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호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

일구이무(一球二無) 정신으로 평생을 야구에 바친 ‘야구의 신’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2-01-19 14: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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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났다. 일본에서는 ‘조센징’으로, 한국에서는 ‘반(半)쪽발이’로 무시당했다.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 야구인이 믿을 건 오직 실력뿐이었다. 실력을 갖추려면 이를 악물고 남보다 더 노력해야 했고, 야구에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만 했다. 덕분에 한국시리즈에서 세 번 우승하고 두 번 준우승했지만 '한 발만 물러나면 절벽으로 추락한다'는 그의 비장함과 절박감은 언제나 다른 이들과의 불화를 낳았다. 그래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뒀음에도 열두 차례나 해고를 당했다. 하지만 일흔 살의 노(老)감독은 아직도 현역 야구인으로 활동하며 새로운 변화를 꿈꾸고 있다. 바로 ‘야신(野神·야구의 신)’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이다.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
    “한번 던진 공은 다시 불러들일 수 없다. 타자가 치는 공 하나에도, 수비수가 잡는 공 하나에도 ‘다시’란 없다.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작은 세상’ 하나가 창조되기 때문이다.”

    직경 7㎝가량에 불과한 조그마한 야구공을 두고 이렇게 비장하고 엄숙한 말을 내뱉는 사람이 있다. 칠십 평생을 ‘야구가 곧 내 인생이자 삶 그 자체’라는 태도로 살아온 김성근(70) 고양 원더스 감독이다.

    SK 와이번스에서만 한국시리즈 3회 우승, 1회 준우승을 일궈내 SK 와이번스를 2000년대 후반 한국 야구 최강팀으로 만든 김 감독이지만 그는 언제나 격렬한 찬반논란을 몰고 다니는 논쟁적인 지도자다. 20대까지 일본에서 나고 자란 김 감독은 1960년대 초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 야구 발전에 투신했다. 한화와 롯데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구단과 인연을 맺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며 ‘빈약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하지만 언제나 야구만을 생각하고 타협을 모르는 그의 강인한 성격은 많은 불협화음도 냈다. 2007년 SK 와이번스에서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기 전까지 그는 한국 야구계에서 철저히 비주류였다.

    그럼에도 김 감독의 지지자들은 그를 ‘인천 예수’라 부른다. SK 와이번스와 인천 야구의 구세주라는 극존칭 표현이다. 감독으로서의 능력, 야구에 대한 깊이와 철학에 관해서도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야구계의 중론이다. 실제로 그는 프로야구 통산 1234승 57무 1036패의 성적을 기록해 김응룡 전 삼성 라이온스 감독의 1436승 65무 1125패에 이어 역대 전적 2위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비판론자들은 그가 승리만을 목표로 삼고, ‘감독의, 감독에 의한, 감독을 위한 야구’를 시행해 야구의 재미를 반감시켰다고 주장한다. 직설적인 화법으로도 유명한 김 감독이 입을 한 번 열 때마다 야구계가 들썩이고 일부 야구팬은 얼굴을 찡그린다. 이처럼 그의 야구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고 찬반론자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관점과 선입관에 따라 편의적으로 그를 해석한다. 2011년 한국 프로야구계의 최대 사건은 김 감독이 2011년 8월 SK 와이번스 감독직을 전격적으로 사퇴한 일이었다. 1984년 OB(현 두산) 감독을 시작으로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 SK의 감독을 거친 그는 프로시장에서만 6번째 해고를 당했다. 아마추어 감독직까지 합하면 무려 12번째다. 하지만 그는 불과 석 달을 쉰 후 같은 해 12월 한국 최초의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의 감독으로 변신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고양 원더스는 한국 프로야구 신인 지명(드래프트)에서 선택받지 못한 무명 선수들이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있도록 재도전의 기회를 부여하는 구단이다. 1942년생인 김 감독은 올해 우리 나이로 71세다. 80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망팔(望八)’의 나이가 됐음에도 은퇴 의사가 전혀 없다. 프로 감독으로서 온갖 영욕을 누린 그가 독립 구단을 택해 아직도 현역 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늙은 감독을 한국 야구의 최고 지도자로 만든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이를 탐구해보자.

    경남 진양이 본관인 김 감독은 1942년 일본 교토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일본 이름은 가네바야시 세이콘(金林星根)이다. 김 감독의 부친은 그가 어릴 때 사망했고 집안 형편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가족 전부가 일을 했고 그 역시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고등학교를 다녔다. 교토 가쓰라고등학교에서 투수로 야구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1960년 야구를 하려고 혼자 한국으로 건너와 동아대 선수가 됐다. 고교 졸업반 때 일본 프로야구팀으로부터 지명을 받지 못해 ‘일본 제일의 투수가 되겠다’는 꿈을 접어야 했기 때문이다.



    김성근은 누구인가

    한국의 불안한 정국과 빈곤한 생활을 염려한 어머니와 큰형의 반대는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한국에 온 후 일본 영주권마저 포기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이 정식으로 수교하지 않은 때라 한국에서 일하는 재일동포들은 1년에 40일가량은 일본으로 돌아가 체류해야만 일본 영주권이 유지됐다. 하지만 한국에서 야구에만 전념하고 싶었던 청년 김성근은 이를 성가시다고 여겼고 결국 일본 영주권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완강히 반대한 어머니를 뒤로하고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탄 그는 대한해협을 건너며 펑펑 울었다. 혼자 남았다는 짙은 외로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은 채 혼자 야구를 하고, 언제나 낭떠러지에 한 발 끝을 걸친 채로 인생을 살아가는 그의 자세가 어디에서 왔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 감독은 뛰어난 왼손 투수였지만 어깨 부상이 찾아온 탓에 1969년 중소기업은행 선수를 끝으로 현역 선수 생활을 접었다. 당시 실업야구 선수가 은퇴하면 대부분 은행원이 됐다. 하지만 그는 한국말이 어눌해 은행 창구에 앉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지도자로 야구 인생의 승부를 새롭게 걸기로 마음먹었다. 1969년 마산상고 감독을 시작으로 기업은행 감독, 국가대표 코치, 충암고 및 신일고 감독을 지낸 그는 1982년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코치로 프로야구와 인연을 맺는다. 1984년 OB 베어스의 감독이 된 그는 이후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스,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등 총 6개 프로 구단에서 감독을 맡았다. 태평양 돌핀스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는 열악한 구단 재정, 다른 구단보다 훨씬 처지는 선수 구성에도 우수한 성적을 내 ‘꼴찌 구단을 4강 구단으로 변모시키는 조련사’의 이미지를 굳혔다. 2002년 LG트윈스 감독을 맡았을 때는 압도적인 전력 열세에도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호화 멤버를 앞세운 삼성 라이온스와 6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여 야구팬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김 감독에게 오늘날의 ‘야신’ 이미지를 만들어준 곳은 LG 트윈스다. 2001년 5월 당시 이광은 LG 트윈스 감독이 전격 경질됐다. 시즌 개막 후 9승1무25패의 최악의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이광은 감독 대신 감독대행을 맡은 사람이 바로 당시 LG 트윈스 2군 감독이던 김 감독이다.

    어수선한 한 해를 보낸 김 감독은 2002년 정식 감독으로 승격됐다. 2002년 초 일본 오키나와에서 전지훈련을 마친 그는 LG 트윈스가 올해 반드시 4강에 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시즌 개막 후 6월 초까지 두 달 넘게 LG 트윈스는 8개 구단 중 7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다. 에이스 이상훈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이승호, 만자니오, 안병원, 신윤호 등 투수진도 잇따라 무너졌다.

    하지만 이상훈이 복귀해 에이스 몫을 해주자 사정이 달라졌다. 이승호 최향남, 이동현 최원호 등이 마운드에서, 부상에서 돌아온 유지현과 김재현 등이 타석에서 투혼을 발휘하면서 LG 트윈스의 성적은 서서히 상승했다. 8월 들어 4위를 굳혔고 무난히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LG 트윈스의 상승세는 가을야구에서도 계속됐다. 전문가들은 4강에 오른 팀 중 LG 트윈스의 전력이 가장 처진다며 준플레이오프 탈락을 점쳤지만 김성근 감독은 이를 비웃듯 승승장구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는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현대 유니콘스를 2연승으로 가볍게 눌렀고, 플레이오프에서도 KIA 타이거즈에 이겼다.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
    상위팀은 푹 쉬면서 컨디션 조절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LG 트윈스의 돌풍은 한국시리즈에서도 이어졌다. LG는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삼성 라이온스에 1승3패로 몰렸지만 5차전에서 8대 7로 아슬아슬하게 이겨 다음을 기약했다. 6차전에서는 8회까지 9대 6으로 앞서 최종 7차전을 눈앞에 두는 듯했다. 하지만 이승엽, 마해영, 양준혁 등 거포 군단을 둔 덕에 LG 트윈스에 비해 월등한 화력을 보유한 삼성 라이온스는 9회말 1사 후 대반격에 나섰다. 이승엽이 에이스 이상훈을 상대로 동점 스리런 홈런을 날렸고, 바로 뒤 마해영이 구원투수 최원호로부터 끝내기 솔로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이를 통해 삼성은 창단 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이란 축포를 터뜨렸지만 패자 LG 트윈스에도 기적 같은 드라마를 연출했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LG 트윈스의 선전이 워낙 대단했기에 우승자인 김응룡 당시 삼성 라이온스 감독이 김 감독의 허를 찌르는 작전능력과 용병술에 감탄해 “마치 야구의 신과 싸우는 것 같았다”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야신’이라는 그의 닉네임도 이때부터 생겼다. 그럼에도 당시 LG 트윈스 구단은 한국시리즈 후 김 감독을 전격 경질했다. “LG 트윈스가 지향하는 신바람 야구와 김 감독의 스타일이 맞지 않는다”는 다소 어이없는 이유였다. 빈약한 자원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감독에게 상을 줘도 모자랄 일이었기에 야구계 전체가 깜짝 놀랐다. 이는 김 감독에게도 아픔이었지만 역설적으로는 지도자로서 그의 명성이 더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LG 트윈스가 이후 9년 동안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LG 트윈스는 한국 프로야구 30년 역사상 최장 기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구단이란 불명예를 안고 있다. 야구팬들은 LG가 이유 없이 명장을 내친 것 때문에 생긴 결과라며 이를 ‘김성근의 저주’라는 징크스로 부른다.

    LG 트윈스에서 물러난 김 감독은 일본으로 갔다. 이후 2006년까지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코치로 활동하며 당시 일본으로 막 건너온 이승엽을 지도했다. 2005년 이승엽이 일본 프로야구에 데뷔한 후 첫 30홈런을 터뜨린 데는 김 감독의 공도 적지 않다. 이승엽 역시 이에 관해 여러 차례 김 감독의 공이 컸다고 고마움을 표한 바 있다.

    SK 와이번스 ‘왕조’를 이룩하다

    2006년 SK 와이번스의 러브콜을 받고 국내 무대로 복귀한 김 감독은 2006년 10월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공식 취임했다. 2000년 3월 창단된 SK 와이번스는 김 감독이 취임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우승을 해보지 못한 약체 팀이었다. 신생 구단이라 변변한 스타 선수 하나 제대로 없었고 선수들도 풀이 죽어 있었다. 2006년 성적 역시 6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이런 팀을 맡아 첫해인 2007년 곧바로 팀을 우승시켰다. 특히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에 내리 2패를 한 후 4연승하며 우승해 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 야구 역사상 한국시리즈에서 2연패 후 우승한 팀이 없었기 때문이다. 2008년에도 SK는 최강의 팀으로 군림했다. 83승43패로 페넌트레이스 1위에 올랐다.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두산 베어스를 맞아 역시 1패 뒤 4연승하며 2연패에 성공했다.

    2009년 SK는 정규시즌에서 불과 1경기 차이로 KIA 타이거즈에 1위 자리를 내줬다. 그러나 부상 선수들이 줄줄이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시즌 막판 19연승을 내달리며 KIA 타이거즈를 위협하는 저력을 선보였다. 한국시리즈에서는 KIA와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펼친 끝에 아쉽게 고개를 숙였다. 특히 7차전에서는 초반 5대 1로 이기다가 투수진의 부족으로 연장전까지 몰렸고 결국 접전 끝에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에 무너졌다. 당시 SK 와이번스에도 ‘화려한 조연’‘승자 못지않은 패자’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2010년 SK 와이번스는 한 해 전의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84승 47패 2무를 기록하며 가볍게 정규시즌 정상을 탈환했다. 삼성 라이온스와 맞붙은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SK는 단 한 번도 지지 않고 4연승을 내달려 3번째 패권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에서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한 삼성 라이온스는 한국시리즈 직후 계약 기간이 4년이나 남은 선동열 당시 삼성 라이온스 감독을 경질했다. 그만큼 패배의 충격이 컸다는 뜻이다.

    김 감독은 확고한 ‘일구이무(一球二無)’의 철학을 가지고 약팀 SK 와이번스를 2000년대 후반 한국 프로야구 최강팀으로 변모시켰다. 일구이무는 일시이무(一矢二無)란 고사성어를 변형시킨 것이다. 중국 한나라 때 한 장군이 해 질 무렵 호랑이를 발견했다. 그는 목숨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활시위를 당겨 호랑이를 명중시켰다. 그런데 살펴보니 화살이 꿰뚫은 것은 호랑이가 아닌 바위였다. 정신을 집중하면 화살로 호랑이는 물론 바위까지 뚫을 수 있다는 교훈이 담긴 말이다. 김 감독은 일본에서 현역 선수로 뛰던 20대 시절 이 고사성어에서 ‘화살 시(矢)’ 자를 야구공을 의미하는 ‘공 구(球)’ 자로 바꿔 ‘일구이무(一球二無)’라는 좌우명을 직접 만들었다. 공 하나에 온 정신을 다 쏟아 바위를 뚫고야 말겠다는, 야구에 대한 그의 집념을 엿볼 수 있는 좌우명이다.

    SK 와이번스가 최강 팀이 되기까지 김 전 감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김 감독은 혹독한 훈련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키워나갔다. 그가 오기 전 김광현, 정근우, 최정, 박정권, 박재상, 조동화 등 현재 SK 와이번스의 핵심 선수들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무명 선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지도해 이들을 SK 와이번스를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야구선수로 만들었다.

    신장암 수술을 받은 노령 감독인데다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허리디스크를 앓고, 어깨 인대를 다치는 상황이 생겨도 그는 언제나 마운드에서 선수들과 함께했다. 타자들에게 직접 야구공을 던져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투수들의 투구 자세를 봐줬다. 끊임없는 특강 및 정신 교육을 통해 선수들의 안일한 마음가짐과 태도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갔다.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

    2010프로야구 SK와 넥센히어로즈의 경기에서 4회초 1사 1루 때 SK 선발 투수 김광현이 흔들리자 김성근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 진정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SK 와이번스는 스타 선수가 없어도 누구나 스타 몫을 하는 야구, 끈끈한 조직력으로 선수단 중 누구 하나가 빠져도 절대 티가 나지 않는 야구를 하는 팀으로 거듭났다. SK 와이번스 팬들이 ‘SK 구단 전력의 반은 김 감독’이라고 칭송하며 ‘인천 예수’라는 별명을 붙여준 이유다.

    일흔 살 감독, 독립구단에서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다

    김 감독은 SK 와이번스에서 지도자 인생 최초로 영광의 나날을 보냈고, 한국 야구계의 완연한 주류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2011년 8월18일 SK 와이번스 구단은 김 감독을 퇴진시키고 이만수 2군 감독을 감독대행으로 선임했다. 김 감독이 “올해 시즌이 끝나고 SK 와이번스를 떠나겠다. 재계약은 하지 않겠다”고 말한 지 하루 만이었다.

    양측이 가장 크게 대립한 부분은 이만수 2군 감독 대행의 거취였다. 우수한 성적을 거뒀음에도 재계약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SK 구단에 김 감독이 섭섭함을 표시하자 “재계약을 하려면 이만수 2군 감독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뜻을 비친 것. 이는 자존심 강한 김 감독에게 큰 충격을 줬고 결국 그는 스스로 옷을 벗겠다고 선언했다.

    실제 2006년 말 SK가 김 감독과 이만수 현 SK 와이번스 감독을 같은 팀에 영입했을 때 많은 야구인은 두 사람이 한 팀에서 뛴다는 사실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두 사람의 인생 역정과 야구관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말한 대로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김 감독은 ‘프로는 승리로 증명한다’는 야구관을 절감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였던 이만수 감독은 달랐다. 늘 국가대표로 뽑혔고 올스타 투표 때마다 최다 득표를 기록한 그는 “팬이 즐거워하는 야구를 하겠다”라고 공언해왔다. 승리를 삶의 존재 이유로 삼는 감독과 성적만큼 흥행과 쇼맨십을 중시하는 코치의 동거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만수 감독의 거취 문제 외에도 선수단 훈련 문제 등으로 종종 구단과 갈등을 빚어온 김 감독이 시즌 도중 옷을 벗는 사태가 벌어지자 인천 팬들은 분노했다. 이들은 문학구장에다 ‘김성근 감독님 사랑합니다’‘김 감독님 폄하한 구단 관계자 사퇴하라’‘감독님을 내몰아? 우린 프런트를 자른다’‘프런트! 퇴진!’ 등의 현수막을 곳곳에 걸고 김성근을 연호했다. 일부 관중은 SK 와이번스 깃발을 불태우고 오물까지 투척하며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많은 사람이 SK 와이번스에서 물러난 김 감독이 당분간 쉴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야구장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갑갑한 감독직을 떨쳐버리니 더 쉴 틈이 없다”며 의욕을 불살랐다. 자신이 가르친 후배와 제자들이 지도자로 있는 아마추어 팀 선수들을 가르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의 그라운드 밖 인생 역시 야구뿐이었다. 최근까지 일본 진출을 타진했던 그는 장고(長考) 끝에 2011년 말 한국 야구 최초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의 초대 감독을 맡아 야구계에 복귀했다.

    고양 원더스는 모기업의 지원을 받는 대기업 산하 계열사라는 기존 프로 구단의 운영 형태를 완전히 벗어난 팀이다. 구단주인 허민 나무인터넷 위메이크프라이스 이사회 의장이 출연한 사재(私財)로만 운영되기에 재정도 빈약하고 성공 여부도 불투명하다. 하지만 김 감독은 거기서 가능성을 읽었다고 주장한다. 기존 구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고양 원더스는 현재 40여 명의 선수를 선발했고 올해 프로야구 2군팀과 약 40경기를 치러 이 중 유망주들을 프로야구 1군 선수로 성장시킬 계획이다.

    그만큼 프로야구 1군 무대의 문호가 좁다. 2011시즌에 프로야구단 신인지명에 도전한 고교 야구 선수는 708명이다. 이 중 10%인 78명이 지명됐지만 첫해 1군에서 주전이 된 선수는 LG 트윈스의 임찬규 1명뿐이다. 즉 고교 선수가 프로야구 1군 선수로 살아남는 확률이 1%도 안 된다는 뜻이다. 이를 감안하면 프로구단의 지명도 받지 못한, 즉 78명에도 들지 못한 선수들로 꾸려진 고양 원더스가 언제까지 존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김 감독은 왜 이런 어려운 실험을 자청했을까. 그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도 과연 이 땅에 프로야구가 생존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30년간 성공적으로 뿌리내렸다. 이제 한국 야구의 발전을 생각할 두 번째 시기가 왔다. 독립야구단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한 명의 선수라도 1군 무대에 올려야 또 다른 독립야구단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독립야구단이 한 팀이라도 더 생겨야 많은 선수가 야구를 하며 잊었던 자신들 꿈과 희망을 찾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간 맡았던 프로구단들과 성격 자체가 판이하니 그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김 감독은 취임사에서 “다시 유니폼을 입게 돼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현장을 떠날 시기가 왔다고 여겼는데 다시 이런 기회가 오니 마지막 행운이다.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어떻게 팀을 만들어나갈지 깊게 생각해보겠다”고 밝혔다. 일구이무의 신념처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야신의 새로운 도전은 이미 시작됐다.

    김성근 감독이 다른 조직의 리더들에게 주는 교훈

    1)리더는 아버지다

    김 감독은 평소 선수들을 ‘우리 아이들’이라고 칭한다. 마흔이 넘은 선수도 그에게는 예외 없이 ‘아이들’이다. 그는 항상 선수들의 아버지 노릇을 자청한다. 승리를 했건 패배를 했건 절대 선수 탓을 하지 않는다. 결국 선수를 기용하는 것도, 빼는 것도 감독이라는 이유에서다.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는 ‘지도자는 아버지’라는 지론을 강조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한 김 감독은 늘 “우리 아이들이 잘살게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이 약속을 지킨 덕에 SK 와이번스에서 최저 연봉 2000만 원을 받던 수많은 선수가 억대 연봉자로 발돋움했다.

    지도자는 곧 아버지라는 그의 신념은 윤길현 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2008년 6월 19일은 김성근 감독의 야구인생 중 가장 아픈 날로 기억된다. 이날 SK 와이번스의 홈구장인 문학에서 벌어진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투수 윤길현이 욕설 파문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의 젊은 투수 윤길현은 10대 1로 크게 앞선 8회 초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30대 중반의 최경환에게 머리로 날아가는 빈 볼(Bean Ball)성 공을 던졌다. 불쾌해하는 최경환에게 침을 뱉는 등 불량한 태도를 보인 윤길현은 최경환을 삼진으로 잡아낸 후에도 상스러운욕설을 내뱉으며 마운드를 내려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TV 중계에 고스란히 잡히면서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한국 야구계가 발칵 뒤집혔다.

    김 감독은 파문이 확산되자 윤길현을 2군으로 내려보냈다. 신영철 SK 와이번스 사장과 같이 공개 사과도 했다. 특히 자신이 사태를 책임지겠다며 며칠 후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는 스스로 결장했다. 한평생 야구밖에 모르던 현장 책임자가 스스로 ‘그라운드 출입금지’라는 중징계를 내렸으니 그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김 감독은 당시 “선수의 잘못은 내 잘못이다. 논란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 싫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픈 징계로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실제로 출장정지는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이 출장하지 않은 경기에서 SK 와이번스는 두산 베어스에 대패했다.

    당시 김 감독의 결장을 두고 야구계에서는 김 감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SK 와이번스 감독이었다면 감독 결장 사태까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윤길현의 욕설에 KIA가 아니라 나머지 구단 팬들도 분노한 것은 윤길현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김성근 야구에 대한 반감이었다는 분석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지도자는 아버지이며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그의 아버지론(論)을 다시 한 번 부각하는 계기가 됐다.

    2)조직원의 마음부터 얻어라

    김 감독은 지독한 훈련광이다. 해 뜨기 무섭게 훈련을 시작해 선수들이 스스로 눈치껏 챙겨 먹지 않으면 식사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선수들을 몰아세운다. 재미있는 점은 그를 거쳐 간 수많은 제자 중 그 누구도 그 혹독한 훈련을 소화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김 감독을 처음 만났을 때는 “어떻게 이 정도로 훈련을 혹독하게 시키느냐”며 불만을 늘어놓던 선수들이 어느 순간부터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김 감독은 “선수들이 처음에는 왜 훈련을 해야 하는지 모르다가 이를 깨닫기 시작하면 스스로 움직인다. 그때부터 발전하는 모습이 확연히 눈에 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자신의 기량이 발전하는 것을 느끼면서 시키지 않아도 더 열심히 훈련에 매진하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된다는 의미다.

    이미 머리가 굵을 대로 굵은 프로야구 선수들을 움직이려면 단순히 “훈련을 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라는 식으로 종용해선 안 된다. 진심으로 선수들에게 다가가고, 이를 통해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 후 조직원에게 분명한 목적의식과 목표를 심어줘야 성과 창출이 가능하다. 김광현과 함께 SK 와이번스의 간판 투수인 송은범은 프로 초기 끼가 많고 노는 걸 좋아한다는 이유로 ‘풍류은범’이라는 별명이 붙은 선수였다. 고된 훈련을 지겨워했던 그는 김성근 감독 앞에서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선수 인생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김 감독이 갓 부임했던 2006년 말 제주에서 열린 마무리 훈련 때 그는 김 감독의 강의에 너무 놀랐다. 야구 기술 등을 언급할 줄 알았던 김 감독이 일본과 한국 정착 초기에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을 들려주며 야구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가짐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때 김 감독은 그 유명한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생각이 바뀐다”는 말을 거듭 했다. 이날의 교훈은 놀기 좋아하던 ‘풍류은범’의 마음을 꽁꽁 붙들어 SK 최고 선발에 마무리까지 소화하는 명투수 송은범을 만들었다.

    이처럼 김 감독은 종종 ‘정신교육’을 통해 선수들에게 야구가 아닌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많은 선수가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한 김 감독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시간이 참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어 시간이 금방 간다”고 얘기한다. 야구를 포기하려다 그 시간을 통해 마음을 다잡고 돌아온 선수도 있을 정도다.

    한번은 고된 마무리훈련으로 힘들어하는 선수들에게 김 감독이 1000층쯤 되는 계단을 오르라고 지시했다. 훈련으로 녹초가 된 선수들은 억지로 계단을 올랐다가 깜짝 놀랐다. 김 감독이 미리 그곳에 올라와서 선수들에게 ‘지치고 힘들지만 견디고 노력하면 이렇게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 더 열심히 하자’는 편지를 써놓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 감독은 강 훈련 이전에 먼저 선수들의 마음을 붙잡는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저렇게 운동만 시키는데 어떻게 감독에 대한 불만이 없을까” 싶지만 그를 거친 선수들이 입을 모아 그를 최고의 지도자로 칭송하는 이유다.

    2011년을 끝으로 프리에이전트(FA)자격을 얻어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하다 롯데에 둥지를 튼 투수 정대현은 김 감독의 자상한 면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지난해 한 경기에서 그는 “오늘 등판하지 않아도 되니 쉬어라”는 코칭스태프의 얘기를 듣고 아무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기가 박빙으로 진행되자 출격 명령이 떨어졌고 부랴부랴 등판한 그는 결승타를 맞고 패전투수가 됐다. 억울한 마음에 숙소에 돌아와 화를 삭이고 있는데 문자 메시지 한 통이 날아왔다. “대현아. 미안하다”는 김 감독의 메시지였다. 정대현은 “뭉클했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진심을 담아 전하는 감독님의 말 한 마디에 선수들의 없던 의욕도 살아난다”고 말했다.

    3)리더는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김 감독의 밑에서 야구를 한 코치나 선수들이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 있다. 바로 김 감독이 다른 사람과 같이 식사하는 장면이다. 한 코치가 “감독님께서 워낙 혼자 식사하시는 통에 무슨 음식을 드시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의 자서전 ‘꼴찌에서 일등으로’를 보면 그 이유가 자세히 나와 있다. ‘감독이 특정 선수나 코치와 밥을 먹기 시작하면 선수단 내 파벌이 생긴다’는 이유에서다. 밥 한 끼 같이 먹는 일이 뭐 대수라고 그렇게까지 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김 감독은 단호하다. 식사뿐 아니라 이동할 때도 김 감독은 철저하게 혼자 움직인다. 구단 프런트는 물론 코칭스태프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태가 생기기도 한다.

    그는 특히 원정경기 때 혼자 식사하는 일을 즐긴다. 이는 일종의 경기 준비 과정이다. 시간이 절약되고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 아니다. 생각이 산만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면 떠오르는 생각을 까먹을 때가 많다. 혼자 고민하다보면 떠오르는 생각이 많다. 그래서 나는 혼자 다니는 걸 즐긴다”고 말한 바 있다. 혼자는 외롭지만,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는 과정이므로 일부러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 자신을 극한 상황에 몰아넣고 이를 극복하려 할 때만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는 그다운 논리다.

    당연히 그에게는 친구도 별로 없고 친구가 필요하지도 않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멘토조차 야구라고 발언한 바 있다. “나를 이끌어준 것은 야구 아닌가. 인생 상담이라는 거 해본 적 없다. 전부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해결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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