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곧 서거 10주년…한국 미술계는 ‘조용’
- 1970년대에 초고속 인터넷 시대 예언
- 해외에선 “다 빈치, 피카소 이후 최고 예술가” 찬사
- 창조경제 시대, 백남준은 한국의 브랜드이자 화두
2015년이 저물어가는 이 시점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면 아마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백남준이 누구냐고요? 에이, 잘 알죠. 비디오 아트 창시자잖아요. 옛날에 경복궁 옆에서 갓 쓰고 굿도 했지 않아요?” 이렇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그를 기억하는 분이다. 일반인, 특히 청년세대는 백남준이 예술가인지도 모르지 않을까 싶다.
1996년이다. 삼성그룹에서 주는 호암상 예술부문상을 수상하기 위해 한국을 다녀간 것이. 그러고는 곧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다시 한국에 오지 못했으니, 그의 모습을 뵌 것이 벌써 20년 가까이 됐다. 백남준 이름 석 자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위성 예술쇼가 TV를 통해 방영되고 나서부터다(KBS 1TV 중계). 그는 이 쇼가 방영된 직후 34년 만에 한국을 찾아 숱한 화제를 뿌렸다. 벌써 30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이다. 그러니 적어도 마흔 살 아래로는 백남준을 알거나 기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스미소니언에서 만난 백남준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도 꺾이지 않는 창작혼을 발휘해 새로운 예술 영역인 레이저 예술에 몰두했고, 2000년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의 대규모 회고전은 대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2006년, 백남준은 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9년 반이 지난 올 7월에는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도 남편의 뒤를 따랐다.
결국 백남준은 말년의 뇌졸중으로 한국에 다시 올 수 없게 된 이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의 예술활동은 미국 등 해외에서 펼쳐졌기에 우리가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우리 젊은이들이 백남준을 잘 알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내년 1월이 되면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지 만 10년이 된다. 지난 10년간 백남준은 우리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갔지만, 그가 주로 활동한 미국과 세계 곳곳은 그를 놓지 않았다. 그가 보여준 예술적 재능과 미래에 대한 예지 능력은 오히려 더욱 부각되고 강화돼가는 느낌이다.
백남준 서거 3년 후인 2009년, 미국 워싱턴DC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 측은 백남준의 유족을 대표하는 친조카 켄 하쿠다로부터 백남준이 생전에 쓰던 기기, 도구와 그가 남긴 글, 편지, 작품기획서, 구상안 등 중요 아카이브를 모두 받아갔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스미소니언이 복권에 당첨된 것과 같다”고 평했다. 이것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주요 스케치 작품이나 관련 자료 등과 비슷할 정도로 귀한 보물이 될 것임을 미국인들은 안 것이다.
과연 2012년 12월 13일, 스미소니언은 백남준의 아카이브와 그의 주요 대표작을 공개하는 전시회를 열었다. 이듬해 8월 11일까지 무려 8개월간 지속되는 최장 기간 전시회였고, 세계 최대 종합 박물관인 스미소니언을 찾은 많은 미국인을 비롯한 세계인들이 백남준을 다시 봤다.
백남준의 아카이브를 구입하고 전시회 개최를 주도한 인물은 존 핸하르트(John G. Hanhardt). 그는 1982년에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백남준의 대규모 초대전을 열었고, 2000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그의 대표작-특히 ‘야곱의 사다리’ 등 레이저 작품-을 망라한 대규모 회고전을 연, 자타 공인 최고의 백남준 전문 큐레이터다. 백남준의 유물 하나하나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는 작업의 최적임자이자, 백남준을 알아본 최고의 지음(知音)이다.
‘지구의 예언자’
스미소니언 전시회의 타이틀은 ‘Global Visionary’, 즉 ‘지구의 예언자’였다. 전시회를 마감하며 스미소니언 측이 발표한 글은 백남준의 삶을 잘 정리하고 있다.
백남준은 영감(靈感)입니다. 그는 일관되게 기술을 예술의 수단으로 변신시키며 새로운 예술적 도구를 발명해 급격하게 성장하는 우리의 미디어 문화를 탐험하고, 형성하고, 참여해왔습니다. 그는 동료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줬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예술을 과감하게 변화시켰습니다. 그의 작품에 의한 시각적이고 의식적인 영향은 20세기 후반, 그리고 현대의 컴퓨터 예술가 세대들에게서 느껴집니다. 그의 글들은 전 세계 학자들과 큐레이터들, 비평가들에게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행한 예술적 작업 전부는 오늘날 지구적인 창조 문화를 불러왔습니다.
1976년 독일에서 자신의 작품 ‘TV 로댕’ 옆에서 포즈를 취한 44세 때의 백남준.
한마디로 백남준의 예술적 안목과 예지, 그리고 노력이 미디어가 범람하며 컴퓨터가 지배하는 현대라는 공간에서 전 세계인에게 예술적인 영감을 줬다는 것이며, 그것이 문화 창조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다.
2013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을 국빈 방문해 이 전시를 둘러봤고, 그날 저녁 스미소니언에서 열린 한미동맹 60년 기념 행사를 주재했다. 이 행사는 백남준 예술이 지닌 창조적 역량을 한미 두 나라 젊은이들이 공유하고 더욱 발전시키자는 뜻에서 장소를 스미소니언으로 택했다. 행사가 열린 홀에는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도 진열됐다.
박 대통령의 첫 미국 국빈 방문 때 열린 중요 행사를 미 의회나 큰 호텔 등에서 하지 않고 스미소니언이라는 예술적인 공간에서 주최한 것은 문화적으로도 중요하고 큰 의미를 부여할 만한 시도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날 밤 윤창중 당시 청와대 대변인의 일탈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 행사는 이슈에서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대통령이 몸으로 보여주려 한, 창조경제의 인계철선(引繼鐵線)으로서의 백남준의 역할은 더 이상 살아나지 못했다. 또한 이는 국내에서 백남준을 더욱 살려 그의 뒤를 이을 창조적인 인재를 찾아내고 기르자는 사업이 부진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불 꺼진 ‘다다익선’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된 백남준의 ‘다다익선’. 많은 모니터가 고장 나 최근 수리를 마쳤다.
그리고 꼭 2년 전에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이용하는 프레스센터 춘추관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 위쪽에 설치된 백남준의 조형 작품 ‘산조(散調)’가 흉물로 방치돼 있다고 한 신문이 지적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다다익선’은 여전히 수리하지 못하고 있고, 청와대의 ‘산조’도 고쳐졌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 두 작품만 문제인 게 아니다. 현재 국내 주요 기관이나 건물에 세워진 백남준의 비디오 조형 작품은 상당 부분 모니터를 꺼놓고 있거나 고장 난 채 방치돼 있다. 이유는 모니터가 고장났다거나, 작품을 유지하는 데 전기료가 많이 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드웨어 문제는 백남준 비디오 작품의 주요 구성물인 브라운관 모니터가 더는 생산되지 않는 데 따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가 백남준에 대해 신경을 끄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최근 국정감사에서는 ‘다다익선’의 여분 모니터 확보율이 9.47%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왔다는데, 이런 모니터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에 대해 아무도 나서지 않아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된 2011년, 그냥 두면 잊힐 수 있으니 백남준을 기억하고 그의 창조정신을 한국인과 세계인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자며 KBS와 문화관광체육부, 서울시교육청 등이 양해각서(MOU)를 교환했고 그 이듬해 백남준문화재단이 출범했다.
가야금 음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은 황병기 선생을 이사장으로 한 재단에서는 백남준의 예술을 제대로 조명하는 첫 단계로 2013년 그의 작품 목록(catalogue raisonne)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듬해 정부 예산이 끊겼고, 각계의 후원도 이어지지 않아 사업이 중단된 상태다. 백남준이 태어난 곳을 기념 장소로 만들거나 어린이들이 그의 창조정신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는 몇 가지 시도도 예산이나 시민의식 문제로 답보 상태다.
교과서에 백남준을 싣는 일도 아직 지지부진하다(물론 미술교과서에는 나오지만 그 의미가 잘 살지 않는다). 교과서를 집필하거나 편찬하는 분들이 아직까지 백남준이나 그 예술의 중요성을 잘 모르거나, 알 기회가 없기 때문이리라.
상황이 이러한지라 글의 첫머리에 ‘백남준을 아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백남준이야말로 이 시대 창조의 아이콘임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싸이와 허스트의 공통분모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경기중·고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대로 유학을 떠났고, 독일에서 예술활동을 시작해 미국에서 성공했다. 음악에서 출발해 행위예술, 시각예술을 지나 TV 수상기를 예술의 재료 혹은 수단 삼아 그간 아무도 표현하지 못한 전자예술의 영역을 열었다. 비디오를 마구 쌓고 펼쳐 사람과 역사를 표현했고, 걸어 다니는 로봇도 만들었다. 전 세계 예술인들을 모아 세계 각지를 위성으로 연결해 공연하며 인류 문명의 미래를 진단했고, 기술이 인간에게 아름다운 욕망을 가져다주도록 예술론을 새롭게 펼쳐갔다. 또한 레이저로 시공예술을 추구했으며, 1974년에 전 세계 정보 고속도로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제시해 오늘날의 인터넷 시대를 예견했다. 그가 보여준 TV와 전자통신망의 미래는 21세기 들어 모두 실현되었다. 한마디로 그는 21세기를 내다본 예지자이자 예언가였다.
오늘날 한국이 필요로 하는 창조적 역량,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창조경제는 바로 이런 것 아닐까. IT와 과학기술을 중심에 두고 각 산업과 문화를 융합해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만들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도출하는 것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5월 미국 방문 때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백남준 전시를 감상했다.
백남준은 IT와 과학기술의 기반 위에 현재의 산업과 문화를 융합시켜 새로운 개념의 예술, 곧 일거리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켰고, 새로운 문명으로 인도했다. 그것이 미국 스미소니언이나 미국 언론이 주목하는 백남준의 실체다.
해외에서 백남준을 높게 평가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당대에 새로운 예술 장르를 열었다는 점에 있다. 미술이란 예술 장르에는 기본적으로 회화와 조각이 있다. 그것이 구상과 비구상으로 나뉘고, 고전파, 인상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으로 세분된다. 이러한 유파나 장르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비디오 아트’이고, 그 창시자가 백남준이다.
예술 장르란 최소 몇 십 년 이상 여러 사람이 참여해 큰 흐름을 형성해야 성립되는 것인데, 백남준은 홀로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오늘날 비디오 아트를 추구하는 예술가는 전 세계에 수없이 많다. 백남준의 후예들이다. 영국이 자랑하는 데미언 허스트도 백남준이 독일에서 연 첫 전시회에서 피가 흐르는 소머리를 작품으로 내놓은 대담함에서 영감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백남준은 ‘창조’라는 아이콘을 떠나서도 한국이 가진 최고의 브랜드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를 본인이 당대에 창조하고 발전시킨 사람으로 예술사에 기록돼 있다. 그에 대해서는 항상 ‘한국에서 태어났다(He was born in Korea)’는 표현이 붙어 다닌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를 흔들 때, 영국의 한 신문은 백남준이 있었기에 한국에서 싸이가 나올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조국이 그를 잊은 사이…
그러나 우리는 백남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백남준’이란 브랜드를 우리 것으로 키우려 하고 있는가. 미국이나 독일은 백남준을 자기들 것으로 여기는데, 그의 조국은 오히려 그를 잊어가고만 있다. 이제 곧 서거 10주년인데, 그 모멘텀을 살릴 준비를 하고는 있는가.
이 문제를 놓고 백남준의 생일인 7월 20일 즈음 국내 미술계를 점검했지만, 눈에 띌 만한 기획은 없었다. 경기도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는 예산이 줄어들어 변변한 사업기획도 하기 힘들다. 백남준 작품 목록 보완 작업에 쓰일 예산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 걸 보면 정부에서도 그 중요성을 모르는 듯하다. 백남준을 살리는 일은 문화관광체육부만의 일이 아니고 미래창조부의 일이기도 하지만, 지난해 말 ITU(국제전기통신연합) 전권회의 준비과정에서 세계적인 정보혁명 선구자로서의 백남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이 드러난 것에서 보듯 별다른 대책을 세우는 것 같지 않다.
“미술사에서 볼 때 백남준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피카소 이후 최고의 예술가이다.” 스미소니언은 백남준을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는 여전히 콤플렉스가 있는 걸까. 서양에서 높이 평하는 백남준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박 대통령은 스미소니언 전시를 보고 나와 이렇게 말했다. “백 선생님의 작품은 가장 세계적이면서 동시에 그 바닥에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포함하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에서 평가받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셈이다.
백남준 작품을 어떻게 수리하고 보존할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주춤거리는 사이, 영국의 테이트모던 갤러리는 11월 중순 대규모 국제 세미나를 열어 이 변화하는 시대에 비디오 작품 등 미디어 예술을 어떻게 정의하고 지켜나갈 것인지 논의하고 아마도 결정까지 할 예정이다. 이는 우리 미술계가 진작 나섰어야 할 문제다.
전자문명 시대의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도 당대에는 오늘날처럼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백남준은 500년 후에 세계인 모두가 기억할 ‘전자문명시대의 미켈란젤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다. 그의 예술과 비전을 정리해 후손들에게 알려야 하는 일이 시급하다. 또 그의 비전을 새로운 창조의 촉매로 전환시켜, 우리 젊은이들에게 활력을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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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말처럼, 우리 한국인 앞에 놓인 문명이라는 바다는 백남준이라는 등대가 있으므로 능히 항해할 수 있다. 전국 곳곳에 창조센터가 문을 열고 있는데, 거기서 무슨 창조를 하는지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백남준이라는 등대, 백남준의 창조정신이라는 등불을 본다면 ‘창조의 항해’에 구름이 걷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