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말 미국 메이저리그의 명문구단 보스턴 레드삭스에 28세의 풋내기 단장이 부임했다. 야구에 관한 경력이 거의 없는데다 어지간한 주전 선수보다 나이가 어린 엡스타인을 단장으로 뽑자 미국 야구계가 발칵 뒤집혔다. 여론의 우려와 팬들의 반대가 들끓었지만 이 초짜 단장은 부임 2년 만에 86년간 이어져오던 밤비노의 저주를 깼다. 불과 3년 후에 두 번째 우승컵을 안기며 보스턴 레드삭스를 2000년대 메이저리그 최고 구단으로 만들었다. 엡스타인은 이제 새로운 저주를 풀기 위해 자신의 무대를 시카고로 옮겼다. 그는 2011년 말 1908년 이후 100년 넘게 월드시리즈 정상을 밟지 못해 ‘염소의 저주’에 시달리고 있는 시카고 컵스의 사장으로 부임했다. 밤비노의 저주를 깬 그가 염소의 저주까지 깨 메이저리그 역사를 새로 쓸지 주목된다.
‘밤비노의 저주’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이자 밤비노라는 애칭을 갖고 있던 베이브 루스를 1920년 헐값에 라이벌 구단 뉴욕 양키스에 팔아넘긴 보스턴이 이후 86년간 월드시리즈를 제패하지 못한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의 롯데 자이언츠 못지않게 열광적이고 때로는 극성맞기까지 한 팬을 보유하고 있는 레드삭스 구단은 이 저주를 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저주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급기야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 존 헨리는 2011년 8월호 ‘Leadership in Sports ④’에서 소개한 빌리 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을 레드삭스의 새 단장으로 영입하려 했다. 하지만 빈은 10년간 1250만 달러(약 140억 원)라는, 당시로서는 메이저리그 단장 중 최고 연봉을 거절하고 오클랜드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헨리 구단주가 선택한 인물이 바로 젊은 단장 테오 엡스타인이다.
애송이 단장의 행보는 좀처럼 주변의 신뢰를 얻기 어려웠다. 엡스타인은 세이버 메트릭스(saber metrix)란 희한한 통계를 동원해 보스턴 팬들로선 이해가 안 되는 트레이드를 해댔다. 특히 보스턴 레드삭스 최고의 스타인 유격수 노마 가르시아파라까지 트레이드시켰을 때 비난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그는 부임 첫해 레드삭스를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고 다음해에는 86년간 보스턴의 발목을 잡았던 ‘밤비노의 저주’를 풀었다. 과감한 트레이드와 유망주 육성으로 그가 3년 후 또 우승에 성공하자 풋내기 단장에 대한 의혹의 눈초리는 아이비리그 출신의 천재 단장 혹은 우승 청부사라는 칭송으로 바뀌었다.
메이저리그에서 단장(General Manager)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단장이 선수단 구성과 팀 운영에 대한 전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신인 선발부터 트레이드, FA(자유계약선수) 영입에 있어 감독이 아니라 단장이 전면에 나서 모든 일을 주도한다. 이 때문에 각 구단은 능력 있는 단장을 영입하기 위해 선수 스카우트 못지않게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을 벌인다. 유능한 경영자가 때론 야구단의 핵심 자산인 선수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은 2011년 10월 임기를 1년 남겨둔 엡스타인이 시카고 컵스로 이동하면서 입증됐다.
시카고 컵스가 엡스타인 단장을 새 사장으로 전격 스카우트하자 능력 있는 젊은 경영자를 빼앗긴 보스턴 레드삭스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보스턴은 엡스타인을 내주는 대신 컵스의 에이스 맷 가자, 올스타에 뽑힌 명유격수 스탈린 카스트로를 달라는 실현 불가능한 요구를 할 정도로 큰 상실감에 빠졌다.
4개월간이나 답보 상태에 빠졌던 양측의 분쟁은 결국 2012년 초 컵스가 마이너리거 2명을 내주는 조건으로 마무리됐다. 이로써 시카고 컵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는 구단 프런트와 선수 간 트레이드라는 희귀한 사례를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겼다. 게다가 컵스는 엡스타인에게 5년간 1850만 달러(약 200억 원)라는 엄청난 연봉까지 지급하기로 했다.
시카고 컵스가 이렇게 큰 출혈을 감수하고도 엡스타인을 데려온 이유는 컵스 역시 ‘염소의 저주’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컵스는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던 1945년, 홈구장인 리글리필드에 염소를 데리고 나타난 팬의 입장을 거부했다. 당시 해당 팬은 “앞으로 이 구장에서 다시는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결국 시카고 컵스는 이해 월드시리즈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고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던 1908년 이후 104년 동안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컵스는 메이저리그 내 30개 야구단 중 가장 오랜 시간 우승을 하지 못한 팀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이에 지난 9년간 팀을 이끌었던 짐 헨드리 단장을 해임하고 엡스타인에게 미래를 맡겼다. ‘밤비노의 저주’를 푼 천재 엡스타인이 ‘염소의 저주’까지 풀고 컵스에 우승반지를 안길 수 있을까. 만약 성공한다면 엡스타인은 어지간한 스타 선수나 감독보다 더 크게 자신의 이름을 메이저리그 역사에 새길 수 있을 것이다.
테오 엡스타인은 누구인가
테오 엡스타인은 1973년 미국 뉴욕시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家系)에는 글쓰기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많다. 엡스타인의 할아버지인 필립 엡스타인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고전영화의 교본 ‘카사블랑카’의 각본을 썼고 소설가인 아버지 레슬리 엡스타인은 보스턴대에서 창작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여동생인 안야 엡스타인 또한 ‘강력살인’ ‘거리의 삶’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 등 미국 유명 드라마의 각본에 참여한 바 있다.
엡스타인은 고등학교 때까지 야구와 전혀 인연이 없었다. 브루클린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미국 고교생이라면 한 번쯤은 참가하게 마련인 교내 야구부의 일원으로도 활동한 적이 없다. 1991년 예일대에 입학한 그는 교내 신문인 ‘예일 데일리 뉴스’에서 스포츠 담당 부장을 맡아 스포츠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는 결국 대학 졸업 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구단의 홍보부에 취직하는 계기가 됐다. 엡스타인은 파드리스 구단에 재직하면서 샌디에이고대 로스쿨을 다니고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엡스타인은 이곳에서 메이저리그 경력을 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멘토 래리 루치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사장(현 보스턴 레드삭스 사장)을 만났다. 루치노 사장은 엡스타인과 마찬가지로 프린스턴대와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아이비리그 출신의 변호사였다.
루치노 사장은 엡스타인의 명석함을 일찌감치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는 2002년 11월 자신이 보스턴 레드삭스의 새로운 최고경영자(CEO) 겸 사장이 되자마자 엡스타인을 스카우트했다. 한 달 후 그에게 보스턴 레드삭스의 임시 단장 직을 맡겼다.
아무리 임시 단장이라지만 130년이 넘은 메이저리그 역사에 28세 단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메이저리그의 단장이란 스카우팅과 같은 밑바닥 업무부터 시작해 산전수전 다 겪은 중장년층이 주로 맡았기 때문이다. 프로는커녕 아마추어 야구 경험도 전무한데다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의 주전선수 25명 중 3명을 제외하면 선수보다도 나이가 어린 단장이 부임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특히 여러 언론에서 ‘어린애’가 단장이 됐다고 그의 능력을 폄하했다. 명문 예일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가졌으며 외모까지 훤칠한, 소위 스펙 좋은 엘리트였지만 야구에 관해서는 도저히 그의 능력을 신뢰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세이버매트릭스 도입과 과감한 트레이드로 저주를 깨다
엡스타인은 단장에 취임하자마자 본인이 원하는 선수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특히 고비용 저효율의 표본이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페이롤(payroll, 선수단 전체 연봉)을 저비용 고효율로 바꾸는 데 힘썼다.
메이저리그의 30개 구단의 페이롤은 2억 달러가 넘는 뉴욕 양키스부터 수천만 달러에 불과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나 탬파베이 레이스 등 천차만별이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1억5000만 달러 내외의 페이롤을 지녀 양키스에 이어 페이롤이 매우 높은 구단에 속했지만 엡스타인이 오기 전에는 포스트시즌 진출에 3년 연속 실패하는 등 비용 구조가 엉망이었다.
그는 2003년 시즌을 준비하면서 케빈 밀라, 빌 뮬러, 마크 벨혼, 빅 파피, 브론손 아로요, 토드 워커 등을 잇따라 영입했다. 당시 영입한 선수 중 상당수는 연봉이 수십만 달러에 불과했다. 데이비드 오티즈, 제레미 지암비 등 지금은 슈퍼스타급으로 거듭난 선수들도 데려왔다. 이들의 연봉도 500만 달러 미만일 정도로 가격 대비 효용이 높은 영입이었다. 엡스타인은 실력에 비해 저평가된 이들 선수를 영입해 당시 레드삭스 타선을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강타선으로 바꿔 놓았다.
엡스타인이 싼값에 훌륭한 선수를 데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세이버 메트릭스를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야구 저술가이자 통계학자인 빌 제임스가 1970년대에 창시한 세이버 메트릭스는 ‘기록의 스포츠’인 야구를 통계학적, 수학적으로 분석해 선수의 재능을 평가하고자 하는 방법론이다. 메이저리그 구단 운영에 이를 적극 도입한 사람은 빌리 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이 최초지만 아쉽게도 빈은 아직까지 팀을 우승에 올려놓지 못했다는 점에서 엡스타인과 차이가 있다.
몇 년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던 레드삭스는 무난히 포스트시즌에 올랐다. 하지만 아쉽게도 월드시리즈 진출을 눈앞에 뒀던 아메리칸리그 결승전 7차전에서 통한의 끝내기 홈런을 얻어맞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2004년 엡스타인은 과감한 트레이드로 역사를 만들었다. 우선 그는 에이스(팀 내 제1 선발투수) 커트 실링을 2003년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데려왔고 마무리 투수 키스 폴크를 자유계약선수(FA)로 영입하면서 투수진을 보강했다. 특히 시즌 중반, 메이저리그 트레이드 역사에 길이 남을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바로 명유격수 노마 가르시아파라의 4각 트레이드다. 가르시아파라는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1994년부터 10년간 레드삭스의 간판 유격수로 활약했고 미국 여자축구계의 스타 미아 햄의 남편이기도 해 보스턴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다.
팬들의 반발이 상당했지만 결국 보스턴은 가르시아파라를 시카고 컵스에 내주는 대신 몬트리올 엑스포스로부터 유격수 올랜도 카브레라와 미네소타 트윈스의 1루수 더크 민트키비츠를 데려왔다. 몬트리올은 컵스의 유격스 알렉스 곤살레스, 투수 프란시스 벨트란, 외야수 브랜든 해리스를 영입했고, 미네소타 마이너 투수 저스틴 존스를 각각 새 식구로 맞았다.
엡스타인은 팀에 이득이 된다면 그 어떤 스타플레이어라도 내보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원래 강했던 타선에다 투수진까지 보강되자 팀 전체의 상승효과는 엄청났다. 후반기 무서운 기세로 와일드카드를 따낸 레드삭스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맞붙은 2004년 월드시리즈 결승전에서 네 경기를 연속 승리하며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우승 반지를 차지했다. 그 과정에서 엡스타인이 2004시즌 영입한 선수들은 각자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고 엡스타인의 능력에 대한 신뢰도 커졌다.
거액의 FA 먹튀가 낳은 시련
2004 시즌이 끝난 후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들인 페드로 마르티네스, 데릭 로, 올랜도 카브레라 등은 자유계약선수로 풀려 모두 팀을 떠났다. 엡스타인은 이들의 공백을 데이비드 웰스, 매트 클레멘트, 에드거 렌테리아 등으로 메우려 했지만 그 시도는 대실패로 끝났다. 비싼 돈을 받고 보스턴에 온 세 선수는 모두 초라한 성적을 내며 ‘먹튀’로 전락했다.
2005년 시즌의 성적이 나빠지자 지난해의 우승이 운에 의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게다가 자신을 단장으로 만들어준 래리 루치노 사장과의 관계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선수단 운영에 루치노 사장이 본격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이다.
해당 시즌이 끝난 2005년 10월 말 엡스타인은 쉬고 싶다는 말과 함께 사의를 표명했다. 구단이 3년간 총 450만 달러(약 60억 원)를 지급한다는 비교적 좋은 연봉 조건을 제시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야인으로 돌아가 야구와는 다른 일을 찾겠다는 의사도 내비쳤다. 하지만 보스턴 구단이 더 나은 대우를 약속하며 연봉 상향 의사를 내비치고 사임의 원인이 됐던 구단 사장 래리 루치노와의 관계도 나아질 조짐을 보이자 2006년 1월 엡스타인은 3개월 만에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2006년의 성적도 좋지 않았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2006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1억 달러 이상의 페이롤을 지급하면서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팀이란 오명을 남겼다. 이유는 2005년과 같았다. 7000만 달러(약 840억 원)를 들인 J. D. 드루, 5200만 달러(약 600억 원)를 들인 일본 출신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 등 거금을 지불하고 영입한 선수들의 성적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거액의 FA 영입에 대한 실패는 지금까지도 엡스타인의 약점으로 지목되고 있다. J.D. 드루와 마쓰자카 다이스케 이후에도 보스턴 레드삭스는 투수 존 래키, 외야수 칼 크로포드, 1루수 애드리언 곤살레스 등에게 수억 달러의 돈을 퍼부었지만 이들의 성적은 모두 죽을 쒔다.
두 번째 우승으로 보스턴을 최고 구단으로 만들다
엡스타인은 이 난관을 강력한 팜(farm) 육성으로 돌파했다. 즉 레드삭스 휘하에 있는 마이너리그나 트리플에이리그 팀 선수들을 적극 육성하고 이들을 1군 무대인 메이저리그에 속속 데뷔시키기로 한 것. 메이저리그 각 구단의 팜 랭킹 순위 중 가장 정확하다고 인정받는 지표인 BA 팜랭킹에서 매번 25위 밖이었던 레드삭스의 팜은 엡스타인 취임 이후 꾸준히 상승해 한때 전체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엡스타인이 만들어낸 강력한 팜은 2007년의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어졌다. 2004년 우승은 매니 라미레즈, 커트 실링, 페드로 마르티네즈 같은 스타와 엡스타인이 세이버 메트릭스의 이론을 살려 영입한 저비용 고효율 선수 즉 외부 인사가 주도한 우승이었다. 당시에는 레드삭스 팜 출신 주전 선수가 우익수 트로트 닉슨밖에 없었다.
반면 2007년 우승은 레드삭스 팜 출신들이 주도한 내부 인사 위주의 우승이었다. 팜 출신 선수인 2루수 더스틴 페드로이아, 3루수 케빈 유킬리스, 마무리 투수 조너선 파펠본은 시즌 내내 전력에 큰 힘을 보탰다. 중견수 제이코비 엘스베리와 투수 클레이 벅홀츠 등은 시즌 후반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올라와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엘스베리는 홈런왕 매니 라미레즈가 부상으로 빠진 9월에 그를 대신해 라미레즈의 공백을 훌륭히 메웠고 플레이오프 때는 주전 중견수로 활약하며 눈부신 활약을 했다.
결국 레드삭스는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21세기가 된 후 월드시리즈에서 두 차례 우승한 팀은 보스턴 레드삭스가 유일하다. 특히 이제는 페디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더스틴 페드로이아야말로 테오 엡스타인이 만들어낸 스타 선수라고 하겠다.
페드로이아는 메이저리거치고 체구가 작아 많은 스카우터가 그의 능력을 비관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엡스타인은 그의 가능성을 보고 신인 드래프트 때 상위 순번에 그를 지명했다.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시킨 후에도 그의 성적에 관계없이 꾸준히 페드로이아를 기용하라고 감독에게 종용했다. 페드로이아는 2007년 주전 2루수로 우승에 기여했고 2008년에는 아메리칸리그 전체 최우수선수(MVP)가 되어 엡스타인의 발탁에 보답했다.
젊은 단장의 전성시대를 열다
엡스타인의 첫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은 메이저리그 내에 아이비리그 출신 젊은 단장의 전성시대를 여는 계기가 됐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메이저리그 프런트에 아이비리그 출신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엡스타인의 성공 이후 하버드대 출신의 폴 디포데스타 전 LA 다저스 단장, 코넬대 출신의 존 다니엘스 텍사스 레인저스 단장, 하버드대 출신의 피터 우드포크 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부단장 등 야구계 경험이 많지 않은 학구파 영건들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젊은 단장, 즉 1995년 33세의 나이로 부임한 케빈 타워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단장, 1997년 35세로 부임한 빌리 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 등은 모두 선수 출신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등장한 영건들은 선수 경험이 없어 현장과 괴리돼 있다는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명석한 두뇌, 뛰어난 수학 및 경제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분석적이고 냉철한 운용을 거듭해 메이저리그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급기야 엡스타인 본인이 세운 최연소 단장 기록도 깨졌다. 2005년 10월 텍사스 레인저스는 명문 코넬대를 졸업한 젊은 부단장 잭 대니얼스를 새로운 단장으로 승진시켰다. 대니얼스는 당시 28세 1개월에 불과해 3년 전 엡스타인이 세운 28세 10개월의 최연소 단장 기록을 9개월가량 단축시켰다.
엡스타인 단장이 주는 경영 교훈
1)유망주를 적극 발굴하고 기용하라
엡스타인 단장의 가장 큰 성과는 ‘저주받은 팀’을 유망주의 산실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의 첫 성공작은 조너선 파펠본이었다. 2003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보스턴은 미시시피 주립대의 마무리 투수였던 파펠본을 점찍었다. 파펠본은 보스턴에 입단하자마자 성공가도를 달렸고 불과 3년 만에 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우뚝 섰다.
2004년에는 보스턴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로 떠오른 더스틴 페드로이아가 입단했다. 주전 1번 타자로 자리 잡은 제이코비 엘스버리 역시 2005년 신인 드래프트 후 불과 2년 만인 2007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이듬해 당당히 주전 중견수 자리를 꿰찼다.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존 레스터도 보스턴 팜이 키워낸 작품이다. 고교 졸업 후 200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57순위로 지명된 뒤 마이너리그에서 착실히 선발 수업을 받은 레스터는 2006년부터 빅리그 무대를 누볐고 한 시즌에 16승을 거두는 정상급 에이스로 거듭났다. 특히 레스터는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기적처럼 이를 극복하고 마운드로 돌아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선물했다. 이외 투수 저스틴 마스터슨과 매니 델카멘, 클레이 부크홀츠 등도 모두 엡스타인이 직접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뽑은 선수들이었다. 엡스타인은 단지 이들을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의 성적이 별로 좋지 않을 때도 꾸준히 기용해 어리고 경험 없는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강력한 팜 육성을 통해 엡스타인은 보스턴 레드삭스를 축구의 스페인 FC바르셀로나처럼 어릴 때부터 손발을 맞춘 선수들끼리 주전 선수로 성장해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팀으로 바꿨다. 즉 몇 명의 슈퍼스타에 의존하는 팀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굴러가는 팀을 만든 셈이다. 팜에서 육성해 끊임없이 공급되는 새로운 선수들은 그 누구의 자리를 대신해도 일정 부분 이상의 성적을 보장했다. 엡스타인이 강조하듯 10년에 8번은 포스트시즌에 당연히 진출할 수 있는 컨베이어벨트와 같은 팀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보스턴 레드삭스라는 팀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단지 2번의 우승 때문이 아니라 더스틴 페드로이아를 비롯한 자체 팜 출신의 스타 선수 출현, 우수한 성적, 이에 따라 기존보다 더 뜨거워진 팬덤 등 엡스타인이 낳은 성과들은 보스턴 레드삭스에 베이브 루스가 존재하던 1920년대 이후 두번째 전성기를 선물했다.
2)패배주의를 걷어내야 진정한 리더다
엡스타인이 단장 취임 직후 줄곧 선수단에게 한 말은 “뉴욕 양키스의 성공 방식을 무시해라. 우리 자신만의 성공 방식에 집중하자”였다. 보스턴 레드삭스 팬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서운한 말일 수도 있으나 엡스타인 이전의 보스턴 레드삭스는 뉴욕 양키스에 대한 열등감이 상당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양키스와 견고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레드삭스 팬들은 미국 내에서 가장 열광적인 성향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2003년부터 현재까지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 펜웨이파크는 700경기 연속 홈경기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유일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렇듯 팬들의 지지는 열광적인데 엡스타인 부임 전까지 성적은 신통치 않았으니 구단 내외부에 알게 모르게 쌓인 자조적인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다. 일부 팬들은 저주를 극복하겠다며 베이브 루스가 연못에 버린 피아노를 자비로 건져 올리는 엽기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명민한 엡스타인은 이런 분위기를 단번에 파악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역시 뉴욕 양키스 못지않은 거대한 시장과 큰돈을 보유한 구단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돈’으로 ‘악의 제국’ 양키스를 이길 수는 없었다. 이에 엡스타인은 빅 마켓 구단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대대적인 외부 선수 영입과 강력한 팜이라는 내부 선수 육성 전략을 반반씩 조화시켜 양키스와의 차별화에 힘쓰면서도 강한 전력을 유지했다. 자유계약선수(FA) 영입에서는 상당부분 실패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엡스타인은 허를 찌르는 트레이드의 잇따른 성공으로 이를 보완했다.
3)구단 운영 외의 부문에서도 혁신 대상을 찾아라
2004년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군 보스턴 레드삭스는 불과 한 달 만에 홈구장 펜웨이파크를 전면 개보수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관중석 통로를 확장하고 외야 좌석을 1000석 정도 늘리는 이 작업 역시 엡스타인이 주도했다.
“지긋지긋했던 ‘밤비노의 저주’를 겨우 극복한 ‘성지(聖地)’에 대공사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팬들의 반발이 컸지만 엡스타인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나에게 미신이니 저주니 하는 말들이 통할 리 없다. 빈틈없는 계획으로 팀 전력을 극대화한 뒤 수익을 최대화하는 게 프로 야구단의 당연한 수순”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우승으로 입장객이 훨씬 늘어날 텐데 팬에게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기대감을 안고 펜웨이파크를 찾은 관객이 두 배로 실망할 수 있다는 점, 구장 개보수로 관중이 늘어나면 결국 이는 선수단 분위기 개선과 수입 증가로 이어져 구단 전체의 전력을 강화하는 촉매제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을 내다본 포석이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레드삭스가 양키스처럼 새 구장을 짓는 대신 소규모의 관중석 확대 전략을 택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티켓이 귀할수록 열성 팬들의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입장권 가격이 올라간다는 점을 노린 전략이었다. 펜웨이파크의 평균 입장권 가격은 약 50달러(약 6만 원) 내외로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이다. 다른 구장의 평균 입장권 가격인 25~30달러보다 2배가량 비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삭스 구단은 줄곧 ‘소형 경기장, 고가 입장권’ 전략을 유지하고 있다. 1930년대에 좌측 외야에 설치된 11m 높이의 ‘그린 몬스터’ 담장도 여전하다. 이 그린 몬스터는 홈런성 타구를 2루타로 떨어뜨리거나 평범한 플라이볼을 홈런으로 만들 수도 있어 각종 변수를 발생시키는 곳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일본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는 레드삭스가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가장 적은 3만8000여 석을 보유하면서도 입장료 수입은 뉴욕 양키스에 이어 항상 2위를 기록할 정도로 장사를 잘하는 이유를 △고객을 흥분시켜 소비를 촉발하고 △티켓 희소성을 높여 가격을 올리고 △경기 외에 ‘체험’을 파는 ‘경영 혁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4)아름다운 이별을 하라
10년간 보스턴 레드삭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엡스타인은 시카고 컵스행을 확정지은 2011년 10월 말 이례적인 행동을 했다. 그는 자비를 들여 지역 신문인 보스턴 글로브에 전면 광고를 실었다.
오랜 기간 특정 지역 팬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선수들이 해당 팀을 떠나면서 지역 신문에 광고를 게재한 예가 있긴 했지만 단장이 이런 광고를 싣는 건 메이저리그 사상 처음이었다. 10년간의 소회를 진솔하게 표출하고 그간 레드삭스에서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감사를 표하는 이 광고는 상당한 화제를 낳았다.
판이 좁지만 주요 인사들의 일거수일투족에는 엄청난 관심이 쏟아지는 메이저리그의 현실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현명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엡스타인이 지금 당장 보스턴과 이별한다 해도 나중에 어떤 인연으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그가 전략적으로 광고를 게재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끝이 좋아야 다 좋다”는 우리 속담처럼 깔끔한 마무리를 하는 것은 단순히 리더여서가 아니라 성숙한 인간이 반드시 지녀야 할 태도라는 점에서 그의 광고는 상당한 교훈을 준다.
● 엡스타인이 게재한 광고의 주요 내용
지난 10년 동안 레드삭스에 속해 있으면서 야구계에서 가장 재능 있고 열정적인 사람들과 함께 일한 것은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함께 성취한 모든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존 헨리 구단주, 래리 루치노 사장을 비롯한 구단 운영진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
믿기 힘들 정도로 열심히 일하며 재능 있는 사람인 벤 셰링턴을 비롯해 레드삭스 프런트 오피스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같이 일했던 것은 대단한 경험이었으며 우리의 우정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끊임없는 노력을 그치지 않으며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재정립해준 선수와 코치들, 테리 프랑코나 감독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펜웨이파크를 열정적으로 찾아주신 팬들에게도 감사합니다. 팬 여러분은 두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 여섯 번의 플레이오프 진출, 700경기가 넘는 연속경기 매진을 포함해 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굉장했던 지난 10년에 큰 고마움을 느낍니다. 삭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