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한국 사회를 질식시키고 있어
법이 정치를 먹고, 정치가 법을 먹는 악순환
2004년에도 불거졌던 ‘정치의 사법화’
문제시 됐던 ‘헌재 향한 노무현의 두 잣대’
20년 세월 흘렀건만 정치행태는 그대로
악순환 극복 방안은 ‘정치적 논의와 타협’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최종 변론을 하루 앞둔 2월 2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 반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뉴시스
‘정치의 사법화’에 대한 최근 논의
① 정치의 사법화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 달여 동안 고발 건수가 70건을 넘었을 정도다. 과도한 정치의 사법화는 특정 이념 지향성이 강한 일부 판검사들의 정치화를 부추기고, 나아가 국민을 갈등과 분열로 몰아가는 촉매가 되고 있다. … 정치의 사법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최종 판결을 통해 바로잡을 기회가 있다. 그러나 사법의 정치화는 아예 그럴 기회조차 없다. 사법의 정치화는 국론 분열과 갈등을 키워 자칫하면 유혈 충돌을 불러일으킨다.(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디지털타임스 2025년 1월 9일)
② 정치권력의 갈등과 그 자체적 해결 능력의 결여가 드러나면서, 정치적 분쟁이 헌법재판소로 이전되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 정치세력이나 사회세력이 헌법재판을 일종의 정치적·사회적 보험제도로 활용하는 현상은 ‘정치·정책의 사법화’를 초래하고, 이는 다시 ‘사법의 정치·전략화’ 현상을 불가피하게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 헌법재판은 정치재판이라 할 만큼 너무 정치에 오염됐다. 또 다른 문제는 헌법재판이 여론과 재판관 성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양건 전 감사원장, 신동아 2025년 2월호)
③ 국가의 중요한 결정을 둘러싼 논란이 정치가 아닌 사법 과정으로 해소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정치의 사법화’는 다소간 필연적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인 데다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법원이 해주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 문제는 정치의 사법화를 넘어 사법의 정치화를 조장하려는, 정치권의 의도된 행위다. 소위 “법대로 하자”는 주장이 대표적인데, 이 같은 화법은 대화나 타협 등의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사법적 판단 전까진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궁극적으로는 사법 시스템이 정치적 이익과 목적에 따라 왜곡되거나 영향을 받게 되는 ‘사법의 정치화’로 연결된다.(정승훈 논설위원, 국민일보 2025년 2월 4일)
④ 언제부턴가 대한민국 정치가 사법에 포획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고소·고발로 손쉽게 처리하려는 풍조가 자리 잡으면서 정당과 정치인들이 앞장서 사법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한 결과다. … 정치와 사법의 위험한 밀월 관계는 민주화 이후 더욱 강화됐다. 정치권력은 사법부가 단순한 중재자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를 지지하고 법적으로 뒷받침해 줄 기관이 되길 원한다. 국회의원 중 법조인 출신이 꾸준히 증가하는 흐름도 이를 방증한다. 제22대 국회의원 300명 중 법조인 출신이 60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고, 특히 야당 내 비율이 더 높다.(구민교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머니투데이 2025년 2월 14일)
이 네 견해나 주장은 새로운 게 아니다. 적어도 20년 이상 묵은 오래된 이야기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날이 갈수록 정치의 사법화와 그로 인한 폐해가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의 사법화가 공론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계기는 21년 전인 2004년 3월에서 5월까지 진행된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 사태였다. 그리고 그다음엔 6월부터 뜨겁게 달아오른 행정수도 문제였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지난 20년간 정치의 사법화에 대한 논의의 역사적 궤적을 살펴보면서 논의해 보자.

2004년 3월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관용 당시 국회의장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가결을 선포한 뒤 방망이를 두드리고 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의석에서 박 의장을 향해 안건 뭉치와 각종 물건을 던지자 국회 직원들이 손으로 막고 있다. 동아DB
“노무현 대통령의 헌재에 대한 두 잣대”
연세대 교수 박명림은 한겨레21(2004년 9월 2일)에 기고한 ‘개헌논의를 서두르자’는 제목의 글에서 사법부에 과도한 임무가 맡겨지고 있는 현실을 우려했다. 그는 최근 한국은 탄핵 사태와 행정수도 이전을 포함해 국가·사회·행정·인권의 주요 이슈를 가능한 한 헌법 문제로 끌고 가 ‘헌법적 결정’에 의지하려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일상의 사법화’ 흐름을 목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 헌법 체계는 일상적 정치와 삶을 좌우하는 문제로 자리 잡아가고 있고, 사법부와 헌법재판소의 ‘사법적 힘’이 아니라 ‘정치적 힘’이 날로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명림은 정치의 사법화를 개헌 문제에 연결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왜 민주화 이후 정부들은 항상 중간평가 약속, 3당 합당, 내각제 개헌 약속, 재신임 약속, 탄핵 파동과 같은 ‘(초)헌법적’ 사태에 예외없이 직면했느냐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또 정당정치의 파괴나 헌법적 약속, 탄핵 파동이 아니고는 여소야대-분할정부 상태를 정상적으로 극복한 정부가 민주화 이후 왜 한 번도 없었느냐는 문제도 제기했다.
박명림은 이러한 반복이 대통령들의 무능과 정략의 산물만은 아니며, 국민주권과 대표의 중복과 충돌이라는 헌법 체계의 문제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점과 관련해 대통령선거와 의회선거의 ‘선거주기’ 충돌 문제를 해소한 가운데, 대통령 임기 사이에 국민주권을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계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박명림은 하나의 대안으로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으로 변경하고, 대통령선거와 지역대표 국회의원 선거 날짜를 일치시키고, 비례대표 의원을 지역대표의 2분의 1 수준으로 늘려 ‘중간평가’로서 이들 비례대표 선거를 정당명부제를 통해 대통령 임기 중반에 실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었다.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의 위헌 여부를 묻는 헌법소원 사건 심판에서 재판관 8 대 1의 의견으로 이 법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했다.
헌법재판소가 성문헌법이 아닌 ‘관습헌법’을 근거로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뜨거운 쟁점이 됐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헌재 결정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했다. 여당 인사들은 “헌재가 헌법을 훼손했다” “분수를 망각하고 오만방자한 결정을 내렸다” “헌재 재판관 임용에 문제가 있다” “재판관을 탄핵해야 한다”는 등의 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10월 26일 대통령 노무현은 국무회의에서 헌재의 위헌 결정에 대해 “앞으로 이와 같이 국회의 입법권이 헌재에 의해 무력화되는 일이 반복된다면 헌정 질서의 혼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은 국회에서 여야 간 합의로 통과되었고, 그 이행은 지난 총선에서 여야 모두의 공약 사항이었다”며 “결국 (헌재에 의해) 국회의 헌법상 권능이 손상되었고, 정치지도자와 정치권 전체가 신뢰의 타격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회는 권능 회복을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친노 세력도 사이버상에서 궐기하고 나섰다. 10월 26일과 27일 오마이뉴스에 ‘신행정수도 특별법 위헌결정을 통박함’이라는 주제로 실린 김용옥의 글은 11월 2일 네티즌의 원고료가 2600만 원이 넘을 정도로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그렇지만 ‘대통령의 헌재에 대한 두 잣대’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건 누가 봐도 분명했다.
국민일보 10월 28일자 사설 ‘대통령의 헌재에 대한 두 잣대’는 “지난 5월 노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를 기각한 헌재 결정에 감사를 표하면서 ‘냉정하고 공정한 재판 진행과 마무리에 대해 국민 모두는 높은 신뢰를 보내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헌재가 국회의 결정을 뒤엎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어떻게 평가가 그처럼 백팔십도 달라질 수 있는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라고 논평했다.

2005년 11월 24일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재판관들이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 헌법소원 최종 심리 결과를 선고하기 위해 법정에 착석했다. 동아DB
정략적 선전·선동을 위한 ‘정치의 사법화’
정부 여당이 반성할 점은 없었을까. 혹 과도한 오만과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던 건 아닐까. 바꿔 말해, 정치의 사법화와 그로 인해 나타나는 문제는 늘 나쁘거나 못난 정치에서 비롯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노무현 탄핵 사태도 그랬고, 행정수도 이전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행정수도 이전은 이전 자체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도 대단히 중요했다.
행정수도 이전은 한나라당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추진해야 했다. 노 정권은 한나라당을 포용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하고 싶었겠지만, 노 정권이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대해 한나라당이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이었을까. 오히려 한나라당이 오락가락했기 때문에 ‘포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게 옳은 태도 아니었을까.
노 정권은 행정수도 이전 건으로 몇 차례 선거에서 많은 충청도 표를 얻었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충청권은 열린우리당에 쏠려도 너무 쏠렸다. 한나라당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나라당이 처음에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찬성했던 건 충청권 유권자들을 의식한 것이었는데, 그 유권자들이 모두 열렬한 열린우리당 지지자로 변해 버리면 한나라당은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한나라당은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충청권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한나라당은 계속 확실한 당론을 미룬 채 엉거주춤한 자세를 보이면서 방식만 문제 삼는 반대 투쟁에 임하고 있었다.
노 정권은 그런 반대 투쟁을 탄핵 사태에 비유하면서 이분법 공세를 폈다. 이게 정치인가. 아니었다. 그건 독식을 위한 싸움질에 불과했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는 국가적 중대사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당의 합의는 물론 한나라당의 적극적 참여 속에 이루어져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노 정권은 행정수도 이전 건으로 충청권에서 계속 재미를 보려는 선거 전략을 포기해야 했다. 아니 조금만 양보하는 수준에서 충청도민들이 각자 색깔에 따라 표를 던지게끔 해줘야 했다. 여러 방안이 있었을 것이나, 우선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는 팀에 한나라당 인사들을 참여시켜야 했다. ‘거국 팀’을 구성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하더라도 행정수도 이전은 계속 진행될 것이라는 확신을 충청권 유권자들에게 심어줘야 했다.
그렇게 하면 열린우리당이 선거에선 큰 재미를 보기 어려울진 몰라도 국가와 국민이 큰 재미를 볼 수 있었다. 이런 재미를 축적해 나가면서 열린우리당은 표를 얻어야 했다. 이런 ‘포용’ 방식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북한도 포용하자고 외치고 있었다. 북한을 포용하는 것이 북한의 잘못되고 왜곡된 것마저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요구는 아니었을 것이다. 현상을 타파하겠다는 강한 열망은 국가와 민중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 무릎도 꿇을 수 있는 겸허와 헌신도 포함하는 것이어야 했다. 아무리 옳고 정당하더라도 높은 곳에서 손가락질하며 꾸짖는 것만이 능사일 수는 없었다.
이런 측면을 외면한 채 결과로 나타난 정치의 사법화를 아무리 비판하고 개탄해 봐야 달라질 건 없다. 그로부터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달라진 게 별로 없다. 대통령 윤석열이 12·3 계엄 선포라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오히려 역사적으로 퇴보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후 근본적 문제 해결의 차원에서 개헌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개헌 없이 그냥 ‘밥그릇 교체’만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이 또한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기시감을 느끼게 만든다.
2005년 7월 1일 국가인권위원회가 개최한 ‘피의사실공표와 인권침해’라는 제목의 공청회에서 고려대 법학과 교수 김기창은 피의 사실 공표의 문제점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정치의 사법화도 피의 사실 공표 관행의 폐해로 지적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해결돼야 할 사안을 고소고발이나 특별검사제 등을 통해 일단 형사 사건화시켜 상대방에게 ‘응징’이나 ‘낙인화’의 타격을 입히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피의 사실 공표를 무조건 막는 게 능사는 아니지만, 이를 정치의 사법화와 연결해 비판한 건 한국형 정치 사법화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사실 정치권에서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걸핏하면 특검 타령을 해대는 건 그게 정말 필요해서 그러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상대 정당에 대한 정략적 선전·선동 공세의 일환일 뿐이다. 즉 정치의 사법화는 원론적으론 ‘민주주의의 보완’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면도 있지만 늘 다른 속셈에 의한 오·남용이 문제라는 것이다.
‘정치의 사법화’를 촉진하는 ‘파킨슨의 법칙’
한동대 법학과 교수 이국운은 한겨레(2006년 10월 9일)에 기고한 ‘누가 ‘정치의 사법화’를 주도하는가’라는 글에서 “사법(司法)을 통한 정치에도 나름의 장점은 있다. 오로지 권력만을 추구하는 편가르기가 정치를 지배할 때 사법은 합리성에 기초하여 긴급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에서 그 흐름은 그런 유익을 거론할 수 있는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섰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정치의 사법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입법기관의 본분을 망각한 채 마치 헌법소송 전문가인 것처럼 행동하는 집권 율사들이다. 국회 내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사법적 쟁송거리로 변질시킴으로써 이들은 민주정치의 정상적인 흐름을 중단시키고 있다. (중략) 돌이켜 보라. 주연(법률가 국회의원들)도 조연(헌법재판소장 후보자와 대통령)도 엑스트라(대법원장)까지 모두 사법시험의 신화에 빛나는 법률가들 아닌가? 서로 정치적 경고 절차가 어느 정도 끝났다면, 국민의 노여움이 더 커지기 전에 이쯤에서 코미디를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올 일이다. 이제 그만 하라!”
그러나 그들은 그만할 뜻이 없었다. 인간이 나쁘거나 악해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파킨슨의 법칙(Parkinson’s Law)’으로 설명하는 게 좋겠다. 파킨슨의 법칙은 공무원의 수와 업무량은 아무 관계가 없으며, 업무의 많고 적음과는 관계없이 공무원의 수는 늘어난다는 법칙이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경영연구가였던 노스코트 파킨슨이 1958년 ‘파킨슨의 법칙’이란 책을 통해 발표한 이론이다. 쉬운 이해를 위해 1996년에 나온 다음 외신 기사를 감상해 보자.
“폴란드의 한 청년 자원 소방대원이 일거리를 만들기 위해 10차례에 걸쳐 방화를 했다가 쇠고랑을 찼다. 그레고리C 라고만 알려진 20세의 이 젊은이는 자신이 진화 작업을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동안 건물 6채에 방화를 해 10만 들로티(3만7000달러) 상당의 재산상 손실을 내게 했다.”
이 사건은 ‘파킨슨의 법칙’의 한 극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조직에서건 자신의 일이 있어야 안전하다. 그것도 가급적 자신의 비교우위를 보여줄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법조 출신이 무슨 정치를 알겠는가. 법적으로 싸우는 일을 자꾸 만들어내야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내고 입증할 수 있다. 정치의 사법화야말로 그들의 생존 조건이자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비결이다. 고로 정치의 사법화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거대 양당이 법적 싸움질에 앞장설 투사형 법조인을 대거 영입하는 경쟁을 벌이면서 정치의 사법화는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특히 2020년대 들어서 이재명의 민주당에선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천 특혜를 누린 투사형 법조인들의 발언권이 강화되면서 정당 전체가 정치의 사법화를 위해 동원되는 일이 벌어진다.

2007년 12월 14일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이 국회에 제출한 BBK 수사 검사 3명에 대한 탄핵안과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에 대한 특검법안을 놓고 국회 본회의장에서 육탄전이 벌어졌다. 사진은 의장석을 지키려는 한나라당 의원들과 대통합민주신당 의원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 동아DB
정치가 퇴화한 2007년 12·19 대선
2007년 대선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정치의 사법화가 두드러진 선거였다. 건국대 법대 교수 한상희는 서울신문(2007년 12월 5일)에 기고한 ‘이번 대선의 직무유기’라는 글에서 “민주화 이후 모든 선거는 고소·고발로 얼룩져 온 터에, 이번 대선은 작정한 듯 아예 검찰수사로 선거 일정을 메워나가기조차 한다”며 이렇게 개탄했다. “정치가 사법화하면 필연코 그 정치는 사법의 볼모가 되고 만다. 그리고 이렇게 정치와 자본과 사법이 유착하는 와중에 법은 폭력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그러나 아직도 이번 대선은 이런 야만의 현실을 방임하고 있을 뿐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이 국회에 제출한 BBK 수사 검사 3명에 대한 탄핵안과 한나라당 후보 이명박에 대한 특검법안을 놓고 12월 14일 육탄전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한나라당 의원 100여 명이 이들 안건의 처리를 막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을 점거하자, 신당 의원 100여 명이 본회의장 문을 전기톱으로 자르고 들어와 한나라당 의원들을 밀어냈다. 이 과정에서 “쥐××” “깝죽댄다”는 욕설이 난무했고, 서로 치고받으며 “살인미수”라고 주장했다. 끝내 한나라당 의원 1명이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런 ‘야만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덕분에, 12·19 대선은 이명박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명박은 유효투표의 48.7%,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정동영은 26.1%, 무소속 후보 이회창은 15.1%, 창조한국당 후보 문국현은 5.8%,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 권영길은 3.0%를 얻었다. 고려대 교수 최장집은 경향신문(2008년 1월 1일) 인터뷰에서 “이번 선거는 정당 없는 경쟁으로 비정상적 선거가 됐습니다. 그것과 병행해 나타난 현상이 RIP라고 부르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입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 정치학자들이 특별검사 수사를 받았던 클린턴 정부를 설명할 때 나온 개념인데, 정치를 폭로(Revelation), 수사(Investigation), 기소(Prosecution)라고 하는 사법적 기능에 호소한다는 뜻입니다. 정치의 사법화죠. 이것은 행정부가 중심이 되면서 정치가 퇴화한 결과입니다. 정치권력이 행사되는 방법에 문제가 있으면 언론이 폭로하고, 검찰이 수사하고, 사법부 판단으로 넘기는 과정에 정치 이슈가 전부 매몰돼 버립니다. 이번 대선은 노무현 정부에 대해 심판해야 한다는 판단이 먼저 서고, 이러한 투표자들의 심리를 대체할 수 있는 어떤 것도 효용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사법적 논쟁이 촉발되면서 정책 경쟁은 온데간데없어져 버린 이상한 선거가 돼버렸습니다.”
사실상 노무현이 만든 열린우리당의 몰락이 시사하듯이, 여당은 대선에서 “48.7대 26.1”이라는 전례가 없는 격차로 패배하고 말았다. 여권 내부의 분열과 갈등은 문자 그대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방불케 했고, 이런 상황에서 정책 경쟁은 가능하지도 않았거니와 무의미했다. 이런 배경을 따지지 않은 채 정치의 사법화를 비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율성을 억압하는 ‘사법적 초집권주의’
정치의 사법화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그래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큰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중앙집권, 아니 중앙초집권의 문제다.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학자는 앞서 인용한 이국운이다. 그는 ‘법률가의 탄생: 사법불신의 기원을 찾아서’(2012)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체제를 규정하는 결정적 한마디는 바로 ‘사법적 초집권주의’다. 모든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분쟁의 최종적 해결은 사법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이를 위한 권력의 집중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와 행정은 분쟁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곧바로 법원과 헌법재판소로 몰려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법은 너무도 손쉽게 중앙집권주의의 통로가 되고 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던 군인들, 지역감정으로 민중을 동원했던 정치인들이 물러가 버린 자리를 사법 과정을 독점적으로 농단하는 법률가들(또는 법률가 정치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어 이국운은 “곰곰이 살펴보면, 대한민국에서 사법 분야만큼 지방분권 또는 지방자치와 담을 쌓고 있는 영역은 없다. 모든 법률은 국가 법률이고, 모든 소송은 국가소송이며, 모든 법원은 국가 법원이고, 모든 검사는 국가 검사이며, 모든 변호사는 국가 변호사다”라며 이렇게 말한다. “사법 과정에서 모든 담론은 국가를 향해 중앙과 위로만 줄달음치게 되어 있다. …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사법 과정은 정당성과 고시생을 중앙으로 올려 보내고 권력과 법률가를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지배의 기축이다. 사법 권력은 모두 ‘국가’에서 나온다. 오로지 ‘국가’에서만 나온다.”
그러다 보니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진다. 물론 코미디임을 알아채지 못해 웃는 사람도 없지만 말이다. 모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선 ‘지역정당’이라는 정치조직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단 한 나라를 제외하고. 그 유별난 나라가 어디인가. 한국이다! “정당은 수도에 소재하는 중앙당과 특별시·광역시·도에 각각 소재하는 시·도당으로 구성한다(제3조)”고 한 정당법 때문이다. 코미디 같은 일이다. 위헌 소송이 제기된 건 당연한 일인데, 2023년 10월 4일 헌법재판소는 문제의 관련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2차 코미디다.
“지역정당을 허용할 경우 지역주의를 심화시키고 지역 간 이익 갈등이 커지는 부작용을 야기할 수도 있다”니, 이게 말이 되나. 서울에 본부를 둔 거대 정당들이 중앙권력의 쟁취를 위해 종처럼 부리는 지역의 정당조직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그런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이지, 지역문제에 전념하는 지역정당이 그럴 일이 무엇이 있다는 건가. 오히려 지방이 중앙정치의 식민지로 전락한 현실이 지역주의를 심화시키고 지역 간 이익 갈등을 키우고 있는데, 왜 그걸 들여다보지 못한 채 정반대로 말한 걸까.
반세기 넘게 사법적 초집권주의 체제에 길든 한국인들은 자율을 두려워하며, 이 점에선 사법 엘리트들도 다르지 않다. 정치적 논의와 타협은 자율적 인간들만이 가능한 것인데, 그렇게 할 생각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은 자율을 방종의 기회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정치권이 정치를 포기한 채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를 향해 질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 호에 계속)

● 1956년 출생
●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메디슨캠퍼스 언론학 박사
● 저서 : ‘발칙한 이준석: THE 인물과사상 2’ ‘싸가지 없는 정치’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강남 좌파’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김대중 죽이기’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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