동 중에도 무선인터넷을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거지요.
이처럼 리모 플랫폼만 있다면 와이브로의 가치가 껑충 뜁니다. 한국산 네트워크(와이브로), 단말기, 리모 플랫폼, 콘텐츠 및 서비스를 패키지로 수출하는 길이 열릴 겁니다. 러시아, 인도같이 전국에 유선 인터넷망을 깔기 힘든 개발도상국가들은 유선을 건너뛰고 무선인터넷을 도입하려고 합니다. 이미 러시아에 와이브로가 수출됐고요. 이런 국가들이 우리의 고객이 될 겁니다.”
▼ 리모코리아를 확산시키기 위해 정부, ETRI, 이통사, 제조업체가 각각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요.
“일단 정부는 대형 국책 과제와 공공부문 수요를 창출해줘야 합니다. 공무원, 우편집배원들의 업무용 스마트폰을 리모폰으로 공급하는 거죠. ETRI는 플랫폼 관련 기술 개발과 표준화를 맡아야 합니다. 제조사는 경쟁력 있는 리모 단말기를 공급하고, 통신사들은 리모폰을 적극 유통시켜야 하고요.”
▼ 국내 기업들의 ‘리모 동참’ 의지는 어떤 수준인가요.
“기업은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여러 전략을 동시에 구사해야 합니다. 리모는 여러 전략 중 하나이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서로 간의 알력 없이 협동하고 있습니다. 오픈형 소스의 철학은 ‘내 것’이 아닌 ‘우리의 것’ ‘세계의 것’입니다. 이런 초심을 잘 지켜나가면 더없이 좋은 플랫폼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거예요. 이달 말 한국리모진흥협회의 창립총회를 여는 것을 목표로 각 기업이 준비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3 스크린 서비스’ 시대 선점해야
김 원장은 “리모를 성공시키면 모바일 플랫폼에서는 뒤졌지만, 3 스크린 서비스에서는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3 스크린이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화면, 즉 휴대전화와 PC, 그리고 TV를 가리킨다. 구글과 애플에 앞서 3 스크린 서비스를 실현시키는 플랫폼 등 IT 환경을 만들자는 주장이다.
▼ 3 스크린 서비스란 용어가 낯선데요.
“최근에 나온 용어입니다. 이제 IT 콘텐츠와 서비스를 휴대전화, PC, TV 등 단말기 종류에 구애 없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거죠. 그러려면 여러 기술이 필요한데 그중 하나가 콘텐츠 사이즈를 단말기에 맞게 지원해주는 겁니다. 지금은 3.5인치의 아이폰 화면에 맞게 개발된 콘텐츠를 50인치 TV에 띄우면 선명도가 떨어져 불편합니다. 이를 해결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거죠. 이런 기술은 애플이나 구글이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하지만 우린 강력한 TV 경쟁력을 갖고 있어요. 이를 소프트웨어 경쟁력과 접목한다면 3 스크린 서비스에서 승산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ETRI는 CDMA, 지상파 DMB, 와이브로 등 선진적인 IT기술을 개발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별다른 성과를 내놓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데요.
“이는 정부의 연구개발(R·D) 전략과도 관계가 있는 부분입니다. 그동안은 몇 백 억원이 투입되는 대형 국책과제 중심으로 IT기술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ETRI가 계속해서 새로운 메가 아이디어를 기획해 정부를 상대로 대형 프로젝트 마케팅을 했어야 하는데, 눈앞에 보이는 작은 과제들에 안주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원장 취임 이후 ‘창의연구본부’를 신설했습니다. 여기서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미래의 IT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정부를 설득해 대형과제로 만들자는 각오입니다.”
▼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아이디어가 있다면요.
“그 한 가지가 미래 인터넷입니다. 앞으로 유무선으로 삼차원(3D) 정보를 주고받는 시대가 될 겁니다. 그러려면 현재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전송해야 해요. 이런 미래 인터넷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미래 인터넷에서 데이터 송수신의 지연시간을 50밀리세컨드(0.05초)로 목표하고 있습니다. 이를 달성하면 공간을 초월한 멀티 퍼포먼스가 가능해져요. 베를린필하모니는 독일 베를린에서, 정경화는 서울에서 각각 동시에 연주하고, 세계인들은 각자의 집에서 이 아름다운 협연을 감상하는 거지요.”
▼ 애써 리모코리아를 개발한다 해도 애플이나 구글을 뛰어넘지 못하는 하위 플랫폼에 머물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익스플로러는 내비게이터의, 윈도즈 미디어 플레이어는 리얼 플레이어의, MS Word는 각종 워드 프로그램의 후발주자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MS의 프로그램이 모두 승리했어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MS가 플랫폼을 장악했기 때문이에요. 자기 플랫폼 위에 올라갈 프로그램은 본인이 제일 잘 만들기 마련이죠. 우리에게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플랫폼이 없다면 플랫폼을 가진 쪽에 아이디어를 다 알려줘야 해요. 그러니까 플랫폼 없이는 절대 우위에 설 수 없습니다. 무협지를 읽다보면 ‘중원을 장악하라’라는 대목이 자주 나옵니다. IT산업에선 플랫폼이 중원입니다. 중원을 놓치면 변방만 남습니다.”
▼ 애플, 구글의 현재 위상은 막강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들을 이길 수 있을까요.
“한국은 조선강국입니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배 한 척 못 만들던 나라가 지금은 세계 조선업계에서 1~5위를 다 차지하고 있어요. 한때 세계 최고 조선업체였던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은 지금 5위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지금 밀렸다고 미래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적자생존’과 ‘빨리빨리’
김흥남 원장은 2007~08년 조선-IT 융복합기술개발 과제를 맡으면서 울산에 여러 번 다녀왔다. 어느 날 그는 조선업에 평생 종사한 이에게 “한국이 어떻게 조선강국이 됐느냐”고 물었다. 그는 ‘적자생존’이라고 답했다. ‘적는 자만 살아남는다’는 뜻에서다. 철저하게 선진 프로세스를 따라가기 위해 배를 만드는 전 과정을 꼼꼼하게 연구하고 체크하며 기록을 남겼고, 그렇게 오랜 세월 기술이 축적돼 세계 1등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적자생존’을 크게 써 벽에 붙여뒀다고 했다.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돌고 있습니다. 한국은 버전 1.0을 세계에서 가장 잘 만들지만 2.0은 절대 못 만드는 나라라고요. 1.0을 잘 살펴보고, 그를 바탕으로 2.0, 3.0으로 발전해나가야 하는데, 이게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창의성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은 잘 기록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을 축적해야 합니다. 거기에다 우리 특유의 ‘빨리빨리’ 근성으로 적극 대응해나간다면, 충분히 지금의 1등을 앞지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TRI도 여기에 희망을 갖고 열심히 임할 각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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