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 구속, 아태재단 상임이사 이수동씨 구속 이후 동교동 정권은 부패정권으로 불린다. 게다가 의약분업, 교원 정년 단축은 세금과 국력의 낭비로 규정된다. 언론세무조사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호남인사 중용은 편파·편중인사의 대명사처럼 불린다. 대북화해 정책은 일방적 퍼주기로 매도돼도 그리 이상하지 않고, 심지어 일부에서는 노벨상을 타기 위한 공작의 일부였던처럼 비아냥거린다. 이번 대통령선거 과정에서도 단 한마디 변명도 없이 수모를 참아야 했다.
맨주먹 야당으로 명분 있는 선전선동으로 일어서서 합종연횡의 줄타기로 정권까지 잡은 동교동. 4수 끝에 기적처럼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그들의 집권시대가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실패와 과오투성이로 몰리고, 차기 대통령선거판에서 부패와 악의 상징처럼 빈정거려지는 현실은 눈뜨고 보기 딱할 지경이었다.
한국 정치사에는 남산 혹은 정보부, 안기부로 불리던 정치공작처가 있었다. 분단 내전 냉전 독재 학생혁명 군사쿠데타라는 특이한 역사가 배태한 제3의 막강 정치집단, 그것은 한국 정치에만 존재하는 괴물이자 어두운 유산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의 권력보위 기능을 맡았던 이 무소불위의 남산조직, 거기에 맞섰던 가장 두드러진 대항 세력은 누가 뭐라 해도 단연 동교동이었다. 권력욕의 화신이어서였건, 대통령병에 걸렸기 때문이었건, 아니면 불굴의 신념으로 뭉친 민주투사여서건 간에 동교동 사람들은 그렇게 불릴 것이다.
비주류 정치인 김대중의 좌절
3선 개헌이 추진되던 1960년대 후반부터 김대중(이하 경칭 생략)이 마지막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1997년까지 적어도 30년 동안, 한국 정치의 핵심적 대립각은 남산과 동교동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의 국회의원 낙선(1967년의 마지막 지역구 출마)을 겨냥한 공작에서 1997년 대선 당시 안기부가 꾸민 낙선공작(북풍)에 이르기까지, 말이 대립각이지 따지고 보면 남산의 조직과 돈, 그리고 권력에 기댄 공격과 동교동의 맨주먹 투쟁, 방어의 끝없는 전투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산과 동교동의 양자 대결 양상은 볼 수 없었다. 김대중은 아직 젊었고 동교동이라는 실체는 미약했다. 오히려 김영삼 의원이 김형욱 정보부로부터 초산테러를 당하는 등 정보정치와 더 첨예하게 대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대중은 40대 초반의 곡절 많은 국회의원, 말 잘하고 머리 좋은 신진기예의 일인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김대중은 비주류였다. 그가 비주류로 돌 수밖에 없었던 데는 여러 이유가 제기된다. 번듯한 4년제 대학 졸업장을 갖지 못한 게 원인이라는 해석, 호남 출신이라 겉돌고 주류 중진들로부터 소외됐다는 해석, 머리가 비상하고 성격이 유별나서 주류에는 어울리지 못했다는 분석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아무튼 김대중은 비주류의 야당 원로들이 돌봐서 기른 특이한 이력의 주인공이다. 그가 1950년대 목포에서 서울에 올라왔을 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겉도는 무명에 불과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선박사업을 했고 군소 신문사 사장을 지냈다고는 하나, 손에 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모 덕을 타고난 것도 아니기에 좋은 집안을 자랑할 수도 없는 편모 슬하의 빈궁한 청년이었다. 학벌도 목포상고 졸업장밖에 없었다. 서울에 지인, 친척이 많을 수도 없었다. 주류의 반열에 기대 설 조건이라고는 한 가지도 갖춘 게 없었던 것이다.
비주류라는 것은 신문이 붙인 이름일 뿐이다. 세상 이치가 그러하듯이 주류가 힘과 돈의 중심을 장악하고 자투리 잉여들이 비주류로 불릴 뿐이다.
주류는 스스로의 선택과 쟁취로 이루어진다. 주류는 승자나 선두주자들의 자랑스런 대열이다. 반면 비주류는 스스로 택한 길이 아니다. 지고 밀리고 소외돼서 도리 없이 불리는 가련한 이름이다. 다만 낙오자 그룹에도 머릿수가 있고 주류에 대항하는 반사적인 입지가 있기에 비주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박순천 홍익표 윤제술 정일형 같은 비주류가 김대중의 정치적 후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김대중과 동교동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훑어볼 차례다. 국회의원 선거 첫 출마는 1954년 목포에서였다. 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서서 고배를 마셨다. 1958년 5월 4대 민의원 선거 때는 멀리 강원도 인제에 원정 출마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4대 선거는 자유당 정권 말기 여당 후보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김대중은 선거관리당국도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상대 후보의 횡포가 심한 가운데 후보 등록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었다.
김대중의 근성과 ‘동교동식’이라고나 할 투지는 이때부터 엿보인다. 그는 굴하지 않고 여당 후보에 대항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다른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정식 등록하고 싸웠다. 그리고 선거가 끝난 후에도 선거법 규정에 따라법원에 후보등록방해 문제를 놓고 소송을 제기했다. 1959년 3월 법원은 1년여의 심리 끝에 4대 인제군 민의원선거를 무효로 판결하게 된다.